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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세가 천재 외손자-150화 (150/304)

150화

하현의 앞에는 허공밖에 없었지만, 그의 눈은 분명 무언갈 보고 있었다.

‘홍괴…….’

아까까지 싸웠던 홍괴의 형상이 눈앞에 보이는듯했다.

파악! 촤악!

하현이 상상으로 만들어낸 홍괴는 마치 시범을 보이듯 초식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눈으로 보고 느낀 부분은 그대로 구현하고, 부족한 부분은 오성과 이해력으로 이어붙였다.

조금씩, 조금씩 형(形)이 잡혀가자 하현은 이 무공이 어딘지 익숙하다는 느낌이었다.

‘정종무공에 가깝다고 했었지.’

하현은 과거 환현문의 나비를 연상케 하는 검술을 복원했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는 지금보다 무공에 대한 이해도 자체도 부족하긴 했지만, 무공을 쓰기에 굉장히 어색하다는 느낌이 강했었다.

‘사도의 무공은 그 기원부터 다른 법이니까.’

어떻게 보면 사파 무공을 구현해낸 것 자체가 엄청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락- 사락-

조용한 연무장에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망부석처럼 가만히 서 있던 하현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하면 될 것 같은데…….’

하현은 천천히 기운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눈앞의 홍괴와 똑같은 자세로 움직이며 기운을 움직였다.

머릿속에서는 이미 기운을 수십 번, 수백 번 움직이며 상황을 미리 구현해보기까지 했다.

그리고 단전에서 시작한 기운이 불타는 듯한 느낌을 가져오기 시작했다.

하현은 이질적인 기운에 해냈다고 생각했다.

이런 낯선 느낌이 일 때마다 새로운 무공을 구현해내곤 했으니까.

그런데 그 순간.

“허억……!”

갑자기 기운이 역행하기 시작했다.

하현은 급하게 숨을 참으며 기운을 억누르기 시작했다.

얼굴이 붉어지고 목에는 핏대까지 올랐다.

여기서 기운을 통제해내지 못하면 주화입마에 빠지게 될 가능성이 크기에 하현은 젖먹던 힘까지 끌어모아 겨우 기운을 억눌렀다.

“후우…. 허억, 허억…….”

시간이 흘러 어떻게든 기운을 통제하는 데 성공한 하현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아주 잠깐이었건만, 어찌나 고통스럽고 힘겨웠는지 이마에서는 굵은 땀방울도 뚝뚝 떨어졌다.

“뭐가 문제지?”

하현은 곧바로 골똘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물론 다른 무공을 재현하려다 실패한 적이 종종 있긴 했지만

그때는 이렇게까지 기운이 역행한 적은 없었다.

“잘못 기억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분명히 이렇게 했었는데? 그리고 여기 군데군데 끊긴 것 같은 건 당연히 이렇게 이어져야 하는데…….”

하현은 눈을 감고, 홍괴가 싸우던 장면을 다시금 떠올렸다.

홍괴를 지배하던 마기 속에서도 홍염의 기운은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발악하는 듯 더 밝게 타올랐다.

하지만 계속해서 점점 커지는 마기 때문에 중간중간 제대로 보지 못했다고 생각했는데…….

‘아…. 설마?!’

하현은 자신이 엄청난 실수를 했음을 깨달았다.

‘제대로 못 봤다고? 정말 그랬을까?’

너무나도 큰 마기에 눈을 흐렸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본인이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자신을 믿지 못한 것이다.

지금까지 하현이 보고 느낀 것이 틀린 적이 있었을까?

‘아니. 그런 적은 없었지.’

부족한 부분을 하현이 채우려 한 것이 잘못이었다.

하현은 도리어 지금까지 했던 모든 노력들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가 봤던 그대로 기운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넘치면 넘치는 대로…….’

마음의 가닥이 잡히니 몸은 절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홍괴의 모습을 눈앞에 그려놓고 따라 할 필요도 없었다.

이미 그의 움직임과 초식은 하현의 머리에 깊이 각인되어 있었으니까.

파악-! 화아아-

하현은 시원하게 팔을 뻗어냈다.

양 손바닥을 앞으로 향하게 뻗는 장법이었다.

하현이 알고 있는 유일한 장법인 항룡십팔장의 항룡유회의 형태가 아니었다.

장법은 점차 홍괴의 것을 닮아갔다.

팍! 팍! 팍!

연신 장을 내지르는 하현의 주변으로 조금씩 기운이 뭉쳐지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내공의 운용도 계속하다 보니, 부족한 게 아니라 간결한 것이라는 생각도 들기 시작했다.

우웅-!

하현의 온몸 혈도를 돌며 점차 덩치를 불려가던 기운이 점차 하현의 손 쪽으로 뭉치기 시작했다.

기이이잉-

그럴 리가 없건만, 하현은 정수리 한가운데 백회혈 뜨겁게 열기가 오른다는 느낌마저 들기 시작한 순간.

