103화
“황금 서른 관?!”
취월걸개가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황금이 서른 관(약 112.5kg)이라면 엄청난 거금이다.
무인과 식솔들을 먹이고, 교육 시키고, 수많은 병장기를 소모하는 남궁세가라는 거대한 가문을 오 년은 운용할 수 있을 정도의 거금.
“아무리 부자라고 해도, 황금 서른 관이라니. 선물치고는 많이 과한 것 같은데?”
“황금 서른 관은 저에게도 결코 적은 돈이 아닙니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선물로 드리기에는 저에게도 타격이 큰 정도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걸 왜 선물로 주냐 이거야.”
장노야가 몸을 똑바로 세웠다.
조금 전까지는 술에 조금 취한 모습이었지만, 취기는 이미 날아가 버린 것으로 보였다.
그는 잠시 궤짝을 바라보더니 다시 취월걸개에게 말했다.
“이 황금은, 제 딸아이의 목숨값입니다. 이 황금…. 저는 못 씁니다.”
취월걸개가 피식 웃었다.
“황금이 다 똑같은 황금이지. 다를 게 뭐 있나?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거지네. 거지가 무슨 황금을 선물로 받겠는가? 나는 필요 없네.”
“그래도……!”
“아직 내 말 안 끝났네. 그런데 여기 있는 하현이는 다르지. 사실 이번 일에 여기 있는 하현이가 제일 큰 공을 세운 것이나 마찬가지거든.”
장노야는 무슨 뜻인지 정확하게는 알지 못하지만, 취월걸개의 말이니 그러려니 하고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취월걸개는 하현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이 황금의 처분은 네가 결정해라 하현아.”
“제가요? 민형님의 말씀도 들어봐야…….”
“아니, 네가 정해도 된다. 그 스님 같은 놈이 무슨 욕심이 있어서 황금을 고민하겠느냐. 괜찮습니다. 허허. 하고 말 놈이지.”
취월걸개가 남궁민의 말투를 따라 한 것이 웃겨 하현이 피식 웃고는 대답했다.
“그러게요. 황금보다는 사부님께서 대련 한 번 더 해주신다고 하면 더 좋아할 거에요.”
“안 해! 아무리 대련이라고 해도 민이 녀석이 진심으로 달려들면 나도 힘들다. 아직도 손바닥이 쓰리구먼.”
취월걸개가 너스레를 떨며 손바닥에 난 생채기를 보여주는 바람에 하현은 한바탕 웃었지만, 이내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아무리 어리다고는 하지만, 하현은 이 황금이 얼마나 큰 가치를 가졌는지 잘 알고 있다.
세상에 돈 때문에 나는 싸움이 대부분이라는 것 역시.
“읏차.”
하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황금이 가득 담긴 궤짝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곤 궤짝에서 주먹만 한 황금 덩이 하나를 꺼내 들었다.
“자. 이건 제가 가져가겠습니다.”
“그러면 나머지는?”
“나머지도 감사히 받겠습니다. 다만…….”
“다만?”
하현이 생긋 웃었다.
“그대로 다시 투자하고 싶습니다.”
“투자?”
“네. 얘기를 들어보니 노야의 아래에는 십 점이라는 상인 조직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장노야는 어리둥절한 채로 대답했다.
“그렇죠. 십점이 있지.”
“저는 그 조직은 각기 다른 상단으로 봐도 되는 것으로 파악했는데, 아닙니까?”
장노야가 속으로 감탄했다.
아직 어린 하현이지만, 장씨 상단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정확하게 파악한 것으로 보였으니까.
“그중에 엄상지라는 분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그분께 나머지 황금을 모두 투자하고 싶습니다. 이 황금을 어떻게 사용하실지는 그분께서 알아서 잘해주시겠지요.”
취월걸개는 하현에게 그가 도착하기 전에 엄상지라는 상인이 어떤 행동을 보였는지에 대해 잘 설명 해주었고, 하현도 그것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허허허……!”
장노야는 하현의 말에 호탕하게 웃어버렸다.
마치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얼굴이었다.
“그래 투자라…. 그렇지. 투자는 이렇게 하는 것인데. 이렇게 중요한 이야기를 당사자 없이 할 수는 없지 않소? 지금 바로 상지를 부르려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하현과 취월걸개가 고개를 끄덕이자 장노야가 즉시 하인을 불러 엄상지를 불러오라 시켰다.
그리고 아주 잠시 후에 엄상지가 헐레벌떡 그들이 있는 식탁 앞으로 달려왔다.
“노야. 부르셨습니까?”
“그래. 불렀다.”
엄상지는 이제야 취월걸개와 하현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저기 큰손께서 자네에게 긴히 하실 말씀이 있겠다고 하신다.”
“큰손이요?”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상석에 앉아 있는 취월걸개는 바라보았다.
그런데 취월걸개는 큭큭 웃으며 옆에 있는 하현을 가리켰다.
