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당규호가 하현이 묵는 방으로 찾아갔을 때, 하현은 그곳에 없었다.
절대 무리하게 움직이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고 나서야 점혈이 풀린 남궁휘연과 남궁환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혹시 하현이를 찾아오신 거면 가장 가까운 연무장에 있을 거예요. 아까 하인에게 연무장이 어디냐고 물어봤거든요.”
“고맙구나.”
남궁환이 당규호에게 설명해주고 돌아서려는데, 당규호가 그를 붙잡았다.
“잠시만 시간 괜찮겠나?”
“저 말입니까?”
“그래. 하현이에게도 볼 일이 있었지만, 너와도 잠시 얘기할 게 있었거든.”
남궁휘연이 당규호에게 말했다.
“제가 잠시 비켜드릴까요?”
“하하. 그럴 필요는 없네. 그리 길지도 않을 테고.”
당규호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남궁환에게 건넸다.
그것은 작은 목패(木牌)였다. 거기에는 짙은 음각으로 당(唐)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아마도 사천당문의 표식으로 보였다.
“이게 무엇입니까?”
“이것은 내가 사천당가의 가주로서 자네에게 주는 것이라네. 이 패만 있으면 사천 어디에서든 자네를 귀빈 대접을 해줄걸세. 몇몇 객잔에서는 값도 치르지 않아도 된다네.”
“그런데 이것을 왜 저에게…….”
“자네가 아이를 구하려 불 속으로 뛰어든 것에 제대로 된 인사도 하지 못했더군. 비록 내가 사천 전체를 대표할 수는 없다지만, 이렇게 감사 인사를 올리겠네. 고맙네.”
당규호는 그에 비하면 까마득하게 어린 남궁환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인데요. 이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세상엔 당연히 할 일을 안 하는 사람들이 많지. 감사받아 마땅하네.”
남궁환은 물끄러미 목패를 바라보았다.
솔직히 말해, 그저 작은 나뭇조각일 뿐이었다.
그런데 이게 뭐라고 이 무게감이 굉장히 무겁게 느껴졌다.
“염치없는 말일 수도 있지만, 다음에도 이렇게 나서주길 바라네.”
조금은 장난기가 섞인 당규호의 말에 남궁환이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네.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니까요.”
* * *
남궁환과 헤어진 당규호는 그의 말대로 연무장에서 하현을 찾을 수 있었다.
당규호가 다가오는 지도 모를 정도로 몰입한 하현이었기에 당규호는 잠시 그를 기다렸다.
이윽고, 초식이 마무리되었는지 하현의 검이 멈추었다.
그는 조용히 앞에서 기다린 당규호를 발견하고서는 조금 놀랐지만, 얼른 인사했다.
“당가주님. 잠시 연무장을 빌렸습니다.”
“하루도 수련을 빼놓지 않는다더니, 정말이었군.”
“쉬기에는 아직 제가 부족해서요.”
하현은 진지해 보였다.
당규호는 하현의 나이대에서는 네가 가장 강할 것이라고 말하려다 말았다.
“자네에게 나이는 중요하지 않군.”
“네. 제 동년배들과 비교해 강하다는 건 듣기에는 좋지만, 실질적으로는 소용없는 말이니까요.”
“그 말이 맞군. 자네가 어리다고 해서 칼이 피해갈 리는 없으니 말이야.”
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저는 무슨 일로 찾아오신 거예요?”
당규호가 빙긋 웃었다.
그리곤 하현에게 가져온 목함을 건넸다.
“이게 뭐죠?”
“비검(飛劍)이네.”
“비검이요?”
“취월걸개 어르신께서 그러시더군. 자네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것은, 무기와 무기를 다루는 기술이라고.”
“그런 편인 것 같습니다.”
하현은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그가 인생에서 가장 집중하고 있는 것도 그것이었고.
“그래서 말인데, 자네가 가장 좋아 하는 것을 주기 위해서 왔네.”
“그래서 이 비검을 주시겠다는 말씀이세요?”
“그렇지.”
“…갑자기 이걸 왜요?”
하현의 얼굴엔 의문이 가득했다.
할아버지는 항상 말씀하셨다.
세상에 대가 없는 호의는 없다고.
그렇기에 무언가를 받기 전에는 상대방이 원하는 대가가 무엇인지를 확실히 알아야 한다고 했다.
하현의 의심스러운 눈길을 받으면서도 당규호는 빙긋 웃으며 돌려 말하지 않고 솔직하게 말했다.
“자네와 친분을 쌓고 싶어서네.”
“저와 친분을……?”
“하하. 자네가 훗날 잘 될 것 같으니, 미리 줄을 서 놓는 것이지. 일종의 뇌물이랄까.”
당규호는 뭐가 그리 웃긴지 껄껄 웃었다.
“받지 않을 텐가?”
“음…….”
하현이 잠시 고민하다가 물었다.
“비도…. 아니, 비검술도 가르쳐 주실 건가요?”
당규호는 하현이라면 할법한 질문이 들려오자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그럼 물론이지. 가르쳐주겠네.”
