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너는…. 정말 따라갈 수가 없구나.”
한참 하현을 살펴보던 팽헌홍이 말했다.
그는 정말로 하현에게 감탄하고 있는 듯했다.
“그러는 팽형도 많이 발전하신 것처럼 보이는데요?”
“나도…. 발전이라고 한다면 많이 발전했지.”
팽헌홍이 웃으며 말했다.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으셨나 봅니다.”
“하하. 내가 좀 쉬고 싶어도 나를 가만히 두지 않는 누군가가 있어서 말이야.”
하현은 그가 말하는 누군가가 소화일거라고 생각했다.
“원래 우리 누나가 조금 집착이 있어서요.”
“큭큭. 한 번에 알아들었구나.”
소화의 이야기를 하는 팽헌홍은 하현이 기억하고 있는 얼굴과는 많이 다른 얼굴이었다.
‘원래는 진중하기만 했던 사람인데.’
그런데 지금 그의 얼굴은 묘한 즐거움을 품고 있었다.
“어? 그 도를 들고 다니시는군요?”
팽헌홍의 표정 변화를 생각하던 하현은 문득 그의 허리춤에 달려있는 도를 발견했다.
비록 흰 천으로 겹겹이 쌓여 있지만, 하현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팽길산이 팽헌홍에게 주었다던 바로 그 도였다.
“아. 이거? 최근에는 이것만 쓰는 중이다. 이제 제법 손에 익숙해져 가는 참이야.”
“그러면 이제 검법은 더 이상 수련하지 않으시는 거예요?”
“검법도 열심히는 하고 있다. 하지만 혼원벽력도에 조금 더 힘쓰고 있지.”
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도가 묘하게 전과는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남궁세가의 무공이 아닌 그만의 무공을 익혀나가는 중이었던 것이다.
“그렇군요. 큰 성취가 느껴집니다.”
“다행히 발전한 것이 조금은 느껴지는가 보구나.”
그가 하현의 칭찬에 정말로 기분이 좋은지 맑게 웃었다.
“도법의 복원은 어떻게 되어가시나요?”
“한 번 볼래?”
하현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팽헌홍이 공터의 중앙으로 성큼성큼 걸어왔고, 하현은 자리를 비켜주었다.
“뭔가 부끄럽구나.”
“하하. 제가 평가하거나 그런 게 아니니까 마음 편하게 하세요.”
“마음 편히 먹기가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후-.”
팽헌홍은 마음을 가라앉히려는 듯, 눈을 감고 몇 번을 심호흡했다.
잠시 후 살며시 눈을 떴을 때, 그의 눈은 착 가라앉아 있었다.
그 눈빛에 하현은 속으로 조용히 감탄했다.
이전에는 몰랐지만, 수많은 일을 겪고 난 지금은 팽헌홍의 간절함이 보이는 듯했으니까.
사락- 사락-
팽헌홍이 도를 감싸고 있는 천을 모두 풀어내자 한겨울 달빛같이 서늘한 도신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역시 멋진 도입니다.”
“하하. 고마워.”
다시 표정을 굳힌 팽헌홍은 양손으로 도를 잡고 앞으로 뻗은 다음 턱을 조금 당겨 넣는 기수식을 취했다.
“어? 저번과 많이 다른데요?”
“그렇지?”
팽헌홍의 얼굴이 밝아졌다.
하현의 반응은 그의 기대에 부응했다.
곧바로 그는 다시 얼굴을 굳혔다.
“후욱!”
그는 숨을 크게 내쉬면서 도를 치켜 올렸다.
파앗!
그리고 도는 유려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도가 움직이는 궤적 하나, 하나에 모든 정신을 담으려 하는 듯, 팽헌홍의 움직임은 과감했으며, 또 동시에 조심스러웠다.
“와-.”
하현은 그 광경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감탄성을 내뱉었다.
‘만월검법과는 완전히 다른 도법이다.’
만월검법과 팽헌홍이 지금 보여주는 도법은 같은 뿌리에서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애초에 팽헌홍이 보여준 혼원벽력도에서 영감을 받아 창안한 것이 만월검법이었으니까.
그렇지만 팽헌홍은 하현과는 완전히 다른 길을 걸었다.
하현이 흩날리는 달빛에서 변화를 생각해내어 만월검법을 창안했다면, 팽헌홍은 달빛이 아닌, 도(刀) 그 자체에 집중한 결과.
부웅-!
팽헌홍의 도가 그리 무거운 것도 아니건만,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제법 묵직하다.
하현은 문득 팽헌홍의 도를 어디선가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느낌을 어디서…. 아……!’
하현은 곧 이 기시감의 출처가 어디인지 기억해냈다.
