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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세가 천재 외손자-116화 (116/304)

116화

하현은 곧바로 생존자를 찾으러 가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그러지 못했다.

무림에는 무림의 법도가 있는 법.

취월걸개는 먼저 당가주에게 하현과 남궁환을 데리고 갔다.

“어르신. 이 아이가 그 아이입니까?”

“그렇다네.”

“정말로 영령의 눈을 많이 닮았군요. 사천당가의 가주 당규호라 하네.”

현재의 당가주는 취월걸개보다 한 배분 아래의 무인이었다.

이제 예순이 넘은 나이이건만, 훤칠한 키에 호리호리한 체형과 짙은 눈썹 덕에 보다 젊어 보이였다.

그는 따로 별호를 소개하지 않았다.

하지만 하현은 언젠가 할아버지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당가에는 특이한 가풍이 하나 있다. 바로 독왕(毒王)이라는 별호와 함께 가주의 자리를 물려받는 것이지.’

당대의 가주가 당대의 독왕이라는 것을 기억해낸 하현은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독왕 어르신. 처음 뵙겠습니다. 남궁하현입니다.”

“호오.”

당규호가 하현을 보고 작게 감탄했다.

아직 열넷밖에 되지 않았다고 하여 예법에 능숙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거늘, 하현의 예법은 완벽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남궁환입니다.”

“하하. 나를 만났던 것을 기억하는 게냐?”

“네. 십여 년 전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래. 그때 내가 일이 있어 세가를 들렀었지.”

당규호는 호인(好人)이었다.

그는 새로 만난 두 어린 무인이 반가웠는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하하하. 어르신. 남궁세가의 후기지수를 소개해 주시어 감사합니다.”

“맘에 좀 드냐?”

“제가 맘에 들고 말 것은 없지만, 둘 다 나이답지 않은 깊은 눈을 가졌군요. 기운도 예사 기운이 아니고.”

당규호가 하현을 보며 눈을 찡긋했다.

마치 하현이 품고 있는 거대한 기운을 눈치챘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러면 인사 다 했으면 빨리 건너가는 게 어떻겠냐.”

“그렇지 않아도 저도 궁금했습니다.”

성질 급한 취월걸개가 당규호를 채근하자, 그가 취월걸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하현과 남궁환에게 손짓했다.

“이쪽으로 오너라. 내가 함께 가야 들어갈 수 있으니.”

“알겠습니다.”

당규호는 한쪽 벽으로 뚜벅뚜벅 걸어가 선반에 얹어져 있는 호리병 하나를 손바닥으로 눌렀다.

철컥-

쿠구구구--

그러나 유리병이 아래로 꺼지는가 싶더니, 벽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것은…. 기관진식인가요?”

“혹시 모르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함이라네. 우리 당가는 기관진식에도 밝지. 왜. 관심 있는가?”

“네. 진심으로 신기합니다. 어떤 원리로 문이 저절로 열리는 것인지 궁금하네요.”

하현이 똘망거리는 눈으로 벽을 훑어보자 당규호가 껄껄 웃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가르쳐주도록 하겠네.”

“감사합니다.”

그 모습을 보며 취월걸개가 속으로 웃음을 삭였다.

‘하현이 녀석이 얼마나 집요한데, 가르쳐준다는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다. 규호야.’

하현에게 시달리는 당규호의 얼굴이 떠오르는 듯했다.

옆 방으로 넘어가니 방 안에는 꽤 많은 사람이 있었다.

그중에 대부분은 이곳을 지키는 당가의 무사들이었고, 또 일부는 가운데에 누워있는 누군가를 치료하고 있는 의원들이었다.

하현은 누워있는 사람을 가리켰다.

“저 사람인가요?”

“그래. 가서 보겠느냐?”

하현은 당규호에게 고개를 끄덕여 준 후에 그에게 다가갔다.

‘도대체 누구길래.’

가슴이 세차게 요동쳤다.

사 년 전.

