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아쉽습니다. 그곳을 노린 게 아닌데.”
“이노옴!”
검마가 노호성을 내뱉었다.
하현의 한 마디로 조금 전까지 그의 머리를 채우고 있던 냉정이 와장창 무너졌다.
이성이 잃어버릴 정도의 분노로 턱이 부들부들 떨렸다.
쿵- 쿵- 쿵- 쿵-
그제야 귀가 잘린 곳에 불에 덴 듯한 고통이 느껴졌고, 쿵쿵대는 맥박이 느껴지는 듯했다.
검마는 이전에도 이런 감각을 느낀 적이 있었다.
그의 왼팔이 잘려나갔을 때였다.
순간 하현의 모습이 삼십 년 전의 남궁무룡과 겹쳐 보였다.
할아버지에게는 왼팔을 내주고, 그 손자에게는 귀를 내어주었다.
“네놈은 내가 죽인다!”
푹- 푹- 와작!
우악스러운 발걸음.
한 걸음, 걸음마다 땅이 푹푹 파인다. 군데군데 장식으로 돌을 깔아 놓은 곳을 밟을 때면 돌을 그대로 부숴버리며 달려왔다.
분노한 노고수는 걸음걸이마저 위협적이었다.
그렇게 힘이 들어간 만큼 속도도 굉장했다.
그는 번개 같은 속도로 하현에게 다가왔다.
휘릭!
멧돼지같이 직선으로 달려오는 검마를 막아내려는 찰나, 하현의 앞을 누군가가 가로막았다.
속도라면 무림에서 일절을 논할 수 있는 무인. 취월걸개였다.
“후읍!”
그의 호흡과 함께 주변으로 강력한 기운이 몰려든다.
바로 뒤에서 보는 하현은 자신도 빨려들지 않을까 하는 착각이 일 정도였다.
그 순간.
‘어……?’
갑자기 시간이 느리게 가는듯한 느낌이었다.
마치 나비의 날갯짓마저 눈으로 볼 수 있겠다고 싶을 정도.
그리고 실제로 보일 리는 없건만, 기감이 최고조에 달한 하현의 눈에 취월걸개가 행하는 기의 흐름이 보이는 것 같았다.
‘아랫배에서 다리로, 발끝에서 어깨로. 다시 어깨에서 손바닥으로.’
그 짧은 찰나, 하현은 항룡십팔장의 절초인 항룡유회가 어떤 방식으로 운용되는지를 엿보았다.
굉장히 단순해 보였던 항룡유회는 사실 굉장히 복합적인 무공이었다.
단전에 끌어모은 기운을 손바닥에 곧바로 방사시키는 것이 아닌, 다리를 지나가며 온몸을 튼튼히 지지하고, 그 기운을 어깨에서 모아 손바닥에서 폭발시키는 것이다.
콰아앙-!!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거대한 굉음.
취월걸개의 육장과 검마의 검이 부딪히는 소리였건만, 폭환이 바로 옆에서 터졌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만큼의 소리였다.
“……!”
그 순간, 하현은 몹시도 놀랐다.
항룡유회의 진짜 비밀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폭발하는 그 순간에, 그 폭발력으로 진기를 다시 회수한다.’
어디선가 많이 본듯한 수법이었다.
번갯불이 깜빡일 만큼의 짧은 찰나.
하현은 이 수법을 어디서 보았는지 기억해냈다.
‘사부님의 신법!’
취월걸개가 오래 달릴 수 있도록 고안한 그 만의 신법.
바닥에 발바닥이 닿는 순간 기운을 회수하며 다시 기운을 사용할 수 있게 하는 그 수법이 바로 항룡유회에서 따온 수법이었다.
“방해하지 마라!”
“네 상대는 나라고 몇 번을 말했느냐!”
두 고수의 외침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그리고 등 뒤로 날카로운 예기가 느껴진다.