화악!

하현의 손에 붉은 안개 같은 것이 응어리지기 시작했다.

홍괴의 것보다는 옅지만, 그래도 구현은 성공한 셈.

하지만 하현은 여기서 만족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내공을 운용은 더 빠르게, 손에 담는 기운은 더욱 무겁게.

그리고 그가 느끼는 부족함은 그대로 부족하게.

구구구구-

그의 몸 안에서 마치 홍수라도 난 것 같은 느낌이 일기 시작했다.

내공이 손의 목적지로 끝없이 쏟아지는 것 같은 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러자 조금씩, 조금씩 손으로 모이는 안개가 짙어지기 시작했다.

화르륵!

드디어 하현의 손에 붉은 기운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하현은 손에 깃들 기운을 신비롭게 바라보았다.

“이렇게 되는 거구나.”

하현은 기쁜 얼굴을 감추지 않았다.

혈수마공의 비밀은 순환이었다.

보통의 장법은 내공을 축기하고, 방출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하지만 혈수마공은 방출하지 않고, 기운이 온몸을 주천하듯 계속해서 흐른다.

손은 기운이 흐르는 곳 중의 하나일 뿐.

하지만 다른 장법처럼 내공이 뿜어져 나가는 곳도 손이다.

그렇기에 강맹한 기운이 계속해서 조금씩 흘러나오게 되고, 결국은 계속해서 수강을 펼치는 것처럼 보이게 되는 것이다.

부웅-! 붕!

하현은 손을 몇 번 내질러 보았다.

이제는 제법 커진 내공이 오랜 기간 혈수마공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었다.

슈우우-

하현은 천천히 기운을 거두었다.

그의 손에 깃들었던 기운도 점차 몸으로 회수되며 빛을 잃어갔다.

그는 허리에 잘 매달려 있는 검을 바라보았다.

손으로 해낼 수 있다면 분명히 검으로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자신의 육체로 해내는 것보다는 훨씬 힘들겠지만, 하현은 자신이라면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깃들었다.

하지만 오늘은 여기까지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뭐든 무리해서 이루어낸 것은 체하기 마련이다.

“이제 슬슬 내려가 볼까?”

어찌나 고생했는지 온통 땀범벅이었다.

입고 있는 무복도 땀에 흠뻑 젖어있었다.

하현은 문득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개울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아직 시간도 밤이 되기 전 저녁 시간.

하현은 땀을 씻어낼 겸 개울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푸하-”

개울에 도착한 하현은 멱을 감았다.

아예 머리끝까지 몸을 담그니 세상 시원함이 몰려왔다.

타닥- 타닥-

이미 입고 있던 무복도 물에 빨아 옆에 나뭇가지에 널어두고 그 밑에 불을 피웠다.

그는 이제 화섭자 없이도 불을 피울 수 있게 되었다.

비록 기를 이용해 물건을 태우는 삼매진화(三昧眞火)의 경지는 아니지만, 부싯깃을 아래에 두고 빠르게 나무를 비벼 불을 피우는 방법을 익혔다.

‘어릴 때 이곳에서 정말 많이 놀았는데.’

물에 머리만 쏙 내놓은 하현은 또 옛 생각을 했다.

이곳은 사 년 전과 달라진 것이 하나 없었다.

깊이가 어른 가슴 정도까지 오는 곳이라, 예전에는 발이 닿지 않아 무서워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발도 닿고 머리도 물에서 빠져나온다.

새삼 자신이 많이 자랐음을 상기할 수 있었다.

한참을 첨벙거리며 헤엄을 치던 하현은 뭍으로 올라가 기운을 끌어 올려 몸에 묻은 물기를 다 날려버렸다.

잘 마른 옷을 다시 챙겨 입고, 불도 흙을 덮어 꼼꼼하게 껐다.

그리곤 나직이 입을 열었다.

“남이 목욕하는 모습을 훔쳐보다니. 좋은 취향은 아니시군요.”

당연히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만약 이 장면을 누군가 보았다면 하현이 실성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갑자기 허공에 대고 말을 했으니까.

하현은 더 말을 하지 않았다.

개울가에서 주먹만 한 돌을 하나 집어 들고는 몇 번 던졌다가 받으며 무게를 가늠했다.

그리곤 그것을 앞쪽 숲을 향해 냅다 던졌다.

쒜에엑-!

뭉툭한 돌덩이건만, 하현의 손에서 떠나니 공기를 찢는 소리가 들렸다.

당규호에게 배운 암기술로 내공을 담아 던진 돌은 직선으로 날아가 무언가에 부딪혔다.

퍼억-!

무언가에 제대로 적중했는지 분명히 들리는 파육음.

하현은 그곳으로 신법을 펼쳤다.

순식간에 도착한 그곳엔…….

“뭐야. 멧돼지라고?”

