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하현이 일러준 구결을 모두 듣고 나서 팽헌홍은 눈을 감았다.
“…….”
그리곤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의식 속으로 침잠해 들어갔다.
구결이 만들어준 영감을 붙잡아내려 하는 그의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던 하현이 팽헌홍이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을 주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대단하다.’
방에 혼자 남겨진 팽헌홍이 처음 느낀 감정은 이것이었다.
그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무공에 대한 상식이 전면에서 부정당하는 느낌이었다.
보통 무인들은 생각지도 못한 것을 하현은 이 짧은 순간 해내었다.
‘무공이라는 것을…. 개량할 수도 있는 것이구나.’
지금까지 그는 아버지로부터, 가문으로부터 배운 무공은 완전무결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무공을 수정한다던가, 개량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하현은 그것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무공을 구결로 풀어내는 것…. 애초에 모든 구결은 무공이 먼저인 것을.’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때로 사람의 판단력을 흐리는 경우가 많다.
팽헌홍은 지금껏 구결을 통해 무공을 배운다고만 생각했지, 무공을 구결로 바꿀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구결은 그저 먼 선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완전무결한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특별나다고 생각했는데, 실상은 보통의 무인이었구나.’
그는 스스로 느낀 것을 솔직히 인정하기로 했다.
너무나도 큰 격차에 하현에게 시기나 질투심이 일어나지도 않는다.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새로운 길, 새로운 사고의 방식이 있음을 가르쳐 준 것을.
스으으으-
팽헌홍의 기운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하현이 일러준 구결은 지금까지 그가 배워왔던 구결들처럼 선문답이나 하는 뜬구름 잡는 느낌의 구결이 아니다.
지금 곧바로 이해할 수 있고, 현재의 그에게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을 일러주는 듯했다.
그 덕분에 팽헌홍이 자신의 기운을 움직이는 방식은 이전까지 그가 기운을 운용하던 방식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쿠구궁-
팽헌홍은 자신의 안에서 무언가 부서지는 듯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그가 쌓아온 무(武)에 대한 개념이 부서지는 것.
소리가 들릴 리 없건만, 팽헌홍의 귀에는 생생하게 들려오는 듯했다.
‘이 심공은 오로지 혼원벽력도를 위한 것. 이 심법은…. 혼원벽력신공(混元霹靂神功)이라고 불러야 해.’
그는 자신의 몸에 흐르는 기운을 모두 혼원벽력신공에 맞게 변환해가기 시작했다.
천천히, 천천히 기운들이 그의 의도에 따르기 시작해갔다.
* * *
밖으로 나온 하현은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
하늘에 걸려있는 조각달과 별이 미약하게나마 빛을 내뿜고는 있건만, 주변을 분간하기에는 어려운 그런 밤이었다.
‘잘한 일일까?’
그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조금 전 팽헌홍에게 구결을 일러준 일 때문에 조금은 고민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혹시나 앞으로도 나에게 의지하게 되는 일은 없겠지?’
제일 큰 고민은 이것.
하현은 팽헌홍이 가장 빠르게 강해질 수 있는 길을 엿보여준 것이나 다름없다.
만약 팽헌홍이 그 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앞으로 스스로 생각하고 수련하기보다는 하현에게 크게 의지하려 할 것이 걱정되었다.
‘아니다. 그럴 일은 없어.’
하지만, 아주 잠시 후에 그는 그 고민에 대한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하현은 팽헌홍이 스스로 강해지려 하는 마음이 더 클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그가 보여왔던 모습과 더불어, 한 가문의 가주가 되겠다는 포부를 가진 자가 겨우 쉬운 길에 빠질 리는 없을 테니까.
스슥-
한창 하현이 생각에 빠져있을 때, 조금 멀리서 작은 소리가 하현의 귀를 자극했다.
신경을 쓰지 않고 들었다면 그냥 지나갈 수도 있을 정도의 작은 소리이기에 들짐승이라고 여길 수도 있건만, 하현의 표정이 달라졌다.
‘들짐승이 내는 소리가 아니야.’
하현은 얼마 전에 산중에서 만났던 호랑이를 떠올렸다.
그때는 산짐승을 그렇게 맞닥뜨린 것이 처음이라 알아챌 수 없었지만, 한 번 경험해 보았기에 지금은 확실히 알 수 있다.
저 소리는 인간의 옷깃이 스치는 소리라는 것을.
