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제갈정현은 무척이나 쾌활하고 붙임성 있는 사람이었다.
“이렇게 된 것도 인연인데, 합석해도 되겠소?”
“아, 네. 괜찮습니다.”
그는 스스럼없이 자리를 차지하고는 앉았다.
“청룡신검을 평소에 동경하고 있었소. 그런데 소협들을 보니 남궁세가의 저력이 만만치 않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하하!”
“과찬입니다. 아직 저희는 무림소졸이라.”
“어떤 영웅이든 처음에는 무림소졸로 시작하지요.”
그는 친근하게 말을 붙여왔다.
하현은 그의 행색을 다시 한번 보았다.
‘무공을 익힌 것 같은데…….’
그는 무복이 아닌 흰 장포를 입고, 이마에는 그 색에 맞는 영웅건까지 둘러메고 있었다.
또 한쪽 허리에는 검 대신 부채를 찔러넣고 있었다.
“남궁환 소협은, 뇌전검 남궁기철님의 자제분 아니오?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아서.”
“제 이름을 들어보셨다고요?”
“하하. 제갈세가는 개방 다음가는 정보력을 자랑하니까요.”
제갈세가는 백 년 전까지만 해도 무림맹의 두뇌 역할을 하던 곳이었다.
오십 년 전 정사대전부터는 불세출의 천재로 일컬어지는 모용휘의 등장으로 그 역할을 뺏겼지만.
“그런데 이쪽 분은 사실 제가 누군지 잘 모르겠소만…. 남궁하현 소협이라고 했지요?”
그는 하현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하현은 자신을 어떻게 소개할지 몰라 움찔하고 있던 사이 남궁환이 대신 대답해주었다.
“이쪽도 제 사촌입니다. 조부님의 직전 제자죠.”
“아…! 검존 어르신의?”
그가 놀라워하자 남궁환이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검존이라는 이름은 대단했다.
제갈정현은 하현이 누구의 아들인지에 대한 의문은 한순간에 잊어버린 듯했다.
“이렇게 알게 된 것도 인연인데, 호북까지 오셨으니 제가 대접하겠소.”
그는 점소이를 불러 이것저것 부탁하지도 않은 음식을 이것저것 시켜 주었다.
“이러실 필요까지는 없는데…….”
“남궁세가는 능히 현재 천하제일가라고 불릴만한 가문이오. 평소에 친분을 쌓고 싶었건만, 이렇게 기회가 되어 기분이 좋아 그렇소.”
하현은 제갈정현의 말에서 악의 없는 선의를 느꼈다.
그도 오대 세가 중의 하나인 제갈세가의 무인이다.
다른 세가를 천하제일가라고 칭할 때 자존심이 상할 만도 하건만, 그는 시종일관 웃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어디를 향하는 중이었는지 여쭈어봐도 되겠소?”
제갈정현의 말에 하현과 남궁환은 눈을 마주쳤다.
어디까지 말해야 할지 둘은 눈으로 대화를 나눈 듯 남궁환이 말했다.
“사천으로 가는 중입니다.”
“사천이라 하면…….”
제갈정현이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시 빠지곤 말을 이었다.
“당문으로 가시는 길이겠구려.”
“그렇습니다.”
남궁환은 제갈정현이 그들의 행선지를 정확하게 맞추었음에도 놀라지 않았다.
조금 전 남궁환이 쫓아낸 두 무인은 제갈세가 사람에게 휘연의 소식을 들었다고 했다.
그러니 제갈정현은 당연히 남궁휘연의 소식을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혹시 휘연 형님의 상태가 어떤지 아십니까?”
“휘연? 청풍검 남궁휘연을 말하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아아…. 두 분으로서는 가문의 사람이니 심히 걱정되시겠구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큰 부상을 입었으나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상황이라고 하오.”
남궁환과 하현은 그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사천까지 가신다면 중경을 거쳐 가실 듯한데, 제가 마침 중경에 볼일이 있소.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저와 동행하지 않으시겠소?”
“동행 말입니까? 하현아. 어떻게 생각해?”
남궁환은 자신이 형임에도 하현의 의견을 물었다.
이번 사천행은 엄연히 정예대원인 하현의 임무고, 자신은 하현은 따라온 정식대원.
세가에서 정한 위계질서를 철저히 지키는 그였다.
하현은 제갈정현에게 물었다.
“다른 일행은 없으십니까?”
“그렇소. 혼자 가려니 외롭기도 하고…. 또 이렇게 안면을 익혀두면 훗날 서로에게 도움이 될지 누가 알겠소?”
그는 능청맞게 말했다.
그리곤 혹여 하현이 거절할까 걱정했는지 황급히 말을 이었다.
“혹여 저와 동행하며 길이 지체될까 걱정하는 것이라면 걱정할 필요 없소이다. 아니, 오히려 함께 가는 것이 시간을 더욱 단축할 수 있을 것이오.”
“어떻게 그게 가능합니까?”
“말 두 필이 끄는 마차를 타고 있소. 어지간한 신법보다는 쌍두마차가 더욱 빠를 테니.”