취월걸개와 검마에게는 달려들 생각도 못 하던 마교도가 하현을 보고는 용기를 낸 것이다.
“죽어라! 커억……!”
그 용기의 대가는 죽음이었다.
조금 전 검마의 귀를 잘라내었던 하현의 비검이 이번엔 마교도의 미간에 꽂혔으니까.
그리고 그 모습을 검마는 똑똑히 보았다.
조금 전, 하현의 비검술은 막아낼 수야 있겠지만, 그도 깜짝 놀랄 정도의 것이었다.
‘저놈은 지금 이 순간에도 무섭도록 성장하고 있다.’
너무나 비현실적인 하현의 성장이 다시 그가 냉정해지도록 도와주었다.
정신을 차린 검마가 취월걸개와 하현을 한 번 노려보고는 뒤로 훌쩍 뛰었다.
그때 하현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생겼다.
근심거리라도 생긴 것으로 보이는 그가 취월걸개에게 말했다.
“사부님. 문제가 있어요.”
“문제?”
“적의 원군이 근처에 있는 것 같아요.”
“원군이라니, 어디에?!”
이제야 취월걸개가 집중하여 기척을 느꼈다.
정확하게 어디라고는 못하지만, 엄청나게 많은 사람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가만 보니, 땅마저도 쿵쿵 울리고 있었다.
하현이 아래를 가리켰고, 곧장 깨달았다.
“땅굴을 타고 오고 있구나!”
검마가 흐흐웃었다.
한쪽 귀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피가 아직도 흐르고 있고, 얼굴에는 피로 세수라도 한 듯 피칠갑을 하고 웃는 꼬락서니가 꿈자리가 뒤숭숭할 것이 걱정될 정도로 기괴했다.
“드디어 왔구나. 너희를 곱게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곧이어 땅굴에서는 고수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무사들이 속속들이 올라서기 시작했다.
파파파팟!
그들은 이미 땅 위에 올라서 있던 마교도들과 비슷한 흑색 무복을 입고 있었는데, 왼쪽 가슴께에 하얀 글씨로 검(劍)자가 수놓아 있었다.
올라온 이들은 모두 열아홉이었다.
“마검원(魔劍院)…? 저 망할 것들이 살아있다니. 아니지, 혈검대도 아직 있다는 데 마검원이 없을 것은 또 뭐야?”
취월걸개가 대수롭지 않은 척 투덜거렸지만, 그 목소리에 담겨있는 긴장감은 숨겨지지 않았다.
마검원은 검마의 직속 무력단체로, 소수정예로 운영되는 곳이다.
마교에서의 원(院)은 대(隊)보다는 한 단계 낮은 단위의 단체다.
허나 그것이 개개인의 실력이 혈검대에 뒤진다는 말은 아니었다.
그 순간 하현과 취월걸개는 순간 눈이 마주쳤고
둘은 눈을 마주친 순간,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환이는?”
남궁환이 위험하다는 것.
급히 고개를 돌려보니, 의외로 남궁환은 선전하고 있었다.
여섯이었던 마교도 중 벌써 세 명을 베고, 나머지 셋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시간만 더 있었더라면 남궁환이 이길 것으로 보였다.
타다닷- 퍽!
그렇지만, 지금은 그 시간이 없었다.
취월걸개는 신법을 밟아 남궁환쪽으로 다가가며 등을 보이는 마교도의 머리를 강하게 찼다.
부지불식간에 머리를 얻어맞은 마교도는 죽었는지, 기절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쓰러져 일어나지 않았다.
“뒤로 빠져라!”
그 덕에 나머지 둘이 몸을 뺐고, 그 자리에는 취월걸개와 하현이 들어섰다.
“헉, 헉…….”
필사적으로 티를 내려 하지는 않지만, 가까이서 들어보니 남궁환은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상태였다.
“고생했다.”
“아닙니다. 훅, 이런 놈들쯤은…. 후.”
