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그의 이야기를 들은 하현은 맑게 웃었다.
“이제 정말로 피하지 않으시는군요.”
“그렇소.”
유정협의 표정은 결연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제가 오래 살지 않아 우습게 들릴지는 모르지만, 남궁세가에서 시간을 보내며 깨달은 게 하나 있습니다.”
“무엇이오?”
“움직이지 않고, 생각만 해서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유정협은 하현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바로 알아차리곤 씨익 웃었다.
“좋은 말씀입니다. 항상 가슴에 새기고 있겠습니다.”
그때 장소유가 앞으로 나오며 말했다.
“대협. 여러모로 정말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그런데 대협은 좀…….”
하현이 민망해하자 장소유가 재빨리 말했다.
“앞으로 수년 안에 무림에 이름을 떨치실 분이니 미리 부른다고 생각해주세요.”
장소유는 하현의 반응에 살풋 웃고는 말을 이었다.
“행동하지 않으면 바뀌는 게 없다는 말. 저도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장소저께서는 앞으로는 너무 무리하게 행동 안 하시는 편이…….”
“뭐라고요?”
“흠흠. 아닙니다.”
하현은 괜히 헛기침하고는 장소유에게 말했다.
“아주 잠시만 유 형과 따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얼마든지요. 저는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두 분의 시간을 방해한 건 아닌가 싶네요.”
장소유가 아름답게 웃으며 말하곤 뒤돌아섰다.
“내일부터는 항상 함께 일 텐데요. 뭐.”
그녀가 돌아가고, 유정협은 하현에게 물었다.
“저와 따로 할 이야기라도 있으신 겁니까?”
“네. 그렇지 않아도 따로 찾아뵙고 드리고 싶은 게 있었는데, 마침 잘 됐죠.”
하현은 품에서 주먹만 한 무언가를 꺼냈다.
“이, 이게 무엇입니까?”
“금이에요.”
“금?!”
조금 전 따로 챙긴 금한 덩이였다.
“이걸 왜 저한테 주십니까?”
“축의금입니다.”
“그러니까 축의금을 왜 저한테…….”
하현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저희 할아버지께서 그러셨거든요. 타인의 인생을 간섭하려거든 끝까지 책임질 각오로 간섭하라고.”
“할아버님이라면 혹시…….”
“검존 남궁무룡이십니다.”
유정협이 흠칫했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하현이 들고 있는 황금을 받아들었다.
사실 유가장은 그리 부유한 가문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장소유에게 변변한 패물 하나 선물해본 적 없는 그였다.
하현은 그런 유정협을 생각해준 것이다.
“정말 감사합니다. 언젠가…. 언젠가 이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저한테는 안 갚으셔도 됩니다. 다만, 앞으로는 정진을 멈추지 마세요. 유 형이 강해지는 것이, 결국 정파 무림을 발전시키는 것이니까요.”
“다음에 만날 때에는 괄목상대 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하현은 유정협과 훈훈하게 인사를 주고받은 뒤에 숙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현이 유정협에게 이렇게까지 신경 쓴 것은 이번 일을 계기로 그도 느낀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이야.’
세상은 이상과는 다르다.
이치대로만 흘러가지는 않는 것이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인간의 마음이라는 변수 때문이다.
궁지에 몰린 사람이 어떤 마음을 먹고 어떤 행동을 할지는 결코 아무도 모르는 일일 것이기 때문에.
앞으로는 어떤 행동을 하거나 계책을 짤 때 사람의 마음이라는 변수를 고려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계략이라는 것도 배웠고 말이지.’
그리고 이번 일 덕분에 취월걸개에게 계략과 계책, 그리고 정보전에 대해서 배웠다.
무림에서 횡횡하려면 그저 무공이 강한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소리다.
생각해보면 할아버지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남궁세가 내에도 창천각 같은 정보 조직을 따로 구성하셨으리라.
문득 손에 들린 두 자루의 검을 바라보니, 하현은 이번에 얻은 것이 참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하루빨리 강호에 제대로 나서봤으면.’
