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사라져?!”
취월걸개는 깜짝 놀라 하현의 몸을 점검했다.
“허……?!”
“무슨 일인가? 하현이 몸에 무슨 이상이라도 있는 거야? 길산의 말만 듣고 소환단을 먹이지 말 것을…….”
남궁무룡은 취월걸개의 표정을 보고, 무슨 일이 생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사태를 만든 것에 자책했다.
하지만 취월걸개의 다음 반응은 그가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하…. 하하…….”
“취월……?”
“하하하하!”
취월걸개는 크게 웃기 시작했다.
평소의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아닌, 호탕하게 웃는 소리였다.
“자네…….”
“이럴 수가 있는 건가? 난 머리털 나고 난생처음이네.”
“무슨 일이기에 그런가?”
“자네가 직접 보게나.”
남궁무룡은 하현에게 다가가 그의 몸에 기운을 불어넣었다.
그리곤 두 눈이 동그래지도록 깜짝 놀랐다.
“이게 뭔가? 이렇게 기운이 알알이 뭉쳐져 있는 게 도대체 무엇이지?”
“아…! 자네는 아직 소림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
남궁무룡이 눈을 가늘게 뜨며 취월걸개에게 말했다.
“자네가 말해주지 않았으니, 모르는 게 당연하지 않나?”
“미안하네. 지금 바로 말해주겠네.”
취월걸개는 하현이 소림에서 월룡에게 기운을 전달받았고, 그 전달받은 기운 중에 흡수하지 못한 기운이 온몸 곳곳에 남아있는 것까지 상세히 이야기해주었다.
“그런 일이 있었으면 서신이라도 보내주지 그랬나?”
“원래는 소림을 떠나 곧바로 남궁세가로 돌아올 계획이어서 보내지 않았네. 중간에 일이 생기긴 했지만.”
“그게 무슨 일인지까지 이따가 말해주게.”
“알겠네.”
취월걸개는 남궁민을 달래 준 뒤에 하현에게 말했다.
“네 몸 안 곳곳에 자리 잡았던 월룡의 기운들을 자세히 봐라. 그 크기가 조금씩 커져 있을 터이니.”
“그랬군요.”
하현도 이제야 영문을 알았다.
현재 하현의 몸에는 아직도 받아들이지 못한 월룡이 거대한 기운이 곳곳에 포진해 있는 상태.
이런 상황에 소환단의 기운이 들어오니, 몸이 받아들이지 못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다행인 점은 흡수하지 못한 기운이 분해되어 흩어지지 않고, 기존 몸 안에 박혀 있던 기운들에게 흡수당했다는 것.
“흐흐. 앞으로 네가 해결해야 할 과제가 더 많아졌구나.”
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취월걸개가 말하는 과제라는 것은 아직 몸속에 응어리져 있는 기운을 열심히 녹여내어 흡수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하현은 중간에 쉬어갈 때, 심지어는 이동하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창궁대연심공을 운용하며 기운을 흡수해갔다.
“몸에 이상이 없다니, 일단은 다행이구나. 그래도 혹시 조금이라도 이상한 느낌이 든다면 언제든 나에게 와야 한다. 알겠느냐?”
“네. 할아버지. 꼭 그럴게요.”
남궁무룡은 빙긋 웃으며 하현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어주고는 몸을 일으켰다.
“자. 그러면 어서 돌아가자꾸나. 모두 너희 둘을 많이 기다렸다.”
“그래요?”
“그럼. 특히 소화가 하현이는 언제 오냐고 몇 번을 물었단다.”
“누나가요?”
하현이 큭큭 웃었다.
소화는 하현이 앞에 있으면 까칠하게 굴지만, 하현이 없을 때는 누구보다 하현을 그리워하는 사람 중에 하나기도 했다.
“그리고 조금 천천히 말해주려고 했는데…….”
“또 무슨 일이 있어요?”
“무슨 일은 아니고.”
