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흡!”
남궁민은 순간 헛숨을 들이켰다.
기척은 완전히 지우고 있을 터였다.
그럼에도 청괴가 이상함을 감지했는지, 천천히 남궁민이 숨어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회색 중년인이 입을 열었다.
“청괴 어르신. 쥐새끼라니요? 저기에 누가 숨어있다는 것입니까?”
“정확히는 모른다. 그런 것 같은 거지.”
그가 남궁민이 숨어있는 수풀을 가리키며 말했다.
“홍괴. 네가 저기에 한 번 갔다 와라. 너도 저 부근이 찜찜하다는 거지?”
“그래. 그런데 왜 내가 가야 하냐?”
“네가 찜찜하다고 했으니까, 네가 갔다 오라는 거지.”
“그러니까 왜 나를 시키냐 이 말이야! 네가 가면 되지.”
화를 내지 않던 청괴도 홍괴가 소리를 지르자, 고함으로 받아쳤다.
“사형이 사제한테 좀 시키겠다는데, 뭐가 그리 말이 많아?!”
“사형은 얼어 죽을 사형? 사부님이 돌아가실 때 너희는 똑같다고 했던 말 잊었냐? 노망이라도 난 게야?!”
“뭐? 노망? 그럼 너는 앞으로 형제로 살라고 하셨던 말은 기억 못 하는 게야? 그리고 우리 둘 중에서는 내가 형이야!”
갑자기 그 둘을 티격태격 싸우기 시작했다.
회색 중년인은 이런 장면을 많이 봐 익숙하다는 듯 능숙하게 그들을 말렸다.
“두 분 다 그만하십시오.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어디 쪽입니까?”
“넌 좀 기다려라! 내 이놈이랑 오늘은 기어코 결판을 내고야 말아야겠다.”
“그래! 아니면 네가 얘기해봐라. 인제 와서 저놈이 내 형 노릇을 하려고 하는데, 이게 맞다고 생각하냐?”
하지만 그가 말리려 해도 도무지 노인들은 말을 듣지 않았다.
당황한 회색 중년인도 그들의 중간에 껴서 중재하는 사이, 남궁민은 조금 더 몸을 뒤로 빼내었다.
‘지금이 기회다.’
남궁민은 조금 더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기들끼리만 집중하고 있을 지금이 도망칠 적기라고 판단한 것이다.
스윽!
그는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뒤를 돌아 신법을 펼치려는 순간.
오싹!
갑자기 오한이 들어 다시 뒤를 바라보니 세 명이 어느새 싸움을 멈추고 남궁민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는 남궁민의 기척을 확실히 느낀 것 같았다.
이렇게 된 이상 선택지는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파밧!
그는 발을 굴러 숲 안쪽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응축해 두었던 내공을 모두 폭발시키는 신법이었다.
그는 말 그대로 쏘아지듯 내달리기 시작했다.
쒜에엑-!
세찬 바람이 귀를 스치며 찢어지는 소리를 만들어냈지만, 남궁민은 그에 개의치 않았다.
이번에는 회색 중년인과 청홍쌍괴가 크게 당황했다.
“저, 저게 무슨?! 취월걸개라도 되는 거야?”
“잡아라! 빨리 쫓아가!”
남궁민이 신법을 전개하는 속도는 그들의 상상을 초월했다.
그들은 허둥지둥 남궁민을 쫓기 시작했다.
처음에야 당황했다지만, 그들도 결국은 초절정의 고수.
마음먹고 쫓아가며 점차 집중력을 찾기 시작했다.
“……?!”
도망가는 남궁민도 당황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무슨 속도가?!’
취월걸개에게도 인정받았고, 스스로도 꽤 자부심이 있는 신법이었다.
중원의 그 누구라도 그를 따라잡기 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청홍쌍괴는 그와 비슷한 속도로…. 어쩌면 그보다 더 빠른 속도로 그를 쫓아오고 있었다.
타다다다-!
쉴 새 없이 달리며 남궁민은 행낭 안에 있는 주먹만 한 구슬을 만지작거렸다.
큰 위험이 닥쳤을 때 사용하라며 할아버지께서 건네준 물건이었다.