“저기 저 소영웅(小英雄)께서 말입니까?”
“소영웅이라니…….”
하현이 민망해하고 있을 때, 장노야가 엄상지에게 말했다.
“자네를 높게 보시어, 투자하고 싶다고 하네.”
“투자요? 투자라면 얼마나…….”
그는 순간 하현이 돈이 있으면 얼마나 있겠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오대세가의 하나인 남궁세가의 자제이니 제법 있을 수는 있겠지만, 나름 거상의 한 축인 그에게 어지간한 액수는 눈 깜짝도 할 만큼이 아니었다.
“황금 서른…. 아니, 한 덩이를 빼갔으니 스물아홉 관 정도 될 것이네.”
“네에?!”
그는 상상을 초월하는 액수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하현을 빤히 쳐다보았다.
하현은 한숨을 작게 쉬고는 말했다.
“이 황금을 어떻게 쓰시든 관여하지 않겠습니다. 황금을 이용해서 꼭 성공을 거두시고, 나중에 필요할 일이 있을 때, 제가 찾으러 오겠습니다.”
“이런 게 큰돈의 전권을 제게 맡기신다는 겁니까? 따로 구하시려는 물건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하현이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따로 없습니다.”
“잠,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당장 계약서를 준비하겠습니다.”
엄상지는 헐레벌떡 종이 뭉치 하나를 가지고 왔고, 하현이 거기에 지장을 찍고 나서야 이 소동은 마무리되었다.
계약서에는 이자가 어쩌고, 성공 지분이 저쩌고 글자가 많이 쓰여 있었지만, 하현은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엄상지는 궤짝에 든 황금을 챙겨가면서 그 황금의 출처가 어디인지 깨달은 것으로 보였으나, 그 황금에 대해서 가타부타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출처가 어떻든, 어떤 돈이든 돈이라면 똑같이 대하는 상인으로서의 바람직한 자세였다.
장노야가 하현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고, 하현도 마주 인사했다.
“이것 참. 기분이 좋습니다. 저도 많이 배웠습니다.”
“아닙니다.”
장노야는 무척이나 기쁜 얼굴로 하현에게 말했다.
“제가 너무 기분이 좋아서 선물을 한 가지 더해드리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아! 아닙니다. 그것만으로도 과분합니다.”
하현이 양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장노야가 시무룩하게 말했다.
“그런가요. 제가 유일하게 가진 취미가 귀한 병장기를 수집하는 일이라, 제 수집품 중의 하나를 드리고 싶었는데…….”
“…구경만 해볼까요?”
“예?”
“아, 아니 다른 뜻은 없고, 그냥 구경만…….”
뜻밖에 하현의 반응에 장노야가 웃음을 터뜨렸고, 취월걸개도 따라서 웃었다.
“아이고, 배야. 장영감. 이놈이 이런 놈이네. 눈앞에 수십 관의 황금도 마다하지만, 칼 한 자루에 더 흥미가 가는 놈.”
“이해가 갑니다. 이럴 때가 좋은 것이지요. 한 가지에 푹 빠져 있을 때요.”
하현은 아주 조금 부끄러움을 느꼈지만, 뻔뻔하게 말했다.
“뭐, 구경만 하다가 정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갖고 싶을 수도 있고요…….”
장노야는 하현을 귀엽게 바라보았다.
이제야 조금 나이에 걸맞게 보이는 듯했다.
“그럼 뜸 들일 게 무엇 있습니까? 지금 당장 가보죠.”
“지금 당장이요?”
“네. 저기 전각 뒤에 보이는 창고가 제 수집품 창고입니다. 따라오시죠.”
“나도 가서 구경해도 되는가?”
“그럼요! 어르신께서도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얼마든지 말씀하시지요.”
결국, 그들은 연회를 하다 말고 창고로 자리를 옮겼다.
창고에 들어선 장노야는 익숙하게 벽에 붙어 있는 등불에 불을 붙였다.
지금처럼 어두운 밤에도 수없이 이곳에 와본 것처럼 익숙한 움직임이었다.
화륵!
불이 붙으며 창고 내부를 환하게 비추었고
창고의 벽에는 온갖 검, 도, 창, 활이 걸려있었다.
“와아……!”
감탄하며 벌린 하현의 입이 다물어질 줄을 몰랐다.
“남궁세가는 보검에는 관심이 없지. 처음부터 병기에 의지하면 발전이 더디다고 말이야.”
취월걸개의 말에 장노야가 몰랐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무룡이도 아직 평범한 철검을 쓴다네. 뭐, 그놈이 지금에 와서 병기를 따질 수준은 아니지만 말이야.”
“그러시군요. 저는 무공은 모르지만, 병기에는 관심이 많았습니다. 돈은 많은데 나이를 먹으니 이런 취미만이 생기더군요. 하하.”
