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다, 닥쳐라!”
주방장은 손에 들고 있는 두꺼운 중식도를 그대로 휘두르며 남궁환에게 달려들었다.
“후. 이렇게 끝날 리 없지.”
남궁환은 가볍게 그의 칼을 받아냈다.
주방장이 이들의 우두머리인 것도 사실이고, 이 중에서 가장 강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궁환이 조금 전에 한 것처럼 다섯을 순식간에 베어낼 실력은 없었다.
콰악! 그그그극-
그는 커다란 덩치가 무색하게 남궁환이 밀어붙이는 힘에 맥을 추리지 못했다.
점소이가 재빨리 남궁환에게 소도를 날렸으나.
팅-!
어느새 그의 앞에 나타난 하현이 그의 검을 가볍게 퉁겨내었다.
하현과의 격차를 한 번의 수로 깨달은 점소이의 얼굴에 절망이 깃들었다.
탱그렁-
그는 허겁지겁 겁을 바닥 멀찍이 던져버리고 하현 앞에 납작 엎드렸다.
“사, 살려주십시오!”
그 모습에 하현이 적룡검을 내려뜨리고, 주방장과 싸우고 있는 남궁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때 제갈정현이 크게 소리쳤다.
“조심해!”
샤악-
그 순간 엎드려 있던 점소이는 하현에게 비도를 날렸다.
비도술을 연마한 것인지 놀랍도록 은밀한 비도였다.
이것은 아마도 그가 가진 비장의 한 수였을 것이다.
이 비도술은 여러 번 그의 목숨을 구해주었을 것이다.
만약 상대가 하현이 아니었다면.
화아악-
뛰어난 하현의 기감은 그 비도를 놓치지 않았다.
비도를 알아채자마자 자연스레 하현의 팔이 움직였다.
남궁민과 함께 수련한 마음의 검은 이제 하현이 의식하지 않아도 펼쳐지는 경지에 이르렀다.
서걱!
분명 날카로운 쇠로 만들어졌음이 분명한 쇠가 하현의 적룡검에 의해 갈라졌다.
하현은 점소이가 엎드릴 때에도, 그가 남궁환을 바라볼 때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제갈정현의 목소리가 없었어도 능히 알아차렸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하현이 점소이를 향해 검을 찔렀다.
검 끝과 그의 심장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거리를 찾아 들어가는 쾌검결이었다.
푸욱!
적룡검이 점소이의 몸속에 잠시 들어갔다 나왔다.
마치 물속에 검을 담갔다가 뺀 것 같은 부드러움 움직임이었다.
“끄륵…….”
점소이는 유언도 남기지 못한 채 쓰러졌다.
“으아악-!”
그때 주방장으로부터 찢어지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남궁환의 검이 그의 어깻죽지를 갈랐고, 검을 쥔 손이 땅에 떨어졌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남궁환은 아직 살아있는 자가 있음을 확인하고는 거침없이 주방장의 목을 갈랐다.
쿵!
육중한 그의 몸이 큰 소리를 내며 바닥에 널브러졌다.
“형. 다친 데는 없어?”
“괜찮아. 너는?”
“나도 괜찮아.”
남궁환은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고는 검집에 갈무리했다.
그리곤 제갈정현에게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그의 현재 태도나 행동으로 보아 이 객잔의 무리들과 한패가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형님. 많이 놀라셨을 텐데 죄송합니다.”
“아, 아니네. 이게 다 무슨 일인가?”
태연한 척 물었지만, 제갈정현은 널뛰는 심장을 다스릴 수 없었다.
심장이 너무나도 크게 뛰어 남궁환마저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아마도 지나가는 여행객을 노리는 것들인 것 같아요. 질이 나쁜 놈들입니다.”
“어떻게 알았는가? 나는 꿈에도 몰랐네.”
제갈정현의 말에는 진심이 뚝뚝 묻어나왔다.
“첫째로는 살기가 느껴졌습니다. 우리가 들어서자마자 이곳에 있던 모든 무인들이 우리를 예의주시하더군요. 심지어는 저기 주방 안에서도요.”
