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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세가 천재 외손자-157화 (157/304)

157화

하현과 팽헌홍이 북쪽을 향해 떠나던 날 밤의 안휘성 회남(淮南).

정남상단의 단주 정후는 낭패로운 상황에 부닥쳐 있었다.

크고 안락해 보이는 의자 위에 앉아 있는 그의 앞에 회색 무복에 복면을 쓴 자가 검을 겨누고 있었으니까.

“비급을 어디로 빼돌렸는지 말해라.”

“큭큭. 네 입으로 결국 실토했군, 그것이 비급이라고.”

“곧 죽을 놈이. 혀가 길구나.”

“그것이 어디 있는지 말해주면 날 살려줄 생각은 있고?”

복면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저것들처럼 한순간에 고통 없이 죽여주마.”

그가 손짓한 곳에는 정후의 호위무사로 보이는 무사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하하! 지금까지 삼십 년간 장사하며 수많은 사람을 보았지만, 너 같은 위선자는 처음이다. 그 무공이 그토록 욕심이 났나?”

“말할 생각이 없군. 손가락이 잘려도 지금처럼 건방질 수 있을까?”

저벅- 저벅-

그가 검을 들고 천천히 앞으로 걸어가 정후 앞에 섰다.

정후는 몸을 움직이려 애썼지만, 혈도가 잡혀 있는지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복면인의 검이 정후의 손가락에 닿으려는 순간, 그들이 있던 전각에 누군가가 들어왔다.

“주군. 이 상인이 며칠 전 청룡표국에 들르는 것을 봤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청룡표국?”

“남궁세가에서 직접 운영하는 표국입니다.”

“내가 그걸 모르는 줄 아느냐?!”

“죄. 죄송합니다.”

복면인이 얼굴을 구기며 말하자 수하가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그 역시 무림에서 칼밥을 먹으며 살아온 기간이 상당히 길다.

청룡표국과 남궁세가라는 이름이 가지는 의미를 모르지 않았다.

“클클. 너희 뜻대로 되도록 놔둘 줄 아느냐.”

“이런 버러지만도 못한 것이 성가시게!”

서걱!

그가 신경질적으로 검을 휘둘러 정후를 베었다.

“끄윽.”

정후는 의자에 앉아 있는 그대로 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가자.”

“이, 이대로 두고 갑니까?”

“그렇다. 왜. 마음에 걸리는 것이냐?”

“아닙니다!”

복면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방을 나가버렸다.

정후는 조금 전 일격에 즉사하지 않았다.

복면인이 휘두른 검은 그의 살과 근육을 가르고 지나갔지만, 치명상을 입히지는 못했다.

지금 당장 조치한다면 그는 살아날 가능성이 있으나…. 주변에 살아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크흑…. 아가씨. 꼭 무사하셔야…….”

정후는 쏟아지는 탈력감에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온몸의 피를 다 쏟아내고 나서야 명을 달리할 것이다.

그때까지 그 고통을 모두 견뎌내야만 한다.

“아가…. 씨…….”

정후의 피가 온 바닥을 적셔갔다.

* * *

정남상단을 빠져나온 복면인은 수하에게 말했다.

“당장 청룡표국으로 가서 물건의 소재를 확인해라.”

“네. 주군. 이미 표행에 올랐으면 어떻게 합니까?”

“누가 표행을 맡았는지, 어디로 갔는지까지 샅샅이 조사해라.”

“존명.”

수하가 사라지고, 그는 이 상황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청룡표국…. 남궁세가……”

무림엔 여러 가지 비공식적인 불문율이 있다.

그중의 하나가 바로 ‘청룡표국은 절대로 건드리지 마라.’는 불문율이다.

그것의 시작은 복면인이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을 때부터였다.

수십 년 전, 겁 없는 사파문 하나가 청룡표국의 표물을 습격해 약탈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처참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남궁세가에서 가주를 포함한 모든 무인들이 결집하여 그 사파문을 박살 냈고, 표물을 되찾은 것은 물론 그곳에 살아있는 모든 자를 몰살시킨 것이다.

남궁세가는 그것을 숨기기는커녕, 오히려 온 무림에 공표해 버렸다.

앞으로 다시는 청룡표국을 건드리지 말라고.

“정말로 성가시게 됐어.”

그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잠시 무언가를 더 생각하던 그는 곧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 *

하현과 팽헌홍은 계속해서 북쪽으로 말을 몰았다.

추성(鄒城)에 도착했다.

팽헌홍은 지도를 살피더니, 하현에게 말했다.

“오늘 하루만 이곳에서 쉬어가면 황보세가가 있는 제남까지는 하루 만에 갈 수 있을 거야.”

하현은 왜인지 팽헌홍이 제남을 말하는 어투가 자연스럽다고 느껴졌다.

“제남을 잘 아시나 봅니다?”

“잘 아는 정도는 아니지만, 몇 번 가보기는 했지. 하북에서 제남까지는 매우 가까우니까.”

“그랬군요. 가까운 객잔에서 쉬어가면 될 것 같습니다.”