츠츠츠-
하현은 천천히 기운을 흘려보내 주변을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이 객잔 주위에 네 명의 무인이 흩어져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거리는 약…. 열다섯 장 정도.’
무인들은 아주 천천히 이쪽으로 접근하는 중이었다.
신경 쓰고 있지 않았더라면 움직이는지도 몰랐을 정도로 은밀한 움직임이었다.
‘목적이 뭐지?’
하현은 잠시 고민했다.
누구인지 모를 자들이 이 방향으로 오고 있기는 하지만, 이 객잔에도 꽤 많은 사람이 머물고 있다.
누구 때문에 어떤 목적으로 오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곧 결정을 내렸다.
‘선자불래(善者不來)요 내자불선(來者不善)이라.’
누구에게 목적이 있든 이 야심한 밤에 저토록 은밀하게 움직이는 것은 필시 좋지 않은 목적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 하현은 천천히 신법을 전개했다.
휘익-
하현의 몸이 깃털처럼 가볍게 움직였다.
그의 움직임은 바람을 연상케 했는데, 속도보다는 은밀함에 최대한 신경을 쓴 신법이었다.
하현은 그림자에 완전히 녹아들었다.
누군가 옆에 있더라도 고개를 갸웃하게 만들 수 있을 정도였다.
스윽-
네 명 중에 가장 강한 기운을 발산하는 자의 지척에까지 다다른 하현은 어둠 속에서 그를 주시했다.
검은색의 잠행복과 복면을 착용한 그는 빠르게 움직이지 않았다.
은밀함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기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살수…? 아니야. 그것과는 다른 느낌인데…….’
지금껏 살수를 많이 만나본 것은 아니지만, 살수에게서만 나는 특유의 살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한술 더 떠서 무인에게서 느껴지는 투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무공을 배운 거로 봐서는 무림인이 분명한데…….’
하현은 조용히 그의 뒤로 다가가 비검 하나를 꺼내어 그의 목덜미에 대고 조용히 말했다.
“목적을 밝혀라. 조금이라도 허튼짓을 하려다간 죽는다.”
복면인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하현이 처음 말을 걸었을 때, 어깨가 크게 들썩이는 것으로 보아 깜짝 놀란 것은 분명해 보이나, 그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 같았다.
“말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좋아. 물어볼 사람이 너 말고도 셋이나 더 있으니까.”
그는 이번엔 더 크게 움찔하더니 결국 입을 열었다.
“누군가를 해하려는 건 아니오. 우리의 일에 끼어들지 마시오.”
“해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소. 대협이 누구신지는 모르겠으나, 야밤에 심기를 거스른 것은 사과드리겠소.”
하현은 피식 웃음이 나올 뻔했다.
대놓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수상한 사람처럼 보이는 자가 저토록 예의가 바르게 인사하는 모습이 이상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하현은 그를 가까이에서 보니 더욱 확실히 그의 기도를 읽을 수 있었다.
‘자세히 보니 무공을 제대로 배운 것 같지도 않아.’
분명히 무공을 익히기는 했으나, 느껴지는 기운이 굉장히 미약했다.
밤에 은밀히 움직이는 것과 하현이 잡아내기 어려웠을 정도로 미미한 기운을 느꼈을 때는 이들이 내공을 갈무리하는 수법을 알고 있는 살수들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애초에 숨길 기운조차 없었던 것이다.
“혹시……?”
하현은 팽팽히 머리를 굴렸다.
할아버지와 취월걸개에게서 배운 무림의 사정과 지금까지 그가 직접 겪어온 일들을 종합해 봤을 때 이들의 정체를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
“투귀(偸鬼)?”
“……!”
하현의 말에 복면인의 두 눈이 몹시도 커졌다.
복면을 쓰고 있음에도 그가 놀란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잘 보였다.
투귀란 고상하게 말해서 그렇지 결국, 도둑을 지칭하는 말이다.
정확히는 그 많은 도둑 중에서도 하오문(下汚門) 투문(偸門)에 소속된 도둑들을 지칭한다.
“역시. 맞았군.”
“다들 도망쳐!”
타앗!
복면인은 소리를 지르며 땅을 박찼다.
하현의 말대로 그는 투귀였다.
대부분의 하오문도가 그런 것처럼 제대로 된 무공을 배우지는 못했지만, 신법 하나만은 자신이 있었다.
