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길륭섭은 산적들을 이끌고 중경시 관아로 돌아가기 직전, 용호채를 한 번 둘러보았다.
그래도 이 주변을 주름잡고 있던 산적들의 본거지이니, 남긴 것도 많았으리라는 판단하에서였다.
“살아있는 사람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소?”
하현은 주변을 둘러보는 길륭섭에게로 걸어가며 말했다.
“기다리는 동안에 혹여 납치를 당했거나 강제 노역을 하고 있는 자가 있을지도 모르기에 간략하게나마 내부를 수색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사람은 한 명도 없더군요.”
길륭섭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 옥화산은 그가 좋든, 싫든 그의 관할 구역 내였다.
양민이 납치를 당했는데, 관아에서 알지도 못하고 있다면 큰 문제가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이구려, 그러면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야겠소. 저 극악무도한 산적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니 말이오.”
“돌아가시기 전에 꼭 보셔야 할 게 있습니다.”
“봐야 할 거라니?”
하현은 길륭섭을 이끌고 산채 가장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창고로 보이는 몇 개의 건물이 보였다.
길륭섭은 순간 자신의 이마를 탁! 쳤다.
“이들이 그동안 노략질해온 것들이군! 맙소사. 이것을 잊다니.”
어느 곳이든 그 근거지를 털었을 때, 그들이 보유하고 있던 재화나 금은보화를 챙기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길륭섭 역시 그것을 잘 알고 있었으나, 하현이 보여준 엄청난 광경에 정신이 팔렸던 탓인지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내 당장 부하들에게 빗장을 부술 연장을 가지고 오라고 하겠소.”
“진정하시고 자세히 보세요. 제가 이미 풀어 놓았습니다.”
그가 눈을 비비고 다시 창고를 보니, 단단히 걸려 있어야 할 빗장과 잠금장치가 모조리 거칠게 뜯겨 있었다.
누구의 소행인지는 물어보지 않아도 뻔했다.
하현이 싸우는 것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길륭섭이었다.
“이 빌어먹을 산적 놈들. 무지하게도 쌓아놓았군.”
창고엔 은자와 더불어 각종 패물이 쌓여 있었다.
길륭섭은 눈앞에 금은보화를 이렇게 쌓아놓고서도 화가 나는 것은 처음이라고 느끼며 욕을 내뱉었다.
“이렇게 금은보화를 쌓아놓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양민이 피를 흘렸을지…….”
하현이 낮게 읊조렸다.
그의 말대로였다.
통행세를 내고 지나가는 경우도 있었겠지만, 대력거웅이 하현에게 다짜고짜 화살을 날렸던 것을 생각하면 목숨을 잃은 자들도 심심치 않게 많았을 것이다.
“이 정도의 양이라면 지금 있는 인원으로는 다 가져가기도 힘들 것으로 보이오.”
“여기 온 관군들께서는 산적들을 호송하기에도 빠듯하겠죠.”
“그러면 몇 명은 여기서 보초를 서도록 하고, 나머지는 산적들을 호송하고 다시 오는 수밖에.”
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 방법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 옆 창고에는 식량이 가득하고, 그 옆 창고에는 각종 병기가 있으니 그것도 챙기기 위해서는 마차를 가져오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이 산골에 마차라…. 그건 고민을 해보겠소.”
하현이 싱긋 웃었다.
길륭섭이 생각보다 말이 잘 통하는 자라고 생각했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잠, 잠깐. 어딜 간단 말이오?”
“저와 형은 남궁세가로 돌아가는 길이였습니다. 그러니 가던 길을 가야지요.”
길륭섭은 순간 당황했다.
“이 금은보화를 보고도 그냥 간단 말이오?”
“그러면요? 이 금은보화가 제 것이라고 주장해야 합니까?”
“그, 그런 건 아니지만 그래도…….”
하현이 피식 웃었다.
