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집으로 돌아온 지 며칠이 지났다.
하현은 자진해서 하는 수련이건만, 차라리 강호행을 했을 때가 더 나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열심히 수련했다.
새벽같이 일어나, 식사 시간을 제외하고는 아침부터 점심을 먹기 전까지 초식 연습 등 육체를 사용하는 수련을 한다.
점심을 먹고서 저녁까지는 월룡이 준 기운과 소환단의 기운을 몸 안에 녹여내려 운기조식하며 명상을 한다.
저녁을 먹고 나서 자기 전까지는 공터(이제는 다들 하현의 수련장이라고 부른다)에 나가 만월검법을 가다듬으며 검법의 깊이를 키우는 데 힘쓰는 생활의 반복이었다.
“하현아! 너 이러다 죽을 수도 있어!”
소화와 남궁환의 애정 어린 만류에도 하현은 의연하게 대답했다.
“죽지는 않을 거야. 아니, 딱 죽지 않을 만큼 할 거야.”
하현의 독기에 둘은 혀를 내두르면서도 소화는 의지를 불태웠다.
“오라버니! 현이가 저만큼 하는데, 우리는 쟤보다 더해야 하는 거 아니야?”
“소화야. 냉정하게 말해서 저것보다 더하면 죽어.”
“그러면 죽을 만큼 할 거야!”
“제발 참아줘…….”
딱 남들 하는 것만큼만 하면서 살고 싶다는 남궁환이지만, 주변에 보이는 기준이 남궁민과 소화, 그리고 하현이다 보니 입으로는 항상 투덜대면서도 결국은 따라오는 그였다.
* * *
하현이 수련장에 있을 시간이건만, 오늘 그는 수련장에 있지 않았다.
그는 남궁기철과 함께 평소에 남궁무룡이, 그리고 지금은 가주 대리로서 남궁기철이 응접실로 사용하는 창천각의 한 곳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진주언가의 막내딸 언영이 오늘 남궁세가를 방문하기로 한 것이다.
“옷이 불편하느냐?”
“조금요.”
하현은 평소에는 항상 남궁세가의 상징과도 같은 초록색의 무복만 입었지만, 오늘은 그보다 단정한 예복을 입고 있었다.
“후우…….”
“긴장되느냐?”
“솔직히 말해서 긴장은 하나도 안 돼요.”
“그래?”
“네. 다만, 지금은 그냥 궁금해요. 혼담이라는 게 어떻게 진행되는 것인지. 보통 이렇게 찾아와서 이야기하고 싶다고 하나요?”
남궁기철이 고개를 저었다.
“보통은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는 신랑과 신부가 얼굴도 보지 못하고 혼인하는 경우가 태반이지.”
“이번이 굉장히 특이한 경우네요.”
“그렇지.”
남궁기철은 하현에게 북경에서 있었던 일을 모두 전해 들었기에 언영이라는 아이가 진심으로 궁금했다.
‘이름도 똑같이 령(鈴)이고, 가출이라니…. 하는 짓도 빼 박았고.’
여러모로 그의 여동생 남궁영령을 생각나게 하는 아이였다.
* * *
조금 더 시간이 흐르고, 남궁세가의 대문 앞에는 몇 명의 사람이 도착했다.
그들은 여기까지 걸어왔는지 힘든 기색이었다.
“아가씨. 도착했습니다. 힘들지 않으세요?”
“괜찮아. 한숨 돌리고 들어가자.”
“그러게 마차나 가마로 오시지…….”
그들은 진주언가에서 온 언영과 그녀의 호위단이었다.
당연하게도 그 호위단을 이끄는 앵앵과도 함께였다.
“앵앵. 너보다는 못하다고는 해도 나도 무인이고, 무가의 자식이야. 너무 나를 어린애 보듯 하지 마.”
“아, 아가씨…….”
“오늘 남궁세가에 온 것도 다른 일이 아닌 내 혼담 때문인 거 잊었어? 나도 만약에 혼인을 하게 되면 어른이라고.”
앵앵의 표정이 울상이 되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아가씨.”
“아니야. 앵앵이 날 걱정해주는 거라는 건 알아. 고마워.”
언영이 싱긋 웃어주자 앵앵의 기분이 조금은 풀렸는지 얼굴이 보통 때로 돌아왔다.
“그럼 들어갈까?”
“네. 아가씨.”
언영이 직접 대문을 두드리자 남궁세가의 하인이 나왔다.
그녀는 마치 친우의 집에 놀러 온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했다.
“진주언가에서 온 언영이라고 합니다. 하현 공자를 만나러 왔어요.”
“말씀 전해 들었습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감사합니다.”
언영은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하인을 따라 남궁세가로 들어갔다.
세가에 발을 내딛자마자 그녀는 눈앞의 광경에 감탄했다.
“앵앵. 이것 좀 봐. 장원이 엄청 넓다.”
“흠흠. 조금 넓군요.”
“전각들 높은 것 좀 봐. 그리고 조경도 정말 예쁘게 잘해놨네.”
“뭐…. 그런 편이군요.”
언영은 앵앵의 반응이 웃긴지 쿡쿡 웃었다.