그가 던진 돌에 머리를 맞아 소리도 내지 못하고 즉사한 멧돼지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바로 조금 전에 죽은 것이 확실한지 흐르는 피와 몸이 모두 따뜻했다.

하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히 산짐승의 느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산짐승은 기척은 내지만, 시선을 보내오진 않는다.

그런데 하현은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는 듯한 시선을 느꼈었다.

“기운을 너무 많이 써서 헷갈렸나? 뭐…. 멧돼지한테는 미안하지만, 잘 됐지 뭐.”

감각을 집중해 한참 주변을 더 살폈지만,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사방이 스무 장 안에 들어 있다면 작은 다람쥐가 숨 쉬는 기척까지 느낄 수 있는 하현이다.

그렇기에 하현은 자신이 잘못 봤다고 생각했다.

“읏차.”

하현은 멧돼지를 들쳐메었다.

무게가 상당히 나가는 듯했다.

이 정도면 남궁세가의 무인들은 물론, 현재 신가장에 함께 머물고 있는 개방도까지 배부르게 먹을 수 있을 것이다.

“개방 아저씨들은 우리가 가져온 식량은 잘 안 드시려고 하니까.”

그리고 개방도들은 사냥도 잘 하지 않고 대부분의 끼니를 동냥으로 해결하려 한다.

만약 그 수많은 개방도가 산짐승을 잡아먹으며 연명하려 했다면 중원 천진에 남아나는 산짐승이 없을 것이다.

대신 누군가 짐승을 잡아다 준다면 세상에서 제일 맛있게 먹는 그들이었다.

하현은 순간 취월걸개가 생각나 쿡쿡 웃고는 신법을 펼쳤다.

슈욱!

삼백 근은 족히 나가는 멧돼지를 둘러업고도 하현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하현은 곧 신가장으로 사라졌다.

파악-!

하지만 하현은 알지 못했다.

조금 시간이 흐른 뒤에 조금 전 그가 서 있던 자리 바로 아래에서 손이 하나 튀어나왔음을.

땅을 뚫고 나온 그는 시야에 보이지도 않는 신가장 쪽 방향을 잠시 지긋이 바라보다가 곧 사라졌다.

* * *

하현이 신가장에 온 지도 벌써 사흘이 흘렀다.

그 시간 동안 남궁민은 요양에 힘쓴 결과, 제법 내상을 회복할 수 있었다.

양손은 한참 동안 더 치료해야 하지만, 개방도 용출이 해주었던 응급처치가 제법 효과가 있었는지, 향후 걱정될만한 후유증은 없을 것으로 보였다.

그래서 그들은 세가로 돌아가기로 했다.

이곳에 계속 있어봤자 더 얻을 것도 없었고, 세가에서 마음 편하게 치료에 전념하기 위해서였다.

“이것 참, 그래도 꽤 큰 마차인데 거구가 둘이나 있으니 굉장히 좁게 느껴지는구먼. 두 대를 살 걸 그랬나?”

남궁기현이 마차에 오르며 투덜거렸다.

남궁기현과 남궁민, 그리고 남궁지신과 남궁길에 하현까지 포함하여 모두 다섯이나 한 마차에 타고 있었다.

주변 마을에서 가장 큰 마차를 사 왔건만, 범상치 않은 남궁기현과 남궁지신의 덩치 덕에 다섯이 타기에는 비좁았다.

그때 하현이 슬그머니 마차에서 내렸다.

“현아. 왜 내리는 것이냐?”

“생각해보니 여기서 저만 환자가 아니어서요. 환자 네 분께서는 편하게 타고 가세요. 저는 마차 위에 올라서 가겠습니다.”

“뭐라고?”

하현은 대꾸하지 않고, 마차 위로 훌쩍 올라갔다.

마부는 하현을 슬쩍 쳐다보고 뭐라고 하려 하더니, 무림인이라 알아서 잘 하겠지라고 생각했는지, 그냥 자리에 앉았다.

“이랴!”

마부의 채찍질과 함께 마차가 출발했다.

하현은 마차 위에서 뒤로 돌아앉았다.

신가장이 점차 멀어지기 시작한다.

하현은 그리 서글프다거나, 가슴이 먹먹하다거나 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담담히 인사를 건넸다.

‘안녕.’

그는 대답이 돌아올 리 없는 인사를 마음으로 건넸다.

지금 그의 인사는 신가장에게, 더 나아가서는 신가장에서의 그의 유년시절에 보내는 인사였다.

하현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모든 은원이 끝나기 전에는 다시는 이곳에 돌아오지 못할 것임을.

그리고 곧이어 다짐했다.

언젠가는 이곳에 돌아올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은 태양 빛이 하현을 비추었다.

그는 다시 뒤돌아 앉았다.

너무 눈이 부셔서일까? 하현의 눈에 아주 작게 이슬이 맺혔다.

하지만 그것은 끝끝내 흘러내리지 않았다.

남궁세가 천재 외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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