남궁무룡이 조금 뜸을 들이고는 말했다.
“하현이 너에게 혼담이 들어와 있단다.”
“혼담이요?!”
하현은 혼란스러웠다.
도대체 누가 하현에게 혼담을 넣었다는 말인가?
무림에 나선 적도 몇 번 없고, 아는 사람도 별로 없는데.
“어디에서 온 겁니까?”
지금까지 가만히 있던 남궁민이 물었다.
하현이 세가 밖을 나설 때 대부분 시간을 함께한 그였다.
그런 남궁민으로서도 어디인지 쉬이 예상이 가지 않았다.
“진주언가다.”
“진주언가요? 하현이랑 진주언가가 도대체 무슨 접점이……?”
남궁민이 취월걸개를 바라보았지만, 취월걸개도 전혀 모르기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때 하현이 생각나는 게 있는지, 외쳤다.
“언영!”
“그게 누구냐?”
“어디서 만난 게야?”
“진주언가주님의 막내딸이에요. 저번에 북경에 갔을 때, 잠시 만난 적이 있긴 한데…….”
생각에 빠지려 하는 하현을 보며 남궁무룡이 말했다.
“현아. 여기서 결정을 내려야 할 필요는 없단다, 네 큰삼촌이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으니, 이야기를 한번 나누어 보겠느냐?”
“네. 그렇게 할게요. 할아버지.”
하현이 남궁무룡에게 대답했고, 그들은 곧 남궁무룡의 연무장을 나섰다.
* * *
하현은 방에 와서 짐을 풀고, 곧바로 남궁기철에게 가려 했으나 그럴 수 없었다.
“하현아!”
“잘 갔다 왔어?”
“누나! 형!”
그의 방에 우당탕 쫓아온 남궁환과 소화 때문이었다.
“둘이 염려해 준 덕분에 잘 갔다 왔어.”
하현이 웃으며 말했지만, 소화가 장난스레 정색하며 말했다.
“나는 별로 걱정 안 했는데?”
“응. 고마워 누나.”
“아니? 염려 안 했다니까?”
“그러니까 고맙다고.”
소화는 뜻대로 되지 않아 답답한지 가슴을 두드렸고, 하현은 그런 그녀를 보며 피식 웃었다.
“재밌었어? 개방은 어떤 곳이야? 방주님도 만난 거야?”
“응. 개방은… 뭐랄까 거지들이 아주 많은 곳이야. 세상 거지들은 거기 다 모여 있는 거 같거든. 그리고 방주님은 진짜 좋은 거지셔.”
“그 얘기 들으니까, 왠지 가기 싫다.”
하현은 빙긋 웃음 지으며 말했다.
“그래도 가보면 좋을 거야. 다들 좋은 거지거든.”
“소림은? 소림은 어때?”
쏟아지는 질문 공세로 인해 하현은 하던 것도 잊고 그들과 대화 삼매경에 빠졌다.
“와… 그랬구나. 그러면 결국 둘이 혼인하는 건 못 보고 온 거네?”
“응. 내 생각에는 혼인식을 또 성대하게 올리지는 않을 것 같아.”
“하기는 주변에 보는 눈이 있으니까.”
“그나저나 금와상단은 정말 너무했다. 부인을 그렇게 쉽게 버릴 수 있는 거야?”
“뼛속까지 장사치다 이거지 뭐.”
하현은 이번 강호행에서 있었던 일을 요약하여 모두 말해주고 나서야 비로소 그도 질문을 할 수 있었다.
“그러면 누나랑 형은 뭐 했어?
“여기서 할 게 뭐가 있겠어. 수련밖에 안 했지.”
“그래? 특이한 일은 없었고?”
“후후. 특이한 일은 없었어. 있을법한 일만 있었지.”
소화가 당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치 빨리 무슨 일인지 물어봐 달라는 듯한 태도였다.
“그랬구나. 알겠어 누나.”
