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중경시 옥화산에 자리를 잡은 녹림채 용호채(龍虎砦)
그곳의 부채주 대력거웅(大力巨熊)은 용호채에 들어온 지 삼 년도 채 되지 않았건만, 부채주의 위치까지 오른 자였다.
“부채주. 갈림길 아래에서 봇짐을 진 사람 세 명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사람? 무림인인가?”
“행색이 그래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아무 병기를 들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제일 윗 개울을 지나갈 때까지는 충분히 두고 보아라.”
“알겠습니다!”
원래 녹림도는 충성심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았으나, 조금 전 부하가 대력거웅을 바라보는 얼굴에는 충성심이 절절 흘렀다.
“특별한 점은 없어 보입니다. 여기 옥화산을 가로질러 중경을 빠르게 지나가려는 보부상으로 보입니다.”
“그래? 좋다. 느티나무 아래 공터에서 급습하는 것이다.”
“알겠습니다!”
본디 다른 산적들은 부채주의 위치까지 오른다면 직접적으로 노략을 하는 일은 거의 하지 않는다.
녹림도가 무림인을 잘못 건드려 힘이 필요하거나, 가끔 관병(官兵)들이 산채 주변에 나타나면 처리하는 일을 주로 하고, 나머지 시간은 대부분 무공 수련 등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게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대력거웅은 조금 달랐다.
그는 현장에서 직접 사람들을 노략질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것이야말로 그가 산적이 된 이유였으니까.
“생각보다 산이 험하네요.”
“그러게 말이네. 들어오기 전에는 이렇게 높고 깊게 보이지는 않았는데.”
“형님들, 잠시 저 앞에서 쉬어 가실까요? 좋은 나무 그늘이 있네요.”
보부상들은 대력거웅이 수하에게 말했던 느티나무 그늘에 잠시 멈춰 물을 나누어 마셨다.
대력거웅은 경거망동하지 않고, 유심히 그들을 지켜보았다.
‘아이……?’
셋 중의 하나는 덩치는 크지만, 얼굴이 앳되어 보였다.
그렇기에 대력거웅은 더욱 마음을 놓았다.
‘어린 나이부터 고생이지만, 안타깝게도 여기까지다.’
대력거웅은 풀숲으로 숨어 천천히 움직였다.
거대한 덩치가 무색하게 풀숲은 대력거웅을 완전히 숨겨주었다.
저 보부상들이 무공을 익혔을 수도 있고, 익히지 않았을 수도 있다.
허나 그는 보부상들을 사냥하기로 마음먹었다.
척-
그가 조심히 등 뒤에서 화살 하나를 꺼내 활시위를 먹였다.
끼이이익
활시위가 당겨지고 대력거웅은 숨조차 쉬지 않으며 기다렸다.
그가 무림인도 무서워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이 활이었다.
보통 산적이라고 하면 길가에 갑자기 튀어나와 '이곳을 지나가고 싶으면 있는 것을 다 내놓아라!'라고 말하며 길을 가로막는 사람들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건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지.’
실제로 그런 식으로 영업활동을 하는 산적들도 많이 있다.
하지만 대력거웅은 그런 바보 같은 모험은 하지 않는 부류였다.
아무리 무공을 익혔다고 한들 날아오는 화살에 맞으면 치명상을 입는 건 매한가지.
돈을 가지고 있든 없든 일단 죽이고 나서 주머니를 뒤지는 것이 대력거웅의 영업방식이었다.
‘내 활이 적중하면 너희도 곧장 연이어서 쏘아라.’
‘네. 부채주님.’
그는 부하들에게 속삭였다.
그가 데려온 열 명의 부하들 역시 활을 한 자루씩 들려준 것은 당연지사.
한두 발이 빗나가더라도, 열 개가 넘는 화살을 어찌할 수는 없을 터.
“자. 충분히 쉬었으면 출발하지.”
“그러죠. 형님.”
“이 산은 어디까지 이어지는 걸까요?”
보부상들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점점 그가 숨어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대력거웅은 입가에 슬쩍 미소를 흘렸다.
'좀 더 가까이…. 가까이…. 이런 경우에는 더 어린 쪽을 먼저 치는 것이 정석이지'
그리고는 이 정도면 되었다 싶을 때 그는 활시위를 놓았다.
픽!
‘어……?’
그런데 그 순간 그는 어린 보부상과 눈이 마주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쒜에엑!
쏘아진 화살은 순식간에 날아갔다.
이제 저 화살은 사내의 가슴팍에 박히고 가슴에서는 붉은 꽃이 피리라.
오늘은 바람도 불지 않았다.