멋쩍게 말하는 장노야의 목소리에서는 자부심마저 느껴졌다.
하현은 그의 수집품 창고를 둘러보다가, 한 곳에 시선이 꽂혔다.
“노야.”
“네. 공자.”
“혹시 두 자루도 괜찮나요?”
“두, 두 자루 말이오?”
하현은 그에게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한 곳만 응시하며 앞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
그가 향한 곳은 창고 안쪽 벽면의 가장 구석.
그 구석에는 똑같이 생긴 두 자루의 검이 위, 아래로 걸려있었다.
하현은 그중에 위에 있는 검을 집어 들어 검집에서 검을 꺼내 보았다.
스릉-
오랫동안 관리를 하지 않은 듯 보였으나, 서슬 퍼런 날이 하현을 반겼다.
검날이 묘하게 푸른색을 띠는 것 같았으며, 검병 끝에는 파란 실이 감겨 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길이도 딱 적당하고. 무게도 가볍고.”
하현이 검을 위아래로 흔들며 무게를 가늠해보고 있을 때, 장노야가 말했다.
“역시, 볼 줄 아시는구려. 사실 그 검이 이 창고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 무구 중의 하나로 청룡검(靑龍劍)이라고 하오.”
“청룡……!”
“그리고 그 아래에 함께 놓여 있는 검은, 적룡검(赤龍劍)이라 하오.”
하현은 청룡검을 잠시 내려두고, 적룡검을 집어 들었다.
청룡검과 생김새는 완전히 똑같았지만, 푸른 날이 아닌 붉은색을 은은하게 띠고 있었고, 붉은 실이 감겨 있었다.
하현이 완전히 그 검에 빠져 있을 때, 장노야가 말을 이었다.
“그 두 자루 모두 드리겠소. 청룡검은 청룡신검에게 선물하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오?”
하현은 장노야가 자신의 의도를 한 번에 맞추자 잠시 눈을 크게 떴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부터가 남궁민에게 꼭 어울릴법한 검이었다.
“청룡신검 역시 우리 집안의 은인. 은인에게 내어주는 것이 무엇이 아깝겠소?”
“감사합니다.”
하현이 빙긋 웃으며 검들을 꼭 껴안았다.
“아이고. 저렇게 좋을까.”
“어르신께서도 하나 고르시지요.”
취월걸개가 허리춤에 꽂혀있는 타구봉을 '탁' 치며 말했다.
“난 이거면 충분하다. 거지면 타구봉을 들어야지. 현아. 다 골랐으면 얼른 나와라. 못다 먹은 밥이나 먹으러 가게.”
“네 사부님!”
하현은 어느새 적룡검을 허리춤에 묶어놓았다.
‘방산 아저씨가 조금은 서운해할지도 모르겠네.’
하현이 쓰던 검은 방산이 하현에게 맞추어 제작해준 검이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이 검을 본 순간 온 마음을 뺏겨버린 것을.
“사부님. 노야! 저는 숙소에 좀 갔다가 다시 가겠습니다.”
“왜. 네 형한테 지금 당장 전해주고 싶으냐?”
“하하. 맞아요.”
하현이 멋쩍게 웃었다.
“갔다 와라.”
“네!”
하현이 기분 좋게 대답하고는 바로 남궁민을 향해 달려갔다.
그런 하현을 보고 장노야가 흐뭇하게 웃었다.
“형제가 우애가 참 좋은가 봅니다.”
“그렇지? 가끔은 나도 부러울 정도라니까? 뭐. 됐고. 가서 술이나 더 먹지?”
“좋습니다. 이제는 여아홍(女兒紅)을 내오라고 하겠습니다.”
“그 귀한 것을? 어서 가지.”
* * *
한창 숙소를 향해 달리던 하현은, 장노야가 숙소로 사용하라고 한 전각에 당도하기 전, 수풀 뒤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걸음을 멈추었다.
조금 더 그곳에 가까이 가자 충분히 목소리를 구별할 수 있었다.
“가가……!”
장소유의 목소리였다.
이 장원에서 그녀가 가가라고 할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다.
하현이 수풀 사이로 고개를 빼꼼 내밀어 얼굴만 내밀어 말했다.
“유 형. 여기서 이러셔도 되는 거예요?”
“꺄악!”
“으헉!”
갑자기 나타난 하현에 둘 다 깜짝 놀랐다.
하현이 수풀을 헤치고 나왔다.
“왜 이렇게 몰래 숨어 있어요. 죄라도 지었어요?”
“그, 그건 아닌데…….”
장소유가 말끝을 흐렸다.
그러자 유정협이 그녀의 앞으로 나서며 당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현 공자. 그렇지 않아도 그 얘기를 하고 있었소.”
“무슨 얘기요?”
“내일 노야께 말씀드리려 하오.”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만으로도 떨리는지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말했다.
“정식으로 소유와 혼인하고 싶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