“응? 무슨 일인지 안 물어봐?”
“있을 법한 일이면 별로 궁금하지 않아서.”
“이익! 야! 남궁하현!”
소화가 당장이라도 하현에게 달려들 듯한 태도로 소리쳤고, 하현은 깔깔 웃으며 급히 그녀를 진정시켰다.
“하하! 미안해 누나. 장난이었어. 무슨 일이 있었는데?”
“너 또 그러면 가만 안 둬 진짜.”
“알겠어. 미안하다니까.”
남궁소화는 하현에게 눈을 한 번 흘기고는 입을 열었다.
“이제 헌홍 오라버니는 내 상대도 안 돼.”
“어?”
놀란 티를 숨기지 못했다.
소림으로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소화는 팽헌홍을 부를 때 꼬박꼬박 팽가놈이라고 했었으니까.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이야?”
“놀랄 일… 이긴 하지. 조금 의외라서.”
“뭐가 의외야? 내 재능이면 그깟 헌홍 오라버니쯤 이기는 건 일도 아니라고.”
소화는 하현이 어느 부분에서 놀랐는지 전혀 감도 잡지 못하는 것으로 보였다.
하현은 가타부타 따지지 않고, 그냥 맞장구쳐 주었다.
“맞, 맞아. 누나 자질이 보통 자질은 아니지.”
“그치? 너도 금방 따라잡을 거니까, 조금만 기다려.”
소화는 기세등등한 표정이었다.
하현이 남궁환을 슬쩍 바라보자, 그는 소화가 안 들리게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으쓱했다.
“형은 무슨 일 없었어?”
“나야말로 아무 일 없었어. 그냥 열심히 수련하고, 수련하고, 수련하고…….”
남궁환이 같은 말을 반복하다가 몸서리를 치며 말을 이었다.
“그냥 똑같지 뭐…….”
“그, 그래. 고생 많았겠어. 형.”
“오늘 밤부터 바로 수련할 거지? 오늘부터는 같이 하자.”
“그래. 그러자.”
그 이후로도 소화와 남궁민은 한참을 떠들다가 하현에게 쉬라고 하며 방을 나갔다.
“이제야 집에 온 것 같네.”
그의 혼은 쏙 빼놓는 둘을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집에 온 것 같았다.
잠시 침상에서 쉬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하현은 곧바로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남궁기철에게로 향했다.
* * *
“그래. 하현아. 돌아왔다는 얘기는 들었다.”
“민형님께서 벌써 다녀오셨군요.”
“그렇다. 그래도 사부라고 잊지는 않았나 보더구나.”
남궁기철은 하현을 보고 빙긋 웃었다.
“혼약 때문에 궁금해서 온 거지?”
“맞습니다. 사실 언영이…. 그러니까 진주언가의 막내딸과는 안면이 있는 사이이긴 한데 혼담이 오갈 정도의 사이는 아닌 것 같아서요.”
정말로 궁금하다는 표정의 하현을 보며 남궁기철이 쿡쿡 웃었다.
“평소에는 네가 어린아이라는 것을 잊고 살지만, 이럴 때 보면 한 번씩 실감이 나는구나.”
“네?”
“중원에서, 특히나 우리 같은 무림 세가끼리의 혼담은 무슨 일이 있어서 오가는 것은 아니야. 친분을 더욱 다지고 싶은 집안에 나이가 맞는 사람이 있으면 이전까지 인연이 전혀 없더라도 넣을 수 있는 것이 바로 혼담이지.”
“아…….”
하현은 남궁기철의 말이 무슨 뜻인지 단번에 이해했다.
그렇지 않아도, 바로 어제 있었던 유정협과 장소유의 일이 그런 혼인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만약 안면까지 있다? 그러면 더 거리낄 것 없는 것이지.”
“무슨 말씀이신지 알 것 같습니다.”
“민이에게 들어보니까, 이전에 진주언가의 막내딸과 만난 적이 있는 것 같다고 하던데?”
