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던 검마는 문득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변에 있는 검마원의 무사는 겨우 열 명 남짓.
그를 도주 시키기 위하여 마흔이나 되는 그의 수하들이 목숨을 바쳤다.
“취월걸개! 너만은 내가 꼭……!”
검마는 이를 갈았다.
무심하게 도망친 것처럼 보이지만, 그간 십수 년간 키워왔던 수하들이다.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는데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어느새 피는 멈추었지만, 귀 대신 피딱지가 들러붙은 곳에 욱신욱신한 통증이 느껴져 왔다.
“그 꼬맹이!”
그리곤 자연스럽게 하현이 떠올랐다.
취월걸개를 떠올릴 때만큼의 분노는 아니었다.
그가 떠올린 것은 위험이었다.
아직 어린 하현이 조금 더 나이를 먹고 컸을 때 마교에 어떤 위험을 불러올지를 생각하자, 그는 본능적으로 공포라는 단어가 뇌리에 박혔다.
‘그놈은 결코 살려두어선 안 된다!’
그저 재능이 뛰어나다는 말로 설명이 불가능한 수준이다.
게다가 하현에게 귀를 잘릴 때 느꼈던 시간이 멈춘듯한 기묘한 감각.
그 감각은 분명히 어디선가 느껴본 적 있었던 감각이었다.
‘그게 누구였지?’
그는 쉬지 않고 달리면서도 머릿속으로는 그 감각을 누구에게서 느꼈는지 생각해내려 했다.
‘일단 적은 아니었다. 분명히 우리 교(敎)내의 인물인데…. 그간 너무도 많은 비무를 해왔으니.’
마교는 삼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무림에 나서지 못하고 그들끼리만 갇혀 살았다.
그렇기에 그들이 택할 수 있는 수련 방법은 그들끼리의 비무밖에 없었다.
허나 비무라고 해서 보통의 비무와는 다르다.
상대를 죽이거나 치명상을 입히는 것이 모두 허용되는 진짜 실전.
그것이 강자존 마교에서 고수를 기르는 방식이었다.
“아……!”
검마는 불현듯 그 감각을 어디에서 느꼈는지 떠올랐다.
약 삼 년 전, 스치듯 맞붙어본 적이 있던 소교주였다.
그때 이후로 비무를 해볼 기회가 없어 단번에 기억하지는 못했지만, 그 감각은 생생히 떠오르는 듯했다.
‘그러면 남궁무룡의 손자가 소교주님과 같은 능력을 가졌다는 것인가?’
그는 자신이 생각해 놓고도 아닐 것이라고 고개를 저었다.
소교주의 능력은 하늘이 내리고 땅이 만든 능력.
그런 능력을 가진 자가 또 있을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때 저 멀리 앞쪽에 누군가 서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수하들에게 말했다.
“앞에 누군가 있다. 검을 들어라.”
“넵!”
그는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앞에 보이는 자가 만약 양민이라 할지라도 단칼에 베어 넘기고 지나갈 속셈이었다.
“원주님. 복장이 우리 교인으로 보입니다.”
수하의 말대로 천마신교의 무복이었다.
그것도 보통 교인들이 입는 옷이 아니라, 상위층이 입는 검정색의 무복.
“소교주?!”
검마의 눈이 커졌다.
조금 전까지 소교주를 생각하고 있어서일까? 이곳에 있을 리 없는 소교주가 보이는 듯했으니까.
그는 눈을 비비고 다시 앞을 보았다.
하지만 그렇게 보아도 결과는 같았다.
“검마님. 이제 오시는군요.”
“소교주가 어째서 이곳에 계시는 겁니까?”
소교주는 방긋 웃었다.
등 뒤로 두 자루의 칼을 차고 있는 그는 잘생긴 얼굴에 웃을 때는 눈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저 사람이 마교의 소교주라고 하면 절대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멀끔한 인상이었다.
“왜 이곳에 있다니요. 저는 며칠 전부터 계속 여기 있었습니다.”
“그렇습니까? 교주님께서 따로 명령을 내리셨나 봅니다?”
소교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간단하고 귀찮은 임무를 맡았죠.”
“어떤……?”
“정파놈들이 우리 신교의 위치를 알아낼 수 있는 모든 방도를 사전에 차단하라 하셨습니다.”
검마의 눈이 커졌다.
“그렇다면 염강표국을 몰살시킨 것이……!”
“마음이 아팠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취월걸개가 쫓아오는데 살릴 방도가 없더군요.”
말은 이렇게 했지만, 아쉬운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는 그였다.
검마 역시 소교주의 이런 성정을 잘 알고 있었다.
직접 마주한 적은 몇 번 없다지만, 이미 신교 내에서 잔혹한 성정으로 유명한 그였으니까.
“크흠…….”
문득 검마는 현재 자신의 꼴이 우스워져 헛기침을 내뱉었다.
삼십 년 만의 강호행이었다.
