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세상엔 이런 우연도 있다.
같은 객잔, 같은 자리에서 바로 며칠 전까지 함께하던 사람의 형을 만나다니.
하현과 남궁환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자신들을 소개했다.
“저희는 남궁세가의 남궁하현, 남궁환입니다. 얼마 전에 제갈 형…. 그러니까, 정현 형을 만난 곳도 바로 이곳이었는데, 이 객잔과 인연이 깊군요.”
“하하. 그러면 제 영향이 알게 모르게 있었을 것입니다. 정현이에게 이 객잔을 가르쳐준 것이 바로 저입니다. 이것도 인연인데 잠시 합석은 어떠십니까?”
제갈정규의 제안에 하현은 정중히 거절했다.
“일행이 있으시지 않습니까? 저희가 즐거운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현의 말대로 제갈정규는 두 명의 사람과 함께 앉아 있었는데, 그 둘은 모두 여인이었다.
여인 중 한 명이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 저희는 신경 쓰지 마세요. 이제 막 돌아가려는 참이었어요.”
“하하. 그러면 오늘은 여기까지겠군. 즐거운 대화였소. 오늘 식사는 내가 계산하리다.”
그는 은자를 꺼내어 여인들에게 건네주었다.
은자를 받아든 여인들은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아예 자리를 피해버렸다.
하현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정말 죄송하지만, 저희가 내일 새벽 일찍 움직일 계획이라 오래 앉아 있을 시간은 없습니다.”
“잠깐이면 됩니다. 실례인 것은 아오나, 정현이에 대해서 여쭙고 싶어서요. 만약 소식을 모르신다면 바로 일어나겠습니다.”
여인들이 떠나자 제갈정규의 태도가 완전히 바뀌었다.
그전까지는 풍류를 알고, 멋스러우며 여유가 넘치는 미공자였다면 지금 그는 어딘지 모르게 급해 보였다.
“그렇다면 아는 건 말씀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제갈정규가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정현이와는 언제까지 같이 계셨던 겁니까?”
“이틀 전까지 계속 같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각자 헤어졌죠.”
“이틀! 그러면 그때까지는 살아있었던 모양이군요.”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헤어진 곳이 어디입니까?”
“중경 근처였습니다.”
“중경…! 기어코 그놈이……!”
안도한 것도 잠시였다.
중경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제갈정규는 흥분하기 시작했다.
“혹여 다른 말은 안 하던가요? 공을 세워야 한다느니, 산적을 잡으러 가겠다느니…….”
“했습니다.”
“아…! 너무 늦었단 말인가…….”
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러더니 돌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정말 실례했습니다. 좋은 시간 보내십시오. 이곳도 셈은 제가 치르고 가겠습니다.”
“어디를 가시려는 겁니까?”
“한시라도 빨리 중경에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동생을 찾아야 해서요.”
“지금 정현 형을 찾으러 간단 말입니까?”
“네. 그러려고 이곳까지 온 거니까요.”
대강 이 상황을 파악한 하현이 이미 자리에서 일어난 제갈정규에게 물었다.
“혹시 제갈 형…. 그러니까 동생분께서 공을 세우기 위해 산적을 잡으러 간다하였고, 그것을 말리려 그를 찾으시는 겁니까?”
“정확합니다. 일을 치르기 전에 조금이라도 빨리 움직여야 할 것 같습니다. 정현이라면 홀로 그곳에 들어가고도 남을 아이입니다. 어서 말려야 합니다.”
하현과 남궁환은 슬쩍 눈을 마주쳤다.
제갈정규가 진심으로 자신의 동생을 걱정하고 있는 것이 느껴진 듯했다.
“그 거대한 중경에서 어떻게 찾으실 생각입니까?”
“정확히 말하면 옥화산으로 갔을 겁니다. 옥화산도 제법 큰 산이라고는 하나, 도착하자마자 심마니들을 고용하여 산을 타게 하면 금방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심마니요?”
“산을 돌아다니며 온갖 약초 등을 캐는 자들이기 때문에 옥화산의 지리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제 동생이 올라갈 길이라고 해봤자, 산을 넘나드는 행인이나 사인들이 다닐 길일 터. 경우의 수는 많이 줄어들 겁니다.”
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 방법이면 훨씬 빠르게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그쪽으로 가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제갈정규는 몸을 일으키다 말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하현의 말투에서 무언가 있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하현은 제갈정규가 상황파악도 빠르고, 행동의 결단도 빨라 보인다고 느꼈다.
‘조금 전에 매우 급한듯한 모습을 보여준 것도 모두 연기였을지도 모르겠어. 그래야 필요한 정보를 빨리 얻어낼 수 있으니까.’
그럴 리는 없지만, 하현은 옆에서 머리 굴러가는 소리가 들린다고 착각했다.
“정현 형은 옥화산 산적을 제대로 소탕했습니다. 그리고 제갈세가로 떠났죠.”
“그게 정말입니까?”
“네. 아마도 이제 슬슬 제갈세가에 거의 도착하지 않았을까 싶군요.”