평소 진주언가에 대한 자부심과 충성심이 과할 정도로 충만하고, 남 좋은 소리도 잘 못 하는 앵앵이다.
그녀가 이 정도 반응이라면 언영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는 말과도 같은 말이었다.
그들이 남궁세가의 경관에 감탄하며 잠시 하인을 따라가자 눈앞에 거대한 전각이 나타났다.
“이곳은 창천각이라고 합니다. 이곳에 계십니다.”
언영이 신기하다는 눈으로 창천각을 올려다보고는 하인에게 물었다.
“혹시 오늘 검존 어르신께서 나오셨을까요?”
“정말 죄송스럽게도, 가주님께서는 다른 일이 있으셔서 오늘은 가주 대리께서 자리에 나오실 겁니다.”
그때 앵앵이 하인에게 말했다.
“가주 대리라면 혹시, 뇌전검 남궁기철님이십니까?”
“예. 맞습니다.”
그 모습에 언영이 앵앵에게 물었다.
“앵앵. 남궁세가 분을 원래 알고 있는 거야?”
“아니요. 잘 알지는 못합니다. 저보다도 한 배분이 더 높으신 분이기도 하고요. 종종 먼 발치에서나마 몇 번 뵈었을 뿐입니다.”
“그렇구나.”
떠드는 사이 그들은 미닫이문 앞에 도착했고, 하인이 잠시 기다려달라고 한 뒤에 그곳으로 들어갔다.
아주 잠시 후에 그 문이 열리고, 목소리가 들렸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어서 들어오시지요.”
남궁기철의 목소리였다.
앵앵은 나머지 호위들에게는 문밖에서 기다려 달라고 한 뒤에 언영과 둘이서만 방 안으로 들어섰다.
언영은 안으로 들어서며 내부를 둘러보았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고급스러운 자재를 사용한 듯 은은한 분위기가 오랜 세월을 보내온 남궁세가는 이런 곳이라고 말해 주는 듯했다.
그리고 방의 끝 쪽에는 두 명의 남자가 있었는데, 하나는 조금 전 말한 남궁기철로 보였고, 나머지 하나는 언영이 익히 아는 하현의 얼굴이었다.
“제가 마중을 나갔어야 했는데, 이곳까지 오시게 하여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제가 억지로 뵙고 싶다고 청한걸요. 제 억지를 들어주셔서 제가 감사합니다. 진주언가의 언영입니다.”
언영은 다소곳하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그리고 이쪽은 제 호위이자, 이번 혼담에서 진주언가님의 대리로 오게 된 앵앵이라고 합니다.”
“앵앵입니다.”
언영의 모습은 누가 보면 천상 요조숙녀로 볼 정도로 정중하고 예의 바른 모습이었다.
“반갑습니다. 남궁기철입니다. 하현아. 너도 인사해야지.”
“아! 네. 남궁하현입니다.”
하현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남궁기철은 하현이 어색해하는 모습이 귀여워 미소 지었다.
사실 하현이 어색해하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내가 생각하던 언영이가 아닌데?’
그녀가 하현의 기억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하긴, 그때는 가출 중이라 거의 거지꼴이었으니까.’
하현이 생각하는 언영은 경단집 앞에서 군침을 흘리던 가출 소녀였지만, 지금은 과장을 조금 보태어 선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기 때문이다.
언영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하현을 보며 슬쩍 미소 지어 주었고, 남궁기철은 그런 둘을 지켜보다 입을 열었다.
“제가 누구와 어떤 이야기를 나누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사실 저도 당사자가 직접 오는 혼담은 해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어서.”
그러자 언영이 입을 열었다.
“제가 직접 온 것은 다름 아닌, 하현 공자와 둘이서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사실 혼담을 정식으로 넣은 것도 그렇게 되기 위한 과정일 뿐이었죠.”
“하하. 그래요?”
“네. 그래서 허락해 주신다면 하현 공자와 제가 둘이서 이야기를 나눠보고, 거기서 진전된다면 그때 정식으로 혼담을 진행해도 괜찮을까요?”
남궁기철은 언영을 웃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사실 언영의 지금 언사는 어떻게 보면 예의에 어긋나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남궁기철은 그런 언영이 싫지 않았다.
“그래요. 그럼 내가 자리를 비켜드릴까요?”
“……!”
남궁기철의 말에 앵앵은 깜짝 놀란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솔직히 말해서 앵앵이 혼담이 진행되는 것을 보고도 가만히 있었던 것은 절대 남궁세가에서, 그리고 하현이 언영의 요구를 받아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집안의 의견 없이 당사자들끼리만 이야기하는 혼담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런데 그가 이렇게 순순히 언영의 말을 승낙할 줄은 생각지도 못 했던 것이다.
“감사합니다. 그러면 앵앵도 자리를 비켜줄래?”
“아! 넵. 알겠습니다. 아가씨.”
앵앵은 남궁세가로 올 때보다는 더욱 가벼운 마음으로 방을 나설 수 있었다.
‘남궁세가. 생각보다 괜찮은 곳일지도 모르겠군.’