남궁환에 이어 하현이 말했다.
“그리고 이 돼지고기볶음에서 육두구(肉荳蔲) 향이 과하게 났습니다. 멀쩡한 음식에서 날 정도를 아득하게 넘어서 말입니다.”
육두구는 소량만 섭취하면 위장을 튼튼하게 하고 향신료로도 쓰이지만, 대량을 복용하게 되면 마비와 어지러움을 가져온다.
“이럴 수가……. 나는 정말 몰랐네.”
“정말로 요리를 하던 자인지 교묘하게 향을 숨긴 것 같습니다.”
하현이 이제는 싸늘한 주검이 된 주방장을 흘긋 보았다.
남궁환은 하현과 제갈정현이 대화하는 사이, 아직 살아있는 자에게 다가가 피를 쏟고 있는 허리춤의 혈을 짚어 지혈했다.
그리곤 그의 백회혈에 손을 가져다 대자 혼절해 있던 사내가 곧장 깨어났다.
“크, 크흑…….”
“죽고 싶지 않으면 똑바로 말해라. 너희 일당은 너희뿐이냐?”
“아, 아니…오…….”
그는 피를 너무 많이 쏟아 오한이 이는지 몸을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그러면 너희는 어디서 보낸 것들이냐.”
“녹, 녹림…….”
“녹림?!”
하현의 앞에 가만히 앉아 있던 제갈정현이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그리곤 아직도 쓰러져 있는 사내에게 달려가 말했다.
“혹여 옥화산(玉化山)에 있는 녹림채인 것이냐?!”
“그, 그렇소…….”
남궁환은 벌벌 떠는 그의 머리를 팔로 감싸고는 한순간 힘을 주었다.
으득-
그는 목이 돌아가며 한순간에 절명하고 말았다.
“어차피 살 가망이 없었어.”
남궁환이 조금은 괴로운 표정으로 말하자 하현이 그에게 다가가 말했다.
“그대로 뒀으면 고통만 길어졌을 거야. 형…….”
하현이 그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이 순간만큼은 하현이 남궁환의 형인 것처럼 보였다.
“제갈 형. 뭐라도 아는 것입니까?”
“아, 아니……. 이 일에 대해서는 아는 것은 없었네.”
“그러면 아까는 왜 그렇게 이 객잔에서 묵자고 한 겁니까?”
남궁환과 하현은 그가 이 객잔에 들어가기를 채근하기에 한패가 아닐까 의심하였건만, 지금 보이는 행동으로 보아 그것은 아닌 것으로 보였다.
“후…. 일이 이렇게 됐는데, 자네들에게 무슨 말을 못 하겠는가. 사실 중경으로 들어가기가 무서웠네.”
“무서워요?”
“일이 이렇게 됐으니 모두 말해줌세. 그런데 일단 이곳부터 정리하지 않겠나? 내가 알기로는 이 근처에 관아가 있네. 그쪽에 이 사실부터 알리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럽시다. 이대로 둘 수는 없으니까요.”
그런데 제갈정현이 그들에게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머뭇거렸다.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염치 불고하고 하는 말이네만, 혹여 이 공을 나에게도 조금 나누어 줄 수 있는가?”
“공을 나눠요?”
하현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싫으면 어쩔 수 없네만, 관아의 사람을 부르면 결국 논공행상을 하기 마련이네. 작게나마 내 이름이 우리 세가에 들어갈 수 있도록….”
“일단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하현의 대답에 제갈정현의 얼굴엔 화색이 돌았다.
“고맙네! 관아에는 내가 금방 갔다 오겠네.”
제갈정현은 마차에서 말을 한 마리 끌러 금방 사라졌다.
“이게 다 무슨 일이래. 강호는 원래 이런 건가?”
“나도…. 처음이라 잘 모르겠네.”
남궁환과 하현은 잠시 바깥에 나와 있었고, 제갈정현은 금세 관군들과 함께 나타났다.
“이곳이 산적 소굴이란 말입니까?”
