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그래. 일행이 있었지!”
“이제 우리도 시간이 없습니다. 아마 팽 형이 시간을 끌고 있을 테니, 서둘러 가보죠.”
“알겠소!”
급하게 말하는 그들을 멀뚱히 보고 있던 진선문이 땅을 박차려는 하현에게 물었다.
“대협!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객잔이 엉망이 되었으니까 정리를 도와주시고, 저자가 머물렀던 방에 뭐라도 남겨진 것이 없는지 샅샅이 찾고 계세요.”
“아, 알겠습니다!”
그리고 하현은 진선문을 가리키며 주방장에게 말했다.
“깨지거나 부서진 것은 이 사람이 다 배상해줄 것이니 걱정하지 마세요.”
“네? 제가요?”
“현무도장. 빨리 따라오시죠.”
하현은 진선문의 반문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서 땅을 박차며 신법을 전개했다.
그가 시야에서 빠르게 멀어지자 현무는 진선문의 어깨를 두어 번 툭툭 쳐준 후에 하현의 뒤를 따랐다.
“내가 왜? 다른 성으로 확 도망쳐버려……?”
하지만 이내 그는 한숨을 푹 쉬었다.
“주방장. 들어갑시다…. 빨리 정리부터 합시다.”
그는 모든 것을 체념한 듯 보였다.
* * *
회색 복면인이 사라진 방향으로 얼마나 따라갔을까?
그의 옆에는 어느새 따라온 현무가 함께였다.
‘대단한 신법이다……!’
현무는 하현의 뒷모습을 보며 속으로 감탄했다.
하현은 전력을 다해 달리는 것 같지도 않았고, 그저 가볍게 발을 놀리는 듯 보였다.
그런데도 현무는 무당파의 절학 중 하나인 제운종을 극성으로 펼치고 있음에도 그를 따라잡기가 쉽지가 않았다.
카캉!
그때 조금 멀리서 병장기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현의 고개가 그쪽으로 홱 돌아가더니, 뒤의 현무에게 말했다.
“현무도장. 저쪽입니다. 제가 가는 방향으로 따라오시면 될 겁니다.”
“그냥 같이 가면 되는 것 아닌…….”
파앗!
하현은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다리에 기운을 응축하여 땅을 박찼다.
그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인다 싶더니 갑자기 저 멀리서 툭 하고 나타난 듯 보였다.
그리고 그의 신형은 끊임없이 달라졌다.
“허허…….”
현무는 그만 헛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가 보고서 감탄했던 신법은 그저 가볍게 달리는 수준이었다.
“저 정도라면 우리 사형 정도…. 혹은 사형보다도 더……?”
하현의 뒷모습을 보며 현무는 검룡의 신위를 떠올렸다.
* * *
“팽형!”
병장기가 부딪히는 소리가 난 곳에 순식간에 도착한 하현의 눈 앞에 펼쳐진 것은 네 명의 무인과 싸우고 있는 팽헌홍이었다.
“하현아!”
그는 네 명을 압도하고 있지는 못했지만, 누구 하나 승기를 잡지 못한 대등한 싸움을 이어가고 있었다.
“하현아, 미안하다. 한 명을 놓치고 말았다.”
“한 명을요?”
하현은 팽헌홍이 싸우고 있는 네 명의 무사를 둘러보았다.
그런데 조금 전 객잔에서 싸웠던 복면인은 발견할 수 없었다.
팽헌홍이 말한 도망친 한 명이 바로 그였으리라.
“저기 두 그루의 큰 나무 사이로 도망갔다. 출혈 때문에 운신이 자유롭지 못해 보였다. 이곳은 나에게 맡기고 빨리 쫓아가라!”
“알겠습니다.”
하현은 팽헌홍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팽헌홍은 이들과 비등비등한 싸움을 이어가고 있고, 곧이어 현무가 도착하여 가세한다면 충분히 승기를 잡을 수 있으리라 판단했기 때판단했다.
“아무 데도 못 간다!”