‘도제님께서 보여주셨던 도와 비슷해!’
도제의 성명절기는 오호단문도이다.
그렇기에 현재 팽헌홍의 초식이나, 도의 움직임이 그와 비슷하다는 말은 결코 아니었다.
그가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도의 숨결.’
우스운 소리지만, 하현은 팽헌홍이 휘두르고 있는 도가 말하는 소리가 들린다고 생각했다.
‘조금 더 빠르게, 조금 더 강하게!’
변화가 아닌 직선.
그 직선의 묘리에서 상대의 병기를 가르고 뼈를 끊을 정도의 패도 적인 움직임.
그것이 바로 도(刀)의 정수인 것이다.
“후욱, 후욱…….”
어느새 움직임을 멈춘 팽헌홍이 깊은숨을 몰아쉬었다.
“아쉽지만, 아직은 여기까지다. 어때?”
“정말 멋지네요. 도제님이 자연스레 떠올랐습니다.”
“그래?”
팽헌홍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의 아버지라는 것을 차치하더라도, 도제라는 이름은 도를 쓰는 모든 도수에게 선망이 되는 이름이니까.
“아직은 갈 길이 멀지만, 언젠간 나도 아버지처럼 되겠지.”
“네. 충분히 가능할 겁니다.”
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 좋아서 복원이지, 사실 팽헌홍이 하고 있는 것은 무공을 창안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물론 시작점과 나아갈 방향이 정해져 있다고는 해도, 범인은 상상도 못 할 일.
새삼 팽헌홍의 자질이 뛰어남이 느껴졌다.
두근두근-
그런데 하현은 자신도 모르게 심장이 뛰고 있었다.
검을 쥔 손에는 힘이 들어가 있고, 가만히 서 있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했다.
팽헌홍이 그 모습을 알아채고는 피식 웃었다.
“하현아. 한 판 해보고 싶어서 그러지?”
하현이 씨익 웃었다.
“네. 가만히 있을 수가 없네요.”
“그럴 줄 알았어. 내가 얼마나 발전했는지, 제대로 보여주마.”
“사실 저도 예전의 제가 아니라서요.”
스르렁-
하현이 검집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적룡검의 붉은 검신이 달빛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거렸다.
“와. 그 검은 어디서 난 거야?”
보통 검이 아님을 한 번에 알아챈 팽헌홍이 감탄하며 말했다.
“착한 일을 했더니, 돌아오더라고요.”
“그게 무슨 말이야?”
“자세한 건 나중에 말해줄게요.”
“알았다.”
“팽형의 도와 잘 어울리겠군요.”
팽헌홍이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의 도 역시 적룡검에 버금가는 보도였기에.
“자. 간다.”
“네. 먼저 오십시오!”
팽헌홍이 시원하게 보법을 밟으며 다가와 하현에게 도를 내질렀다.
하현은 피하지 않고, 검을 휘둘러 팽헌홍의 도를 쳐냈다.
채앵!
그리 강하게 부딪힌 것도 아닌 것 같은데, 노란 불꽃이 피어오르며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아……!”
하현은 처음 휘둘러본 적룡검에 감탄했다.
마치 검이 제 갈 길을 미리 알고 따라가는 듯한 착각이 일 정도였다.
“이번엔 제가 갑니다!”
하현과 팽헌홍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서로 검과 도를 주고받았다.
서로의 목숨을 노리는 생사결도 아니고, 실력의 우위를 정하려는 비무도 아니다.
그저 서로가 지금까지 어떤 수련을 해왔고, 어떤 성과를 냈는지를 보여주는 자리.
그렇게 밤은 깊어져 갔다.
* * *
잠시 후.
팽헌홍은 공터에 털썩 앉았다.
그는 깊은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하아…. 넌 진짜 독한 놈이구나.”
“그러는 팽형도 왜 이렇게 독해졌어요?”
둘은 한 시진이 넘는 시간 동안 쉬지도 않고 대련을 했고, 나중에는 점점 공력을 담아서 칼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팽헌홍의 내력이 바닥나자 겨우 끝난 것이다.
하현은 힘들기는 하지만, 널브러질 정도는 아니었는지 손쉽게 호흡을 진정시키고 검을 갈무리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분명히 내력은 내가 더 앞섰었는데, 지금은…….”
팽헌홍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하현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기연(基緣)이 있었어요.”
“참나. 하필 기연이 너에게 찾아갔다니.”
팽헌홍은 피식 웃었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그도 잘 알고 있다.
기연이라는 것 역시 준비된 자에게만 찾아온다는 것을.
“그나저나, 조금 이상한데요?”
“무엇이?”
