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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세가 천재 외손자-109화 (109/304)

109화

“무, 무공?”

한순간 언영의 얼굴이 붉어지며 말을 더듬었다.

“아, 아무리 그래도 무공을 가르쳐 달라는 건 너무 무린가?”

“정말 그거면 되는 거야?”

하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아? 얘기 들어보니까, 나한테는 손해될 게 별로 없어 보이던데.”

“그렇긴 하지만…….”

하현이 싱긋 웃었다.

“정말로 혼약을 하는 것도 아니잖아. 정말로 혼인을 하자 그랬으면 그러지 못하겠지만, 약혼쯤이야 뭐. 약혼을 진행하면서 집안 어르신들이 귀찮을 일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건 내가 잘 얘기해볼게.”

언영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얘기한다니. 지금 우리가 한 이야기를 어른들에게 말 할거라는 소리야?”

“말할 생각이었는데 왜?”

하현은 당연하다는 표정이었다.

“아니, 그…. 어른들이 이걸 받아들여 주실까? 나는 최대한 말 안 하고 숨기는 쪽이 좋을 것 같은데.”

“분명히 잘 설명하면 이해해주실 거야. 네가 계속 가출하는 것보다야 이렇게라도 안정을 찾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고.”

언영이 아연실색했다.

“내가 가출했다는 것도 이미 다 말한 거야?”

“응. 널 어떻게 만났냐고 물어보셔서 다 말했지.”

언영은 어이가 없었다.

“그런데도 이 혼담을 받아들이셨다고? 그 얘기를 듣고 뭐라고 하셨는데?”

“재미있는 소저라고 말씀하시던데? 용기도 있고, 결단력도 있고.”

“아…….”

“미래가 기대된다고 하셨어. 어떤 무인으로 성장할지.”

하현의 말에 지금까지 아무렇지 않은 척 잘 유지하고 있던 언영의 얼굴이 무너졌다.

그녀의 눈가에는 눈물마저 고이려 하고 있었다.

평생을 집안에서 어떤 인정도 받지 못했던 그녀다.

‘어떤 무인이라니…….’

그의 아버지인 철권 언형철은 항상 그녀를 사랑한다고는 하지만, 한 사람으로서의 인정보다는 딸이라는 역할을 강요했다.

그리고 그녀를 가장 사랑해준다고 할 수 있는 앵앵마저도, 그녀를 자신의 몫을 할 수 있는 무인보다는 어린아이로만 봐주었다.

그런데 생면부지인 남궁세가의 사람이 그녀를 한 사람의 무인으로서 인정을 해준 것이다.

그것도 가출이라는 치기 어린 행동을 듣고서는.

“그리고 구해달라며? 네 인생에 끼어든 건 나잖아. 나도 어느 정도는 책임을 져야지.”

하현은 당연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언영은 결국 눈물을 한 방울 툭 떨구고 말았다.

“흑…….”

“아, 아니. 왜 갑자기 울어? 내가 무슨 말실수라도 했나?”

하현이 급히 자신이 했던 말을 되돌아봤지만, 그녀를 울릴만한 말을 한 것은 기억해내지 못했다.

“아니야. 너무, 너무 고마워서…….”

“휴. 그랬구나. 난 또 내가 눈치 없이 무슨 말을 했나 했어. 우리 누나가 항상 여자한테 말할 때는 한 번 더 생각하고 말하라고 하도 타박을 줘서…….”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는 하현을 보며 언영은 울다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제는 웃네? 나한테 고맙다고 했지?”

언영은 순간 울다가 웃은 것이 부끄러워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하현은 눈부시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면 웃자. 울지 말고. 앞으로도 고마우면 웃어주기로. 나는 사람이 울면 그게 좋아서 우는 건지, 속상해서 우는 건지 구별을 잘 못 하거든. 그런데 웃으면 좋아서 웃는 거라는 건 알아.”

그 말에 언영은 부끄러운 것도 잊고 환하게 미소 지었다.

지금 하현과 둘이 있는 방 안을 환하게 밝혀주는 것 같은 밝은 미소였다.

“응. 고마워.”

하현도 기분이 좋은지 다시 한번 미소 지어 주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긴 하네.”

“무슨 문제?”

“너도 무공을 익히긴 했지?”

“당연히 익혔지? 아까 네가 그랬잖아. 나도 무인이라고.”

하현이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그런데, 지금 네가 나한테 뭘 가르쳐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뭐라고?”

“내가 배우고 싶은 무공이라는 건, 단순히 구결이나 초식 같은 게 아니야.”

언영이 당황한 표정으로 큰 눈을 깜빡거렸다.

“그러면 네가 원하는 건 뭔데?”

“무리(武理). 나는 무공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상대가 필요해. 그게 나의 발전을 가져올 테니까.”

“무리라니…….”

그녀의 눈동자가 지진이 난 듯 흔들렸다.

하현이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지만, 그녀는 무공에 대한 큰 뜻을 아직 세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건 엄청난 고수들이나 되어야 할 수 있는 거 아니야?’

하현의 표정은 진지했다.