그제야 하현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고는 목함을 열어 안에 담긴 비검을 살펴보았다.
검날은 매우 튼튼하고 날카로워 보였는데, 던지기 편하게 만들었는지 매우 가벼웠다.
과장을 조금 보태어 깃털 같았다.
“이건 뭐로 만든 거죠? 가주님의 비도와 굉장히 비슷해 보이는데요?”
“좋은 눈썰미를 가졌구나. 내 비도와 쌍으로 만들어진 비검이란다.”
“그러면 굉장히 중요한 것일 텐데 저한테 주셔도 돼요?”
“지금 당가에서는 비검술을 쓰는 사람이 없단다.”
“어째서죠?”
당규호가 자신이 애용하는 비도를 꺼내 보여주었다.
“잘 봐라. 둘이 굉장히 비슷해 보이지만, 사실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비도는 말 그대로 날이 하나지. 날이 없는 반대쪽은 유선형으로 깎여 있단다.”
“정말 그렇네요. 물고기 같은 느낌이에요.”
“그렇지. 반면에 이 비검은 어떠냐?”
비검은 양쪽 날 폭이 좁았고, 상대의 검날로부터 손을 보호해주는 고동도 달리지 않았다.
검 끝부터 손잡이 끝까지 일직선으로 뻗어 있는 것이, 바늘을 납작 누르면 이런 모양이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현이 든 생각을 당규호에게 말해주자, 그는 껄껄 웃었다.
“하하. 네 말대로 바늘을 눌러놓은 것처럼 보이는구나.”
당규호는 하현에게 건넸던 비검을 눈으로 훑으며 말했다.
“하여튼 비도를 던지는 느낌으로 비검을 던지면, 생김새의 차이 때문에 보내고자 하는 곳에 보내지 못한다. 거기다 비도술이 비검술에 비해 익히기가 훨씬 쉽지.”
하현은 그의 말을 이해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쉬운 길을 두고 돌아갈 필요는 없으니, 누구도 비검술을 배우지 않는 것이군요.”
“그렇지. 배우기 쉽다고 하여 위력이 약한 것도 아니다. 아니, 오히려 같은 기간을 배웠을 때는 비도술이 더욱 성취가 빨라 위력적인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
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비검술이 실전되어 가는 이유를 정확히 알 것 같았다.
“그러면 비검술에 장점은 없는 건가요?”
“당연히 장점도 있지. 어느 정도 이상의 경지에 오르면 그 안에 내공을 담기가 더 쉽단다. 양날이 대칭이기 때문에, 다른 계산할 필요 없이 내공을 많이 담으면 담을수록 더욱 빠르고 강력하게 던질 수 있단다.”
그는 하현을 이끌고 연무장 한쪽 벽면에 있는 과녁 앞으로 데리고 갔다. 과녁은 수도 없이 연습한 흔적으로 가득했다.
하현에게서 비검을 건네받은 그가 말했다.
“나도 비검술을 제대로 익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기초는 알고 있으니 잘 보거라.”
스윽- 팍!
당규호의 손이 움직이는가 싶더니, 어느새 과녁의 정 가운데에 비검이 꽂혀 있었다.
“봤느냐?”
하현은 과녁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다.
“한 번만 더 보여주시겠습니까?”
“그럼.”
그가 한 번 더 비검을 던졌다.
조금 전보다 더욱 천천히.
파악!
과녁을 보고, 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래? 한번 해봐라.”
하현은 비검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손안에서 그 무게를 느껴보았다.
‘정말 종잇장 같은 느낌이야.’
너무 얇아 힘을 주어 부러뜨린다면 뚝 하고 부러질 것만 같다.
‘비도를 던질 때는 부드럽게 하는 것 같았는데, 비검술은 손목을 확 낚아채야 하는구나.’
하현은 전에 당규효가 비도를 던졌을 때의 모습과 조금 전의 모습을 비교하며 그 짧은 시간에 비도술과 비검술의 차이점을 파악했다.
허나 그것을 굳이 당규호에게 말하지는 않았다.
그가 아무리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해도, 아주 오래전 취월걸개가 한 번에 모든 무공을 따라 하지 말라고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신 천천히 조금 전에 당규호가 했던 대로 손을 움직여 검을 과녁에 던져 보았다.
쒜엑-! 콱!
“……?!”
검은 공기를 찢고 날아가 순식간에 과녁의 정 가운데를 꿰뚫었다.
처음 던지는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모습에 당규호는 입을 다물 줄 몰랐다.
“…혹시 암기술을 어디서 배워본 것이냐?”
“아닙니다. 오늘이 처음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한다고……?”
당규호는 저리도 놀라고 있건만, 정작 하현은 자신이 보인 비검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공기를 찢고 날아가면 안 된다. 당가주님이 던지셨을 때는 그런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어.’
하현은 침착하게 다시 비검을 들고 섰다.
“후우-.”
숨을 크게 내쉬며 조금 전 당규호가 어떻게 던졌는지를 다시금 상기했다.
조금 전 자신이 던진 것과 무엇이 달랐는지를 계속 생각하니, 머릿속에서 당규호와 자신이 겹쳐 보이는 듯했다.
