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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세가 천재 외손자-119화 (119/304)

119화

‘기척을 알아채지 못했어.’

하현은 그들을 지켜보며 이전까지보다 더욱 경계심을 끌어올렸다.

그의 기감은 보통의 무인들보다 뛰어나다.

심지어는 무림의 최고수 중의 하나라는 취월걸개보다도.

그런 하현마저 그들이 있었는지 깨닫지 못했을 정도였기에.

이윽고 그들이 가까이 왔을 때, 하현은 그들의 행색을 보았다.

그들은 모두 네 명.

넷은 모두 같은 모양의 검을 들고, 똑같은 회색 의복을 입고 있었다.

검신에는 음각으로 살(殺)자가 새겨져 있었다.

“귀찮은 늙은이 때문에 모르는 척하려 했더니, 알아서 자리를 피해주는군?”

“그래도 아무리 생각해도 귀찮은 건 매한가지란 말이야.”

저들이 말하는 늙은이가 취월걸개라는 것은 한 번에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들은 눈앞에 셋이 보이지 않는다는 듯 자기네들끼리 티격태격했다.

“그러니까 내 말대로 염강표국에서 도망친 놈을 확실히 죽였어야 했어.”

“무공도 모르는 것이 객잔을 무너뜨렸는데, 살아남을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그 덕에 애꿎은 사람들만 죽었지.”

사람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하며 킬킬 웃는 그들이었다.

“하여튼 일살(一殺). 너 때문에 우리 사천사살이 무공을 모르는 놈도 쫓지 못했다고 소문이 퍼지면 가만히 안 둘 줄 알아라.”

“사살(四殺) 주제에 첫째한테 으름장을 놓는 게냐?”

“이게 서열순이 아니라는 것은 네가 제일 잘 알 텐데.”

그대로 두면 끝없이 떠들고 있을 것 같은 네 명을 보고 당규호가 말했다.

“사천사살(四川四殺)?”

“당가주. 우리 얼굴을 잊지는 않았겠지?”

“네놈들은 죽었을 텐데?”

“다 죽어가는 우리를 교(敎)에서 살려주었지. 오늘은 네가 죽을 차례다.”

당규호의 언성이 높아졌다.

“마교의 주구가 된 것이냐?!”

“일전에도 사파라는 이유로, 살수라고 억울하게 당했다. 하지만 마교는 살수인 우리를 인정해 주었다.”

당규호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억울? 의뢰를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수십, 수백 명의 사람을 죽인 너희 입에서 억울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냐?”

사천사살.

약 십오 년 전, 사천에서 악명을 떨치던 네 명의 살수였다.

무자비하게 사람을 죽였기에 결국 아미파와 당가에서 연합하여 그들을 추살하는 데 성공했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것도 마교라는 이름을 등에 업고서.

하현은 이들을 알 리 만무하다.

이들이 어떤 이력을 가졌는지도 알 수 없고.

하지만 단 한 가지. 이들이 생사결을 벌일 목적으로 이곳에 왔다는 그것만은 확실하다.

“당가주님. 그러면 이들이 살수란 말입니까?”

“그렇다. 비겁하게 숨어서 상대의 목숨을 노리는 살수들이다.”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다행?”

“꼬맹이가 실성했나?”

하현은 씨익 웃었다.

지금의 분위기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웃음이었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당황했는데, 좋은 경험을 했습니다.”

“꼬맹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게냐.”

“여러분들의 기척을 감지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제가 어찌해볼 수 없는 고수들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군요.

하현의 눈에 이채가 번뜩였다.

“기척을 지우는 무공을 익힌 겁니까?”

“이게 무슨 헛소리를……?!”

채앵!

하현이 허리춤에 꽂혀 있는 적룡검을 뽑아내며 말했다.

“그런데 한 가지 착각하신 게 아닙니까?”

“착각?”

“살수라면 암살로 승부를 봐야 했던 것 아닙니까? 정공을 택하시다니, 자신을 무인이라 착각하신 듯해서요.”

하현의 표정은 굉장히 여유로웠다.

“뭐, 뭐라고? 이런 천둥벌거숭이가……!”

사천사살 중 일살이라 불린 사내가 분노했다.

그럴 만도 했다.

그는 비록 살수라고는 하지만, 무림에서 칼밥을 먹은 지도 이십 년을 훌쩍 넘긴 자들이었다.

그런데 까마득하게 어려 보이는 하현의 입에서 저런 소리가 나오다니 화가 날 수밖에.

“어차피 죽이려고 했지만, 너는 절대 편하게 보내주지 않겠다.”

그가 검을 말아쥐고는 나머지 사천삼살에게 말했다.