열 살 아이였지만, 너무나도 뛰어난 오성은 어린아이의 천진함마저 잊게 했다.

그때의 기억을 잊으면 조금이라도 마음이 편했겠건만, 하늘이 내려준 재능이라며 칭송받는 그의 엄청난 기억력은 신가장에 대한 것은 하나도 잊을 수 없게 만들었다.

당연히 장원에 살았던 하인들 하나, 하나의 얼굴까지 모두 기억이 난다.

“후…….”

땅만 보며 누워있는 자의 앞까지 도달했을 때, 하현은 고개를 들 수 없었다.

혹여나 모르는 자라면 그 실망감은 감출 수도 없으리라.

그런데 만약 아는 사람이라면…. 그것도 하현과 가까웠던 사람이라면…….

“하현아.”

그때 남궁환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제자리에서 멈췄다.

다행히 남궁환은 지금 하현의 마음을 알아챘는지 나직이 한 마디를 내뱉었다.

“변하는 건 없어. 넌 남궁하현이야.”

순간 하현은 뱃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올라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것을 억지로 다시 뱃속으로 밀어 넣자, 이제야 눈앞이 조금 개인 느낌이 들었다.

“고마워. 형.”

나직이 감사의 말을 내뱉은 뒤, 하현은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아……!”

얼굴을 확인하곤 말을 잇지 못했다.

취월걸개가 답답했는지 하현에게 물었다.

“아는 사람이냐?”

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은 조금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누구인 것이야? 신씨 일가 사람이야?”

이번엔 고개를 저었다.

신씨 일가가 아닌데 하현이 아는 얼굴이라니.

취월걸개로서는 그가 누구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아버지께서는 아주 인자하신 분이었습니다.”

하현이 조금은 음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집에서 오래 일하거나, 마음이 맞는 사람들에게는 신씨 성을 내리고, 다 같이 가족으로 살아가자고 하셨던 분이었죠.”

그가 뜬금없는 소리를 하고 있건만,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잠자코 하현의 이야기를 들었다.

심지어는 의원들이나 호위를 서고 있는 당가의 무사들도 하현의 이야기를 넋 놓고 듣고 있었다.

하현의 존재감은 어느새 이렇게 커져 있었다.

“하지만, 단 한 사람만은 그런 아버지의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그게 누군가?”

“총관입니다. 신가장의 재물을 관리하는 자로서, 가족이 되면 사사로운 정에 이끌릴 수 있다며 자신은 그저 총관으로 남겠다고 했지요.”

“그러면 그 사람이……?”

하현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맞습니다. 고초를 겪었는지 그때보다 얼굴이 많이 상했지만, 신가장의 총관이 맞습니다.”

뚝.

기어코 하현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사 년 전 그날.

그때 이후로 절대 울지 않겠노라 다짐했던 하현이건만, 잠자듯 쓰러져 있는 총관의 얼굴을 보니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저씨. 일어나 보세요.”

하현이 총관에게 나직이 말했다.

하지만 정신을 잃은 그가 하현의 말을 들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하현아…….”

그 모습을 보던 취월걸개가 나직이 하현을 불렀다.

그리곤 하현에게 걸어가 가볍게 그를 안아주었다.

이제는 제법 덩치가 커져 품 안에 들이기도 어색했다.

아주 잠시 그러고 있던 취월걸개가 머쓱한지 주위를 둘러보며 헛기침을 내뱉으며 안고 있던 팔을 풀었다.

“흠흠. 네가 그런다고 정신을 잃은 사람이 회복되지는 않지 않느냐. 치료는 여기 의원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나가 있자꾸나.”

“네. 스승님.”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당규호는 하마터면 가주로서의 체통을 잃어버리고 입을 쩍 벌릴 뻔했다.

‘취월걸개 어르신에게 저런 면모가 있었단 말인가?’

그에게 취월걸개의 따뜻한 면모는 굉장히 낯설었기 때문이다.

