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진선표국은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었다.
“물, 물을 더 가져와라!”
“불길이 번지게 하면 안 된다!”
표국 전각이 불타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잘 타라고 기름을 먹여 놓았는지 불길은 잡힐 생각을 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 주변의 민가에까지 번지려 하고 있었다.
“이봐, 무슨 일이야?”
“보면 모르시오? 불이오, 불! 저 불이 번지면 다 끝장이란 말이오!”
취월걸개가 눈에 보이는 아무나 붙잡고 물었지만, 그들은 허둥지둥 제 할 말만 쏟아내고서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주변을 둘러보니, 무공을 제대로 배운 자는 없어 보였다.
간간이 허리춤에 병기를 메고 다니는 자들도 보였지만, 그마저도 삼류 수준으로 보였다.
당규호가 다급하게 말했다.
“어르신. 저희도 물을 길어 오겠습니다. 무공을 모르는 자들보다는 훨씬 빠르지 않겠습니까?”
“아니, 지금 저건 물로 해결할 수 있을 불이 아니야.”
취월걸개가 불길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곤 하현과 잠시 눈을 마주쳤다.
마치 지금 말하는 것을 잘 기억해뒀다가 나중에 써먹으라는 것 같았다.
“불이 나면 우선 냄새를 맡아봐라. 자연적으로 나고 생긴 불이 집을 태우면 나무 태우는 향만 난다. 하지만 누군가 일부러 기름을 먹여 지른 불은 이렇게.”
취월걸개는 코를 킁킁하고는 말을 이었다.
“등불 탈 때 나는 냄새가 난다. 이것이 기름이 타는 냄새다.”
그의 말대로 기름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이런 불에는 함부로 물을 끼얹으면 안 된다. 기름에 붙은 불이 물을 타고 흘러갈 수 있거든.”
하현이 말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해요? 불이 꺼질 때까지 기다릴 수도 없고요. 혹여나 옆 민가에 불이 번지게 되면 연쇄적으로 큰불이 될 수도 있습니다.”
“불은 태울 것이 있어야 타고 넘어갈 수 있다. 근본적으로 태울 것을 없애버리면 불은 번지지 않지.”
하현이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 하고 재차 물어보려 할 때 취월걸개가 말했다.
“백 번 설명해야, 한 번 보는 게 낫겠지. 따라와라. 너희들도!”
취월걸개는 말을 하고서 곧장 가장 높은 전각을 찾더니 그 위로 올라갔다.
입구를 통해서 원래 가야 하는 길로 올라간 것이 아닌, 담을 타고, 지붕을 타서 가장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당규호는 물론이고, 하현과 남궁환 역시 신법이 능숙했기에 그의 뒤를 무리 없이 따를 수 있었다.
“어디 보자.”
가장 높은 곳에서 불이 난 표국을 주위를 둘러보던 취월걸개가 한 곳을 가리켰다.
그곳은 진선표국과 민가가 가장 가까이에 붙어 있는 곳이었다.
“저쪽으로 가야겠다.”
“그래서요?”
“제일 가까운 민가를 부술 것이다.”
“민가를 부순다니…?”
언뜻 듣기에는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이었다.
하지만 하현은 그 말을 듣는 순간 퍼뜩 이해해버렸다.
“아…! 그렇군요. 민가를 미리 무너뜨리면, 거기서 불이 타고 넘어갈 집이 없으니, 자연스럽게 불길이 멈추겠군요?”
“그래. 진선표국의 불길을 잡지도 못하고 애꿎은 민가를 부수게 되겠지만, 급한 대로 일이 더 커지지 않게 만들 방책이지.”
하현이 정리해서 이야기해준 덕분에 당규호와 남궁환도 취월걸개의 계획을 이해하게 되었다.
계획도 알게 되었겠다. 이젠 마음이 급해진 당규호가 급히 입을 열었다.
“어르신, 그러면 저는 반대쪽 끝으로 가겠습니다.”
“그래. 그쪽부터 차근히 부수면서 오너라. 명심할 것은 부수기만 하는 게 다가 아니다. 부서진 잔해가 불 쪽으로 넘어지도록 해야 한다. 이유는 말 안 해도 알지?”
하현이는 취월걸개의 질문에 똘망하게 대답했다.
“네. 집에 들어가는 목재 때문에 오히려 불길이 건너갈 징검다리가 될 수 있으니까요.”
취월걸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 가지만 더. 여기는 사천이지?”
“그렇습니다.”
“사천의 패자(霸者)는 누구냐.”
당규호는 이것을 왜 물어보는지는 모르겠지만, 당당하게 대답했다.
“사천당문입니다.”
“그래. 사천당문이다. 그러니 무너진 집의 보상은 네가 좀 해줘라. 알겠지?”
“어, 어르신!”
당규호가 다급하게 취월걸개를 불렀지만, 이미 그는 지붕 아래로 몸을 던진 후였다.
바닥에 사뿐 내려앉은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취월걸개의 청력이라면 자신을 부르는 소리는 당연히 들었겠지만, 그는 그냥 무시해 버리는 듯했다.
“에휴…. 그럼 우리도 가자꾸나.”
