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아버지가 눈앞에 나타난 것도 놀라운데, 남궁민은 이어지는 목소리를 듣고는 더욱 놀랐다.
“형님!”
“하현아!”
죽음의 직전 떠오른 하현이었다.
“네가 어떻게 여기에?”
“어떻게라뇨. 구하러 왔습니다. 용출이라는 개방도가 이쯤에 있을 것이라 말해주었어요. 때마침 우리가 신가장에 있었거든요.”
“그랬구나…. 그랬어…….”
개방도에게 부상자를 잠시 대피시키기 위하여 신가장으로 데리고 가라고 했었는데
그것이 목숨을 구해줄 줄이야.
쿠과광-!
둘은 옆에서 터지는 폭발하는듯한 굉음에 고개를 돌렸다.
남궁기현과 홍괴가 충돌하며 나는 소리였다.
홍괴는 조금 전 남궁민을 밀어붙일 때와 같이 패도 적인 무공이었고, 그에 반해 남궁기현의 검은 부드러웠다.
스하악-
남궁기현의 검은 그의 덩치에 걸맞게 보통 검보다 훨씬 더 두껍고 길다.
그는 그런 검을 유려하게 다루며
정면으로 짓쳐들어오는 홍괴의 장을 모두 좌우로 검을 휘두르며 모두 흘려보냈다.
“네 이노옴!!”
모든 공격이 무위로 돌아간 홍괴는 뒤로 물러서며 노호성을 터뜨렸다.
반면 남궁기현은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그는 붉게 일렁이는 홍괴의 손을 보며 말했다.
“홍괴가 있다고 하더니 정말이군. 혈수마공(靑手魔功)이라는 것을 몰랐다면 하마터면 강기로 착각했을 거야. 헌데 네 짝은 어디 있지?”
“뭐라?”
홍괴가 순간 격분하여 이마 핏줄이 터질 듯 돋우어졌다.
남궁기현이 다 알고서 조롱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궁기현은 순수한 궁금증이었다.
용출에게서 홍괴가 나타났다는 말만 듣고 곧바로 출발했기에 청괴가 죽어 홍괴가 남궁민에게 복수하려 한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둘 사이가 죽고 못 산다고 들었는데, 혹시 싸운 건가? 부부싸움은 좋지 않아.”
“네 혓바닥을 뽑아버릴 것이다!!!”
쿠웅-!!
홍괴가 폭사한 기운에 지축이 울렸다.
여태까지와는 확연히 다른 기운이었다.
피부에 저릿저릿하게 와닿는 느낌이 보통의 기와는 이질적이었다.
“끄흐윽!”
홍괴가 고통에 찬 신음성을 흘렸다.
그의 피부와 눈동자가 붉어지고, 온몸이 부풀어 오른다.
“이것을 겨우 여기서 쓰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거늘……!”
쿠우우우-
진기의 폭풍이 몰아친다.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힘의 크기가 확연히 달랐다.
마치 그의 안에 있는 다른 무언가가 깨어난 느낌.
홍괴가 눈을 번뜩이며 소리쳤다.
“내 이 자리에서 소멸할지라도, 너희는 모두 데리고 가겠다!!”
남궁기현은 그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몰라 그를 제지하려 했지만, 몰아치는 기의 폭풍에 그에게 접근할 수가 없었다.
“선천진기를 끌어다 쓰는 것인가?”
대답을 기대하지 않은 남궁기현의 혼잣말.
그런데 뒤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그것과는 다릅니다!”
“뭐라고?”
하현이었다.
그는 홍괴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말했다.
“선천진기는 가슴에서, 명치에서 무언가 폭발하는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머리에서부터 폭발했어요! 그리고 저자가 원래 쓰던 기운은 붉은 느낌인데, 지금은 검은색입니다!”
“검은색이라고?”
홍괴를 조금 더 유심히 바라보던 남궁기현이 외쳤다.
“마기(魔氣)?!”
드디어 기운의 정체를 알아챈 남궁기현이 소리쳤다.
“그럴 리가 없어.”
남궁기현은 의아한 표정이었다.
청괴와 홍괴는 애초부터 마기를 익히지 않았다.