“산적 소굴이라기보다는 분타라고 하는 게 옳을 것이오. 아마 이곳에 묵으러 온 자들을 죽이고 뺏은 은자와 패물을 옥화산에 있는 본타에 상납했겠지.”
관군들과 대화하는 제갈정현의 모습은 얼핏 당당해 보이기까지 했다.
누가 보면 그가 이곳에 있는 모두를 처리한 것처럼 보일 정도로.
“대협께서 이들과 모두 상대하신 겁니까?”
“아니오. 나는 한 손만 거들었을 뿐. 저기 있는 두 대협께서 다 하신 일이오.”
관군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는 제갈정현이 가리키는 곳에 있는 남궁환과 하현을 보더니 두 눈이 커졌다.
“이 아이들은……?”
“어허, 아이들이라니. 이분들은 남궁세가의 대협들이오. 조금 전에 말하지 않았소? 이 두 분께서 다 하신 일이라고.”
“남궁세가!”
그는 남궁세가라는 말에 놀랐는지 남궁환과 하현을 돌아보고는 인사했고
그리곤 객잔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능숙하게 시신을 처리했다.
짧은 시간에 정리를 마친 그들은 전투의 흔적에서 남궁환이 대부분 적을 처리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그들이 돌아갈 때는 제갈정현이 아닌 남궁환에게 다가와 포권을 하며 인사했다.
“최근 이 근처에서 계속 행랑객이 사라져 골머리를 앓고 있던 참이오. 그런데 이런 곳에 녹림의 주구들이 터를 잡고 있었다니….”
“시기가 좋았습니다. 우연일 뿐입니다.”
“어쨌든 감사하오. 객잔에서 나온 패물과 은자들은….”
남궁환은 욕심 하나 없는 맑은 눈으로 대답했다.
“부디 피해자들의 유족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힘 써주시기 바랍니다.”
“전부 다 말이오?”
“그렇습니다.”
“그, 그래도 되겠소?”
남궁환은 거침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관군은 몹시도 놀라는 얼굴이었다.
보통 이렇게 노획한 전리품들의 절반은 무인들이 챙겨가기 마련이다.
그런데 남궁환은 아까운 기색 하나 없이 하나도 챙기지 않겠다고 말한 것이다.
“내 이번 일은 꼭 상부에 잘 전달하도록 하겠소. 남궁세가의 남궁환. 개인적으로도 대협의 존함을 꼭 기억하겠소이다.”
“아닙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
관군은 끝까지 남궁환에게 감탄하며 돌아갔다.
그들은 다시 마차를 끌고 나왔다.
아무리 처리가 끝났다지만, 조금 전까지 칼을 휘두르고 싸웠던 곳에서 잘 수 있을 만큼 그들은 무신경하지 않았다.
조금 더 중경에 가까워지자, 객잔이 하나 나왔다.
“이쪽으로 드시지요!”
사람이 북적거리지는 않았지만, 늦은 밤이었음에도 마차를 인도해주는 직원도 있었고 꽤 많은 사람이 술을 홀짝이고 있는 것이 이번에야말로 정상적인 객잔임이 틀림없었다.
그들은 숙소를 잡아두고는 아까 하지 못한 식사를 하러 식당에 둘러앉았다.
“술을 한잔해도 되겠지?”
“그럼요.”
제갈정현은 점소이를 불러 죽엽청을 한 병 시키더니, 하현과 남궁환이 식사를 시작할 무렵 금세 한 병을 다 비워버렸다.
한 병을 더 시켜 마시던 그는 취기가 도는지 남궁환과 하현을 바라보았다.
“자네들은…. 무척이나 강하군?”
“그렇게 이야기를 들을 정도는 아닙니다.”
“아니야, 아니야. 나 같은 건 상대도 되지 않겠더군.”
그는 자조적으로 말했다.
“아까 내가 왜 중경에 들어서는 것이 무서웠는지 말해주겠다고 했지?”
“네. 그랬죠.”
그는 술병째로 술을 쭉 들이켜고는 말했다.
“나는 중경에 죽으러 가는 것이네.”
“뭐라고요?”
“죽으러 간다니요?”