하현이 몸을 틀어 복면인을 쫓아가려 할 때, 팽헌홍과 싸우던 무사 하나가 하현의 앞을 가로막았다.
“도망간 자가 누구이기에 이토록 필사적으로 지키려 하는 것이죠?”
“알 것 없다!”
부웅-
무사가 척 보기에도 묵직한 기운이 서려 있는 위에서 검을 위에서 내리쳤다.
그 수준은 분명히 다르지만, 복면인이 쓴 것과 같은 수법이었다.
카앙!
하현이 그 검을 가볍게 막아서고서 말했다.
“역시. 같은 무공을 익히신 것으로 보아, 같은 문파나 가문이시겠군요.”
“같은 무공?”
무사가 하현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반문하는 순간, 하현이 무한보를 밟아 순식간에 그에게 접근하고서는 그가 했던 것과 매우 흡사한 동작으로 그를 내리쳤다.
태산압정(泰山壓頂)이란 이런 것이라 말하는 듯한 동작이었다.
부우웅- 쿠웅!
“크윽!”
무사가 검 끝을 잡고 내리치는 검을 겨우 막아냈으나, 검에 실린 경력까지 흘려내지는 못하고 그대로 몸으로 받아내고 말았다.
“이렇게 하는 거였는데요.”
“큽! 네, 네가 어떻게 이 검법을!”
“요령을 가르쳐 드릴까요?”
“뭣이?!”
쉬익!
하현의 말에 몹시도 놀란 그는 하현이 보법을 밟아 지척에 당도한 것도 모르고 황망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뻐억!!
기운이 잔뜩 실린 주먹이 그의 명치에 꽂히자 무사는 앞으로 쓰러지며 혼절하고 말았다.
하현은 팽헌홍을 흘긋 보고서는 곧장 발걸음을 옮겼다.
조금 전 팽헌홍이 말해 준 큰 나무 사이였다.
팽헌홍에 대한 걱정은 추호도 없었다.
일대 사도 대등하게 싸우고 있던 그다.
일대 삼은 당연히 더욱 쉬울 것이 뻔했다.
스윽
하현은 나무 밑에 떨어져 있는 핏방울을 발견하고는 손으로 쓸어보았다.
아직 굳지 않은 것이, 조금 전 떨어진 핏자국임이 분명했다.
핏방울은 바닥에 방울방울 떨어져 있었다.
하현은 그 핏방울을 따라 걸어갔다.
‘이렇게 피를 흘릴 정도로 상처가 깊었던가?’
하현의 검이 분명 복면인의 팔뚝을 꿰뚫기는 했으나, 이 정도로 피를 흘릴 일인지 의문이 들었다.
‘지혈하지도 못하고, 바로 도주에 들었기 때문일까?’
일단 하현은 다른 생각은 하지 않고, 핏방울만 따라가기로 했다.
혹시 모르는 일이니, 검을 잡은 두 손에는 힘을 놓지 않은 채였다.
그리고 어느 순간 피비린내가 물씬 풍겨왔다.
‘저 풀숲 뒤다.’
무성하게 자라있는 풀숲 뒤.
저 자리에서 유독 피비린내가 진하게 나왔다.
그가 저곳에서 지혈하고 있을 수도 있어 보였다.
하현은 속으로 심호흡을 한 번 하고서, 땅을 박차 한 번에 풀숲을 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하현은 표정을 와락 구겼다.
“사슴?”
그곳에는 사슴이 한 마리 죽어가고 있었다.
검에 찔린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피를 쏟아내며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하현은 복면인에게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도주할 때는 이런 속임수를 사용할 수도 있구나.’
하현은 자신의 경험 부족을 새삼 느끼며 사슴에게 다가갔다.
“미안하다. 인간들의 일 때문에.”
서걱-
하현은 사슴을 편하게 보내주고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짜악-!
그는 자신의 양 볼을 손바닥으로 강하게 쳤다.
양 뺨에서 얼얼한 고통이 느껴졌다.