그들이 각각 쓰는 무공의 이름이 청수마공, 혈수마공이기에 처음부터 마교도였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들도 많았지만, 그들은 모두 장성하고 나서 마교 교주에게 패배하여 그의 수하가 된 자들이었다.
무공에 마공이라고 붙은 이유는 그들이 정마대전 당시에 죽인 무림인의 수가 워낙 많아 악명을 떨쳐 그렇게 된 것이다.
푸스스-
남궁기현이 생각하는 사이 홍괴가 내뿜고 있던 기의 장막이 서서히 옅어지기 시작했다.
그라고 해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 역시 창궁대연심공을 극성으로 운용하여 팽팽히 기를 끌어올렸다.
“끄으으…….”
홍괴의 입에서 신음에 가까운 소리가 흘러나왔다.
얼굴은 붉으락푸르락하고 있고, 입가에는 가는 선혈도 흐르고 있었다.
내상을 입어 토해내는 피는 아니었다.
고통을 참아내느라 입술을 너무 세게 물어뜯어 온통 찢어진 것이었다.
그의 눈은 피라도 흐를 것처럼 시뻘겋게 물들어 있다.
스윽-
고개를 돌려 남궁기현을 바라본 홍괴가 앞으로 천천히 걸어오기 시작했다.
쿵- 쿵- 쿵-!
내딛는 발걸음엔 엄청난 기운이 실려 있었는지, 걸음걸음마다 땅이 푹푹 파였다.
천천히 다가오는가 싶던 홍괴가 별안간 진각을 밟았다.
퍼엉-!
마치 폭약이라도 심어놓은 듯 그의 발이 닿은 땅이 날아갔다.
그리고 화살보다 더 빠른 속도로 홍괴가 쏘아졌다.
쒜에엑-!
그의 신형이 어찌나 빠른지 단련된 남궁기현의 육안으로도 확인하기 힘들 정도였다.
붉은 안개가 그를 덮쳐온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홍괴는 이미 코앞에 와 있었다.
“이것도 흘려봐라!”
홍괴는 양팔을 앞으로 내질렀다.
그가 내지른 팔에는 아무런 기교도, 초식도 없다.
그저 앞으로 내지를 뿐.
그가 내뿜은 엄청난 기운 앞에서 초식은 무용지물인 것처럼 보였다.
빠아악!
남궁기현과 홍괴의 육장이 부딪혔다.
검법을 사용해 맞받아칠 생각은 애초에 하지도 않았다.
그저 검을 가로로 들어 넓은 면으로 막아내는 것이 최선이었다.
“크흡!”
남궁기현의 신형이 뒤로 주르륵 밀렸다.
힘과 내력에서는 빠지는 일이 없는 남궁기현이지만, 현재 홍괴의 내력은 아득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흐흐. 검이 무척이나 가볍구나.”
홍괴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붉은 눈을 하고 저런 표정을 지으니 실로 기괴하기 이를 데 없어 보였다.
남궁기현은 검을 두어 번 휘둘러 뻐근한 손목을 풀어주었다.
‘이대로 방어만 해서는 안 된다.’
계속해서 이런 공격을 막아내다가는 검이 깨지든, 손목이 깨지든 할 것이 분명했다.
남궁기현은 재빨리 기수식을 취했다.
그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검법을 펼쳐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우웅- 우웅-
내력을 잔뜩 밀어 넣은 검에서 진동이 느껴진다.
남궁기현은 서서히 움직이며 창궁무애검법의 검결을 떠올렸다.
창궁무애(蒼穹無涯).
맑고 푸른 하늘은 끝이 없다는 뜻이다.
검법의 이름처럼 맑고 청명한 기운이 끝도 없이 뿜어져 나왔다.
“어디서 수작질을!”
남궁기현의 기운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기 때문일까?
홍괴는 다시 한번 남궁기현에게 달려들었다.
파악!
조금 전과 비슷한 자세로 손을 막아내었고, 또다시 뒤로 밀려났다.
이번에는 홍괴가 곧바로 연달아 공격해왔건만, 남궁기현 역시 지금까지처럼 수비 일변도는 아니었다.
콱!
일보(一步).