“이 금은보화는 제가 발견했다고 하더라도, 제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 피를 흘리고, 목숨을 잃으며 뺏긴 돈입니다. 관아에서도 피해자를 전부 찾을 수는 없겠지만, 최대한 피해자 구제에 이 돈을 써 주실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아……!”
길륭섭은 하현의 담담한 말에 가슴이 일렁였다.
그의 말은 특별할 것 없는 정론이다.
정파의 무인이라면 응당 할법한 말.
하지만, 그는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것 같았다.
‘이런 무인을 만난 것이 언제인지……!’
길륭섭은 하현에게 감동하며 말했다.
“그러지 마시고 같이 관아로 가시지요. 오할…. 아니, 최소한 삼 할이라도 발견한 분에게는 권리가 있습니다.”
그는 조금 전까지는 반존대를 해왔으나, 지금은 겨우 아들뻘인 하현에게 존칭을 하고 있었다.
하현은 길륭섭이 자신을 보고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보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만약 제가 재물이 탐났다면 굳이 대장님을 이곳에 데리고 오지 않았을 거예요. 조용히 모두가 돌아오고 나서 챙겨가면 그만이니까.”
“아무리 그래도…….”
“다만, 혹여 이 재물을 허튼 곳에 쓴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면 가만히 있진 않을 것입니다.”
하현의 진중한 말에 길륭섭이 펄쩍 뛰었다.
“우리 중경시 관군을 어떻게 보시고…! 다들 공적에 메말라 있는 것은 매한가지나, 우리는 황제의 군인입니다. 불명예스러운 짓으로 부를 쌓고 싶지는 않습니다.”
길륭섭의 말은 진중했다.
그의 말대로 길륭섭이 출세를 위해서는 어떤 일이라도 할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명예와 관직에 있어서였다.
그는 그 흔한 뇌물 한 번 받아보지 않은 자였다.
혹여나 그것이 어떤 경로로든 밝혀지면 그때는 공직에서도 내려와야 한다는 것도 큰 이유지만.
“그럼 잘 되었네요. 부탁드립니다.”
하현이 이제는 제법 미청년 태가 나는 얼굴로 싱긋 웃었다.
길륭섭은 그 얼굴을 보고 더는 그를 붙잡을 수 없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하현에게 정중히 포권했다.
“남궁하현 대협. 대협의 뜻은 우리 관에서 잘 받들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언젠가는 꼭 중경에 들러 주시기 바랍니다.”
“네. 그렇게 할게요.”
하현도 그에게 포권으로 대답했다.
이 순간, 길륭섭은 하현을 어린 무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부터, 그에게 하현은 보통의 훌륭한 무인이었다.
* * *
하현이 길륭섭과 창고로 향했을 때, 제갈정현은 그와 함께 남아 있던 남궁환에게 물었다.
“환 동생. 괜찮은가?”
“무엇이요?”
“지금 관군의 대장과 하현이 함께 갔지 않은가?”
“그렇죠.”
남궁환은 왜 다 알고 있는 것을 묻느냐는 얼굴이었다.
“눈치를 보아하니 전리품을 대장에게 말해 주려는 것 같은데, 이렇게 되면 모든 공이 하현에게로 돌아가지 않는가?”
“당연히 그렇게 되겠죠? 그리고, 실제로도 현이 혼자서 한 게 맞는걸요.”
“그래도…….”
남궁환의 표정이 일순 험악해졌다.
애초에 제갈정현이 이곳까지 오게 된 이유와 지금 남궁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를 모두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지금 그 말은 제게 하현의 공을 가로채라는 말입니까?”
“공을 가로채라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자네도 한 몫 거들었다는 것을 말해야…….”
“제가 지금 화가 나려 하니, 그만 말씀하시지요.”
제갈정현은 차가운 남궁환의 말투에 언뜻 정신이 들었다.
“아, 그러니까. 나는 그런 말을 하려던 게 아니라…….”
“아뇨. 지금 그런 말을 하려 했습니다. 우리 사이를 이간질이라도 하겠다는 겁니까?”
“절대 그럴 의도는 없었네…! 사과함세. 정말 미안하네.”