“소화 누나가 아까 이야기하기를, 형님과의 대련에서 이제 이길 수 있다고 했는데, 제가 느끼기에는…….”
하현이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팽헌홍은 하현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소화를 봐주는 게 아니냐고?”
“맞아요. 누나도 많이 발전하긴 했지만, 제 생각에는 지금 팽형에게는 절대 안 될 것 같거든요.”
팽헌홍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봐주는 것은 아니다.”
“그래요?”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봐준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소화에게는 절대 말하면 안 된다.”
“알았어요.”
팽헌홍은 주변에 있을 리도 없건만, 주변을 한 번 두리번거리며 둘러 보고는 입을 열었다.
“소화와 대련 할 때는 검을 쓴다.”
“아…! 도를 쓰지 않고요?”
“그래. 그런데 그게 봐주거나, 지려고 그렇게 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다만, 검법이 손에 익을수록 혼원벽력도의 완성도가 높아지는 것 같기에 검술 수련에도 소홀히 하지 않는 것이지.”
“그랬군요.”
하현은 납득이 됐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검법과 도법은 칼을 쓴다는 것에서는 비슷하지만, 실상은 전혀 다른 움직임을 가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시 예사 재능은 아니야.’
하현은 속으로 팽헌홍을 높이 평가했다.
검법을 펼칠 때 사용하는 근육과 도법을 펼칠 때 사용하는 근육도 제각기 다르다.
자질이 부족한 자가 두 가지를 모두 하려다가는 두 마리 토끼를 쫓다 둘 다 놓치는 결과를 맞이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팽헌홍은 적절하게 두 무공에서의 장점만을 흡수하려 하는 것이다.
“어쨌든 소화 귀에 들어가면 큰일이니까, 절대 말하면 안 된다. 알았지?”
“걱정하지 마세요.”
하현은 입을 꾹 닫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팽헌홍이 큭큭 웃고는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널 만나면 묻고 싶은 게 있었는데.”
“뭔가요?”
“주은이랑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팽주은이요?”
하현은 그녀를 떠올리고는 피식 웃었다.
“네. 일이라고 하면…. 있었죠.”
“무슨 일이기에 주은이가 보낸 서신에 절반이 넘도록 네 이야기야?”
“뭐라고 얘기하던가요?”
팽헌홍이 서신을 떠올리고는 어이가 없는지 쿡쿡 웃으며 말했다.
“지금 밤잠을 줄여가며 수련하고 있대. 다음에 너를 만나면 꼭 한 방 먹여 줄 거라는데?
“하하하. 그랬어요?”
“그래서 네가 무슨 수련을 하고, 얼마나 강해졌는지 나에게 이야기해달라고 하더라.”
“용봉지회에서 만나면 저를 가만히 안 둘지도 모르겠네요.”
하현은 하북팽가에서 팽주은과 있었던 일을 팽헌홍에게 말해주었고, 그는 한바탕 웃어 젖혔다.
“하현아. 너는 외롭지는 않겠다.”
“왜요?”
“소화도 그렇고, 주은이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너를 보고 네 뒤를 쫓아가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잖아.”
“가끔은 그래서 부담스러워요. 영원히 잡히면 안 될 것 같아서.”
팽헌홍이 씨익 웃었다.
“그래. 평생 잡히지 말아줘. 언제나 나보다 한 발자국만 앞서있어라. 네가 내 목표가 될 수 있게.”
“노력해볼게요.”
“이젠 이런 말에도 곤란해하지도 않네?”
“그럼요. 저 놀리려고 일부러 하는 말인 걸 다 아는데요.”
팽헌홍이 맞다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사실은 그의 진심이 상당 부분 섞여 있었다.
“자. 그럼 일어나자. 내일은 규현 스승님께도 인사드려야지.”
“네. 주변 마을에도 한 번 돌아볼 생각이에요. 취월걸개 사부님께서도 내일 돌아가신다고 하셨고요.”
“그래. 알겠다. 오늘 고마웠다.”
하현과 팽헌홍은 새삼스럽게 서로에게 포권을 주고받으며 예를 차린 뒤에 각자의 숙소로 헤어졌다.
‘언제나 한 발자국 앞에 있으려면…. 정말 헛되이 보낼 시간이 없구나.’
하현은 숙소로 돌아가면서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았다.
팽헌홍의 말대로 이제 하현은 본인만 잘하면 되는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이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는 계기가 된 것 같았다.
‘몸 안에 있는 기운들을 조금이라도 빨리 녹여내야겠어.’
하현은 그의 방으로 돌아가자마자 씻지도 않고 가부좌부터 틀어 앉았다.
오늘도 하현은 조금씩 강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