하현은 취월걸개의 영향 때문인지 노숙에 큰 거리낌이 없었지만, 팽헌홍은 노숙을 싫어했다.

그들은 가까운 객잔을 찾아 들어갔다.

배는 고프지 않았기에, 방을 잡고 올라간 그들은 곧바로 몸을 씻고 침상에 올랐다.

“오늘은 수련을 안 하는 것이냐?”

“아, 검을 휘두르는 수련 말이에요?”

팽헌홍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련은 하루도 빼놓지 않고 하는 줄 알았는데. 어제부터 안 하는 것 같아서.”

“사실 어제도, 지금도 수련하고는 있어요. 다만, 이렇게 바깥으로 나올 때는 제 체력과 기운을 항상 일정 이상으로 비축해 두기 위해서 직접 검을 휘두르지는 않죠.”

“그러면 어떤 수련을 한다는 것이야?”

하현은 손으로 머리와 단전을 가리켰다.

“먼저 눈을 감으면 끊임없이 머릿속으로 전투를 치러요.”

“전투?”

“이상하게 들리실지는 모르겠지만, 제 안에는 무인 하나가 살고 있거든요. 그 무인은 제가 보고 들은 것을 바탕으로 매일매일 강해지고 깨달음을 얻죠. 그러면 저는 그 무인을 이기기 위해서 매일같이 도전하고, 싸우는 거예요.”

“그렇…. 구나.”

팽헌홍은 마지못해 대답한다는 듯이 천천히 대답했다.

솔직히 잘 이해가 가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저는 끊임없이 운기조식을 하고 있어요. 밥 먹을 때, 앉아서 쉴 때, 말을 탈 때도. 물론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하는 것보다는 효율이 무척 떨어지지만, 하지 않는 것보다는 훨씬 나으니까요.”

하현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가볍게 말했지만, 팽헌홍은 하현이 지금 그의 강함의 비결을 여과 없이 솔직히 말해주었다는 것을 알아챘다.

하지만, 그 비결을 따라 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지만.

“움직이면서 하는 운기조식이라니. 그게 남궁세가의 비전 심법인가 보구나.”

하현이 고개를 저었다.

“아, 아뇨. 사실 제가 익힌 창궁대연심공은 형이나 누나가 배운 거랑은 조금 다르거든요. 저는 구결을 처음 익히고서 길을 잡아 줄 사람이 없었어서 저 홀로 익히다가 이렇게 된 거예요.”

“심법을 홀로 익혔다고?”

하현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팽헌홍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그 역시 하현이 엄청난 천재인지는 잘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그는 자신의 아랫배에 슬쩍 손을 가져다 대었다.

건곤미허신공(乾坤彌虛神功).

하북팽가를 대표하는 심법으로 채워 넣은 기운이 자리 잡고 있다.

그는 평생 질투라는 것을 하지 않았는데, 지금 그는 아주 조금 하현이 부러웠다.

‘나도 끊임없이 운기할 수 있다면 아주 조금씩은 더 강해질 텐데.’

하지만, 그는 곧 마음을 잡아내었다.

이룰 수 없는 일에 목메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을 더 잘하려 노력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잘 아는 그였다.

“팽형. 괜찮으세요?”

몹시도 심각한 얼굴의 그를 보고, 하현이 조심스레 물었다.

“하하. 내 감정이 그대로 밖으로 드러났나 보군. 창피하구나.”

“흠…….”

하현은 그를 보고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왜 그렇게 조급하세요?”

“내가 조급해 보여?”

“네. 많이요.”

“…….”

팽헌홍은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남궁세가에서 지내며 많은 것을 내려놓았다고 생각했는데, 실상은 하나도 내려놓지 못한 자신을 깨달았다.

그는 겨우 말을 내뱉었다.

“형님들은 아득히 먼 곳에 계시니까. 사실 지금의 나로서는 보이지도 않아서 말이야.”

팽헌홍이 형님이라고 했지만, 아버지와 아들이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을 나이 차이다.

그들이 남궁세가의 남궁기철, 남궁기현과 동년배이니.

이번 용봉지회에서 다른 하북팽가의 무사들을 압도하는 실력을 보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들과 연배는 비슷하다고 해도 조카뻘의 항렬인 무사들이었다.

그들을 이긴 것으로는 결코 만족할 수 없는 팽헌홍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팽형은 팽가에 뜻이 있으시군요.”

팽헌홍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세가의 사람, 그것도 가주의 손자인 하현에게 배신하겠다고 대놓고 말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는지, 그는 불편하게 움직였다.

“언젠가는 그곳에 돌아가 가주가 되는 것이 나의 목표니까.”

하지만, 하현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우리 누나를 좋아하려면 그 정도 포부는 있어야죠.”

“아, 아니…….”

당황한 그에게 하현이 방긋 웃으며 그에게 다가왔다.

팽헌홍은 방금 하현이 그를 놀리려 그랬다는 것을 알았지만, 굳이 반박하지는 않았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제가 조금 도와드릴까요?”