‘그러면 하현이는 벌써 그런 경지에 올라 있다는 거야?’

그녀는 하현과 북경에서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생각해보니 그때 아무리 기습이었다고는 해도 제법 고수 축에 드는 그녀의 호위를 한 방에 기절시키기도 했고, 앵앵과는 대등한 기도를 보이기도 했었다.

“그리고 말이야. 무공 수련에 더욱 힘쓰는 게 앞으로의 너에게도 더 도움이 될 거야.”

언영은 하현의 목소리에서 상념에서 깨어났다.

하현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아까도 말했지만, 우리는 무인(武人)이잖아? 무공이 강해야 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기도 하고.”

“그렇구나. 알겠어. 내가 지금까지 무공 수련을 소홀히 했던 건 사실이니까.”

“잠깐만 팔 좀 줘봐.”

그때 하현이 언영의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언영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

그녀는 순간 너무 놀라 입만 벙긋거렸지만, 하현은 그녀의 팔에 집중했다.

“어디 보자…. 사부님이나 할아버지처럼 잘 보는 건 아니지만, 나도 어느 정도는 볼 줄 알 것 같거든.”

하현은 그녀의 팔을 빤히 바라보다 감탄성을 뱉었다.

“오! 생각보다 기골, 세맥이 튼튼한데? 여태까지 열심히 안 해서 성취가 적은 거라면 앞으로 충분히 발전할 수 있을 거야.”

하현이 대답을 기다렸지만, 언영이 아무 말도 없자, 하현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괜찮아? 너 어디 아픈 거 아니야?”

“내, 내가 왜?”

“얼굴이 너무 빨개.”

그녀가 화들짝 놀라 하현에게 잡힌 손을 뺐다.

“괜, 괜찮아.”

그러자 하현이 그녀의 얼굴에 자신의 손을 가져다 댔다.

“괜찮은 게 아닌 거 같은데? 열도 있는 거 같고. 갑자기 맥박도 불규칙하게 뛰어.”

“괜찮다니까? 아! 사실 언가에서 여기까지 걸어와서 힘든가 봐.”

하현이 조금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까지 걸어왔어? 나도 한 번 걸어왔는데 보통 일은 아니던데. 네 무공 수준이라면 더 힘들었을 거고.”

“아까 말했지만, 나도 무가의 자식이잖아. 걱정 안 해도 돼.”

언영은 최대한 태연한 태도를 하며 말했다.

“그건 그렇고, 내 무공 수준 얘기는 그만해줄래? 열심히 노력해 온다고 했잖아.”

하현은 자신의 말에 또 실수가 있었다고 생각하며 반성했다.

“아, 그래. 내가 또 눈치 없이 상처가 될 수도 있을 말을 했네.”

“그래. 너무했어.”

그녀는 뒤로 두 걸음 정도 뒷걸음질 치며 말했다.

“그러면 우리 얘기는 이쯤 하면 된 것 같아. 그렇지?”

“응. 약혼에 대한 이야기는 어른들에게 맡기자. 네가 할 일은 이제 무공 수련에 전념하는 거야.”

언영이 눈을 가늘게 뜨고 하현에게 말했다.

“아까부터 계속 무공, 무공…. 너는 무공 익히고 수련하는 게 그렇게 좋아?”

하현이 거침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는 수련하는 것도 좋고, 강해지는 것도 좋아.”

“왜 그렇게까지 강해지려고 하는 건데?”

언영은 진심으로 궁금한 표정이었다.

그녀가 지금까지 무공 수련에 힘쓰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적절한 동기를 찾지 못해서였다.

무공을 익혀서 강호에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무림에서 손꼽히는 무인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으니까.

“내가 강해지려는 이유는, 훗날 내가 어떤 일을 하더라도 힘이 없어서 후회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야.”

“후회하고 싶지 않아서?”

“응. 세상을 사는 데 무공이 전부는 아니지만, 무공은 많은 것을 해결해주거든.”

하현이 빙긋 웃었다.

“그거 알아? 지금 무림맹주님도 여자분이신거?”

“아…! 철매화(鐵梅花) 대협.”

“맞아. 그분도 사실 처음에는 섬서성의 작은 무가 출신이셨다고 해.”

“그래? 나는 그분이 처음부터 화산에서 공부하신 줄 알았어.”

언영은 처음 듣는 이야기에 눈을 깜빡이며 흥미를 보였다.

“원래부터 무공에 흥미가 많으셨는데, 그분의 아버지께서 무공 수련을 많이 시키지 않으려고 하셨다나 봐. 그런데도 죽자사자 무공을 익히셨고, 결국 화산 고수분의 눈에 들어 화산에 입문하신 거래.”

“그랬구나…….”

그녀가 느끼는 바가 있는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현의 말은 할아버지에게서 들은 이야기이니 사실일 것이다.

“그리고 혹시 모르지 않니? 네가 정말로 강해지면 네 아버지께서도 너를 무인으로 인정해주실지.”

“알았어. 정말 열심히 해볼게.”

“응. 그래서 나에게 진주언가의 무공이 무엇인지 꼭 가르쳐 줘야 해.”