서슬 퍼런 남궁환의 눈빛에 제갈정현은 거의 빌다시피 남궁환에게 사과를 빌었다.
말실수했다는 것을 몇 번이나 자기 입으로 말하고 나서야 남궁환의 노기가 조금 누그러졌다.
“알겠습니다. 앞으로는 절대 그런 식으로 말씀하지 마세요.”
“주의하도록 하겠네.”
“알겠습니다.”
한바탕 말이 오가고 난 뒤에 둘 사이에서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한참 동안의 침묵을 깬 것은 남궁환이었다.
그는 그보다 연장자인 제갈정현에게 먼저 사과했다.
“화낸 건 미안합니다.”
“아니네. 내가 잘못 생각했어. 그럴 만했네.”
제갈정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받아주는 남궁환을 보다가 물었다.
“진심으로 궁금한 게 있는데, 하나만 물어봐도 되겠는가?”
“대답할 수 있는 것이면 대답해드리겠습니다.”
“자네는 가주에 대한 욕심이 없는가?”
“네. 없습니다.”
“어떻게 그리 쉽게 포기할 수 있었지?”
그의 물음은 진심이었다.
가주가 되는 것은 제갈정현의 인생 최대의 목표다.
그런데 너무나도 다른 사고방식을 가진 남궁환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남궁환의 입에서는 대답이 쉽게 나왔다.
생각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저는 민 형님이나, 하현이보다 부족한 점이 많으니까요.”
“그게 다인가?”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까?”
“욕심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자네는 더 높은 곳에 오르고픈 욕심이 없는가?”
남궁환은 이번에도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도 사람인걸요. 저에게도 당연히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 그렇게…….”
제갈정현은 의구심을 지우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갈망.
평생 동안 그가 가지고 있던 고민이다.
그런데 남궁환은 그로부터 어찌나 자유로워 보이는지, 욕심을 모두 내려놓은 고승과 대화하는 듯한 착각마저 일었다.
“하하…. 제갈 형. 그거 아십니까?”
“무엇을?”
“하현이 하루 동안 수련에 쏟는 시간이 얼마인지 아십니까? 또 민 형님은요?”
제갈정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욕심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하현과 남궁민의 수련시간이라니.
그가 대답할 생각이 없어 보이자, 남궁환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거짓말이 아니라, 둘 다 하루에 여덟 시진씩은 수련에 힘을 쏟습니다.”
“여덟 시진? 잠도 안 자고, 밥도 안 먹는단 말인가?”
남궁환이 고개를 저었다.
“나머지 네 시진이 있지 않습니까? 그동안 식사하고, 잠자고…. 다 하는 거죠.”
“그게 어떻게 가능하다는 말인가……?”
“심지어는 그 생활을 하루, 이틀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몇 년이 넘어가도록 오늘같이 임무가 있는 날이 아니면 빼먹지 않고 수련하죠.”
대답도 못 하고 얼이 빠져있는 제갈정현을 보고, 남궁환이 큭큭 웃으며 말했다.
“그런 둘을 보면서 제가 가주를 꿈꿀 수 있겠습니까? 자리는 그 자리에 마땅히 어울리는 사람에게 가야 합니다.”
“…….”
제갈정현은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남궁환의 말에 무언가 깨닫는 바가 있는 것 같았다.
“그럼 제갈 형. 제가 한 가지 묻겠습니다.”
“무엇인가?”
“과연 제갈 형은 조부님의 총애를 받고 있으시다는 큰 형님보다 더 큰 노력을 하고 계십니까?”
“나, 나도…….”
남궁환이 고개를 단호히 젓고는 말을 이었다.
“이런 술수나 공로를 쌓으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무인입니다. 결국은 우리의 업적과 능력은 무공으로 내보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과연 제갈 형께서 그만큼 무공에 몰두하고 계시냐는 말입니다.”
“…….”
제갈정현은 대답할 수 없었다.
남궁환의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니오’ 였으니까.