남궁기현이 간 것은 단 일보뿐이었다.
하지만 홍괴가 워낙 빠른 속도로 다가왔기에 그 일보만으로도 홍괴로서는 눈앞에 남궁기현이 나타난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그 순간, 남궁기현의 검에서 바람이 뿜어져 나오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후웅!
혼신의 힘을 다한 일검이었다.
단순히 검을 휘두르는 것이 다가 아니라, 그 안에 샐 수도 없이 수많은 변화가 담겨있는 검이었다.
창궁무애검법(蒼穹無涯劍法) 절기(絶技)
창천벽해(蒼天闢海)
쿠과과과과-!!
검은 뻗어나가면 뻗어나갈수록 수많은 변화를 담기 시작했다.
온갖 변화를 모두 받아들인 검은 마치 폭풍이었다.
지나가는 모든 것을 다 빨아들이고 마는 폭풍.
홍괴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이 검은 단순히 막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눈치챈 것이다.
화악-!!
홍괴도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사용하여 기를 끌어모았다.
그럴수록 그의 눈은 더 시뻘게졌지만, 그만큼 혈수마공의 기운 역시 커졌다.
팔꿈치 전까지만 넘실거리던 붉은 기운은 이제 어깨까지 차오른 상태였다.
그는 자신의 힘을 믿었다.
그렇기에 남궁기현이 내지르고 있는 폭풍의 검에 장을 내뻗었다.
쩌엉-!!
휘이이익!
검과 장이 부딪히자 엄청난 굉음이 먼저 터져 나왔고, 그 뒤를 이어 광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바람이 어찌나 강하게 불었는지, 하현은 내공을 끌어올리지 못하는 남궁민이 날아가지 않도록 그를 붙잡아야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하현의 눈은 한순간도 이 싸움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쿨럭-”
기침 소리가 울려퍼졌다.
하현은 깜짝 놀란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 소리는 남궁기현의 것이었으니까.
“제길…. 퉷!”
남궁기현은 목구멍에서 넘어온 핏물을 거칠게 뱉어내고는 다시금 검을 잡았다.
홍괴의 모습도 정상은 아니었다.
그는 남궁기현처럼 피를 토하지는 않았지만, 두 눈과 귀에서 피를 줄줄 흘리고 있었다.
“제법…. 하는구나. 허나 더 싸우기는 힘들어 보이는군.”
“그건 그쪽도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
남궁기현의 말이 틀렸다는 듯, 홍괴가 씨익 웃었다.
“그건 확인해보면 알겠지.”
홍괴가 다시 달려들었다.
그는 조금 전에 달려왔던 것과 비슷한 속도였다.
어깨까지 넘실거리는 기운도 조금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쾅- 쾅- 콰앙!
둘은 몇 번을 더 부딪쳤다.
처음의 충돌 때와 같은 엄청난 폭발은 없었지만, 귀를 먹먹하게 할 정도의 굉음이었다.
검과 장이 부딪힐 때마다 남궁기현은 연신 뒤로 밀려났고, 입가에 흐르는 피의 양이 점점 많아졌다.
누가 봐도 남궁기현이 수세에 몰린 것 같은 상황.
그런데 하현은 홍괴의 태도에서 이질감을 느꼈다.
‘왜 저리 초조한 것 같지?’
이기고 있는 것은 홍괴가 분명했건만, 더욱더 조바심을 내는 것도 홍괴였다.
‘우리의 우군이 오는 것을 걱정하는 것인가? 아니다. 저 정도의 신위를 내보이면서 그것을 걱정할 리가. 그렇다면 왜 이리 초조할까? 마치 무언가에 쫓기기라도 하는 듯…. 아! 쫓기고 있는 거야. 시간에.’
생각을 마친 하현은 남궁기현에게 소리쳤다.
“맞붙지 마세요! 계속 피하기만 하면 됩니다. 시간을 끌어야 해요!”
“뭐라고?”
하현이 외친 소리를 함께 들은 홍괴의 고개가 하현 쪽으로 홱 돌아갔다.
두 눈에서 피눈물을 흘리는 그의 눈빛은 흉신악살이라는 말을 절로 떠오르게 했다.
