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사부님……?”
“하하하! 항룡십팔장까지 훔쳐냈다고? 그것참 대단하구나! 대단해!”
그것만으로도 부족했는지 그는 연무장이 떠나가라 박장대소를 하기 시작했다.
“내가 애초에 너와 제자의 연을 맺고, 개방에 속가제자로 받아들였을 때 방주님과 약조한 게 있었다.”
“어떤 약조에요?”
“너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줘도 되지만, 항룡십팔장만큼은 전수해주지 않기로 했던 약조니라.”
“아……!”
하현은 큰 실수를 저질렀다고 생각하여 말을 잇지 못했지만, 취월걸개의 생각은 그렇지 않아 보였다.
“그런데 뭐, 보고 따라 하는 걸 내가 어떻게 막겠느냐? 그렇다고 너를 벌 할 수도 없고.”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뭘 어떡해! 눈치껏 잘하는 수밖에 없지.”
분명히 아무도 보는 이가 없을 것이 분명하건만, 취월걸개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누군가 보고 있는 사람이 있는지를 확인하고는 말을 이었다.
“보여줘 봐라.”
“네?”
“너의 항룡십팔장을 나에게 보여 달란 말이다.”
“아, 알겠습니다.”
급작스러운 상황이지만, 하현은 항룡십팔장을 운용할 때 기운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어떤 느낌으로 순간의 폭발적인 힘을 내는지를 완벽히 상기해냈다.
스윽-
양손을 자연스럽게 허리에 가져가자 기운이 절로 따라온다.
하현은 끌어올린 기운이 가득 담긴 다리로 진각을 밟으며, 그 반탄력을 이용해 순차적으로 손바닥에까지 기운을 폭발시켰다.
쿠웅- 파악!!
“……!”
비록 누군가에게 공격을 쏟기 위해 전력을 다한 것은 아니건만, 이 정도만으로도 취월걸개를 놀라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남궁기현에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취월걸개는 하현이 무공의 형과 태만을 베꼈으리라 추측했다.
하지만, 하현의 장법은 진짜였다.
기운의 운용과 흐름마저 완벽해 마치 어렸을 적부터 장을 수련하여 대성한 것처럼 느껴졌으니.
“반탄력을 이용하는 것은 어떻게 알아챘느냐?”
“사부님의 신법을 생각했습니다.”
“내 신법?!”
“사부님께서 오래 달리실 수 있는 비법 중의 하나가 용천혈에서 뿜어나오는 기운을 땅을 딛는 반탄력으로 흡수하여 다시 달리는 데에 사용하는 것 아닙니까?”
취월걸개가 점차 황망한 표정을 지어갔다.
“그, 그렇지?”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사부님께서 그 신법을 창안하신 게 항룡십팔장에서 단서를 따오신 게 아닌가 하고요.”
“…더 말 해봐라.”
하현은 총명하게 두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저는 사부님이 하셨던 그 반대를 했을 뿐입니다. 신법은 이미 사부님께 잘 배웠으니, 그것을 역으로 풀어내는 것에는 무리가 없었습니다.”
“허허…….”
취월걸개는 조금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하현이 천고의 기재라는 것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종종 그가 상정하고 있던 정도를 넘어설 때가 있었다.
그리고 바로 오늘이 그럴 때였다.
“항룡유회는…. 제법 대단하구나. 다른 초식도 보여봐라.”
“다른 초식은 할 줄 모릅니다.”
“뭐? 할 줄 몰라?”
“다른 초식은 본 적이 없으니까요.”
“본적이 없어서 할 줄 모른다? 하하하…….”
취월걸개는 그리 웃긴 말도 아니건만,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한참을 웃던 그가 고개를 돌려 북서쪽을 바라보았다.
개방의 본산이 있는 방향이었다.
‘방주님. 이 배은망덕한 거지에게 용서를.’
그는 잠시 생각한 후에, 하현을 보며 말했다.
“현아.”
“네. 사부님.”
“내가 제대로 무공 수련을 한 지가 한참이 되어 몸이 찌뿌둥하구나.”
취월걸개는 돌연 팔을 휘휘 돌리더니 연무장의 한 가운데로 나아갔다.
“스승이 연공을 할 때 제자가 호법을 서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않으냐?”
차악!
그는 하현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양손을 허리에 가져갔다.
하현도 잘 알고 있고, 조금 전에도 펼쳤던 항룡십팔장의 첫 번째 초식.
항룡유회의 기수식이었다.
“아……!”
하현은 취월걸개의 의도를 알아챘다.
지금 그는 하현에게 항룡십팔장의 나머지 초식들을 전수하려 하는 것이다.
휘이익- 파악!
“척확지굴(尺蠖之屈), 비룡재천(飛龍在天)!”
취월걸개는 초식명을 입으로 소리내기까지 하며 초식을 전개했다.
평소라면 절대 하지도 않을 행동이건만, 이렇게 해서라도 지금 하는 초식이 무엇인지를 하현에게 가르쳐 주고 싶은 그였다.
“쌍룡취수(雙龍取水), 신룡파미(神龍擺尾)!”
그에 화답하듯, 하현도 빠져들 듯 취월걸개의 초식에 집중했다.