대력거웅은 명중하리라는 것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콰악-!
대력거웅은 순간 두 눈을 의심했다.
가슴팍에 박히리라 의심치 않던 화살이 그 아이의 손에 잡히고 말았으니까.
“쏴, 쏴라!”
그는 다급하게 소리쳤다.
화살을 잡아낸 자가 노골적으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순간 그는 공포심이 깃들었다.
슉슉슉- 슉!
화살이 쏘아졌다.
‘이것이라면 반드시 죽는다!’
수하들에게 활을 훈련시킨 보람이 있었다.
열 개의 화살은 비처럼 일제히 앞으로 날아갔다.
퍼버버벅-!
파바밧!
그런데 열 개의 화살은 무색하게도 단 한 발도 그들에게 명중하지 않았다.
앞서 그의 화살을 잡아낸 아이와 그 옆에 있던 자의 손에 몇 개가 잡혀있었고,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한 명은 그 새에 봇짐을 끌러 그 짐으로 화살을 막아내었다.
'고수다. 오늘이 내 제삿날인가?'
대력거웅은 허리춤의 도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풀숲에서 뛰쳐나오며 소리쳤다.
“다들 도망쳐라!”
그리곤 가장 앞까지 나와 있었던 아이에게 도를 휘둘렀다.
까앙!
아이는 어느샌가 검을 뽑아 들고 있었다.
봇짐에 숨겨 놓았던 모양이었다.
척 봐도 고급으로 보이는 그 검은 붉은 검신을 가지고 있었다.
대력거웅쯤 되면 척 보기만 해도 그 검이 얼마나 가치를 가졌는지 알 수 있다.
‘저 정도 수준의 검을 가지려면 굉장히 부자거나 고수이거나, 둘 중의 하나…. 제길. 이렇게 허무하게 끝인가.’
까앙- 까앙- 서걱!
"크윽······."
대력거웅은 보부상의 검을 두 합을 막아내더니, 결국 오른쪽 어깨를 깊게 베이고 말았다.
그 덕에 손에 힘이 빠져 도마저 놓쳐버리고 말았다.
“무공을 익혔군요. 혹시 당신이 이 녹림채의 채주 입니까?”
어린 보부상은 하현이였다.
하현은 조금은 놀랐다는 얼굴로 말했다.
아무리 무공을 익혔다고 해도, 하현의 검을 일 검도 막아내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두 합이나 막아낸 것이다.
“채주님은 나 따위와는 비교할 수도 없으시다.”
“그러면 호법 중 하나?”
이번엔 그의 얼굴에 놀람이 깃들었다.
“호법이 있다는 것은 어떻게 알았지?”
“반응을 보아하니, 호법도 아니신 것 같고…. 그렇다면 부채주겠군요.”
그는 경악하는 표정을 지었다.
대답은 하지 않았건만, 표정으로 모든 대답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부채주님!”
그때 풀숲에서 몇 명의 사람이 불쑥 튀어나왔다.
그들의 활에는 화살이 한 대씩 재어져 있었다.
산적들은 망설임 없이 활시위를 놓았다.
지금껏 어찌나 사람들을 많이 죽여 왔는지, 망설임 하나 없는 동작이었다.
핑-!
처음보다 훨씬 가까운 거리.
그런데도 하현은 망설이지 않고, 검으로 화살을 모두 막아내었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그들이 보기에 실로 신묘한 경지의 검이었다.
“살인에 익숙하시군요.”
조금 전 화살은 정말로 그를 죽이고자 하는 살기가 느껴졌다.
그간 저 활에 희생당한 희생양이 한 둘이 아닐 것이다.
샤악!
하현의 왼손이 품 안에 들어왔다가, 사내들을 향해서 뿌려진다.
그러자 네 개의 빗줄기가 그들의 이마에 박혔다.
털썩-
그들은 한 마디 단말마도 남기지 못하고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형님. 이들을 살려 보내면 안 될 것 같습니다.”
“내 생각도 그래.”
남궁환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어느새 검을 뽑아 들고 있었다.
팟! 촤악-!
남궁환의 검이 움직이는 곳마다 피가 흩뿌려졌다.
지금껏 수많은 양민들의 목숨을 빼앗은 자들의 말로로서는 퍽 적당해 보였다.
* * *
죽음의 공포 앞에서 대력거웅은 결국 산채의 위치와 더불어 상세한 정보까지 모두 하현에게 말해 주었다.
특별히 고문할 것도 없었다.
그가 먼저 목숨만은 살려달라며 하현에게 빌었으니까.