진선표국에서 염강표국으로, 염강표국에서 신교로 짐과 전표를 옮기는 아주 간단한 일일 뿐이었다.
그렇기에 자신에게 맡겨 달라고 호언장담을 했거늘 대부분의 수하를 잃고, 그 자신도 죽음의 문턱에서 겨우 살아 돌아왔다.
그것도 떨어진 귀 한쪽은 찾지도 못한 채.
검마는 눈을 똑바로 마주치지 못하고 말했다.
“면목이 없습니다.”
“아닙니다. 그럴 수 있죠. 취월걸개에 이어 당가까지 그렇게 나타날 줄은 아무도 생각지 못했을 테니까요.”
마치 눈으로 보았다는 듯 자연스럽게 한 소교주의 말에 검마가 되물었다.
“지켜보고 계셨던 겁니까?”
“하하. 설마요. 저는 계속 여기 있었습니다.”
“그러면 당가가 온 것은 어찌……?”
소교주가 검마의 위아래를 훑어보더니 말했다.
“개방 거지들도 아닌데, 그렇게 삭은 옷을 입고 다니는 취미는 없으실 것 같고, 그 삭은 형태를 보면 많이 입어서 해진 게 아니라 독에 부식된 것처럼 보이고요.”
그는 검마의 뒤를 흘끗 쳐다보고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뒤에 서 계신 무사분. 어깨에 당한 상처는 비도에 당한 흔적으로 보이는군요. 독에 비도에…. 당가일 게 뻔하지 않습니까?”
소교주는 흥미롭다는 듯 희미한 미소를 띄웠다.
“취월걸개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생각보다 대단한 사람이군요? 염강표국을 떠올린 것도 대단한데, 당가까지 끌어들일 생각을 하다니.”
검마는 소교주의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여기서 어떤 말이라도 했다가는 그의 무능과 실패를 내비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그는 결국 입을 열고자 마음먹었다.
지금 그의 수모와 창피는 한순간일 뿐.
무엇보다 급한 것은 남궁무룡의 손자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취월걸개뿐만 아니라…….”
“잠깐, 잠시만요.”
그런데 소교주가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조금 전까지 유유자적해 보이던 그의 태도와는 달리 갑자기 무언가 급박한 표정이었다.
그는 검마의 바로 코앞까지 보법을 펼쳐 한달음에 다가왔다.
그리고는 그의 몸에 코를 가까이 데었다.
“이런.”
소교주가 인상을 팍 쓰며 검마에게서 떨어졌다.
검마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이러고서는 무슨 마도천하를 이루겠다고.”
거친 말이 튀어나왔다.
조금 전까지 온화한 얼굴을 유지하던 소교주가 아니었다.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도 된 듯 냉정한 얼굴이었다.
“왜 이렇게 나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지요?”
검마는 순간 분위기가 이상해지는 것을 느꼈다.
마음이 아프다.
조금 전 염강표국을 몰살시켰다고 했을 때 했던 바로 그 말이었다.
“기회를 드리지요. 지금 당장 만리향을 제거할 방법을 압니까?”
“만리향……?!”
그는 만리향이라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취월걸개가 충분히 타격을 가할 수 있음에도 금나수의 수법으로 그를 잡아채려고 했던 것을 기억했다.
“취월걸개! 그 야비한 거지가!”
스릉-
검마가 분통을 터뜨렸지만, 소교주는 자신과는 관계없다는 듯 차분한 눈으로 등허리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취월걸개라면 지금 당장이라도 쫓아오고 있을 터. 만리향을 없애는 방법을 모른다면…. 자결하시지요.”
“뭐, 뭐라고?”
“아무래도 그러실 생각이 없으신 것 같군요. 저는 정말로 마음이 아픕니다.”
냉정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소교주가 검마에게 다가갔다.
검은 든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한다.
그와 동시에 그의 주변으로 바람이 흐르기 시작했다.
“잠깐, 소교주. 내 말 좀 들어보십시오.”
“저도 그러고 싶지만, 시간이 없군요. 취월걸개의 신법이 빠르다는 것은 검마께서 제일 잘 아시지 않습니까?”
검마는 다급하게 그를 말리기 시작했다.
“나 검마요! 나에게 이러고서 교주님께서 가만히 있으실 것 같습니까?!”
“아까 못 들으셨습니까? 신교의 위치를 알아낼 수 있는 모든 방도를 사전에 차단하라 하셨다고요.”
소교주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와 동시에.
카앙-!
번개 같은 움직임으로 검마에게 검을 내질렀고, 검마는 그것을 막아내었다.
쉽게 죽어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소교주는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현재 나의 말은 곧 교주님의 말입니다. 자결하라는 말에도 불복종. 편히 죽여 주겠다는 말에도 불복종. 교주님의 뜻에 반하는 행동으로 즉결 처형하겠습니다.”
“…….”
검마는 대답할 수 없었다.
방금 일 합에서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자신은 소교주의 상대가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평소의 나였다면 능히 이길 수도 있었을 것을.’