자책은 여기까지.
도망친 자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애초에 그를 놓친다고 하여 손해 볼 것은 전혀 없기에 하현은 미련을 버리고 발길을 돌렸다.
아직 무사들과 싸우고 있을 팽헌홍을 향해서였다.
“타압!”
하현이 다시 팽헌홍과 무사들이 싸우는 곳에 도착하니 무사 중 한 명은 이미 쓰러져 있고, 팽헌홍과 현무 둘이서 남은 두 명의 무사를 압도하고 있는 중이었다.
하현은 이 싸움에 끼어들까 하다가 걸음을 멈추고 현무가 싸우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렇지 않아도 승기를 잡은 싸움에 괜히 끼어들어 혹여나 변수를 만들어내지 않으려 함이었다.
휘익!
현무의 검이 유려하게 움직인다.
무당파의 무공을 이토록 자세히 지켜보는 것은 처음이다.
조금 전 객잔에서도 잠깐 보기는 했지만, 싸우는 도중에 스쳐보는 것과는 또 달랐다.
‘아, 태극이 이런 느낌이구나.’
흔히들 무당파의 검은 태극의 검이라고들 말한다.
음양이 조화되고, 부드러움이 강함을 제압하는 이유극강(以柔克刚)의 무공.
하현이 잠시 넋을 놓고 볼 정도로 현무의 검을 흥미로웠다.
‘아…. 검룡이 어째서 현무도장을 그토록 높게 평가했는지 알겠어.’
하현은 자질만 놓고 본다면 검룡보다 현무도장이 더 뛰어날 것이라고 말했던 것을 기억했다.
현무는 기본적인 무공의 수준 자체가 깊지 않다.
그건 누구보다 무공에 진심으로 몰두하고 있는 하현의 눈에는 속을 들여다보이듯 훤히 보인다.
하지만, 현무도장은 태극(太極)이라는 것을 온전히 이해하고 있는 듯 보였다.
‘물. 마치 물이 흐르는 듯한 검술이야.’
분명히 현무가 가진 힘 자체는 그리 크지 않다.
하지만, 그는 상대의 기운을 역이용하여 그리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상대를 압도하는 모습이었다.
지금껏 하현이 배워온 무공은 모두 자신의 힘을 길러 상대를 이기는 방법뿐이었다.
그러나 이 순간 하현은 상대의 힘을 이용하는 법을 배워가는 중이었다.
카카카캉- 피슉!
아주 간단한 움직임만으로 무사의 검을 막아낸 현무가 상대가 검을 회수하는 때에 맞추어 검을 찔렀고, 그 검이 무사의 가슴을 꿰뚫었다.
“크억!”
그와 동시에 팽헌홍의 도가 그가 상대하고 있던 무사의 허리를 반쯤 갈라냈다.
털썩!
무사 두 명은 마치 한 몸인 것처럼 땅에 쓰러졌다.
“후우. 이래서 싸우는 것을 싫어한다니까. 좋은 곳으로 가시오. 무량수불.”
현무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도호를 외었다.
나머지 무사들은 모두 싸우다 절명한 것으로 보였기에, 하현은 그가 기절시켰던 무사에게 다가갔다.
그는 하현이 기절시켰던 모습 그대로 쓰러져 있었다.
그를 뒤집었을 때.
“이런.”
하현은 미간을 좁히고 말았다.
그는 엎드린 그대로 자신의 심장에 소도를 박아놓고서 절명해 있었다.
“하현아. 도주한 자는?”
“놓쳤습니다.”
“그래? 잘했다. 괜히 너무 깊게 쫓았다가는 본말이 전도되었을 수도 있을 테니.”
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임무는 복면인을 잡는 것이 아닌, 황보세가에 표물을 안전하게 이송하는 것이었으니까.
“네. 일단은 객잔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자. 현무도장께서도 함께 돌아가시죠?”
“하하. 제발 그래 주시오. 오랜만에 몸을 움직였더니, 지금 뼈마디가 다 쑤셔서…….”