대답하며 숨을 고르고 나서 검마가 서 있는 쪽을 쳐다보니, 이미 꽤 많은 숫자가 지상으로 올라와 있었다.
아래에서 쾅! 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보니, 취월걸개가 무너뜨려 놓은 잔해를 무력으로 치워가며 점점 입구를 넓히고 중으로 보였다.
“어떡하죠?”
하현이 취월걸개에게 물었다.
마검원 무사들은 하나하나가 강자들이었다.
일대일로 붙으라 하면 질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 숫자가 워낙에 많았다.
얼핏 보아서 마흔은 넘어가 보였고, 아직 열 명가량 올라오지 못한 것으로 보였다.
“어떡하긴 뭘 어떡해?”
취월걸개가 일부러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이건 도망쳐야지. 맞붙으면 개죽음일 뿐이다.”
하현과 남궁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삼대 오십의 싸움.
게다가 취월걸개와 합을 겨룰 정도의 고수인 검마는 아직도 살아있다.
검마는 취월걸개가 맡는다고 하여도, 하현과 남궁환 둘이서 마검원 전원과 마교 무사 몇몇을 상대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문제는 저들의 신법 수준이 얼마나 되냐인데.’
취월걸개는 마검원 무사들의 기도를 면밀히 살폈다.
하나같이 실력을 숨길 생각이 없어 보이는 듯 강맹한 기운을 벌써부터 뿜어내는 것으로 보였다.
‘당연히 나보다는 미치지 못하고, 하현이는 겨우 도망갈 수 있을 것으로 보이는구나. 그런데 환이는…….’
남궁환은 신법도 느릴뿐더러, 현재는 많이 지쳐있는 상황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셋이 세 방향으로 흩어지고 정해진 곳에서 만나는 것이 정석이겠으나, 그렇게 되면 남궁환은 저들에게 잡힐 것이 분명하다.
쿠웅!
취월걸개가 강하게 발을 구르자, 그의 기운이 강맹하게 몸을 흐르기 시작한다.
이전 같으면 그저 습관이라고 생각했겠지만, 항룡유회의 원리를 깨달은 하현에게는 다르게 보였다.
바닥과 발이 부딪히는 순간 기를 내뿜고, 그 반탄력으로 다시 기를 회수하며 온몸에 기운을 일깨우는 것.
즉, 싸울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사부님!”
“귀 아프다. 작게 말해도 좋다.”
“같이 떠나셔야지요.”
취월걸개의 눈이 살짝 커졌다.
지금껏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건만, 하현은 자신이 남아서 싸운다는 것을 눈치챈 것이 의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곧 다시 냉정하게 눈을 뜨며 말했다.
“네 형을 데리고 먼저 도망가라. 곧 뒤따라가마.”
“어떻게 사부님을 놓고 가라는 말을 하세요?!”
하현이 소리 지르자 그가 손을 내저으며 대답했다.
“귀 아프다니까?! 현아. 네가 잊고 있는 것 같은데 나 취월걸개다! 이깟 놈들 상대로는 시간 좀 끌다가 내 몸 하나 내빼는 것은 쉬운 죽 먹기지. 아니, 너희 뒷바라지를 하지 않으면 오히려 혼자 도망가는 건 더 수월하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하현이 고집을 부리는데도 불구하고, 취월걸개는 하현과 남궁환에게서 등을 돌리려 했다.
그때까지 아무 말도 없던 남궁환이 입을 열었다.
“저 때문이네요.”
“뭐?”
“평소에 수련을 게을리했을 때, 이런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수련을 게을리했다고는 했지만, 그가 하루도 빼먹지 않고 수련한 것은 남궁세가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본인은 진심으로 그리 생각하는지, 대수롭지 않은 듯 말하며 앞으로 몇 발자국을 걸어 나갔다.
“어차피 남을 사람이 남는 게 최선입니다. 능력이 미천하여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제가 버텨보죠.”
“뭣이야?”