검마와 생사결을 하는 그 다급한 와중에도 항룡유회를 눈과 머리에 담았던 하현이다.
이렇게 대놓고 보여주는 데 기억하지 못할 리 없다.
후웅- 쩌엉!!
취월걸개의 시범을 보면 볼수록 어째서 항룡십팔장이 방주의 무공이라 하는지 알 것 같은 하현이었다.
하현은 지금까지 수많은 무공을 배우고 봐 왔지만, 이토록 직선적이고 파괴적인 무공은 본 적이 없다.
‘항룡십팔장은 무조건 이겨야만 하는 무공인 거야.’
항룡유회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초식인 진량백리(震諒百里)까지.
정파의 무공이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이토록 살상을 위한 무공이 또 있던가?
개방의 방규는 단 하나. ‘의를 숭상하라.’지만, 용두방주에게는 하나의 방규가 더 있다.
‘절대 패배하지 마라.’
그 방규를 지키기 위한 무공인 것이다.
‘그렇다면 삼십육로 타구봉법은…….’
하현은 그 무공도 궁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항룡십팔장을 배우고 있는 것도 사실은 엄청난 일이다.
이 일이 개방에 알려진다면 정말 심하면 자신과 취월걸개가 파문당할 수도 있을 만한 일.
그렇기에 하현은 타구봉법에 대한욕심은 내려두기로 했다.
스윽- 파삭!
취월걸개가 왼손을 뻗으며 허초로 눈을 가리고, 은밀하게 경력을 숨진 오른팔로 상대의 복부를 가격하는 용전어야(龍戰於野)를 끝으로 모든 초식을 마쳤다.
“후우-.”
그는 깊은숨을 내쉬었다.
전력을 다해 초식을 펼친 덕에 이마엔 살짝 땀이 맺혀 번들거렸다.
“아이고. 역시 나이를 먹으니 이렇게 움직이는 것도 힘들단 말이야. 하현아 네 덕분에 오랜만에 맘 편히 수련했구나. 고맙다.”
“사부님…….”
“표정이 또 왜 이래? 네가 종종 잊나 본데 나 거지다. 이런다고 너한테 줄 것 없어 이놈아!”
하현은 대답 대신 미소를 보여 줄 수밖에 없었다.
‘이미 너무 많은 걸 주셨습니다.’
하고 싶은 말은 있지만, 애써 참아내었다.
뱃속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에잇. 다 큰 녀석이 사람을 왜 이리 빤히 봐? 징그러워서 여기 못 있겠네! 간만에 몸을 움직였더니 허기가 지네. 밥이나 달라고 해야겠다. 난 먼저 간다!”
취월걸개는 이 상황을 견디기 힘들었는지 말을 내뱉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하현은 굳이 그를 쫓지 않았다.
대신에 눈을 감고는 조금 전 취월걸개가 보여준 신위를 떠올렸다.
취월걸개가 많은 것을 잃을 수도 있음에도 하현에게 가르쳐주려 한 초식이다.
혹여나 한 톨이라도 잊으면 취월걸개의 결단에 빛이 바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에 이미 온전히 기억하고 있는 그것을 다시 떠올렸다.
취월걸개의 그 마음과 함께.
* * *
취월걸개는 곽규와 다른 거지들을 이끌고 다음 날 곧바로 사라졌다.
곽규가 취월걸개를 따라 남궁세가를 떠날 때 청룡관 수련생은 한창 수련하고 있을 시간이었기에 운후는 배웅을 나오지 않았다.
잠깐 다녀와도 좋다는 남궁규현의 허락이 있었음에도 운후는 그 시간에 검을 한 번 더 휘두르고 싶다고 대답했다.
진짜 무림인이 되어 다시 만나자는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도련님. 이렇게 같이 살 수 있다니 정말로 꿈만 같습니다.”
“아저씨. 울지 마세요. 저도 정말 기쁩니다.”
신가장의 총관은 이대로 남궁세가에서 살기로 했다.
가주인 남궁무룡은 총관을 반갑게 맞이하였고, 총관의 특기를 살려 남궁세가의 재경관에서 함께 일하도록 했다.
그의 실력은 마교에서도 살려둘 정도로 뛰어났기에, 원래부터 남궁세가에서 일했던 사람들도 만족하며 함께 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 하현은 잔뜩 긴장해 있는 남궁환과 함께 있었다.
“후. 하현아 너도 이랬어? 도무지 진정이 안 되네.”
“아니? 나는 아무 생각 없었는데.”
“나는 며칠 전부터 잠이 안 오던데. 넌 역시 대단하구나?”
“잠이 왜 안 와?”
“부담감이 몰려와서.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과연 내가 정예대원에 걸맞은 무인일까? 이런 생각들이 너무 많아서.”
사천에 다녀오고 나서도 크고 작은 단독 임무들을 성공적으로 수행해낸 남궁환도 드디어 정예대원으로 승급하기로 했다.
그런데 승급식을 몇 시진 남겨놓지 않은 지금, 그는 하현의 방에 와 있었다.
“그간 누구보다 열심히 했잖아. 사천에 다녀오고서는 정말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 같이 더욱 열심히 했고.”