그는 정말로 전신에 통증이 오는지 삐걱거리며 걸었다.
팽헌홍이 그의 곁으로 가 그를 부축 해주었다.
그리고는 정말 놀란 눈으로 그를 보았다.
“……?”
“왜 그러시오?”
“아, 아니…. 정말로 평소에 수련을 많이 한 몸이 아니라…….”
“이것 참 부끄럽소. 하하.”
그는 멋쩍게 웃었다.
“이거 정말 나도 수련을 열심히 하든가 해야지 원. 두 소형제에게 보기 민망하구려. 평소에 힘을 길러놓아야, 오늘 같은 일이 생겨도 잘 대처할 것이고.”
“좋은 생각입니다. 우리는 무인이니까요.”
“그러게 말입니다. 사실 내가 무인이라는 것을 잊고 살았지 뭐요.”
하현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러면 무인이 아니라 무엇이라고 생각하셨습니까?”
“음…….”
잠시 생각에 잠기던 현무가 하현에게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개차반 도인?”
* * *
잠시 후.
그들은 난장판이 되었던 객잔에 도착했다.
그들이 객잔을 떠난 지 한 시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객잔은 멀끔하게 치워져 있었다.
부서진 탁자나 집기들은 모두 밖으로 빼냈기에 안이 휑하기는 했지만.
“대협! 일단은 모두 정리해놓았습니다.”
진선문이 객잔으로 들어오는 하현을 반갑게 맞았다.
“그자의 방에서는 무언가 나온 것이 없습니까?”
진선문이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정말 제가 구석구석 훑어보았지만, 벽에 걸린 이 무복 한 벌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무복이라. 일단 그건 제가 가져가겠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네! 그리고 이것도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하현은 진선문이 건넨 것을 받아들었다.
그것은 하현이 검으로 갈기갈기 찢어버린 종이를 하나하나 맞추어 다시 붙여놓은 것이었다.
“다행히 객잔에 아교가 있어 제가 붙여놓았습니다. 아주 중요한 물건인 것 같은데, 혹시 몰라서요.”
그리고 그는 마치 칭찬을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하현을 바라보았다.
하현은 그를 한 번, 누더기가 되어 있는 종이뭉치를 한 번, 번갈아 바라보더니 그만 크게 웃어버렸다.
“하하하. 이걸 하나하나 다 붙이고 계셨던 거예요?”
“네. 저 친구가 도와주었습니다. 제법 눈썰미가 좋은 친구더라고요.”
진선문이 가리키는 방향에는 객잔의 점소이가 으쓱한 눈으로 하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을 웃어젖힌 하현은 종이뭉치를 내려놓고,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응? 이게 왜 또 여기서 나옵니까?”
그것은 황보세가에 가져갈 표물, 종이뭉치였다.
“자세히 보세요. 두 개가 같은 것인가.”
진선문이 두 개의 눈으로 비교해보자, 둘이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알아챘다.
“아니, 그럼 이건?”
“당연히 가짜죠. 제가 정말로 표물을 찢을 줄 아셨습니까?”
“저는 종이뭉치가 바닥에 흩날려 있기에…….”
하현이 그를 보며 씨익 웃었다.
“그러면 그자도 똑같이 생각하겠군요?”
“그자라뇨?”
“복면인 말입니다. 그자 눈앞에서 제가 종이를 이렇게 찢어 놓았으니, 그는 표물이 파괴된 줄 알 겁니다. 더는 저를 쫓지 않겠죠.”
“아…. 그래서 이런 일을?!”
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럼 이제 편하게 움직일 수 있겠군요.”
하현이 굳이 그의 뒤를 끝까지 쫓지 않은 이유는 이것이었다.
복면인이 누구인지, 왜 이 비급을 노리는지 알 수 있다면 더욱 좋겠지만, 그가 맡은 임무는 이것을 황보세가까지 잘 전달하는 것이다.
이제 방해꾼은 없을 것이다.
남궁세가 천재 외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