“너부터 죽여야겠구나!”
하현에게 뛰어들려는 홍괴를 남궁기현이 막아내려 했지만, 그는 남궁기현을 거칠게 뿌리치고는 하현에게 신법을 전개했다.
그가 바람을 가르며 달려왔건만, 하현은 피하지 않았다.
그의 뒤에는 아직 제대로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남궁민이 있었기 때문이다.
‘막을 수 있어.’
하현이 아무 생각 없이 홍괴도 들을 수 있는 소리를 지른 것은 아니다.
그는 소리를 지르기 전부터 언제든 싸울 수 있도록 기운을 팽팽이 돌리고 있었다.
홍괴의 장을, 남궁기현의 검을 보고서 느낀 바가 있었다.
둘의 목숨을 건 싸움이 하현의 영감을 건드린 것이다.
하현은 양손을 허리에 가져다 대었다.
“지금 뭐 하는……!”
하현의 뒤에 있는 남궁민의 입에서 터져 나온 말이었다.
홍괴가 엄청난 속도로 다가오고 있건만, 하현은 아직 검을 뽑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발검으로 상대하려나 싶건만, 그것도 아니다.
애초에 검을 쥐려는 자세가 아니었으니.
하현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씰룩거린다.
‘이 상황에 웃음이 나오다니.’
하지만 웃지 않을 수 없다.
한 사람의 무인으로서 깨달음을 얻을 때보다 더 즐겁고 재미있을 때가 또 있으랴.
투과과과-
홍괴의 장력이 그를 덮쳐온다.
하현은 끝까지 홍괴의 손바닥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쾅-!
하현이 한 발자국을 내디디며, 그 발에 지금껏 끌어 올린 모든 기운을 담아낸다.
그리고 정확한 때에 두 손을 앞으로 뻗어냈다.
그가 노리는 것은 홍괴의 목숨이 아니다.
오직 손.
저 붉은 기운이 넘실거리는 저것들만이 하현의 목표다.
다리에서 시작해 온몸을 구석구석 돌아온 기운이 하현의 팔꿈치, 손목을 통해 손바닥에 모인다.
그리고 개방의 절초이자, 취월걸개의 특기가 하현의 손에서 완벽하게 재현되었다.
항룡십팔장 항룡유회
(降龍二十八掌 亢龍有悔)
쩌어어엉!!
콰과과과과-!
두 손끼리 만났을 뿐인데, 엄청난 기파가 몰아쳤다.
둘 사이에 있는 모든 것을 무(無)로 돌려 버릴 것만 같은 파괴력이었다.
쾅!
작은 폭발이 한 번 더 일고, 하현의 몸이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양팔, 양손이 너무나도 얼얼해 땅을 짚기가 힘들 정도였다.
아니, 인제 보니 다리도 후들거리는 것이 당장이라도 주저앉고 싶었다.
하지만 하현은 웃을 수 있었다.
‘내 이론이 정확히 맞아떨어졌어.’
조금 전의 충돌에서 그는 내상을 입거나 다친 곳은 전혀 없었다.
다만, 너무나도 막대한 기운이 한 번에 빠져나가 운신하기도 힘든 것이었다.
“끄으아악!”
비명을 지른 것은 홍괴였다.
하현은 홍괴의 손을 부수어버릴 요량으로 항룡유회를 펼쳤기에, 그 고통은 보통이 아닐 것이었다.
“씹어 삼켜주마!!”
그는 조금 전보다 더 많은 피가 흐르는 얼굴로 말했다.
이제는 입가에서마저 피가 흘렀다.
성치는 않은 손이지만, 저깟 어린아이 하나 죽이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홍괴의 눈에는 이제 하현밖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
툭-
눈에서 핏물이 흘러 땅으로 떨어졌다.
하현이 겨우 몸을 일으켰을 때.
휙- 휘익-!
그와 홍괴 사이에 두 명이 무인이 나타났다.
하현을 도와주러 달려가던 남궁기현이 반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남궁지신! 남궁길!”
남궁세가의 정예대원 중 둘이었다.
그들이 마교놈들을 모두 도륙 내고 이곳으로 찾아왔다.
남궁세가 천재 외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