하현은 강호출도를 꿈꿨다.
지금처럼 단기적인 임무가 아닌, 무림을 주유하며 여러 사람과 만나고, 여러 일을 겪는 진짜 강호출도를.
“아차. 빨리 형님께 가져다드리고, 다시 밥 먹으러 가야지.”
숙소로 향하는 하현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이 검이라면 남궁민도 분명히 기뻐할 것을 확신했다.
* * *
다음 날.
이른 새벽부터 하현과 남궁민, 그리고 취월걸개는 장씨 상단을 나설 채비를 마쳤다.
아침 일찍 일어난 총관이 그들을 발견하고는 더 있다 가시지 않겠냐며 붙잡았지만, 취월걸개는 정중하게 거절했다.
“나도 그러고 싶지만, 갈 길이 바쁘네. 다음에 주변에 오면 또 들리도록 하겠네. 장 영감에게 잘 먹고, 잘 쉬고 간다고 전해주게나.”
“그래도 노야라도 한 번 뵙고 가시지…….”
“장 영감한테 잡히면 또 한나절이다. 갈 길이 바쁘다니까?”
“알겠습니다. 어르신.”
그들은 미련 없이 장씨 세가를 나섰다.
취월걸개는 하현과 남궁민을 데리고 가장 가까운 객잔에 들렀다.
그곳에는 새벽같이 일어난 운후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르신. 도련님!”
그는 하현을 보고는 반갑게 웃었다.
운후도 유정협 만큼이나 형편없는 몰골이었다.
유정협의 일격이 적중했는지 눈은 퉁퉁 부어 있었고, 한쪽 팔에는 부목을 데고 있을 정도였으니.
“괜찮으세요?”
“끄떡없습니다. 이렇게 되더라도 이겼으니 된 거 아니겠습니까?”
“유 형은 자기가 이겼다고 하던데.”
“뭐라고요? 무언가 착오가 있었던 것 같네요. 확실히 제가 이겼습니다.”
그 반응에 하현이 큭큭 웃었다.
운후와 유정협이 서로 자존심 싸움을 하는 것이 재밌었다.
“걸을 수는 있으시죠?”
“물론입니다. 팔은 이래도 다리는 멀쩡합니다. 신법도 펼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신법을요?”
하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신법에 대해 전혀 모르던 그였다.
“쯧. 내가 조금 가르침을 줬다고는 해도 지금 그 수준을 가지고 어디서 신법을 펼친다 만다야?”
“그래도 조금은 빨리 달리는 법을 알게 된 것 같아서…….”
“나 같으면 그런 굼벵이 수준으로는 창피해서 아직 신법을 아예 못 배웠다고 하고 다닐 것이다!”
취월걸개가 불호령은 내렸지만, 어찌해서 저 마음을 모르겠는가.
원래 제일 처음에 성취를 보일 때가 가장 남에게 보여주고 싶을 때인 것을.
“사부님. 그러지 마시고, 그러면 우리 남궁세가까지는 경공으로 한 번 가볼까요?”
“뭐? 저놈이 따라올 수나 있겠냐?”
“그건 뭐, 따라오는 사람이 알아서 하겠죠.”
취월걸개가 하현의 말뜻을 알아채고는 큭큭 웃었다.
“오냐. 무슨 말인지 알겠다. 민이 너 달릴 수 있겠느냐?”
“그래도 제법 괜찮아졌습니다. 무리해서 달리는 것만 아니라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래? 알겠다. 그럼 출발하자.”
취월걸개는 운후를 보며 손짓했다.
“어이 하현이 하인. 너도 따라와라. 네가 할 수 있을 만큼 따라오는 것이다.”
“네. 어르신!”
운후는 반드시 따라가겠다고 말하며 그들의 뒤에 섰다.
그리고 그들은 출발했다.
취월걸개와 남궁민이 앞장서고, 하현과 운후가 그 뒤를 따랐다.
그런데 운후는 조금 당황하고 있었다.
‘이렇게 빠르다고?’