‘봉환(鳳丸)’
봉황의 구슬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이 환은 살상력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이것을 던져 터트리게 되면 짙은 붉은색의 안개가 하늘로 피어오르는데, 그 안개가 올라가는 모양이 흡사 붉은 봉황이 하늘을 나는 것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이곳에 들르기 전, 남궁민은 근처에서 가장 가까운 개방 분타에 들러 항상 이쪽을 주시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혹여나 봉환이 하늘에 피어오르면 언제든 남궁세가와 무림맹에 최대한 빠르게 전갈을 보내 달라고 하였다.
‘아니다. 아직은 쓸 때가 아니야.’
그는 봉환을 행낭에서 꺼내어 품속에 집어넣었다.
아직 던지지는 않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봉환이 터지면 할아버지께서 직접 오실 수도 있다. 이건 정말 위급할 때 써야 해.’
대신에 그는 그것보다 더 가까운 해결 방법을 생각해내고는 검집을 꼭 쥐고 있는 왼손에 바짝 힘을 주었다.
‘여차하면 싸운다.’
쉬익- 쉭!
남궁민이 나무와 나무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며 빠른 속도로 숲을 헤쳤다.
실로 절묘한 보법이었다.
물 흐르듯 흘러가며 옷깃 하나 나무에 걸리지 않았다.
“저놈이! 거기 서라!”
“뭐 저리 빠른 게야?”
하지만 청홍쌍괴 역시 그에 뒤지지 않는 속도였다.
남궁민과 우열을 가리지 못할 속도로 달려오고 있기에 둘 사이는 좀처럼 좁혀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익! 잡히면 곱게는 못 죽인다!”
콰앙-!
갑작스럽게 등 뒤에서 들려오는 굉음에 남궁민은 조금 놀라 슬쩍 뒤를 보았다.
청홍쌍괴는 남궁민의 뒤를 직선으로 따르며, 앞을 막는 작은 나무는 양손에 강맹한 기운을 담아 그대로 쓰러뜨리며 넘어왔다.
나무 사이사이를 달리는 남궁민보다 속도가 더 빠를 수밖에 없었고, 점차 그들의 거리는 좁혀졌다.
쾅! 퍼석!
폭약이라도 터뜨리는 듯한 굉음이 귓가를 스쳐오는 가운데 남궁민이 검을 빼 들었다.
‘이 앞으로 조금만 더 가면 낭떠러지가 나온다.’
지금까지 남궁민이 생각 없이 도망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겠지만, 남궁민은 철저히 계산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임무에 들어서기 전, 주변 지형지물을 파악하고 외워두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니까.
쿵-! 쿵-!
그 와중에도 청홍쌍괴는 조금씩 남궁민이 가까워졌다.
아까까지는 스무 장 정도의 차이가 있었는데, 이제는 고작 다섯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이제는 정말로 손만 뻗어도 잡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잡았다 요놈!”
홍괴보다 조금 더 앞서 달리던 청괴가 소리치며 앞으로 도약했다.
마지막 추진력으로 뛰면 충분히 잡을 수 있으리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남궁민도 그것을 느꼈는지 최대한 내공을 끌어넣어 몇 발자국을 더 나아갔다.
사사삭- 화악!
청괴는 남궁민의 등을 잡을 수 없었다.
그 순간 숲이 끝나며 남궁민이 앞으로 팍 치고 나갔기 때문이다.
“망할 것 같으니라고!”
청괴는 욕을 내뱉으며 재빨리 숲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깎아지는 듯한 절벽과 그 절벽을 향해 속도를 줄이지 않고 계속해서 달려가는 남궁민의 모습이었다.
청홍쌍괴의 눈에는 영락없이 남궁민이 절벽으로 뛰어내리려 하는 것처럼 보였다.
“저놈이 미쳤나?”
“죽으려면 곱게 죽을 것이지!”
하지만 남궁민은 죽을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었다.
‘넘을 수 있어.’
그는 속도를 줄이지 않은 상태 그대로 온몸의 내공을 끌어올렸다.
빠직- 빠지직-
천뢰제왕심공으로 축기 된 기운이 남궁민의 주변으로 새어 나왔다.
청홍쌍괴는 그 푸른 전격이 무엇인지 한눈에 알아보았다.
