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궁세가 천재 외손자-155화 (155/304)

155화

“이 표물에 대해서는 할아버지께서도 아시는 일인가요?”

“아마 보고가 올라가긴 했을 텐데…. 아. 여기 용도 미상의 종이뭉치라고 보고가 올라갔고, 표행 승인이 났습니다.”

청룡표국에서는 표행 의뢰가 들어오면 먼저 의뢰 물들을 서류화하여 세가에 보고를 올린다.

그러면 가주 혹은 가주 대리(최근에는 남궁기철이 거의 모든 업무를 대신하고 있긴 하다.)가 목록에서 이상한 것을 직접 검수하는 형태로 의뢰 승인 절차가 진행된다.

이미 승인이 났다는 것으로 보아, 실물을 확인하지 않았거나, 확인했는데 별것이 아닐 가능성이 컸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일단 이 건은 제가 맡는 거로 하겠습니다. 제가 가져가도 되죠?”

“그럼요. 감사합니다.”

“시기는 언제까지고, 누구에게 가져다주면 되는 겁니까?”

“언제까지 보내달라고는 딱히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수취인은…. 황보세가의 황보미견으로 되어 있습니다. 황보세가의 둘째 따님이시죠.”

하현이 그 이름을 머리에 새겨놓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표행을 완수하고 또 들를게요.”

“정말 감사합니다. 도련님 덕분에 큰 시름을 놓았습니다.”

인사를 나누고 세가로 돌아온 하현은 팽헌홍의 수련이 끝나길 기다렸다가, 같이 하북으로 갈 것이라는 것을 이야기해주었다.

그는 하현의 이야기를 듣고서는 태연하게 준비하겠노라 대답했지만,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하현이 향한 곳은 다시 남궁무룡의 집무실.

혹시 할아버지라면 이 종이의 정체에 대해 알고 있지 않을까 싶어서 이곳에 들렀다.

하현이 집무실에 막 들어섰을 때는 창천각 무인 하나가 남궁무룡에게 보고를 올리고 있었다.

“하현아. 여기에는 또 무슨 일이냐.”

“여쭙고 싶은 게 있어서요. 혹시 바쁘시면 다음에 다시 와도 돼요.”

“아니다. 그래! 현이도 같이 들으면 더 좋겠구나. 사천에서 온 소식이라고 하니 말해보게나. 하현이는 사천에 있었던 그 당사자니.”

창천각 무인이 살짝 고개를 숙이곤 말했다.

“네, 가주님. 지금 막 들어온 소식입니다. 남궁휘연이 쾌차하여 다시 탐사대에 합류했다고 합니다. 운남 쪽으로 조금 더 내려갈 예정이고, 그곳에서도 아무런 단서를 발견하지 못하면 다시 세가로 돌아올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구나. 휘연은 다 나은 게 맞겠지?”

“서신에도 당가주가 워낙 신경을 많이 써 줘서 금방 일어날 수 있었다고 쓰여 있었습니다.”

하현은 당가주 당규호의 빙긋 웃는 얼굴이 떠오르는 듯했다.

“하하. 나중에 규호에게 은혜를 갚아야겠구나.”

“맞아요. 당가주님께 저도 받은 게 많아요.”

하현은 살짝 가슴께를 더듬자 당규호에게 받은 비검이 느껴졌다.

“그래. 조금 세태가 안정되면 한 번 초대하는 것도 좋을 것 같구나. 다른 소식은 없나?”

“네. 이상입니다.”

“고맙네.”

“아닙니다.”

창천각 무사는 남궁무룡에게 공손하게 인사하고는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그래. 무슨 일로 다시 온 게냐?”

“혹시 이 물건에 대해서 아시는 게 있을까 해서 왔습니다.”

하현은 남궁무룡에게 표물을 건네주었다.

남궁무룡은 종이뭉치를 살펴보더니 하현에게 물었다.

“이것은 어디서 난 것이냐?”

“황보세가까지 가는 표물입니다. 아마 서류에는 용도 미상의 종이뭉치라고 쓰여 있어서 표행 승인은 난 것 같은데, 아무래도 황보세가 정도 되는 무가에서 아무것도 아닌 물건을 의뢰하지는 않을 것 같아서요.”

남궁세가에서 청룡표국을 운영하는 것만으로도 이토록 풍족한 재정을 유지할 수 있는 까닭은 청룡표국에 물건을 맡기는 의뢰비가 다른 표국에 비해 몇 배는 비싸기 때문이다.

표물의 부피가 커지면 커질수록, 값이 비싸면 비쌀수록 그 의뢰비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된다.

하지만 그런데도 청룡표국이 일손이 달릴 정도로 문전성시를 이루는 것은 단 한 가지 이유다.