앞서 달리는 취월걸개와 남궁민 그리고 하현은 가볍게 달리는 것 같았지만, 이제 막 신법에 대해 걸음마를 뗀 운후가 보기에는 너무나도 빨랐다.
앞으로 달리던 취월걸개가 갑자기 뒤로 돌더니 뒤로 달리며 운후에게 말했다.
“똑바로 못 따라오면 버리고 간다.”
“네, 넵!”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가 따라가겠다고 한 것을.
그는 필사적으로 발을 놀렸다.
* * *
그들은 이 각 정도를 더 달리다가 잠시 한숨을 돌리기로 했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운후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달릴 만하세요?”
“허억, 넵. 헉. 괜찮습니다.”
하현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그는 심호흡하면서도 곧장 대답했지만, 실상은 죽을 맛이었다.
그들의 속도를 따라가기 위해서는 얼마 되지 않는 내공을 쥐어짜다 못해 체력까지 전부 다 소모한 탓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는데, 자신만은 조금 전에 멱을 감고 온 사람처럼 온몸이 흥건했다.
“이봐. 이제 알겠냐? 이게 평소에 우리가 달리는 오 할 정도의 속도로 달린 거다.”
“겨우 오 할입니까?”
“그래. 그러니까 이제는 어디 가서 신법을 배웠다는 소리 하고 다니지 말아라.”
“알겠습니다…….”
취월걸개의 말에 운후가 시무룩해 있을 때, 하현이 말했다.
“그래도 처음 신법을 익힌 것 치고는 잘 따라오셨어요. 저도 사부님께 배운 거지만, 신법이란 게 결국 많이 달려야 느는 것이거든요. 계속 이렇게 하시면 금방 따라오실 겁니다.”
“공자님……!”
하현의 말에 더해 취월걸개 또한 좀처럼 하기 힘든 위로의 말을 건넸다.
“따라오는 것도 재능이 있어야지. 내가 볼 때 네놈은 재능이 썩 뛰어나진 않은 것 같다.”
“어르신…….”
“저 말씀은 특출난 재능은 없지만, 평균에 뒤떨어지지는 않는다는 소리잖아요? 노력하면 충분히 따라갈 수 있어요.”
“공자님……!”
셋의 대화를 듣고 있던 남궁민이 소리죽여 쿡쿡 웃었다.
병 주고, 약 주기가 따로 없었다.
“다 쉬었으면 다시 출발하자. 아마 무룡이가 기다리다가 목이 빠졌을지도 모르니까.”
“알겠습니다.”
취월걸개가 운후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할까? 한 번 더 신법을 펼쳐서 가볼래?”
“아, 아닙니다. 저는 신법을 잘 몰라서요.”
운후가 양손을 내저으며 말을 바꾸자 취월걸개가 낄낄 웃었다.
“그렇지만, 그냥 달리는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조금 전까지 뛰는 것의 절반 정도의 속도로.”
“좋다. 그러면 이제 곧 안휘로 접어드니까, 몽성까지는 쉬지 않고 갈 것이다.”
“몽성…. 알겠습니다.”
회남은 이곳에서 남궁세가가 있는 합비까지 대략 삼분지 일 정도 되는 곳이었다.
“뭐해? 빨리 일어서서 뛰어야지!”
“넵!”
이번에는 운후가 먼저 호기롭게 달려나갔다.
취월걸개와 하현, 남궁민은 그 뒷모습을 보며 피식 웃고는 그의 뒤를 따라갔다.
* * *
하현이 장씨상단을 떠나 남궁세가로 출발한 지 사흘째.
해가 중천에 뜰 무렵 그들은 드디어 남궁세가의 대문 앞까지 당도할 수 있었다.
“에잉. 더 빨리 올 수 있었는데, 이놈 때문에. 꽃단장하면 얼마나 달라진다고 아침부터 목욕재계를 해?”
“그래도 세가에 처음 얼굴을 보이는 것인데…….”
“네 얼굴 예쁘게 보여서 뭐 하려고?”