잠시 생각하던 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전력을 다해 달린다면 쌍두마차보다는 더욱 빠를 테지만, 체력과 기력을 아낄 좋은 기회였다.
“알겠습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하하! 제가 잘 부탁드리오. 동행을 허락해주어 감사하오.”
* * *
안휘성의 달걀 모양처럼 위, 아래가 길고 좌우가 짧은 성이라면, 호북은 일단 안휘성보다 면적이 넓을뿐더러 좌우가 긴 성이다.
그렇기에 호북을 횡단하는 길은 상당히 길다.
다행이라면 좌우를 관통하는 잘 닦인 관도가 있기에 마차가 쉬지 않고 갈 수 있다는 것.
제갈정현은 군데군데 쉬어가고 싶어 하는 듯했지만, 하현은 하루가 더욱 급했기에 곧장 가기를 원했다.
그런 이유로 잠을 잘 때만 객잔에 잠시 들러서 온 덕에 그들을 태운 마차는 사흘 만에 하북성과 중경의 경계에 있는 은서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소문으로만 들었거늘, 최후에 혈랑의 목을 친 것이 여기 하현 아우였단 말인가?”
“그렇다니까요? 저보다 무공 실력도 더 뛰어나고, 세가 내에서의 지위도 높습니다.”
“허허. 얼굴로만 봐서는 그렇게 보이지 않거늘.”
함께하는 수일 동안 남궁환과 제갈정현은 많이 가까워졌다.
이제 막 약관을 넘은 제갈정현은 남궁환과 형님, 동생을 하기로 했다.
“이 이야기는 처음 들으시는 겁니까?”
“무림맹에서 혈랑의 출현을 공표하고, 마교의 탐사대를 꾸렸다는 이야기만 들었네. 그 싸움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는 전혀 몰랐어. 대단하군.”
제갈정현이 하현을 치켜세워주자, 하현이 미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운이 좋았습니다. 조부님께서 혈랑의 힘을 모두 빼놓으셨고, 다른 가족들이 나머지 혈검대원들의 손과 발을 모두 묶어주셨습니다. 저는 마지막에 검을 한 번 휘두른 것밖에는 한 게 없습니다.”
“겸손까지! 미래의 영웅이로세.”
제갈정현이 하현을 칭송하는 것이 자랑스러운지 남궁환의 얼굴에도 웃음이 가득했다.
하현이 어색하게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제갈 형께서는 중경에는 무슨 일로 가시는 겁니까? 마부도 없이 홀로 마차까지 이끄시고요.”
남궁환도 같은 의문이었다.
마차에 무슨 짐이라도 실려 있으면 그 짐을 가져다주러 가겠거니 할 것이다.
그런데 마차는 빈 마차에다가 제갈정현 역시 특별히 짐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하하…. 말해주고 싶네만, 개인적인 볼 일이라서 말이야.”
“그래요?”
“바쁜 자네들의 발을 잡기도 그렇고 말이야. 그건 그렇고, 해가 또 져가는데 오늘 하루 더 쉬어가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현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말대로 하늘은 붉은 노을로 가득했다.
“좋습니다. 내일이면 중경에 도착하겠군요.”
“그렇지. 중경에서 사천까지는 서두르면 하루, 늦어도 이틀이면 도착할 걸세.”
잠시 후 객잔을 발견한 제갈정현은 마차를 몰고 객잔으로 들어섰다.
“여기는…. 귀신이라도 나올 것 같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매우 낡고, 인기척도 없네요.”
“하하. 무슨 일이라도 있겠는가. 어서 들어가 보세.”
말과 마차를 받으러 나오는 하인도 없었다.
이곳이 객잔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다만, 모든 등불과 호롱에 불이 환히 켜져 있었고, 그럴듯하게 달린 간판이 이곳이 객잔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듯했다.
“조금 찝찝한데, 그냥 나가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이렇게 어두워지는데? 그냥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네만.”
제갈정현은 묘하게 그들을 채근하는 눈치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들어가죠.”
하현이 성큼성큼 객잔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뒤를 따라 제갈정현이, 그리고 바로 그 옆에 남궁환이 하현을 따랐다.
“아무도 없습니까?”
끼익-
문은 굉장히 오래된 듯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은은하게 불이 밝혀진 내부에는 손님이 있었는지 몇몇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언뜻 행색을 살펴보니, 모두 무인으로 보였다.
“다행히 장사는 하는가 보군요.”
“내가 뭐라고 했는가? 들어가자고 했지?”
제갈정현이 의기양양하게 식당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하현과 남궁환이 눈을 마주쳤다.
끄덕-
하현이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야 둘은 제갈정현의 곁에 앉았다.
“저희 객잔에 와주시어 감사합니다. 묵어가실 겁니까?”
“그렇네. 음식도 좀 내와 주시게나. 거스름돈은 필요 없으니, 이 돈에 맞는 음식과 잠자리를 부탁하네.”
“술을 같이 올릴까요?”
“그래 주게나.”
제갈정현이 점소이에게 은자 하나를 건네며 말했다.