“저 꼬맹이 둘은 내가 맡는다. 너희 셋이면 당가주를 잡을 수 있겠지?”

“큭큭. 그래. 저자의 주특기는 암기술이 아닌 독공. 허나 이렇게 급하게 나오면서 독을 잘 챙겨왔을 리 만무하지. 꼬맹이들을 얼른 처리하고 합류해라.”

“오랜만에 재미 좀 보겠구나. 흐흐.”

마교로부터 그들이 받은 임무는 간단했다.

염강표국을 추적해 온 자들을 죽여라.

그런데 주변에서 전각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고, 잔해에 깔린 것이 누구인지 알아보려 접근하다가 취월걸개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래서 쥐 죽은 듯 기척을 지우고 이들이 떠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취월걸개가 돌연 자리를 비운 것이다.

‘그 노인네가 염강표국의 본대를 쫓아갔지만, 내 알 바는 아니지.’

그것은 그의 임무가 아니었으니까.

자신들만 죽지 않으면, 자신들에게 피해만 가지 않으면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

이기심.

이것이 사천사살의 본성이었다.

타앗-

싸움은 사천사살이 하현 일행에게 달려드는 것으로 소리 없이 시작되었다.

쉬익…. 카악!

일살이 가볍게 횡으로 휘두른 검이 남궁환의 검에 멈춰졌다.

검이 가로막힐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던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꼬맹이가 제법이구나.”

“노인께서도 제법 힘을 쓰시는군요.”

“하! 이런 건방진……!”

남궁환의 도발에 일살이 코웃음 치며 검에 기운을 불어넣었다.

그리곤 남궁환에게 곧장 검을 찔러 넣었다.

스슥-

어떠한 준비 자세도, 예고도 없는 쾌검이었다.

누군가 이 광경을 보았다면 그의 몸에서 검이 튀어나왔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정도로 은밀하기까지 한 검.

‘이런......!’

남궁환이 그 검에 반응했을 때 검은 이미 지척에 다다랐다.

피하려고 몸을 움직였지만 확연히 느린 반응이었다.

타앙!

그때 검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느새 들어온 하현의 적룡검이 일살의 검을 튕겨낸 것이다.

그런데 하현의 표정이 오묘했다.

‘조금 전의 그 검법은…?’

하현이 일살의 검을 쉽게 막아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수법이 굉장히 익숙했기 때문이다.

그 쾌검은 하현이 즐겨 사용하는 검의 끝과 상대의 신체에서 가장 가까운 경로를 찾아 찔러 넣는 수법이었다.

“이 애송이도 제법이구나!”

“조금 전 그 검법은 어디서 익힌 거죠? 사문이 따로 있나요?”

“내 사문? 황천길이 심심하지 않도록 네가 죽을 때 가르쳐주마!”

그는 호기롭게 외치며 다시금 달려들었지만, 조금 전보다는 훨씬 조심스러운 모습이었다.

남궁환과 하현의 검이 생각보다 더욱 묵직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하현의 시선이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카카캉-!

일살은 계속 검을 휘둘렀지만, 그가 뜻하는 바를 이루지는 못했다.

방심을 버리고 진심으로 휘두르는 검이건만, 휘두르는 족족 하현과 남궁환의 검에 가로막혔다.

“어떻게 그 나이에 그런 무공을……?”

그는 당황하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는 느끼고 만 것이다.

오히려 하현이 지금 자신을 봐주고 있다는 것을.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그때 하현이 말했다.

“말해줄 생각이 없나 보군요. 보여줄 것은 이게 다인가요?”

돌연 하현의 눈에서 빛이 꺼진 듯한 느낌이었다.

흥미가 가라앉은 것이다.

“이익!”

일살은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는지, 대답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입술을 콱 깨물었다.

어찌나 세게 물었는지, 터진 입술에서 피가 비칠 정도였다.

“죽어라!”

그는 뒤는 생각하지 않고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내공을 끌어모아 다리와 팔에 집중했다.

쒜에엑!

무섭도록 빠른 쾌검이었다.

그는 이번 수에 결판을 짓겠다는 듯 필사적으로 검을 내질렀다.

그를 본 남궁환 역시 심공을 극으로 운용했다.

그 역시 하현과 같은 창궁대연심공을 익혔다.

수년간 열심히 수련해온 결과, 그 역시 어디에서 빠지지 않는 내공을 가지게 되었고

콰악-! 그그그극

남궁환은 그 빠른 검을 막아낸 것도 모자라 일살과의 힘겨루기에서도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생각지도 못한 힘에 일살은 뒤로 몸을 빼내려 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힘겨루기 중인 검을 뒤로 빼내면 남궁환의 검이 그대로 자신에게 꽂힐 것이기 때문에.