남궁환과 하현은 그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아 되물었다.
“후후. 조금 전에 그놈들이 녹림 어디에서 왔다고 했는지 기억하는가?”
“옥화산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래. 옥화산. 그곳이 내가 가려는 곳이라네.”
“어떤 연유입니까?”
그가 씁쓸한 얼굴로 웃었다.
“공을 세우기 위해서지.”
“공이요?”
“나는 오 남매 중 막내네. 위로 형님이 둘, 누님이 둘이지.”
그는 점소이를 불러 술을 한 병 더 시킨 후에 말을 이었다.
“현재 우리 제갈세가의 가주 님이시자, 내 조부님은 제일 큰 형님 말고는 그 누구에게도 관심이 없으셨네. 무공이든, 영약이든, 모든 것은 큰 형의 차지였지.”
하현은 새삼 그의 할아버지인 남궁무룡을 떠올렸다.
할아버지는 모든 형제를 똑같이 대해 주신다.
하현 역시 제갈정현처럼 막내건만, 차별을 당한다고 느끼지는 못했다.
그가 생각하는 사이, 제갈정현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그런데 둘째 형도 어느 순간부터는 조부님에게 관심을 받기 시작했지. 그게 언제부터인지 아는가?”
“언제부터입니까?”
“바로 공을 세우고 나서부터네. 오 년 전쯤 안륙(安陸) 근처에 있었던 배화문 소동을 혹시 아는가?”
하현은 모르는 이야기였기에 남궁환을 바라보았고, 남궁환은 기억나는 게 있는지 입을 열었다.
“민간인을 납치하여 생강시의 재료로 쓰려던 사파문의 사건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그 사파문의 이름이 배화문이지.”
“제 기억으로는 배화문의 천인공노할 짓을 세상에 밝히게 된 것이 어떤 무인이 납치하는 배화문도를 끝까지 쫓아가 그 본거지를 밝혀냈기 때문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제갈정현이 박수를 짝-! 하고 치며 말했다.
“그래. 그 무인이 바로 내 둘째 형인 제갈정규일세.”
“그렇군요. 제갈 형께서도 조부님의 관심을 받기 위하여, 옥화산 녹림도의 위치를 수색하려 한 것입니까?”
“하하. 그게 다가 아니네.”
“그러면요?”
“혈혈단신으로 쳐들어가려 했지. 그 정도는 되어야 조부님의 눈에 들 수 있을 테니 말이야.”
그는 씁쓸하게 웃으며 술을 들이켰다.
하현은 이제야 모든 것이 이해가 갔다.
그가 왜 중경으로 넘어가고 싶지 않았는지, 왜 빈 마차를 타고 다니는지.
“그래서 자네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네.”
제갈정현이 절절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런데 하현은 부탁이 무엇인지 듣지도 않고,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무, 무슨 부탁인지는 안 들어봐도 되겠나?”
“네. 보나 마나, 옥화산 녹림채에 함께 가달라고 하는 것일 테니까요.”
“끄응…….”
그는 앓는 소리를 냈다.
정곡을 찔렸기 때문이다.
“그래. 어쩔 수 없지…….”
그는 고개를 푹 숙였다가 다시 들었다.
그러자 침울한 얼굴은 어디 갔는지 다시 쾌활한 얼굴로 돌아온 채였다.
“하하. 그래. 자네들은 갈 길이 바쁘지 않나? 내 생에 마지막 친우가 될지도 모르는 사람이 자네들이라 좋았네.”
그런데 하현은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다른 소리를 했다.
“저희와 함께 사천으로 가시는 건 어떻습니까?”
“사천에?”
“지금은 갈 길이 바쁘지만, 돌아오는 길에는 들르면 어떻겠습니까?”
“……!”
하현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을 이었다.
“산적들이 조직적으로 양민들에게 피해를 끼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그냥 넘어가는 것도 정파 무인이 할 일이 아니니까요.”
제갈정현이 놀란 눈으로 하현을 쳐다보았다.
그는 하현과 눈을 마주치는 순간, 협객(俠客)이라는 단어가 머리를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