“어……?”
그런데 그는 지금 눈 앞에 펼쳐진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분명히 그가 펼칠 수 있는 최고의 신법을 펼쳐 몸을 빼냈거늘 하현과의 거리는 하나도 멀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법이 꽤 특이하신데…. 하오문 투문에 내려오는 비전입니까?”
“뭐라……?”
쒜에엑- 빠각!
도둑은 하현의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그를 따라잡은 것도 모자라 순식간에 그의 뒤로 돌아간 하현이 뒷목을 강하게 내리쳐 그대로 혼절하고 만 까닭이었다.
그가 바닥에 쓰러지는 것을 확인한 하현은 고개를 들어 나머지 셋의 위치를 파악했다.
그리곤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 *
“그러니까, 특별히 무슨 의뢰를 받거나 한 게 아니고, 그냥 저 객잔에 돈 많은 사람이 있을 것 같아서 물건을 훔치러 들어가고 있었을 뿐이라고요?”
복면인이 하현의 손에 쓰러졌던 곳과 그리 멀지 않은 공터.
하현의 앞에 네 명의 남자가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그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하현의 말에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맞습니다. 그래서 객잔에 접근하고 있었습니다. 대… 협…….”
그는 어색하게 대협이라는 말을 뒤에 붙이며 해명했다.
하지만 하현의 얼굴에서 의문이 사라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데요? 이 객잔은 이곳 추성에서도 그렇게 큰 객잔도 아니고, 양민들 보다는 무림인들이 많이 사용하는 객잔인 것 같던데요. 그리고 여기에 오다 보니 거대한 장원도 많고, 큰 전각도 많던데 상식적으로 그곳 물건을 훔치는 게 당연한 거 아닐까요?”
“자랑은 아니지만, 이곳 일대에 제 손이 닿지 않았던 장원은 없습니다. 지금 말씀하신 그곳들은 이미 한 번씩은 다 털어 보았기에 여기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그의 말을 듣는 하현의 미간이 좁혀졌다.
사내는 그 표정을 보고서 깨달았다.
그가 어떤 말을 하든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이라고.
후욱-!
“흐읍!”
하현이 그가 가진 기운을 밖으로 흘려보내어 복면인을 천천히 옥죄었다.
평생 이런 기운을 눈앞에서 마주한 적이 없는 복면인은 공포감에 사로잡혀 식은땀이 절로 나왔다.
‘이 자는 진짜 무림인이야. 진짜 무림인……!’
문도들에게 제약이 약하고 서로의 소속감도 작은 하오문이다.
개개인의 힘이 약한 그들이기에 첫 번째로 지키는 법규가 있다.
‘진짜 무림인에게는 무조건 항복해라.’
약자가 무림에서 살아남기 위함이었다.
그는 지금 선택을 해야 했다.
이대로 모르쇠를 해야 할지, 하현이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어야 할지.
“흐윽…….”
그는 기운 때문에 운신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들어 하현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었다.
착 가라앉아 있는 무심한 눈.
저 눈은 자비를 바랄 수 있는 눈이 아니다.
그는 겨우 입을 열었다.
“의, 의뢰를 받았습니다.”
화악-
그의 말과 동시에 안개가 걷히듯 그를 짓누르던 기운이 사라졌다.
“크헉! 허억…….”
지금껏 제대로 쉬지 못했던 숨을 몰아쉬는 그의 바로 앞까지 다가온 하현이 말했다.
“자세히 말 해보세요.”
“자세히라면…….”
“어떤 물건을 누구에게서 훔쳐야 하는지. 그리고 누가 의뢰했는지까지. 제게 조금이라도 의문이 남게 된다면…. 어떻게 될지는 잘 아시죠?”
하현의 허리춤에 달린 적룡검 검집에 새겨진 용의 눈이 순간 번뜩인 것 같은 착각마저 일었다.
‘망했다. 여기서 살아남는다면 다른 성으로 도망가야 해.’
그는 하현을 바라보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훔쳐야 하는 물건은 저 객잔의 이 층 네 번째 방에 있는 종이 뭉치를 훔치는 것입니다.”
하현은 그럼 그렇지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팽헌홍이 쓰는 방이 바로 이 층 네 번째 방이었다.
“역시 제 방에 오시려고 했군요.”
“네?!!”
그의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커졌다.
남궁세가 천재 외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