언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과는 달리 그녀의 눈에는 확신이 차 있었다.

오랫동안 고민하던 것도 해결되었고, 또 삶의 목표도 생긴 것 같은 얼굴이었다.

‘남궁세가에 오길 잘했어.’

그녀는 진심으로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지금 그녀의 앞에서 웃고 있는 하현을 보며 그녀가 이런 제안을 한 것이 하현이라 다행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하현아.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물어볼게.”

“응. 뭐든지.”

“그러면 너는 어떤 사람이 좋아?”

“어떤 사람이 좋냐니? 어떤 여자가 좋냐는 말이야?”

언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현은 잠시 생각하곤 말했다.

“사실 아직 그런 쪽은 생각해본 적이 없어. 다른 생각을 하기에는 무공 수련으로 너무 바쁘기도 하고, 좋아한다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 잘 모르겠기도 하고.”

“그러면 질문을 바꿔볼게. 어떤 사람이랑 앞으로 함께 하고 싶어?”

“음…. 그러면 하나 생각나는 게 있긴 해.”

“뭔데?”

“내가 무언가를 배울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어.”

“배워?”

그녀가 하현의 답에 반문하고는 조금은 이상한 생각이 들어 하현에게 다시 물었다.

“무공을 말하는 거야?”

“뭐, 사실 무공뿐만 아니라, 어떤 것이든 좋은데…. 지금 나는 무공이 최대의 관심사니까, 무공이면 제일 좋겠지?”

하현은 따뜻하게 웃고는 말을 이었다.

“네가 나한테 진주언가의 무공을 가르쳐주기로 한 것처럼 말이야.”

“뭐, 뭐래…….”

그녀는 순간 얼굴이 달아올랐음을 느꼈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말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갈게.”

“그래. 알겠어. 다음에 또 와.”

“응. 그때까지는 꼭 수련 열심히 할 테니까.”

하현이 그 말에 웃었다.

“다음에 올 때는 마차를 타고 와. 여기는 너무 머니까.”

“그,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

하현은 하인을 불러 이야기가 끝났음을 남궁기철에게 알렸고, 다른 방에서 업무를 보고 있던 그와 밖에서 언영을 기다리고 있던 앵앵이 들어왔다.

“그래서 바로 돌아가신다고요?”

“네. 환대해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며칠 더 쉬시다 돌아가시지요.”

언영이 살풋 웃었다.

조금 전 하현과 대화 할 때와는 전혀 다른 태도였다.

“아닙니다. 객(客)으로서 귀찮게 해드릴 수는 없지요. 하현 공자님과는 이야기가 잘 되었으니, 긍정적으로 검토하시고 저희 집안 쪽으로 말씀 주시기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조심히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언영은 예를 차려 고개를 숙였고, 남궁기철도 그녀를 어린아이가 아닌 한 사람의 무인을 대하듯 정중하게 포권해 주었다.

“아! 혹시 돌아가시는 데 우리 남궁세가에서 도와드릴 건 없습니까?”

남궁기철이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그러면 부탁 하나 드려도 될까요?”

“네. 저희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진주언가까지 돌아갈 마차 한 대만 부탁드립니다.”

언영이 미소 지으며 하현을 바라보고는 말했다.

* * *

진주언가로 돌아가는 마차 안.

앵앵이 언영에게 말했다.

“아가씨. 마차를 타고 가신다니. 정말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래? 역시 편하네.”

남궁기철은 언영을 위해 최고급 마차를 내어주었다.

말 두 필이 끄는 거대한 마차는 호위들이 모두 앉을 수 있는 크기였다.

“남궁세가에서 이야기는 잘 되신 겁니까?”

“응. 잘 됐어. 결과만 말하자면, 하현 공자께서는 내 제안을 받아들여 주시기로 했어.”

“아…. 그렇군요.”

언영이 앵앵을 보며 말했다.

“왜 마음에 안 드는 눈치야? 앵앵도 내가 그렇게 혼인하기를 원했잖아.”

“아무리 그래도 화화공자랑은…….”

“화화공자? 하현 공자가 화화공자라는 소리야?”

앵앵은 자신도 모르게 말실수한 것을 느꼈는지 양손을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언영은 피식하고 웃을 뿐이었다.

“맞네. 화화공자. 앵앵이 정확하게 봤어.”

“그런데도 약혼을 하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언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앵앵에게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앵앵. 부탁이 있어.”

“무엇입니까?”

“나…. 무공 수련을 정말 열심히 하고 싶어. 내가 가까운 무인 중 가장 뛰어난 건 앵앵이야. 나를 많이 도와줄 수 있겠어?”

앵앵의 눈이 흔들렸다.

평소에 무공 수련을 그렇게도 하기 싫어하던 언영이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무슨 심경의 변화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할 수 있는 노력을 다 해보겠습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의 성취를 내고 싶으신 겁니까? 그 목표점에 따라 수련의 강도가 달라지기에…….”

앵앵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언영이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그녀는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그냥…. 누군가에게 가르침을 줄 수 있는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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