“천뢰제왕? 남궁세가의 애송이였나?”
“남궁세가라고? 그 망할 남궁무룡의 가문!”
남궁민의 귀에도 저 얘기가 똑똑히 들렸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기운을 일으키는 데에만 집중했다.
‘나의 무공은 섬전의 무공.’
타다닥!
절벽 끝에 다다른 남궁민이 자신 있게 발돋움했다.
‘섬전십삼검뢰(閃電十三劍雷) 제 십이 초. 뇌탄일검(雷歎一劍).’
파스윽-! 콰앙!
지금껏 달려오던 힘으로 남궁민의 신형이 공중에 둥실 떠오른다 싶었을 때, 돌연 그의 몸이 검을 휘두른 방향으로 푸른 뇌전과 함께 사라졌다.
“이런 미친!”
청홍쌍괴는 말도 안 된다는 듯 소리쳤다.
마치 공중을 한 번 더 박찬 것 같은 착각이 일 정도였다.
그는 자신이 일으킨 뇌전의 힘으로 열 장 정도를 더 나가아 절벽 반대편에 당도할 수 있었다.
“후욱-!”
남궁민은 순간 엄청난 내공이 빠져나가며 잠시 현기증을 느꼈으나, 곧바로 정신을 차렸다.
청홍쌍괴는 그런 남궁민을 어이가 없다는 듯 쳐다보았다.
“이봐 홍괴. 너라면 이걸 넘을 수 있겠냐?”
“못 넘지. 그러는 너는?”
“나도 못 넘지.”
그들은 눈앞에서 남궁민을 놓쳤건만, 묘하게 여유로운 얼굴이었다.
남궁민은 맞은편 절벽에서 그들에게 물었다.
“당신들은 청홍쌍괴인가?”
그 물음에 둘의 눈이 커졌다.
새파랗게 어린 남궁민이 반말로 질문한 것에 분노는 아니었다.
오히려 기쁨에 가까웠다.
“이봐. 들었어?”
“나 귓구멍 안 막혔다! 하하.”
“저 어린것이 우리를 알고 있구나.”
그들은 서로를 보며 기분 좋다는 듯 웃었다.
“삼십 년이나 바깥으로 나오지 못해 답답해 죽는 줄 알았는데. 아직 잊히지 않았나 보다!.”
“그러게 말이다.”
“그래. 어린것아. 네 말대로 우리가 청홍쌍괴다!”
남궁민은 낄낄대며 웃는 둘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넘어올 수 있는 건가?’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조금 전 남궁민이 건너온 단애의 폭은 무려 스무 장이나 가까이 된다.
남궁민과 같은 방도가 없다면 심지어 취월걸개라고 하더라도 건널 수 없을 거리.
그런데 청홍쌍괴는 너무나도 여유로웠다.
남궁민은 잠시 의문은 제쳐두고서 다시 물었다.
“이제는 아예 이렇게 대놓고 활동을 하는 건가?”
청홍쌍괴는 본인들끼리 떠들어댔다.
“이봐, 홍괴. 교주님께서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하시지 않았나?”
“그랬지. 그러니까 대놓고 활동하는 건 아니지 않나?”
“맞아. 그러니까 몰래 왔지! 우리도 네가 있을 줄 몰랐다. 이 어린것아.”
남궁민은 청홍쌍괴와 이야기하며 노인이 아니라 어린아이와 이야기하는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렇다고 하여 지능이 부족하다던가 하는 느낌은 아니었다.
좋게 말해 천진하다는 표현이 어울릴듯한 그들이었다.
“그러면 이곳에는 왜 온 것이지?”
“우리가 그걸 왜 말해줘야 하냐! 그러면 너는 왜 온 것인데?”
남궁민이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잘하면 정보를 더 얻을 수도 있겠어.’
찰나의 순간 생각을 마친 그는 조금 전과는 약간 다른 말투로 말했다.
“내가 잘 아는 사람 중에 신가장 사람이 있어서 왔다. 혹여나 유품을 챙길 수 있을까 해서 온 것이다.”
“신가장? 청괴. 아까 다 무너진 거기가 신가장이라는 곳이야?”
“그렇다! 너는 어디에 나오는지도 모르고 따라 나온 게야?”