하지만 지금 그는 평소 능력의 오 할도 채 발휘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애초에 취월걸개를 상대로 공력을 대부분 소진하였고, 심지어는 작은 내상까지 입은 상태였다.
물론 지금도 죽자사자 반항한다면 동귀어진이라도 할 수 있을 것이 분명하건만…….
쒜에엑-!
날아오는 검을 막으려던 검마는 반항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검을 내리고 두 눈을 감았다.
지금 이 순간, 그는 죽음 앞에서 하현에 대해 알려야 한다는 것을 까맣게 잊은 지 오래였다.
푸학! 털썩-
일 검에 그의 신형이 무너졌다.
검마(劍魔)라는 이름치고는 참으로 초라하고 허무한 죽음이었다.
그리고선 소교주는 수하들에게도 만리향이 묻혀 있나를 확인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들에게는 아무런 흔적이 없었다.
“따라 죽고 싶은 자는 따라 죽어라. 살고 싶으면 나를 쫓아오고.”
검마를 대할 때와는 또 다른 단호한 태도.
당연하게도 모든 수하는 소교주를 따랐다.
소교주는 숨이 넘어가는 그를 잠시 바라보고는 자리를 떴다.
휘잉-
서 있는 사람이 모두 사라진 이곳에 을씨년스러운 바람이 흘렀다.
쓰러진 검마의 빈소매가 유독 펄럭였다.
* * *
검마를 쫓기 시작한지 이각 여가 흘렀다.
열심히 달리던 당규호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르신. 검마의 움직임이 멈추었습니다.”
“움직임이 멈춰?”
“네. 향이 조금씩 가까워져 가고 있습니다. 조금 전까지는 계속해서 멀어지고 있었는데요.”
“그곳에 마교의 은신처가 있을 가능성은?”
당규호가 잠시 생각을 하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크지 않을 것 같습니다. 여기부터 향이 나오는 곳까지는 언덕 몇 개만 있을 뿐,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입니다.”
“제길. 불안하군. 아니면 원군이라도 만난 것인가?”
취월걸개는 스스로 말하고는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추격하고 있다는 것은 추호도 모를 것이 분명했다.
원군을 만났더라도 이렇게 기다리고 있을 리는 없는 것이다.
“가서 확인하는 수밖에 없군.”
취월걸개는 투덜거리곤 추격에 박차를 가했다.
“엇……?!”
잠시 후, 만리향의 향이 멈춘 지점에 도착했을 때, 취월걸개는 저 멀리서도 보이는 피 웅덩이를 보고는 놀라는 소리를 내었다.
고여있는 피에는 시신 한 구가 코를 처박고 있었다.
“설마 검마……?”
그는 반신반의하며 말했다.
아니, 사실 취월걸개는 이미 그자가 검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교의 무복을 입고, 팔 하나가 없는 자는 흔치 않으니까.
쓰러진 시체를 뒤집자, 당연하게도 검마의 얼굴이었다.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당규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아무리 조금 전까지 목숨을 걸고 싸우던 적이라도 해도, 이렇게 처참하게 죽어있는 것을 보는 것이 즐거운 일은 아니니까.
“그놈이다.”
“그놈이라뇨?”
“염강표국을 몰살시킨 두 명 중 하나.”
취월걸개는 검마의 왼쪽 어깨부터 오른쪽 옆구리까지 길게 이어져 있는 검흔을 가리키며 말했다.
“검이 왼쪽 어깨부터 사선으로 그어졌다는 것은 왼손잡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아주 잔혹한 성정을 지녔음이 분명하다. 검이 지나가는 자리가 즉사할만한 급소는 기가 막히게 피해 갔다. 그렇다고 해서 살아날 수 있는 정도는 아니고.”
그가 바닥에 고여 있는 피 웅덩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렇기에 이렇게 웅덩이가 생길 정도로 모든 피를 다 흘려내고 나서야 절명했을 것이다.”
“그런 짓을 왜 하는 겁니까?”
하현이 물었다.
그는 정말로 그 행위가 이해 가지 않았다.
“모르지. 상대가 고통받는 것을 즐길 수도 있고, 그게 아니라면 단순한 습관일 수도 있고…. 하여간 둘 중의 무엇이든 간에 정상은 아니라는 건 확실하지.”
취월걸개는 능숙하게 검마의 시신을 수습했다.
“돌아가자. 이 시신은 무림맹으로 가져가야겠다. 혹시 알아낼 게 있을 수도 있으니.”
하현과 당규호는 취월걸개가 검마의 시신을 수습하는 동안 주변에 남은 흔적은 없는지를 찾아보았다.
하지만 주변에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미련 남기지 말고 돌아가자. 마교의 핵심 전력 중 하나를 이렇게 처리한 것도 나름 큰 수확이라고 볼 수 있으니까.”
하현과 당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더 추적하려면 할 수는 있겠으나, 크게 의미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그들은 쉬지 않고 달려왔으나, 곧바로 뒤돌아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