취월걸개는 운후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아 혀를 쯧쯧 찼다.
“에이. 사부님. 너무 그러지 마세요. 여기 운후 아저씨는 어떻게 보면 목숨을 걸고 여기에 온 거잖아요. 얼마나 간절하겠어요.”
“도련님……!”
“민아! 자기 하인 될 사람이라고 저렇게 편드는 것 봐라. 제자 키워봤자 아무 소용 없다더니.”
그는 남궁민을 향해 투덜대고는 대문으로 다가가 문을 쾅쾅 두드렸다.
“게 아무도 없느냐! 우리가 돌아왔다.”
“누구…. 어르신! 민 도련님. 하현 도련님!”
그들을 반갑게 맞이해 준 것은 장칠이었다.
“잘 다녀오셨습니까? 별일은 없으셨고요?”
“별일이야 많았지. 그런데 이 몸이 잘 해결했다. 무룡이는 안에 있느냐?”
“네. 안에 계십니다. 어서 들어오십시오, 안으로 뫼시겠습니다.
그러다 멈칫 장칠은 운후에게 시선을 향했다.
그런데 이쪽 분은……?”
장칠이 운후를 바라보며 말했다.
하현이 장칠을 보며 대답했다.
“아저씨. 여기는 제 하인이 되기로 한 운후 아저씨라고 합니다.”
“하인이요?”
“자세한 건 나중에 설명해 드릴게요.”
“아, 알겠습니다.”
장칠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총명한 하현의 결정이니 그러려니 한 것이다.
“가주님부터 뵈실 겁니까?”
“네. 집에 왔으니 할아버지부터 뵈어야죠.”
“네. 가주님께서도 좋아하실 겁니다.”
장칠이 방긋 웃고는 그들을 창천각으로 데려갔다.
“이곳 집무실에 계실 겁니다. 어디인지는 아시죠?”
“그럼요. 고마워요. 아저씨.”
“고맙긴요. 도련님은…. 그새 더 자라신 것 같군요. 그 전보다 한 치수 더 큰 옷을 준비해서 방에 두겠습니다. 거기 이쪽 분은 저를 따라서 오세요.”
장칠은 하인들이 기거하는 곳으로 출발했고, 운후가 그 뒤를 따랐다.
창천각 안에 들어서 그들은 곧장 남궁무룡의 집무실로 향해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문이 덜컥 열리며 안쪽에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왔구나!”
“그래. 왔다.”
“다녀왔습니다. 조부님.”
“잘 다녀왔어요. 할아버지.”
남궁무룡의 얼굴은 그들이 출발했을 때보다는 좋아 보였다.
스스로도 내상을 치유하려 노력했음이 보이는 것 같았다.
“오래 기다리셨죠? 중간에 일이 많아서…….”
“하하! 원래 무림이란 문제투성이인 곳이지. 주원에게 서신을 받았다. 멋들어지게 십팔나한진을 격파했다고.”
하현과 남궁민은 겸손하게 고개를 저었다.
“십팔나한진을 격파했다기보다는, 원자돌림 무승들을 이겼다고 하는 것이 정확할 것입니다.”
“맞습니다. 그들을 이겼다고 해서 십팔나한진을 파훼한 것은 아니니까요.”
그래도 하현과 남궁민이 기특한지 남궁무룡은 연신 그들의 등을 쓸어주었다.
취월걸개는 남궁무룡을 보며 말했다.
“이런. 손주들 때문에 친우는 눈에도 안 들어온다 이거지?”
“하하! 그럴 리가. 자네도 정말 고생 많았네.”
“완전히 엎드려 절 받기 군.”
그래도 기분이 나쁘진 않은지 씨익 웃은 취월걸개가 봇짐에서 목함 세 개를 꺼냈다.
“이것이?”
“맞네. 소림의 소환단이네.”
취월걸개가 당당하게 가슴을 펴며 목함을 열었다.
그 안에는 빛을 내뿜는다는 착각이 일 정도로 하얗고 동그란 소환단이 들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