지금까지 의뢰 성공률이 십 할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청룡표국이 먼 옛날에 만들어진 이후로 모든 의뢰들은 단 한 번의 실패도 없었다.

“이건…. 비급일 가능성이 크구나.”

“그래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데…….”

“세상엔 여러 무공이 존재하듯, 종이도 여러 종류의 종이가 있단다.”

남궁무룡은 자리에서 일어나 집무실 구석에 있는 서랍으로 가더니, 세 장의 종이를 가져왔다.

하현이 보기에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흰 종이들이었다.

“먼저 이것을 보거라. 여기에 무엇이 쓰여 있느냐?”

“아무것도 안 쓰여 있어요.”

“그렇지?”

쪼르르

남궁무룡이 갑자기 그 종이에 차를 부었다.

종이가 찻물에 젖기 시작하자, 갑자기 종이에 글씨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 종이는 물에 빠뜨려야만 글씨를 볼 수 있단다. 그러면 이것은 어떨까?”

하현은 그 종이의 의미를 알겠는지 고개를 주억이며 말을 이었다.

“그것도 지금 보기에는 흰 종이로 보이네요. 하지만 특수한 방법이 있겠죠?”

“맞다. 역시 하나를 가르쳐주면 열 가지를 아는구나.”

그는 허허 웃으며 이번에는 종이를 촛불 위에 올려 그을렸다.

그러자 그을음이 글씨로 변했다.

“와. 신기하네요. 그럼 마지막은 뭐에요?”

“마지막이 가장 구하기 힘든 종이지.”

츠츠츠-

남궁무룡은 대답과 함께 종이에 내공을 흘려보냈다.

내공을 먹은 종이가 빳빳하게 서며, 선명하게 글씨를 내보였다.

“이런 종이가 있다니. 들어본 적도 없어요.”

“하하. 앞으로 무림을 횡횡하다 보면 가끔 볼 수도 있을 테니, 잘 기억해 두어라.”

“네. 할아버지. 그러면 그 종이뭉치도 이런 종이일 가능성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거죠?”

“그래.”

하현이 종이뭉치를 빤히 바라보는 것을 보고서는 남궁무룡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하하. 현이 너 지금, 이 비급에 무척이나 욕심이 나나 보구나.”

“아, 아니에요.”

“아니기는. 표정이 다 말해주었는데.”

그는 한바탕 더 웃어젖히고는 하현을 도닥였다.

“역시 할아버지는 못 속이겠어요…. 사실 욕심이 났지만, 이제 괜찮습니다. 표물을 탐내는 표사는 자격 미달이죠.”

하현의 눈은 어느새 차분해져 있었다.

그의 말대로 모든 욕심을 내려놓은 것으로 보였다.

“그래. 이제는 무공에 대해 욕심이 덜 날만도 한데, 아직도 그렇게 욕심이 나느냐?”

“하하. 새로운 무공을 보면 새로운 영감이 떠오르고, 그것이 제가 가진 다른 무공들을 발전시켜 주니까요. 마음 같아서는 이 세상 무공을 전부 익히고 싶어요.”

하현이 멋쩍게 말했지만, 남궁무룡은 하현의 저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너무 무리는 하지 말 거라. 지금 있는 것을 잘 다지는 것도 정말 중요하니.”

“네. 항상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하현은 할아버지에게 인사하고 방으로 나왔다.

그는 지금의 자신에게 할아버지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새삼 생각했다.

‘나도 모르게 앞서 나가고 싶어 할 때가 있으니까.’

하지만 그때마다 할아버지는 어떻게 알고 그를 잡아주었다.

앞으로 튀어나가려 할 때마다 잡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하현은 큰 힘을 얻는 것 같았다.

* * *

그날 밤.

하현은 그의 전용 연무장을 깨끗이 정리했다.

그가 세가 내에 있을 때면 매일같이 찾아오던 남궁환이나 소화이지만, 그가 자리를 비우면 거의 사용하는 법이 없기 때문이었다.

하현이 이 공터를 좋아하는 것처럼, 그들도 각자 좋아하는 수련 장소가 있다.

그런데 하현과 함께 수련하기 위해서는 이곳으로 와야 하기에 오는 것이지, 하현이 없는데 굳이 이곳에 올 필요는 없었다.

“이번에 가면 또 얼마 만에 돌아오려나.”

하현은 예전에 하북에 갔던 때를 기억했다.

그때는 모용세가까지 갔다 오기는 했으나, 거의 일 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세가에 돌아오지 못했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금방 오겠지.”

그때는 사람도 많았고, 할아버지와 함께 모든 직계가 여행하는 느낌이었기에 더욱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하북에서 남궁세가로 돌아오는 것은 며칠 걸리지 않았던 것을 생각했을 때, 일 처리만 빠르게 한다면 생각보다 빨리 돌아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도 하현은 세가를 한 바퀴 돌며 세가 곳곳을 눈에 담았다.