은자를 받아든 점소이는 땅에 머리가 닿을 정도로 고개를 조아리고는 주방 쪽으로 총총 사라졌다.
따로 총관은 없는 것으로 보아, 이 객잔의 주인이 주방장을 겸하는 것 같았다.
잠시 후 점소이가 음식을 내왔다.
흔하디흔한 돼지고기볶음과 죽엽청이었다.
“음식은 더 나올 것입니다. 일단 이것부터 드시고 계십시오. 대협.”
“알겠네. 기대되는군.”
제갈정현은 거리낌 없이 죽엽청을 한 잔 따라 마셨다.
하현은 그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하. 좋군. 영웅이라면 응당 술도 한잔할 줄 알아야 하거늘. 자네들의 연배가 낮은 것이 애석할 따름일세.”
그는 사람 좋게 웃었다.
그런데 조금 전부터 남궁환의 표정을 약간 굳어있었다.
“그런데, 환 아우. 자네는 왜 이리 표정이 좋지 않은가? 자네도 혹여 한잔하고 싶은 것이면 한잔하게. 아무도 보는 이도 없지 않은가?”
제갈정현이 남궁환에게 잔을 하나 건네며 말했다.
남궁환은 그 잔을 무심코 집어 들고는 제갈정현에게 나직이 말했다.
“솔직히 말해주세요. 형님.”
“무엇을 말인가?”
“정말 모르시는 겁니까? 아니면 모르는 척하시는 겁니까? 그것도 아니라면…. 혹시 한패입니까?”
“뭐……?”
남궁환의 말에 제갈정현은 정말로 놀란 얼굴이었다.
“현아. 모두 몇 명이냐. 내가 헤아린 것은 다섯인데.”
“이곳에 일곱, 위에 둘. 여기 제갈 형까지 헤아린다면 총 열이야.”
“그래?”
제갈정현의 눈동자가 심하게 좌우로 흔들렸다.
“지, 지금 그게 도대체 무슨 말…….”
“그 술. 마시지 않았더라면 제일 첫 대상이었을 것입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움직인다면 적으로 간주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파악!
남궁환은 그의 말을 채 듣지도 않고 탁자를 뒤집으며 앞으로 뛰쳐나갔다.
그의 검이 향한 곳은 바로 조금 전 음식을 가져다준 점소이였다.
손에는 언제 뽑아 들었는지 검이 들려 있었다.
쒜에엑-!
남궁환의 검에서 창궁검법의 절초가 쏘아져 나갔다.
하현이 발전했듯, 그도 쉼 없이 발전했기에 그는 몇 달 전의 그가 아니었다.
항상 남궁민, 그리고 하현과 비교되어 그렇지, 그 역시 남궁세가의 피를 가장 진하게 타고난 자 중의 하나였다.
그가 만약 다른 가문이나 사문에서 태어났다면, 능히 후기지수로 거론되었으리라.
까앙-!
점소이의 소매에서 짧은 칼이 뽑혀 나오더니 남궁환의 검을 막아내었다.
“네, 네놈이 어떻게!”
점소이는 아연실색하며 신법을 펼쳐 남궁환에게서 도망쳤다.
그 모습을 보는 제갈정현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채앵-!
갑자기 곳곳에서 술을 마시던 무인들이 검을 뽑아 들었다.
“모두 나와라!”
무인이 소리치며 남궁환과 하현에게 각기 갈라져 달려들었다.
주방에서도 세 명의 남자가 각기 무기를 꼬나 들고 튀어나왔고, 이 층에서도 하현의 말대로 두 명의 사람이 계단을 타고 내려오려는지 모습을 보였다.
스윽-
하현은 미끄러지듯 두 명이 내려오는 계단을 향해 신법을 펼쳤다.
급하게 내려온다고 내려온 두 무인이건만, 하현이 계단 초입에 당도했을 때는, 아직 절반도 내려오지 못한 채였다.
하현이 성큼성큼 계단을 뛰어 올라가며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검을 휘둘렀다.
츠팟-
“끄아악!”
앞에 선 남자가 발목을 잡고 쓰러졌다.
하현이 그 남자를 피해버리자 그는 계단에서 우당탕 굴러떨어졌다.
깜짝 놀란 표정의 남자도 그와 같은 꼴을 면치 못했다.
아니, 그보다 더 좋지 않았다.
앞선 자는 발목이 갈렸을 뿐 완전히 끊어지지는 않았으나, 이자는 발목 자체가 잘려버려 피를 쏟았기에.
하현이 계단 아래로 풀쩍 뛰어 내려가니, 이미 남궁환도 상황을 거의 정리해가고 있었다.
그의 주위에는 벌써 다섯의 사람이 쓰러져 있었다.
개중에는 절명한 자도 있었다.
이제 이 자리에 서 있는 적들은 점소이와 주방장 둘 뿐.
제갈정현은 남궁환의 말대로 자리에 앉아 옴짝달싹하지 않고 있었다.
남궁환이 주방장을 향해 말했다.
“당신이 우두머리 같은데, 항복한다면 목숨은 살려주겠소.”
그는 특유의 무정한 눈빛으로 주방장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