“아……!”
하현은 나지막이 탄성을 내뱉었다.
‘지금까지 완전히 잘못 생각하고 있었어. 던진다는 것. 그것부터가 잘못됐던 거야.’
그는 지금까지 비검을 ‘던진다고’ 생각했다.
허나 당규호는 던지지 않았다.
팔을 휘두르는 중간에 비검을 놓을 뿐.
조금 더 자세히는 팔과 손목을 이용해 비검에 최대한의 힘이 들어갔을 때, 비검을 놓아주는 것이다.
“한 번 더 해보겠습니다.”
“그래라.”
하현은 아주 엷게 미소 지었다.
조금 전 마음을 가다듬었기 때문일까? 과녁이 바로 코앞에 있는 것처럼 커 보였다.
그리고 팔을 휘두르다가, 검을 그대로 놔주었다.
스윽- 팍!
“아니?!”
조금 전 당규호가 보인 모습 거의 그대로였다.
그래서일까. 당규호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치고 말았다.
그러나 하현은 그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목함에 들어 있던 비검은 네 자루.
당규호가 두 번, 하현이 두 번 던졌기에 이미 모든 비검은 과녁에 꽂혀 있었다.
타다다다-
하현은 무엇이 그리 급한지 보법까지 써가며 과녁에서 비검을 회수해 제자리로 돌아왔다.
“암기술이라는 것. 생각보다 재밌군요.”
“재밌다고?”
“네. 만류귀종이라 하지만, 암기술은 검법과는 정말 다른 영역인가 봅니다. 완전히 새로운 것을 배우는 느낌이에요.”
하현이 즐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 모습을 보며 당규호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열네 살이라고 한 것 치고는 굉장히 성숙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야 제 나이처럼 보이는군.’
처음 만나고 나서부터 계속 심각한 모습만 보여주었던 하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처음에 사천에 오게 된 것은 남궁휘연의 큰 부상 때문이었고, 그 다음에 만난 것이 몰살한 줄 알았던 가문의 총관이었다.
그리고서 곧바로 사천사살과의 싸움, 진선표국의 화재…….
계속된 사건의 연속에 연속이었기 때문이었다.
“암기에 내공을 담는 법을 알고 싶습니다. 조금 전에 해보려고 했는데 잘 안되더라고요. 손에서 떨어지는 순간에 그 기운을 대부분 잃어버리던데요?”
하현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당규호에게 물었다.
당규호는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그건 우리 당가에서만 내려오는 독문 심법을 알고 있어야 수월하다. 우리 당가의 현무신공은 기운의 전이를 쉽게 해주지.”
“와. 현무…! 정말 멋있네요…….”
하현의 감탄하던 얼굴이 금방 시무룩해졌다.
“그런데 그건 가문의 비전이라 제가 알면 안 되는 거잖아요? 그냥 오늘 가르쳐준 비검술을 열심히 수련하겠습니다…….”
풀죽은 얼굴로 말하는 얼굴이 퍽이나 귀여웠다.
당규호는 사천사살과 싸웠던 그 무인과 이 아이가 같은 사람인지 의심될 정도였다.
“신공 전체를 가르쳐줄 수는 없지만, 그 요령만이라면 조금은…….”
“정말요?! 감사합니다. 가주님!”
하현이 연신 고개를 꾸벅 숙이며 당규호에게 감사를 전했다.
“그렇게 좋으냐?”
“네. 그리고 기관에 대해서도 가르쳐 주신다고 하셨죠? 그것도 조금 더 알고 싶습니다.”
“기관까지?”
하현은 상기된 얼굴로 쉬지 않고 말을 뱉다 멈칫했다.
“아…! 혹시 너무 바쁘시면 다음에 해도 됩니다. 가주라는 직책이 얼마나 바쁜지 알고 있습니다. 방해할 수는 없지요…….”
당규호가 큭큭 웃었다.
어째서인지 하현이 일부러 동정심을 유발하려 저러는 것 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똑똑한 아이라고 하더니, 맹랑하기까지 하구나.”
“이런. 들켰군요.”
“하하하! 넘겨짚어 본 것이었는데, 정말이었느냐? 허나 밉지 않구나.”
그는 호탕하게 웃고서는 말을 이었다.
“가주라는 자리는 원래 항상 바쁘지. 나름 거대한 집단을 이끌어야 하는 수장이니 말이야.
당규호는 힐끗 하현을 살핀 뒤 입꼬리를 슬쩍 올려 웃었다.
“그런데 말이다. 사실 내가 그렇게 좋은 가주는 아니라서 말이야. 따라오너라. 내 연공실로 가자.”
당규호는 하현을 이끌고 연공실로 데리고 갔다.
어디까지 하려나 싶은 마음에 밤늦도록 하현에게 이것저것을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몇 시진 후.
“후…. 여기까지 하면 안 되겠느냐?”
당연히 두 손을 먼저 든 것은 당규호였다.
그는 혀를 내두르며 다음에도 또 궁금한 것을 가르쳐주겠다고 거듭 약속하고 나서야 하현을 방으로 돌려보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