“형님이 그런 얘기도 하셨어요?”
남궁기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와서 네 혼담이 어떻게 진행된 건지 꼬치꼬치 묻고 가더구나. 민이답지 않게 말이야.”
“형님이 많이 궁금했나 봐요.”
“그러게 말이다.”
“그나저나, 저도 어떤 얘기인지 듣고 싶어요.”
하현이 진중하게 묻자 남궁기철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사실은 나도 해줄 말이 얼마 없긴 하다. 첫 번째로는 언가의 막내딸이 서신으로만 주고받는 혼담은 싫다고, 너와 꼭 만나서 이야기라도 해보고 싶다고 한 것.”
“만나서…. 그리고요?”
“두 번째는 이 말을 꼭 전해 달라고 하더구나. 저번에 구해준 것이 너무 고마웠다고. 이번에도 구해달라고.”
“구해줘요?”
하현이 의문에 찬 목소리로 물었지만, 남궁기철이 대답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도 자세한 건 모른다. 그냥 이렇게 전달해달라고만 들었거든. 바로 대답할 수도 있었지만, 네 의견을 듣고 대답을 하고 싶어서 네가 오기를 기다렸단다.”
“아…. 정말로 감사합니다.”
하현은 남궁기철에게 꾸벅 인사하고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구해 달라고? 아…. 혹시?’
그는 한 가지를 추측할 수 있었다.
‘저번에 언영이 가출했던 것은 원치 않은 혼담 때문이라고 했어. 그러면 이번에도…….’
생각을 마친 하현은 남궁기철에게 물었다.
“만난다고 해서 바로 결정해야 하는 것은 아니죠?”
“그럼. 원래 혼약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결정되는 것은 아니거든. 몇 번이나 매파가 왔다 갔다 하면서 서로의 입장을 조율해야 한단다.”
“그러면 한 번 만나볼게요. 연락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래. 네 뜻대로 하마.”
남궁기철이 야무지게 말하는 하현이 귀여운지 그의 머리를 헝클였다.
* * *
“아이고, 힘들다.”
하현은 방에 돌아와 침상에 벌렁 누웠다.
한 달여의 여정이었던지라 하현은 남궁세가에 있는 거의 모든 이에게 잘 다녀왔다고 인사를 하고 다녔다.
그리고 오랜만에 가족들이 다 같이 저녁 식사까지 마치고 나니, 이미 해는 져버린 지 오래였다.
“차라리 비무를 하는 게 더 나은 것 같아.”
하현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는 무공 수련을 하거나, 전투하는 것보다 이렇게 사람을 만나고 다니는 게 더 힘든 것 같았다.
침상에 누워 잠시 쉬려던 하현의 눈에 탁자 위에 올려놓은 적룡검이 눈에 들어왔다.
“적룡…….”
하현은 홀린 듯 벌떡 일어나 검을 쥐고 반쯤 뽑아 보았다.
스릉-
서슬퍼런 날이 하현을 반겨주는 듯 달빛에 반짝였다.
하현은 잠시 고민하다 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아직까지 널 제대로 휘둘러 보지도 못했구나.”
하현은 마치 적룡검이 강아지라도 되는 것 마냥 소중하게 품에 안고서는 몇 번 쓰다듬어주더니 방 밖으로 나갔다.
그가 향한 곳은 그가 항상 수련하던 공터.
하현은 공터 한가운데에서 적룡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한 번 휘둘러 보려는 데, 느껴지는 인기척에 하현은 검을 멈추었다.
“하현아. 네가 왔다는 소식은 들었어. 왠지 오늘부터 바로 이곳에 있을 것 같았지.”
하현은 익숙한 상황에 그 방향을 돌아보며 대답했다.
“팽형. 잘 지내셨나 보군요.”
“그래. 잘 지냈지.”
그는 전보다 더욱 성숙해진 것 같은 팽헌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