그녀는 보수적이고 꽉 막힌 사람들만 가득했던 서문세가 보다는 남궁세가가 훨씬 더 나은 것 같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남궁기철과 앵앵이 모두 자리를 비우고, 이곳에는 하현과 언영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언영이 하현을 보고 웃는 얼굴로 말했다.
“이렇게 만나줘서 고마워. 사실 네가 만나기 싫다고 했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거든.”
“그렇게 생각했으면 구해달라는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던 거 아니야?”
“뭐, 그렇긴 하지?”
언영은 자신이 말해놓고도 웃긴지 킥킥대며 웃었다.
하현은 웃고 있는 언영을 향해 말했다.
“내가 오늘 만나보고 싶었던 이유는 별 게 아니야.”
“이유가 뭔데?”
“궁금해서. 저번에는 혼인하기 싫다고 가출까지 해놓고서는 나를 알면 얼마나 안다고 갑자기 혼담을 넣겠어? 네가 무슨 생각이 있으니 그럴 거라고 생각을 한 거지.”
“역시 똑똑하네?”
하현이 눈을 가늘게 뜨고 언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건 똑똑한 게 아니라, 누구나 생각해볼 수 있는 거 아니야?”
“내가 누구나 이렇게 생각할 수 있었으면 그렇게 시집가기 싫어서 가출까지 하진 않았겠지.”
하현은 씁쓸해 보이는 언영을 향해 말했다.
“이제 내 궁금증을 해결해 줄 차례야. 나한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야?”
“이렇게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고?”
“응. 빨리 말해야 결정도 빠르고, 대책도 빠르지 않겠어?”
“그렇긴 하네. 그러니까…….”
막힘없이 말하던 언영이 말끝을 흐렸다.
“왜. 무슨 말인데 그래?”
“나랑 약혼해주지 않을래?”
“약혼?!”
“응. 지금 바로 혼인하자는 건 아니야. 원래도 무인은 양민들보다 혼인이 많이 늦는 편이기도 하고.”
“그건 그렇지. 그런데 갑자기 약혼하자는 건…….”
언영이 하현의 말을 가로막고 말했다.
“잠시만. 내 이야기를 조금만 더 들어 줄래?”
“알겠어.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을 테니까, 말 해봐.”
“오 년 후에 약혼을 파기하는 거야.”
“뭐?”
“내 나이가 지금 열다섯이야. 나는 딱 스무 살까지만은 자유롭게 살고 싶어.”
하현의 두 눈에 혼란이 깃들었다.
지금 언영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정확하게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언영은 잠시 하현의 반응을 살펴보다가 말을 이었다.
“나는 세상의 시선 따위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아. 다만, 나에게 중요한 것은 아버지와 집안 어른들이 계속 나를 시집보내려 하는 게 내 인생의 가장 큰 문제지.”
“그러니까…. 나와 약혼을 해서 그 간섭을 막겠다는 거야?”
“응. 집안에서도 남궁세가와의 혼약은 절대 깨고 싶은 마음이 없을 거야. 아니, 오히려 지금 쌍수를 들고 환영하고 있겠지.”
언영은 자신감 있게 말을 이었다.
“우리 아버지에게 남궁세가에 혼담을 넣어 달라고 하니까, 매파를 류은파 선배님으로 모신 거 보면 모르겠어?”
언영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하현이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오 년 뒤에 약혼을 파기하고 나면 그때는 집안에서 하라는 대로 한다는 말이야?”
“그건 그래야겠지…….”
하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냥 맨입으로 그렇게 해달라는 건 아니야. 몇 가지 조건을 걸게.”
“뭔데?”
언영은 심호흡을 한번 하고는 준비해온 말을 했다.
“첫째, 지금 말한 이 조건은 무림에 대외적으로 공표하지는 않을게. 우리끼리만 알고 있으면 되는 거야.”
“그리고?”
“둘째로는 우리가 약혼 중이고, 아직 오 년이 채 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언제든 파기할게.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줄 수 있는 건…. 뭐든지 줄게.”
하현이 언영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뭐든지라는 말이 얼마나 위험한 말인지 알아?”
“응. 알고 있어.”
“그런데도 다 줄 수 있다는 거야?”
언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돈을 달라고 하면 내가 구할 수 있는 만큼 줄게.”
“돈은 관심 없어. 난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돈이 많아.”
“그러면 원하는 게 있어?”
“관심이 가는 건 하나 있는데…….”
“뭔데? 뭐든지 말해봐.”
언영은 말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하현이 아까보다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 설마……?’
아주 미미하게 하현의 눈이 위, 아래로 움직이는 것을 알아챘다.
‘아무리 어려도 남자는 조심해야 한다고 했는데.’
그녀는 하현이 어떤 것을 요구하더라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막상 무슨 요구를 해올지 모르니 무서운 마음이 드는 것이다.
그러나 곧 마음을 굳세게 먹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번 약혼을 성사시켜야 그녀도 숨통이 트이고 살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뭐, 뭔데? 빨리 말해보라니까?”
하현은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참 언영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무공. 진주언가의 권법이 그렇게 대단하다던데. 난 네 무공이 탐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