“도와줘?”

“네. 팽형만 괜찮으시다면.”

팽헌홍은 무엇을 도와주겠다는 것인지 확실하게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하현이 그에게 나쁜 짓을 하지는 않을 것 같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스윽- 츠츠츠-

하현은 팽헌홍의 등으로 다가가 그의 등에 손은 얹었다.

그리고 천천히 기운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이제 천천히 내공을 끌어올려 보세요. 운기조식을 하듯이 일주천 한다는 느낌으로요.”

“후우-.”

사실 다른 심공을 익힌 두 사람의 기운이 충돌하면 큰일이 날 수도 있다.

그것도 바깥이 아니라 체내에서 충돌한다면 자칫 주화입마를 불러올 수도 있는 노릇.

하지만, 팽헌홍은 대답 대신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그는 하현을 믿고 기운을 끌어올렸다.

슈우우욱-

하현은 그의 기운을 자연스럽게 살폈다.

기운이 어떻게 일어나서 어떤 혈을 지나가는지, 그리고 어떤 작용을 하는지 샅샅이 살펴보는 것이다.

‘아……!’

팽헌홍은 하현의 의도를 알아챘다.

하현이 창궁대연심공을 홀로 익히며 개량했듯, 자신도 그렇게 도와주려 한다는 것을.

팽헌홍은 끌어올리던 기운을 더 천천히, 그리고 더 자세히 흐르도록 통제했다.

보통이라면 기운을 통제하는 것도 힘들어했겠지만, 팽헌홍 역시 하현의 옆만 아니라면 천재라고 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만한 자질이기에 그는 해낼 수 있었다.

스윽-

한참을 그렇게 기운을 끌어올리고 나서 하현은 손을 떼었다.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뜬 팽헌홍은 뒤를 돌아 하현을 보며 말했다.

“무엇을 좀 보았어?”

“네. 덕분에 더 자세히 볼 수 있었어요.”

팽헌홍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기운을 느리게 운기 하는 것이 생각보다 큰 심력을 소모 시켰기 때문이리라.

“먼저…. 역시 하북팽가의 저력은 대단하군요. 저도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엄청난 심법이에요.”

“그래?”

“기운을 폭발시키는 데에서는 이만한 심법이 없을 것 같습니다. 언젠가 도제 어르신께서 저에게 보여주셨던 오호단문도에 이토록 어울리는 심법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예요.”

팽헌홍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대로 건곤미허신공은 아버지가 그에게 직접 전수해 준 심법이니까.

“그런데…. 조금은 아쉽습니다.”

“아쉬워?”

“심법 자체가 아쉽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제가 느낀 바로는 팽형이 익힌 혼원벽력도와는 어울리지 않는 심법이에요.”

“혼원벽력도……!”

팽헌홍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하현의 말을 듣는 순간 느껴지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오호단문도와 혼원벽력도는 같은 도법이긴 하지만, 그 결이 완전히 다릅니다.”

“그렇지. 오호단문도는 패와 쾌를 중시하는 도법이고, 혼원벽력도는 변과 중을 중요시하니까.”

“네. 그런데 심법은 오호단문도에 꼭 맞춰져 있는 심법입니다. 물론, 워낙 뛰어난 심법이다 보니 혼원벽력도에도 그럭저럭 어울리지만…. 최상의 힘을 내기엔 어울리지 않죠.”

“그래서…. 그래서 내가 답답함을 느꼈구나.”

팽헌홍은 하현이 말할 때마다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하현은 현재 팽헌홍과 도제를 포함해도 혼원벽력도에 대한 이해도가 가장 깊은 무인일수도 있었다.

“그러면, 방법이 있겠느냐?”

하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하지 못했다.

지금 그는 자신의 속으로 침잠해 들어가 있었다.

하현의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지는 모를 일이기에 팽헌홍은 잠자코 하현을 기다렸다.

차를 한 잔 정도 마실 시간 동안, 하현은 미동조차 없었다.

팽헌홍이 혹시 몰라 말을 걸어볼까 하는 그때 슬며시 하현이 눈을 떴다.

“팽형…. 고맙습니다.”

“뭐가?”

“형님 덕분에 저도 큰 것을 얻어가는 것 같습니다.”

“큰 것이라니……?”

하현은 대답 대신 싱긋 웃었다.

그리곤 한참 있다가 입을 열었다.

“제 깨달음을 구결로 만들어 보았습니다. 이제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구결이라니?”

“이 심법이 온전히 팽 형에게 맞지는 않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제 몸에 맞는 심법이니까요. 팽형의 몸에 맞게 익히고 받아들이는 것은 이제부터 팽형이 해야 할 과제입니다.”

아직도 팽헌홍이 상황을 온전히 이해하고 있지 못할 때, 하현의 입에서 구결이 흘러나왔다.

팽헌홍은 최고조로 집중하여 하현의 말을 토씨 하나라도 빼놓지 않고 외우기 시작했다.

남궁세가 천재 외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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