“네. 당가주님.”
당규호에 이어 하현과 남궁환도 지붕 아래로 내려가 민가를 무너뜨리기 위해 달렸다.
* * *
하현이 민가에 당도했을 때,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벌써 세간을 챙겨 집을 떠난 상태였다.
불이 번질 것이라고 기정사실로 생각하는 듯했다.
“어차피 불에 타버리면 사라질 집이야. 당가주님께서 보상해주신 다고도 했고.”
하현은 혼잣말하며 민가에 들어섰다.
아무래도 멀쩡한 집을 부숴버린다는 것이 뭔가 찜찜했기에.
“어떻게 부숴야 하지?”
아주 급한 와중이건만, 하현은 천천히 집을 훑어보았다.
흔하디흔한 민가였다.
전각을 이렇게 자세하게 들여다볼 생각을 못 했는데, 집중해서 보니 대강 구조가 이해되었다.
“알겠다. 여기 기둥들, 그리고 저 벽들이 천장을 떠받치고 있는 거구나.”
판단을 마친 하현은 재빨리 검을 뽑았다.
그리곤 가장 커다란 기둥 앞에 서서 눈을 감고 깊은숨을 내쉬었다.
“후우…….”
하현은 급박한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옛 생각이 떠올랐다.
청룡관 수련생에서 정식 대원이 되는 시험이었다.
‘철탑을 검으로 베라 했었지.’
말로만 들으면 불가능해 보이는 시험이었건만, 그는 성공적으로 해냈었다.
심지어 그 시험 덕분에 할아버지의 제자가 될 수도 있었다.
번쩍-
하현이 눈을 번쩍 뜨자 안광이 빛났다.
그와 동시에 하현의 아랫배에서부터 흘러나온 기운이 하현의 팔과 다리에 충만하게 깃든다.
꽈악!
검을 휘두르기 위해서는 팔만큼이나 다리도 중요하다.
땅을 제대로 디딜 수 있어야 검을 마음 놓고 휘두를 수 있으니까.
우웅우웅-
하현의 기운을 충분히 받아먹은 적룡검이 부르르 울었다.
가끔 이럴 때는 정말 살아있는 게 아닌가 싶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는 그 진동을 느끼며 그대로 검을 휘둘렀다.
서걱!!
하현이 휘두른 검은 마치 두부를 자르듯 기둥을 깔끔하게 잘라냈다.
“좋았어.”
그는 빙긋 웃으며 옆 기둥으로 가서 기둥을 베었다.
그리고 또 옆 기둥, 그리고 또 옆 기둥.
순식간에 기둥을 베어낸 하현은 집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발에 내공을 담아 불길 쪽으로 벽을 강하게 찼다.
와르르-
기둥이 모두 베어진 집은 허무하게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속도를 조금 더 높여야겠어.”
하현은 기쁜 얼굴로 무너진 집을 바라보다가 그 옆집으로 향했다.
불길은 빠르게 번져오고 있기에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 * *
처음에는 재미있게 시작했건만, 지금 하현은 지쳐가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몇 채의 집을 부쉈는지도 모를 지경이니 그럴 수밖에.
“얼마나 남았지?”
진선표국 쪽을 돌아보니, 불길은 아까보다 확연히 커져 있었다.
아마 불길을 잡는 데에는 완전히 실패한 것으로 보였다.
지붕 위로 훌쩍 올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쪽은 사부님 쪽인가? 거의 다 무너뜨렸구나. 저쪽은 환 형 쪽인가 보다.”
요령을 늦게 파악했기 때문일까.
아직 남궁환이 간 쪽은 많이 남아 있었다.
하현은 그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지금 불길이 커지는 속도로 보았을 때 저쪽은 아슬아슬할지도 몰랐다.
바닥으로 훌쩍 뛰어내린 하현은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조금 더 빠르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아……!’
하현은 문득 그의 허리춤을 바라보았다.
허리에는 사천사살의 일살에게서 뺏은 가죽 주머니가 매달려 있었다.
“이거다!”
하현은 그 주머니를 끌렀다.
그리곤 그 안에 든 작은 구슬을 꺼내 들었다.
일살이 최후의 순간에 사용했던 폭환이었다.
가장 중심이 되는 두꺼운 기둥이 아니면 나머지는 베어내기에 쉽기에 하현은 검을 휘둘러 손쉽게 베어낸 후에 문까지 나왔다.
그리고 손에 든 폭환을 기둥을 향해 던지려 했다.
그런데 그때 문득 생각 난 것이 있었다.
“이렇게 하는 거였던가?”
하현의 손목이 기묘하게 꺾였다.
최대한 큰 회전력을 얻을 수 있도록 손목을 최대한으로 사용하는 수법.
당규호가 접전 중에 수도 없이 비도를 던진 사천당문의 비도술이었다.
피잇-!
하현은 고민 없이 손을 움직여 폭환을 날렸다.
마치 오래전부터 비도술을 익혀온 것 같은 움직임이었다.
콰아앙-
화살처럼 날아간 폭환은 기둥에 부딪히자마자 굉음을 내며 터졌고, 그 폭발은 기둥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했다.