청괴가 한심하다는 눈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홍괴가 킥킥 웃으며 말했다.
“그야 뭐. 지혁이가 부탁하니까 그 뒤만 따라간 것이지.”
“잠깐!”
또 자기네들끼리만 대화를 시작한 그들을 남궁민이 제지했다.
“지금 누가 부탁했다고 했지?”
“뭐? 지혁?”
“그래. 그자의 성이 무엇이냐?”
홍괴가 왜 그런 걸 물어보느냐는 듯한 얼굴로 남궁민을 바라보았다.
그가 입을 열려고 하는 순간.
파삭-
풀숲을 헤치고, 청홍쌍괴와 함께 있었던 중년인이 나타났다.
“내 성은 왜 궁금한 것이냐.”
홍괴는 그 말소리에 말을 하다 말고, 그 중년인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지혁아. 저 아이가 네 성을 물어봤는데, 아직 대답 안 하고 있었다.”
“제가 조금만 늦게 나타났으면 말씀하셨을 것 아닙니까.”
“낄낄! 그건 그렇지.”
중년인이 남궁민을 노려보았다.
“젊은 무인 중 너 정도의 성취를 이룬 자는 흔하지 않지. 그런데 남궁세가의 천뢰제왕심공을 익혔다? 한 명밖에 생각나지 않는군. 청룡신검 남궁민.”
“마교의 지혁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가 신가장에 나타났다? 나도 한 명밖에 생각나지 않는군. 유지혁.”
남궁민은 일부러 그와 똑같은 말투로 대답했다.
그 말에 중년인, 유지혁의 눈빛이 아주 잠시 흔들렸다.
자신의 이름을 정확히 알고 있는 것에 아주 조금 놀란 것이다.
하지만 그는 곧 불안한 눈빛을 거두고 이를 갈며 말했다.
“총관을 잡아 죽였어야 했는데.”
“십 수년간 함께한 이들을 도륙하고도 네가 인간이냐?”
“인간? 인간이지. 짐승은 그런 짓을 하지 않아.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짓이다.”
유지혁을 보는 남궁민의 눈빛이 거칠어졌다.
하지만 그는 이성을 붙잡았다.
지금은 경거망동할 때가 아니라는 것은 그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훗날, 네 목숨은 내가 취할 것이다.”
“그래? 그것참 기대되는군. 그런데 나는 네 목숨을 취할 사람이 누구인지 알 것 같은데?”
“뭐?”
“어르신들. 지금입니다!”
유지혁의 말에 홍괴가 돌연 청괴의 팔을 붙잡고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휙휙휙휙-!
홍괴를 축으로 삼아 빙글빙글 도는 청괴의 속도는 순식간에 빨라졌고, 남궁민이 자리를 피하려 하는 사이 속도가 극에 달한 홍괴가 청괴의 팔을 놓아버렸다.
피슝!
마치 투포환처럼 쏘아 올려진 청괴는 깔끔한 포물선을 그리며 절벽을 넘어 남궁민 쪽으로 날아갔다.
“역시 지혁이! 똑똑하구나. 우린 생각지도 못했는데.”
유지혁은 남궁민과 대화하는 척하며 전음으로 청홍쌍괴에게 이 방법을 가르쳐주었고, 그 둘은 무서움도 없는지 곧바로 시행한 것이다.
콰앙-!
청괴가 무서운 소리를 내며 착지하는 데 성공했다.
날아오는 그를 검으로 쳐내지도 못할 정도로 빠른 행동이었다.
그는 정말 재미있는 경험을 했다는 듯 낄낄 웃더니, 남궁민에게 말했다.
“어린것아. 놀아보자꾸나. 홍괴와 지혁이 오기 전에 끝내주마.”
스윽-
남궁민은 눈동자만 돌려 반대쪽 절벽을 바라보니, 유지혁과 홍괴는 절벽을 기어 내려오고 있었다.
청괴는 그들이 올라올 동안 남궁민을 잡아둘 셈으로 보였다.
처억-!
남궁민은 이미 뽑혀 있는 검을 그의 앞에 들고 말했다.
“나도 마찬가지야. 저들이 오기 전에 끝내주지.”
남궁세가 천재 외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