하지만, 그는 그 대답을 입으로 꺼낼 용기가 부족했다.
“알겠습니다. 대답하지 않으신 것으로 모든 대답을 들었으니까요. 저기 현이가 오는군요.”
때마침 하현이 길륭섭과 함께 창고에서 돌아오고 있었다.
남궁환은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하현을 맞으러 갔다.
“결국, 우리는 무인이라…….”
제갈정현은 남궁환이 했던 말을 한 번 읊조리곤 남궁환을 바라보았다.
하현을 보며 진심이 담긴 미소를 짓는 남궁환을 보며, 제갈정현은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 * *
잠시 후.
하현과 남궁환은 중경시에 훗날 한 번 들르겠다고 길륭섭과 약속하고는 남궁세가를 향해 떠났고
제갈정현은 이번 용호채에서의 일을 마무리 짓고, 논공행상하기 위해 관군들과 함께 말을 몰아 중경시 관아로 돌아가고 있었다.
“남궁세가가 대단하다는 말은 들었지만, 두 소룡(小龍)을 만난 기분이오.”
“그러게 말이오. 저도 꽤 여러 날을 함께 했지만, 가늠할 수 없는 두 형제였소.”
“아참! 그러고 보니, 하현 공자께서 제갈 공자께도 한 번 물어보라 했소.”
남궁환과 남궁하현에 대해 떠들어대던 관군들은 제갈정현에게 말했다.
“무엇을 말이오?”
“용호채에서 찾은 은자와 패물들에 대한 권리 말이오. 하현 공자께서는 그 권리를 포기하셨지만, 분명 제갈 공자께도 그 권리가 있으니, 처분을 논의하라 하셨소이다.”
“아…….”
제갈정현은 그 이야기를 듣고 탄식을 내뱉었다.
자신이 몹시도 초라해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의 표정이 급격히 나빠지는 것을 보고, 길륭섭이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이오?”
“아, 아니오…. 잠시 생각할 게 있어서…….”
제갈정현은 무엇을 생각하는지 한동안 말이 없었고, 길륭섭은 그의 대답을 끈질기게 기다려 주었다.
중경시에 다 다다랐을 무렵, 제갈정현은 무언가 결심한듯한 얼굴이었다.
“길 대장.”
“왜 부르시오?”
“아까 물어본 것 말이오…….”
“은자와 패물에 대한 권리 말이오?”
“그렇소. 저도 그 권리는 포기하도록 하겠소. 부디 양민들을 위하여 써주시오.”
“그게 정말이오?”
제갈정현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갑자기 말머리를 반대쪽으로 돌렸다.
“제갈 소협. 지금 무엇 하는 것이오?”
“그리고, 논공행상은 필요 없을 것 같소.”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게요?”
제갈정현은 올곧은 눈빛을 보내오며 말했다.
지금까지 그가 가지고 있던 고민과 번뇌를 대부분 털어낸 것으로 보이는 맑은 눈이었다.
“대장도 잘 알고 있겠지만, 이번 일은 내가 한 것이 전혀 없소. 남궁세가의 남궁환, 남궁하현. 그 두 소영웅이 해낸 일이지.”
“그런데 그게 왜……?”
“그러니, 내가 가서 논공행상한다는 것을 말이 안 되지. 훗날 언젠가 내가 해결한 일로 당당하게 나타나겠소. 그럼 빨리 세가로 돌아가야 할 이유가 생겨서 이만. 이랴!”
그는 길륭섭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말을 몰아 반대 방향으로 출발했다.
그 방향은 중경시가 아닌, 호북성 방향이었다.
급작스럽게 시야에서 점점 멀어지는 제갈정현의 뒷모습을 길륭섭은 오래도록 쳐다보았다.
그러다 문득 오늘 깊은 인상을 받은 세 무인의 이름을 되뇌었다.
“남궁환, 남궁하현…. 제갈정현.”
그는 머지않은 미래에 그들의 이름이 중원에 널리 알려질 것이라는 직감이 강하게 들었다.
남궁세가 천재 외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