굳이 비유하자면 맹수가 풀을 뜯어 먹고 있는 것처럼.

“현아. 저 총관이라는 자는 무공을 익혔느냐?”

“아니요. 제 기억으로는 무공을 전혀 몰랐을 거예요.”

“내가 대강 몸을 더듬어 보았을 때도 무공을 익힌 흔적이 없었기에 물어본 것이다.”

남궁환도 같은 의문이 들었는지 입을 열었다.

“무공을 모르는데 마교로부터 어떻게 탈출했다는 걸까요?”

“흠…. 그것도 결국은 저자가 일어나야만 알 수 있겠구나.”

모두가 총관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볼 때, 당규호가 의원 중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자에게 말했다.

“지금 저자의 상태는 어떤가?”

“두개골이 골절될 정도로 머리 쪽의 외상이 심했지만, 응급처치는 모두 끝났습니다. 이제는 기력을 돋우어주며 일어나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가만히 그의 말을 듣고 있던 하현이 공손하게 의원에게 물었다.

“머리의 외상이라니…. 심각한 상황입니까?”

“저희가 확인한 바로는 작은 손상은 있을 것으로 보이나, 심각한 수준은 아닙니다.”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하현이 인사하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당규호는 자신도 모르게 하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는 아차 싶어 손을 뗐다.

“그럼 고생해주게. 혹여 무슨 일이 있거나, 깨어나면 곧장 나에게 오게나.”

“알겠습니다. 가주님.”

쿠구구-

돌로 된 문이 닫히고, 그들은 전각으로 다시 돌아왔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 말도 없었다.

정말로 하현과 연관된 사람이라는 것에 각기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규호가 어색하게 소식이 있으면 바로 사람을 보내겠다는 말을 하고 나서야 그들은 남궁휘연이 있던 곳으로 돌아왔다.

“현아. 돌아왔구나.”

취월걸개가 점혈을 풀어주지 않아 계속해서 누워만 있던 휘연이 반갑게 그들을 맞이했다.

하현은 남궁휘연에게도 그가 원래 신가장의 총관이라고 이야기해주었다.

“다행이다. 내 몸이 이렇게 된 보람이 있네.”

휘연은 이 와중에도 쾌활하게 말했다.

“쯧쯧. 네 몸이나 챙겨라. 어떻게 된 게 너는 나이를 먹어도 하현이보다 더 애 같으냐.”

“그게 제 매력이지 않습니까? 어르신?”

“매력은 개뿔!”

복잡한 와중에도 하현은 티격태격하는 둘 덕분에 웃을 수 있었다.

잠시 후에 취월걸개는 다른 바쁜 일이 있다며 자리를 비웠다.

(방을 나서는 동안에도 하현과 남궁환에게 휘연의 점혈을 절대 풀어주지 말라며 으름장을 놓고 나가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하현은 남궁환, 휘연과 함께 여태 있었던 일을 한참 떠들었다.

한참을 떠들고 나자 남궁휘연은 피로했는지 쉬고 싶다며 잠에 들었고, 남궁환과 하현은 그의 잠을 방해하지 않으려 전각 밖으로 나섰다.

전각을 나오자 그들은 갈 곳이 없었다.

아니, 사실 가고자 하면 어디든 갈 수 있었겠으나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전각 앞에 놓여 있는 바위 위에 걸터앉았다.

남궁환이 멍한 얼굴의 하현을 보고는 입을 열었다.

“현아.”

“응?”

“괜찮아?”

하현이 ‘괜찮다’라고 대답하려다가 멈칫했다.

그리곤 대답 대신 방긋 웃어주었다.

“그래. 나 같아도 안 괜찮았을 거야.”

남궁환이 한숨을 푹 쉬었다.

그 뒤로 어색한 침묵이 잠깐 흘렀다.

그리고 그 침묵을 깬 것은 하현이었다.

“사실은 괜찮아.”

“그래?”

남궁환은 하현이 걱정하는 자신을 위해 괜찮다고 말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현은 진심이었다.