취월걸개가 신경질적으로 남궁환의 어깨를 잡아챘다.
그 힘으로 몸이 휙 돌려진 덕분에 남궁환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웃고 있었다.
무섭다거나, 억울하다는 생각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너……!”
“이럴 줄 알았으면 정말 죽어라 해볼 걸 그랬네요.”
“…….”
취월걸개가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순간 깨달은 것이다.
남궁환은 절대로 먼저 도주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피식-
갑자기 취월걸개도 피식 웃었다.
“여기서 살아난다면 네 할애비한테 꼭 일러줄 것이다.”
“뭘요?”
“첫째는 네가 수련을 더 열심히 하고 싶다고 한 것, 두 번째는 남궁세가의 첫 번째 철칙을 여기서 저버린 것”
남궁세가의 첫 번째 철칙.
자신의 목숨을 소중히 하라.
살 기회가 있으면 언제든 살 방도를 찾으라는 그 철칙을 남궁환은 애써 무시하고 있었다.
“내가 어떻게 널 두고 떠나겠느냐. 내 체면이 있지.”
취월걸개도 저벅저벅 걸어가 남궁환의 옆에 섰다.
“어르신……?”
“대략 예순쯤 되니까…. 세기도 귀찮다. 한 명당 서른 명씩만 잡아 죽이면 해결이다. 쉽지?”
“하하…. 쉽군요.”
하현은 이 둘의 대화를 듣고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둘이 그렇게 나오면 저 혼자 여기서 내뺄 수 있다고 생각한 겁니까?”
“아니. 그건 아니지만 넌 먼저 도망쳐라.”
‘넌 정파 무림의 희망이니까.’ 취월걸개는 뒷말은 속으로 삼켰다.
대신 눈빛으로 그 말을 전했다.
하지만, 그 눈빛이 전해지지 않았는지, 혹은 하현이 눈치챘으면서도 애써 무시하는 것인지 하현도 그들의 옆에 섰다.
“이렇게 하면 한 사람당 스물이군요. 서른도 쉬웠는데, 스물은 얼마나 쉽겠습니까?”
“너……?!”
하현은 대답도 하지 않고, 정면의 마교 무사들을 노려보았다.
“이, 이 겁을 모르는 것들이! 살려 달라고 빌어도 모자란 판에……!”
그곳에는 아직도 귀에서 피를 질질 흘리는 검마가 분통을 터뜨리고 있었다.
결국, 취월걸개과 남궁환, 그리고 하현 셋은 모두 같은 곳을 바라보고 서서 각자 기수식을 취했다.
“쳐라! 가장 잔인하게 죽여라! 살려달라고…. 아니, 죽여달라고 애원하게 만들어 주어라!”
“넵!”
파바바박!
검마의 외침에 수십의 검은 물결이 그들에게 짓쳐 들었다.
이 순간, 셋의 머리에는 같은 생각뿐이었다.
‘한 명이라도 더 길동무로 만들겠다.’
그들이 각자 든 병기에 힘이 최고조로 들어가고, 마검원 무사들과 부딪히려는 찰나.
쒜엑-!!
그때 생각지도 못한 파공음이 들려왔다.
여러 개라고 할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숫자였다.
아니, 그것은 비였다.
공기를 찢으며 하늘에서 떨어지는 암기의 비.
퍼버벅, 퍼버버벅!
암기의 비는 마검원 무사들을 헤집어 놓기 시작했다.
취월걸개는 이 고절한 수법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놀람과 환희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만천화우(滿天花雨)!”
그의 목소리 뒤로, 언뜻 사람의 인영이 보이기 시작했다.
신법을 펼치는 그들은 족히 수십 명은 되어 보였다.
그중 가장 앞에서 사람들을 이끌며 무공을 펼치고 있는 자.
사천당가의 가주 당규호였다.
취월걸개는 때를 놓치지 않고, 내공을 담아 우렁차게 외쳤다.
“당가의 원군이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