그와 동시에 하현은 집 벽을 강하게 밀어냈다.
쿠구궁-
성공이었다.
예상치 않게 획득한 폭환이 효과적이었다.
“좋아. 이렇게 하면 체력과 내공을 많이 아낄 수 있겠어.”
방법을 알게 되었으니, 그다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하현은 남은 폭환은 모두 소모하며 차례차례 집을 무너뜨렸고, 이윽고 취월걸개와 만날 수 있었다.
“사부님!”
“현이구나.”
취월걸개가 하현의 뒤로 길게 늘어져 있는 무너진 집들을 보고 말했다.
“아니, 어떻게 이렇게 빠르게 한 것이야? 나보다는 아니지만, 규호보다도 빠른 속도인데?”
“처음에는 검을 사용하다가, 폭환을 사용했어요.”
“폭환을?!”
하현이 취월걸개에게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집을 부수었는지를 말하자 그가 껄껄 웃었다.
“역시 내 제자다. 똑똑하구나. 그 사파 머저리들이 남을 죽일 용도로 만든 폭환이 이렇게 사람을 살리는 데 사용되다니.”
그의 눈에서는 하현에 대한 자랑스러움이 뚝뚝 흘러나왔다.
조금 더 기다리자 당규호도 자신의 할당량을 채우고 자리에 나타났다.
“아이고…. 죽겠습니다. 어르신.”
“아직 젊은 게 무슨 앓는 소리야?”
“젊다니요. 저도 이제 곧 손주를 볼 나이입니다. 제 아들이 약관이 다 되었습니다.”
“그게 젊은 거지! 내 친우 중에서는 증손주를 본 놈도 있다.”
당규호가 대꾸 대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취월걸개가 그를 보고서는 클클 웃더니 말을 이었다.
“얼마나 남은 것이지? 환이 쪽에 많이 남았나?”
당규호가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제가 오면서 봤을 때는 거의 다 부순 것으로 봤습니다.”
“그래? 그런데 왜 이렇게 안 오는 것이야? 한 번 가봐야겠다.”
그들은 남궁환이 맡았던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표국의 장원이 있는 방향에서는 뜨거운 열기가 후끈 불어오고, 그들은 무너진 건물들의 잔해 위를 걸어가니 참으로 을씨년스러웠다.
“엇? 저쪽은 이미 불길이 번졌나 봅니다!”
넷 중에서 무공 실력이 가장 떨어지는 남궁환이지만, 제법 잘 해냈는지 대부분 집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다.
허나 바람이 이쪽으로 분 까닭인지 벌써 민가에 불이 옮겨붙고 있었다.
“환이는 도대체 어디 간 것이야? 규호야. 하현아. 너희는 저 뒤쪽으로 미리 집을 무너뜨려라. 더 불길이 번지지 않도록.”
“알겠습니다.”
“네. 스승님.”
취월걸개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을 발견했다.
“그런데 저기 왜 저렇게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이지? 저기는 내가 가보마.”
하현과 당규호가 각자 양쪽으로 갈라져 건물을 무너뜨리러 갔고, 취월걸개는 불이 붙기 시작한 전각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아직 대피하지 않은 몇몇 사람들이 불붙은 건물을 올려보고 있었다.
“어떡해!”
“제발……!”
그들은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무어야. 무슨 일이냐!”
직감적으로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깨달은 취월걸개가 그들 사이를 헤치고 가장 앞으로 나가 물었다.
그들 중 나이가 가장 많아 보이는 자가 말했다.
“바람이 불어 불길이 순식간에 붙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안에 아이가 미처 빠져나오지 못했습니다.”
그때 한 여인이 취월걸개의 팔을 붙잡았다.
“대협! 무림인이시라면 부디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어 제 자식을 구해 주세요!”
“자네! 이미 공자님 한 분이 들어가시지 않았나! 조금만 침착하고 기다리게나!”
취월걸개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뭐라? 이미 사람이 들어갔다고?”
“네. 아이가 빠져나오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전각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는 들어간 사람이 누구인지 왠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여 그자가 초록색의 무복을 입고 있었느냐?”
“네. 맞습니다. 그런 옷이었습니다.”
“환이로구나!”
불 속으로 뛰어 들어간 자는 남궁환이 분명했다.
취월걸개는 조급해졌다.
남궁환도 가장 친한 친우의 손자였으며 하현이보다야 덜 하지만 자신도 아끼는 아이였다.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옆에 물이 들어 있는 양동이를 몸에 끼얹었다.
그리고는 이제는 제법 불이 번진 전각으로 뛰어들려는 찰나.
콰앙-!
별안간 이 층의 창문 하나가 박살 나더니, 거기서 사람 하나가 튀어나왔다.
취월걸개는 저도 모르게 떨어지는 사람을 몸으로 받아내었다.
부지불식간이었지만, 그는 기운을 적절히 활용하여 안전하게 받아내었다.
떨어진 자는 초록색 무복을 입고 있었다.
“환아!”
“콜록, 콜록. 어르신.”
남궁환이 연신 기침을 해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품에는 어린아이 한 명이 안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