“아까 형이 한 말 덕분에 중심을 잡을 수 있었어.”

“무슨 말?”

“나는 남궁하현이라는 거.”

하현은 남궁하현이라는 이름에서 가장 큰 것을 깨달았다.

그를 생각해주고, 걱정해주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는 것을.

남궁이라는 이름 아래 모인 모든 사람은 하현을 좋아했다.

그리고 하현도 그들 모두를 좋아한다.

그것만으로도 하현은 신가장의 총관을 만났음에도 큰 동요를 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표정이 안 좋아?”

남궁환이 걱정스레 물었다.

하현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아직도 버리질 못했다는 걸 깨달았거든.”

“뭐를 못 버려?”

“복수심을.”

하현이 초연하게 웃었다.

할아버지도, 소림에서 만난 월룡도 그에게 복수심은 부질없다는 것을 강조했다.

하지만 하현은 총관을 보는 순간,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두었던 불길이 번지는 것을 느꼈다.

그 덕에 하현이 이토록 괴로워한 것이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남궁환이 골똘히 무언가를 생각하며 하현의 얼굴을 보았다.

그러다 입을 열었다.

“현아. 그런데 왜 복수심을 꼭 삭여야 해?”

“뭐라고?”

“생각해보면 그래. 왜 꼭 복수심을 없애야만 한다고 하는 걸까? 복수의 대상이 명확하게 악한 자들이기만 하면 우리가 하는 협행(俠行)이랑 다를 게 뭐지?”

하현은 입을 벌린 채로 말을 열지 못했다.

남궁환의 말에서 큰 충격을 받은 것이다.

“물론, 복수심에 눈이 돌아가서 물불 가리지 않으면 문제가 있겠지. 그런데 내가 지금까지 봐온 현이 너는 더 냉철하게 행동하면 했지, 이성을 잃거나 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지금 남궁환이 하는 말을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머릿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마교는 정의로운가?’

소림의 방장 주산선사의 목소리였다.

하현은 남궁환이 순간 그와 겹쳐 보인다는 착각마저 일었다.

“난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았으면 좋겠어. 그게 복수든, 수련이든…. 다만 복수를 택할 거라면 대상이 중요한데. 마교 놈들은 나쁜 놈들이잖아? 나쁜 놈들한테 복수하는 게 뭐가 나빠.”

하현은 막힌 속이 뻥 뚫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남궁환과 함께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러면 할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데…….”

“넌 정말 똑똑한데, 가끔 답답할 때가 있다니까? 조부님이 네가 분노에 사로잡히지 않으시길 바라셔서 그러신 걸 거야. 이번에 마교의 흔적을 찾게 되었을 때, 네 태도를 보고 또 결정하시지 않을까?”

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아는 할아버지는 충분히 합리적이신 분이니까.

남궁환이 하현에게 다가와 등을 토닥토닥 두들겨 주었다.

“누가 보면 형이 정예대원인 줄 알겠어.”

“지금은 청룡각 대원이 아니라, 네 형이니까 괜찮아.”

남궁환의 너스레에 하현이 웃음을 되찾았을 무렵, 이 전각이 있는 아래에서부터 갑자기 돌풍이 일었다.

“윽! 이, 이게 무슨 바람이야?”

남궁환과 하현이 흩날리는 흙먼지에 제대로 눈을 뜨지 못할 때, 하현이 소리쳤다.

“이 느낌은…. 사부님이신데?”

하현의 말대로 그들의 눈앞에는 취월걸개가 순간이동이라도 한 듯 갑자기 나타났다.

그가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빠르게 온 덕에 돌풍이 뒤따라오듯 불어온 것이다.

취월걸개는 어찌나 급한지, 아직 흙먼지가 채 가라앉지 않았음에도 입을 열었다.

“가자. 빨리.”

“어디를 간다는 말입니까?”

“아까 갔던 곳!”

하현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그렇다면 설마……?”

“그래. 그가 깨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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