제갈정규는 진심으로 놀란 눈으로 하현을 보았다.
“그러면 이틀 전에 헤어지셨다는 게…….”
“네. 산적들을 소탕하는 것까지는 확인하고서 서로 헤어졌습니다.”
“허허…. 그랬군요. 다행입니다.”
그는 긴장이 풀리는지 의자에 앉아 있는 자세가 조금은 풀어졌다.
그리고는 하현과 남궁환을 스윽 돌아보더니, 입을 열었다.
“두 분께서 도와주신 것이로군요. 동생의 목숨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는 하현과 남궁환을 향해 정중하게 포권한 다음 말을 이었다.
“동생의 실력이라면 살아남기도 힘들었을 것인데, 두 분의 무공이 굉장히 고강하신가 보군요. 역시 남궁세가입니다. 같은 오대세가라고는 하지만, 그 무력에 있어서만큼은 저희 제갈세가보다 훨씬 앞서 있다는 것을 진작 알고 있었습니다. 하하.”
남궁환은 혼자 계속해서 말하는 제갈정규를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아! 제가 혼자서 너무 앞서갔군요. 두 분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보니, 이미 저희 집안 사정은 다 알고 계시는 눈치였습니다. 그리고, 정현이 옥화산에 들어간다는 이야기를 듣고서도 아무런 반응이 없으시더군요. 그러면 둘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것이요?”
“두 분께서 산적 소탕을 도와주시어 아무런 걱정이 없거나, 혹은 전혀 관심이 없거나.”
제갈정규는 하현과 남궁환의 눈을 차례로 맞추고는 말을 이었다.
“그런데 두 분의 눈을 보니, 죽으러 간다는 사람을 그냥 지나치실 분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 한 가지밖에 남지 않습니다. 두 분께서 도와주셨다는 것.”
“오…….”
남궁환은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고, 하현은 씨익 웃었다.
그가 생각한 것과 비슷한 말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긴장을 푸신 것이군요? 집으로 돌아갔다면 이제 빨리 찾을 필요도 없을 테고요.”
“그렇습니다. 하루를 이곳에서 쉬어 갈 수도 있지요.”
제갈정규는 씨익 웃었다.
아직 어려 보이는 하현이 그의 말을 한 번에 이해한 것을 보고 그 역시 하현이 보통이 아니라는 생각을 한 것이다.
“두 분. 혹시 술은 안 하십니까?”
“아쉽게도 저희 둘 다 아직 풍류를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권할 수도 없겠군요. 언젠가는 기회가 있기를 바랍니다. 다음번에는 제갈세가에 한 번 들러 주시지요. 동생의 은혜는 제가 갚겠습니다.”
하현이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은혜랄 것도 없습니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들르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일어나 봐도 될까요? 조금 전에 보낸 여식들이 멀리 가기 전에 잡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제갈정규는 슬쩍 일어나며 둘에게 정중하게 포권하고는 사라졌다.
그 사이에 점소이는 음식을 가져왔고, 남궁환이 음식을 크게 집으며 말했다.
“정현 형이랑은 굉장히 다른 느낌이지?”
“응. 뭐랄까. 진짜 제갈세가 사람을 만난 느낌이랄까?”
“맞아. 딱 그 느낌이야.”
“그래도 동생을 걱정하는 것만큼은 진심으로 보였어.”
하현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훗날 제갈세가에서 다 같이 만나는 것도 꽤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기나긴 여정이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와…! 드디어 보이는구나.”
저 멀리 남궁세가가 보였다.
한 달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었건만, 몇 년은 된 것처럼 많은 일이 있었다.
다그닥 다그닥-
그들은 마지막까지 고삐를 당겼다.
사천에서 목패를 보여주고 공짜로 얻어온 말이건만, 제법 훌륭한 준마였던 덕분에 큰 어려움 없이 올 수 있었다.
‘이러다 말이랑도 정이 들겠는걸.’
말을 돌려주려 사천까지 돌아온다면 결국, 헛수고이기에 역참에선 굳이 말을 돌려주지 않아도 된다고 했었다.
하현은 이 기회에 이 말을 아예 데리고 있겠노라 생각했다.
말값은 사천당가에서 치를 것이니, 훗날 당가가 갚아주리라 생각하면서.
[남궁세가]
드디어 대문 위에 걸린 현판의 글씨가 또렷이 보일 정도까지 다가왔다.
하현은 고개를 돌려 옆에 나란히 있는 남궁환을 바라보았다.
이번 임무에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은 바로 남궁환의 재발견이었다.
그는 무인으로서도, 남궁세가의 직계로서도, 하현의 형으로서도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
“워어, 워어!”
세가의 대문에 당도하여 말에서 내려 진정시켰다.
푸르륵 거리던 말들은 이윽고 숨을 골랐다.
그와 동시에 대문이 열렸다.
대문에서는 익숙한 얼굴이 나왔다.
“할아버지!”
하현은 자신도 모르게 남궁무룡에게 달려가 퍽 안겼다.