스윽-!

그 잠깐의 찰나를 놓칠 하현이 아니었다.

하현은 일살에게 검을 찔러넣었다.

조금 전 일살이 펼쳤던 최단거리를 잡아가는 검법이었다.

“크윽!”

검에 찔리고 싶지 않았던 일살이 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검을 놓고 뒤로 굴러서 몸을 빼내는 것만 할 수밖에 없었다.

허나 그것도 쉽지 않았다.

서걱!

그가 몸을 빼는 와중에 하현의 검이 그의 팔을 훑고 지나갔다.

길게 자상이 난 그의 팔에서 피가 콸콸 쏟아졌다.

“항복하고 모든 정보를 넘기십시오. 혹시 모르지 않나요? 목숨은 부지할지도.”

남궁환이 차분히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일살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애송이들이 나를 뭐로 보고!”

일살은 돌연 허리춤에서 무언가를 꺼내는가 싶더니, 하현과 남궁환을 향해 던졌다.

“암기다!”

남궁환이 소리쳤다.

하현도 그가 공중에 던진 것을 똑똑히 보았다.

거무튀튀한 구슬 모양의 암기였다.

스스슥……!

남궁환이 구슬을 검으로 쳐내려 할 때, 하현은 일살이 앞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닌, 뒤로 황급히 빠지는 것을 보았다.

하현은 순간 판단하고 소리쳤다.

“형! 건드리면 안 돼!”

하현의 다급한 목소리를 들은 남궁환이 가까스로 검의 경로를 빗겨내어 구슬을 하나도 건드리지 않았다.

구슬이 그들을 지나쳐 뒤로 날아갈 때, 하현은 남궁환을 이끌고 앞으로 냅다 뛰었다.

콰콰쾅-!

그 순간, 땅에 닿은 암기가 폭발하며 굉음을 만들었다.

하현과 남궁환은 폭발에서 벗어나려 땅을 몇 바퀴 구르기는 했지만, 다행히 다친 곳은 없었다.

“이, 이럴 수가…….”

일살이 던진 것은 폭환(爆丸).

구슬 안에 충격을 가하면 터지는 폭약을 넣어 둔 암기였다.

이 폭환은 그의 구명줄이나 다름없었다.

무인 열 중 아홉은 암기가 날아오면 무의식적으로 검으로 베어내려 한다.

검으로 폭환을 가를 때 일어나는 폭발로 치명상을 입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하현은 그것을 어떻게 알아챘는지 피하는 선택을 했다.

“위험했군요. 더 남은 수가 있습니까?”

하현이 일살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이제 그의 손엔 무기도 들려 있지 않다.

만약 검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하현의 검에 당한 상처가 근육을 찢었는지 손아귀에 힘도 잘 들어가지 않았다.

폭환을 몇 개 더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이렇게 가까운데 그것을 쓸 수는 없다.

암기란 말 그대로 모를 때에나 쓸모가 있는 것이지, 상대가 알고 있으면 쓸모가 없는 경우가 많다.

그는 고개를 떨구었다.

“모든 정보를 주겠소. 목숨만은 살려주시오.”

그의 말은 어느새 경어로 바뀌어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남궁환이 냉정하게 대답했다.

“대답이 너무 늦었습니다. 이젠 당신을 믿을 수 없으니.”

파앗- 툭.

남궁환의 검이 가볍게 그의 목을 쓸었고, 그의 목이 땅에 떨어졌다.

한때 사천을 공포에 몰아넣었다던 사천사살 중 일살의 최후치고는 허망했다.

고개를 들어 당가주와 나머지 사천삼살이 싸우던 쪽을 바라보니, 그들은 모두 싸우는 것도 잊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폭환이 터질 때의 폭음에 모두 정신을 뺏겨버린 것이다.

게다가 뒤이은 일살의 죽음까지.

사천삼살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정보를 캐내려면 저 셋 중의 하나를 살리는 것으로 해야겠다.”

“그래. 형.”

남궁환은 숨도 돌리지 않고, 그들에게 뛰어갔다.

하현도 바로 가려다 잠시 멈칫하고는 일살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가죽 주머니를 풀어 보았다.

안에는 대략 다섯 개 정도의 사용하지 않은 폭환이 들어 있었다.

그 주머니를 챙기며 하현은 일살을 한 번 바라보았다.

후환을 남길 바에는 깔끔하게 처리하는 게 낫다.

그 때문에 별다른 감정은 들지 않았다.

하현은 곧바로 남궁환의 뒤를 따라 싸움에 합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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