“현재 총인원은 삼백사십 여섯 명입니다. 그중에서 무공을 익힌 자는 저와 채주님을 포함하여 모두 백 스물여섯 명입니다.”
“백 스물여섯?!”
제갈정현이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그가 생각지도 못한 숫자였다.
“그중에 백 십 명은 저잣거리에 흔히 돌아다니는 삼재 검법 정도를 익힌 자들입니다.”
“그들은 무공을 익힌 지 얼마나 되었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채주께서 최근 모두에게 기초 무공을 가르치기 시작하여…….”
남궁환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랬군. 만약 지금 이곳을 소탕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시간이 흘렀으면 위험할 뻔했어.”
삼류무인이라고 할지라도, 그 숫자가 모이면 강력해지는 것은 당연지사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두각을 발휘하는 자가 있을 수도 있으니, 지금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이 다행일 수도 있었다.
“그러면 나머지 열여섯의 수준은 어떻지?”
“저와 채주를 제외한 나머지 열넷은 내력을 느끼고, 병기에 기운을 불어넣을 줄 아는 수준입니다.”
하현은 대충 이들의 수준을 알 것 같았다.
지금까지의 정보로는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어 보였다.
그런데 한 가지 찜찜한 것이 남아 있었다.
“채주는 누구죠?”
“그건 저도 잘 모릅니다…….”
대력거웅이 말끝을 흐렸다.
눈치로 봐서는 정말 모르는 것 같기도 했다.
“모른다? 그걸 믿으라고 하는 소리인가?”
제갈정현이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정말입니다. 처음부터 자신의 정체를 철저히 숨겼습니다. 아니, 솔직히 말해 산채에 잘 나타나지도 않습니다.”
그의 말은 진실로 들렸다.
제갈정현이 말해 준 정보에도 산채를 자주 비운다고 했던 것으로 보아 사실일 가능성도 컸다.
“그러면 채주의 무공 수준은요?”
“…굉장히 강합니다.”
“당신과 비교하면요?”
“저는 채주님께 삼초지적도 되지 않습니다!”
“삼초지적도 되지 않는 다라.”
공교롭게도 하현도 정확히 세 번의 출수로 대력거웅을 쓰러뜨렸다.
“이제 물어볼 것은 다 물어본 것 같은데, 제갈 형께서는 더 물어보고 싶은 게 있나요?”
“없네.”
“환 형은?”
남궁환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현은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며 대력거웅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우우웅-
그의 손에 기운이 몰려들었다.
대력거웅도 무공을 배운 무림인.
그도 하현의 손에 내력이 모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잠, 잠시만 대협! 모든 것을 말해드리면 살려준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목숨을 빼앗을 생각은 없습니다.”
“그럼 왜……?”
하현은 대답 없이 대력거웅의 앞에 서더니 그의 아랫배를 향해 장을 날렸다.
뻐억-!
“끄어억!”
그는 배를 부여잡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리곤 밀려드는 엄청난 고통에 곧 눈을 까뒤집고 혼절하고 말았다.
“단전을 폐한거야?”
“응. 이대로 살려두었다가 또 양민들을 괴롭히면 어떡해. 사파문에 들어갈 수도 있고.”
“이런 재주는 어디서 배운 거야?”
“사실 처음 해보는 거야.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남궁환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역시 너는 너다.”
취월걸개의 항룡유회를 뒤에서 지켜보며 스스로 익힌 장법이다.
아직 이름도 붙이지 않은 기초 단계이지만, 내가중수법을 활용하여 단전을 파괴하기에는 충분했다.
“제갈 형. 여기서 관아가 먼가요?”
“조금 걸려. 왕복으로는 두 시진쯤.”
“그러면 관아로 가셔서 관군을 불러와 주세요. 저희는 먼저 용호채로 가 있겠습니다.”
제갈정현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하현을 빤히 바라보았다.
하현의 배려를 깨달은 것이다.
관아에 사람을 부르러 가게 되면 자연스레 그곳에 이름을 알리게 될 테니까.
“고맙네. 정말 고마워!”
“관아에 가시면서 이 아저씨도 데려가시고요. 아마 그때까지 깨어날 일은 없을 거예요.”
“관군은 얼마나 불러야 하는가?”
“될 수 있으면 최대한 많이. 최소한 이백 명 이상은 되면 좋겠습니다.”
“알겠네. 바로 출발하지. 이따가 보세나.”
하현과 남궁환은 천천히 대력거웅이 말해 준 용호채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제갈정현이 관군을 이끌고 돌아오기 전까지 검을 들 수 있는 자는 하나도 없게 만들리라 다짐하면서.
남궁세가 천재 외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