이제는 제법 큰 하현의 덩치였건만, 남궁무룡은 그를 안아주며 껄껄 웃었다.
“허허. 잘 다녀왔느냐?”
“네! 이제 몸은 좀 어떠세요?”
“걱정해준 덕분에 이제는 완전히 괜찮아졌단다.”
“다행이에요.”
집 밖에서는 그토록 어른스러운 하현이었건만, 어째서인지 할아버지 앞에만 서면 아이가 되는 듯했다.
“환이는…. 많이 달라졌구나.”
“아닙니다. 아주 작은 깨달음이 있었을 뿐이에요.”
“우리한테는 그 작은 깨달음이 세상 무엇보다 중요하지. 벽을 넘기 전과 넘은 후에는 보이는 그 시야가 다른 법이거든.”
남궁무룡은 남궁환을 보며 눈을 찡긋 해주었다.
남궁환은 그 눈빛에 꾸벅 고개를 숙여 화답했다.
슬쩍 만난 것만으로도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알아봐 준 덕에 남궁환은 목 안에서 무언가 뜨뜻한 것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이 말들은 우리 마굿간에 데려놓아 주실래요?”
“알겠습니다. 도련님.”
“고마워요. 아저씨.”
어느새 나온 하인들이 말을 끌고 들어가고, 하현과 남궁환도 남궁무룡을 따라 세가로 들어섰다.
오후가 한창인 시작이라 다들 수련 삼매경에 빠져있는지, 아직은 그들을 맞이하는 사람도 없었다.
“어서 들어가서 너희 이야기를 듣고 싶구나. 무엇을 했는지, 어떤 것을 느꼈는지.”
“해드리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요!”
“그래? 하하. 기대되는구나.”
“저도 드리고 싶은 말이 아주 많습니다. 저에게도 많은 일이 있었거든요.”
남궁무룡은 남궁환을 슬쩍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아주 밝게 웃으며 말했다.
“오호라. 화멸검의 무용담을 직접들을 수 있다니, 이것 영광이로구나.”
“할, 할아버님! 그걸 어떻게……!”
남궁환이 당황하여 재빨리 물어봤지만, 남궁무룡은 들리지도 않는지 대답도 안 하고, 껄껄 웃으며 계속 걸었다.
세가가 떠나갈 정도로 큰 웃음이었다.
* * *
하현이 남궁세가에 도착했을 때.
제갈정규 역시 제갈세가에 도착했다.
제갈정현을 찾으러 나갈 때보다는 여유로운 태도였지만, 막상 동생이 정말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급하게 돌아온 그였다.
그는 제갈세가에 도착하자마자 하인들에게 제갈정현이 돌아왔는지부터 물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어제 돌아왔다고 대답해주었고, 그는 거침없이 제갈정현의 방으로 가, 문을 열었다.
“정현아. 돌아왔다고?”
“형님? 하하…. 어제 돌아왔습니다.”
제갈정현은 부끄럽다는 듯한 얼굴로 제갈정규를 바라보았다.
그는 정현을 이곳저곳을 훑어보았다.
“다친 곳은 없고?”
“네. 다행히 없습니다. 허송세월만 하다 온 것 같은 느낌이군요.”
“그래. 운이 좋았다. 앞으로는 무모한 일은 하지 말거라.”
제갈정현은 그의 형을 빤히 바라보았다.
분명히 제갈정규가 무엇을 알고 있는듯한 눈치였다.
정현은 차라리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형의 눈을 똑바로 보고 입을 열었다.
“형님. 지금까지 제가 잘못 생각하고 있던 게 있습니다.”
“무엇이냐?”
“저는 노력하려는 생각은 안 하고, 현재의 처지만 탓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뭐?”
제갈정현이 홀가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부터는 가주 자리에 목메지 않을 겁니다. 위험한 일도 벌이지 않을 겁니다. 다만…. 저는 제 자리에서 제가 할 수 있는 것을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불과 몇 주 전과 비교해 굉장히 달라진 듯한 동생이었다.
제갈정규가 무언가 할 말을 찾고 있을 때, 제갈정현이 말을 이었다.
“그동안 저 때문에 걱정 많이 하셨죠? 심려 끼쳐 죄송합니다.”
“아, 아니다.”
“그럼 잠시 자리를 비워도 되겠습니까? 아버님을 뵙기로 해서 말입니다.”
“그래. 알겠다. 앞으로도 잘 해보아라.”
“감사합니다. 형님.”
제갈정규는 아버님의 방으로 사라지는 제갈정현을 바라보고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그는 조금 전에 정현이 보였던 태도를 생각하고는 자신도 모르게 씨익 미소를 지었다.
“하하…. 이제는 방심할 수 없겠군. 그저 할 수 있는 것을 한다라…….”
지금 당장은 미비하지만, 훗날엔 제갈정현이 위협적인 경쟁자가 될 수도 있겠다는 것이 직감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제갈정현의 발전은 곧 제갈세가의 발전을 가져올 테니까.
남궁세가 천재 외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