“그렇긴 한데…….”
“자신감을 가져. 형은 화멸검이잖아.”
“화멸검…. 그렇지.”
이제는 화멸검이라는 별호를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는 그의 모습에 하현이 큭큭 웃고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꼭 기억해야 할 게 있어.”
“뭔데?”
“할아버지를 믿어야지.”
남궁환은 의아해했다.
“할아버지?”
“가주님께서 형을 정예대원으로 승급해도 된다고 인정하신 거잖아. 혹시 할아버지의 판단을 못 믿는 건 아니지?”
남궁환은 하현의 말을 알아듣고는 곧바로 조금은 편한 표정이 되었다.
“역시 네가 나보다 더 어른스러워.”
“그걸 이제 알았어?”
“아니. 진작 알고 있었지. 그래서 내가 역시라고 했잖아.”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서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럼 승급 잘하고 올게.”
“그래. 별거 안 하니까 잘하고 와.”
“고마워.”
남궁환이 방을 나섰다.
승급식이라고 하여 뭐 특별한 게 있는 건 아니다.
사람을 불러 모아서 거창하게 하는 것도 아니고, 남궁무룡과 남궁기철, 거기에 남궁규현 정도만 참석한다.
하지만 그 의미가 가지는 바는 그리 작지 않다.
정예대원이 되면 자신의 뜻에 따라 임무를 받을 수도 있고, 거절할 권리도 있다.
또한, 스스로 조사하고 알아낸 정보를 토대로 임무를 만들어 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임무는 단독으로 수행할 수도 있고,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다.
실례로 정예대원 중에는 벌써 이 년이나 세가에 돌아오지 않고 홀로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무인도 있을 정도였다.
“후후. 환 형은 그만한 자격이 있으니까.”
능동적으로 움직이지는 않지만, 그에게 부여되는 임무는 모두 성실히 수행해낸 남궁환이다.
수련과 성장을 게을리한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저번 사천행을 계기로 그마저도 열심히 하기 시작했다.
그러니 이번 승급식도 조용히 진행되리라 생각했다.
모두가 남궁환의 승급을 축하해줄 거라고…….
“안돼! 난 인정 못 해!”
그런데 바깥에서 갑자기 누군가 큰 목소리로 소리치는 것이 들려왔다.
하현이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나 창문을 열어젖혔다.
“이렇게 되면 또 나만 정식대원이잖아. 승급은 조금만 있다가 해! 나 기다렸다가!”
목소리의 주인은 여인이었다.
그리고 무척이나 반가운 목소리였다.
하현은 창문에 얼굴을 내밀고 소리쳤다.
“누나!”
“하현아. 너도 내려와 봐! 아니지, 너도 지금 정예대원이지? 아주, 나만 빼놓고 열심히 다녔다 이거지?”
“소화야. 이런다고 해결될 게 아닌데, 조금만 진정을…….”
목소리의 주인공은 용봉지회에 참석하러 떠났던 남궁소화였다.
그 옆에는 팽헌홍이 그녀를 말리려 애쓰고 있었다.
타닷!
하현은 반가운 마음에 창문으로 뛰어내려 버렸다.
꽤 높은 전각이었기에 위험할 법도 했건만, 하현은 날렵하게 벽을 타고 내려갔다.
몇 달 만에 보는 소화는 이전보다 훨씬 성숙해진 것 같았다.
열여섯의 소화는 만개하기 직전의 꽃봉오리 같은 자태였다.
“와. 근데 하현이 넌 혼자서 뭘 따로 먹는 거야? 키가 더 컸는데?”
소화가 하현에게 바짝 붙어 키를 데며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하현은 키가 더 커서 팽헌홍과 비슷할 정도였다.
“그냥 해주시는 밥 열심히 먹었지. 팽 형. 잘 다녀왔어요?”
“그래. 너도 별일 없…. 지는 않았구나. 소식은 멀리서나마 잘 들었다.”
팽헌홍을 보는 하현의 눈이 살짝 커졌다.
용봉지회에서 무슨 깨달음을 얻었는지, 그의 기도가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저기, 일단 나 좀 놔주면 안 될까? 나 빨리 가서 승급식을 해야 하는데. 할아버지를 기다리시게 할 수는 없잖아.”
“아오! 내가 오늘은 봐준다. 어제 왔어야 제대로 훼방을 놓는 건데.”
“다행이네. 오늘 와서.”
“뭐?”
“이크.”
남궁환은 목을 움츠리며 멀리 도망갔다.
하현은 그들을 보며 오랜만에 마음 놓고 웃었다.
“역시 누나가 있으니까, 이제야 세가가 좀 활기찬 거 같네.”
“흥. 놀릴 사람이 없어서 심심했겠지.”
“그것도 그렇고.”
순순히 인정하는 모습에 남궁소화가 피식 웃었다.
“잘 다녀왔어?”
“응. 잘 다녀왔어.”
오랫동안 세가를 비웠던 소화가 돌아왔다.
무림칠봉(武林七鳳) 중 검봉(劍鳳)이라는 별호와 함께.
남궁세가 천재 외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