‘민이 형님도 항상 임무를 나가시기 전에 이렇게 한다고 하셨지.’

이것은 남궁민에게 배운 것이다.

임무를 나갈 때마다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를 모르니, 세가의 곳곳과 인사를 나누는 것.

일종의 미신과도 같은 것이지만, 남궁민은 그런 스스로에게의 제약까지 활용할 줄 아는 사내였다.

“…알겠어-?”

얼마나 걸었을까? 세가 장원을 절반 정도 걸었을 때, 하현이 귓가에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시간에 누구지?’

이미 달이 중천에 걸린 지 오래인 늦은 시간이다.

이 시간에 밖을 돌아다닐 사람은 없기에 하현은 조심히 소리의 근원지로 다가갔다.

최대한 소리를 죽인 그의 발걸음은 은밀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니까, 나는 그럴 생각이 없대도?”

아직 그들이 보이지는 않는 곳.

하현은 목소리의 주인공을 알아채고는 조금 놀랐다.

‘팽형?’

내일 하현과 함께 출발하기로 되어 있는 팽헌홍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그 상대방의 말소리가 곧바로 들려왔다.

“마음 같아서는 나도 같이 가면 좋을 텐데.”

‘소화 누나잖아?’

상대방은 소화였다.

이 야심한 밤.

둘은 석별의 정을 나누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갔다 올 때까지 정예대원으로 승급할 수 있도록 임무를 많이 완수해 놓을 테니까, 다치지 말고 돌아와. 알았어?”

“위험한 임무를 가는 것도 아니고, 집에 갔다 오는 것인데 무어가 그리 걱정이 많아?”

“그게 제일 걱정이지. 사실 오라버니는 집이 가장 위험한 곳이잖아.”

소화도 이미 팽헌홍의 집안 사정을 모두 알고 있는듯했다.

‘지금 나갈 수도 없고…. 뒤로 다시 돌아가야겠다.’

하현은 슬그머니 뒷걸음질 치며 몸을 뒤로 빼냈다.

혹시라도 들킬까 두려워 기척을 최대한 지운 발걸음이었다.

“어려운 일 있으면 언제든 현이한테 의지해. 동생이라고 자존심 부리지 말고.”

“하하. 걱정하지 말래도. 하현이는 내 은인이라고 말해주지 않았어? 그렇지 않아도, 이번에 하현이와 함께라 얼마나 기대되는지 모르겠군.”

하현은 갑자기 그의 이름이 나오자 그 자리에서 굳은 듯 그대로 멈춰 버렸다.

“그래? 하현이랑 가는 게 그렇게 좋다는 말이지?”

“그럼. 지금까지 하현이와 둘이서 임무를 갈 기회가 없어서 얼마나…. 아, 아니. 소화야. 그게 아니고.”

“아니긴 뭐가 아니야. 하현이가 그렇게 좋으면 하현이랑 평생 같이 다녀!”

소화는 팽헌홍에게 소리치고는 신법을 전개해 사라졌다.

팽헌홍도 곧 그녀의 뒤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이 모두 근처에 없다는 생각이 들자, 하현은 한숨을 푹 쉬었다.

“내가 듣지 말아야 할 걸 들은 건 아니겠지?”

하현은 잠시 고민했지만, 그냥 신경 쓰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들의 일은 그들끼리 해결하도록 두면 될 일이니까.

그는 재빨리 숙소로 돌아가 내일 출발할 채비를 마쳤다.

* * *

다음 날.

하현과 팽헌홍은 식구들의 배웅을 받으며 출발했다.

팽헌홍 역시 어릴 적부터 교육을 받았는지 말 타는 것에도 익숙했다.

그런데 그의 표정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다.

“팽형. 괜찮아요?”

“나? 내가 왜?”

“어제 잠을 잘 자지 못한 것 같은데.”

“내가? 아니다. 내가 어제 얼마나 잘 잤는데.”

뜨끔 하는 그를 보며 하현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사실 팽헌홍이 어제 소화를 달래느라 밤늦게까지 숙소로 돌아가지 못한 것은 아무도 모르는, 아니 몰라야 할 사실이니까.

“그러면 빠르게 달려 볼까요? 산동이 가깝다고는 해도, 한참 가야 하니까요.”

“그래. 하북에까지 가려면 빨리 서둘러야겠다.”

그 말과 함께, 그들을 태운 말은 북쪽으로 빠르게 나아갔다.

하북에 있는 집을 생각해서일까?

팽헌홍의 얼굴이 다시 활기차기 시작했다.

남궁세가 천재 외손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