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그 후로 나흘이 흘렀다.
그동안 하현의 일과는 반복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곧바로 황보정환과 연무장에서 만나 수미천왕신공의 구결을 전수 해준다.
그리고 그가 하현에게 배운 것을 복기하려 연공에 들어가면 하현은 다시 숙소로 돌아온다.
점심 식사 후에는 황보미견을 만나러 간다.
그곳에서는 가능한 긴 시간 동안 그녀에게 역시 수미천왕신공을 가르쳐 주었다.
똑같이 가르치는 것이라 해도 황보정환에게 해주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
그에게는 구결만을 일러주는 것이었다면, 황보미견에게는 기운의 운용법과 어느 기혈을 통해서 어떻게 작용하는지까지 그가 이해한 모든 것을 상세하게 일러주었다.
그 결과 하현의 말대로 상당한 무재였던 그녀는 나흘 만에 심법을 꽤 깨우칠 수 있었다.
황보정환은 하현에게 정말로 가장 좋은 방을 내어주었다.
커다란 두 개의 방이 하나의 거실로 연결된 방이었는데, 욕실까지 안에 들어 있는 최상급의 숙소였다.
“하현아. 이제 들어오는 것이냐.”
하현이 숙소 거실에 도착하자, 팽헌홍이 방문을 열고 나왔다.
그가 나가 있는 동안 방 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팽 형. 답답하지도 않으세요?”
“아니. 나에게도 좋은 시간이다. 혼원벽력신공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는데 잘 되었다.”
팽헌홍 역시 하현 못지않게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가 목표로 삼은 것은 하북팽가에 다다르기 전 혼원벽력신공을 몸에 완전히 체득시키는 것.
그 덕에 그는 밥 먹는 시간과 잠자는 시간까지 줄여가며 혼원벽력신공을 연구하고, 또 익히는 중이었다.
“오늘 밤에도 나갈 예정이지?”
“그렇습니다.”
하현은 저녁을 먹고서도 한밤이 되면 황보미견의 방에 찾아갔다.
일전에 했던 것처럼 창문을 통해 방에 들어간 그는 그 시간에도 황보미견에게 수미천왕신공을 가르쳐주었다.
“임주수가 생각보다 호위대에 미치는 영향이 큰 것 같았습니다. 그 시간만 되면 호위가 느슨해지거든요.”
“그래. 고지식해 보이는 사람이 때로는 더 믿을 수 있는 법이지.”
황보미견이 유일하게 믿는 사람이라고 했던 임주수는 하현의 이야기를 듣고서는 전적으로 하현에게 협조했다.
아무리 하현이라고는 하지만 황보세가를 제집 드나들 듯 자유롭게 나다닐 수 있는 것은 임주수가 호위들의 일정을 조절하여 그가 자유롭게 움직일 시간을 마련해 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이 아니더라도 하현은 그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움직일 자신이 있었지만, 그래도 신경 쓸 것이 하나 줄어든 것이니 그에게 나쁠 것은 없었다.
“팽 형. 진척은 있으시고요?”
씨익-
팽헌홍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는다.
하현은 대답을 듣지 않아도 그가 하고픈 말이 들리는 듯했다.
“난 다시 들어가마. 이제 겨우 닷새 정도밖에 남지 않은 것 같으니.”
“네. 혹여 막히는 부분이 있으면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래. 그때는 꼭 부탁하마.”
방으로 다시 들어간 팽헌홍의 눈에는 활기가 넘쳤다.
새로운 무학을 익히고, 발전하는 자신이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스윽-
하현이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그러나 황보세가의 무인들에게는 저런 눈빛이 보이지 않는다.
그들의 눈은 어딘가 음울한 구석이 깃들어 있었다.
‘분명히 무언가 있어.’
이곳에서 지낸 지 어느덧 나흘.
하현은 무언가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단순히 가주가 쓰러졌다거나, 야심가가 세가를 지배하고 있는 것에서 오는 위화감은 아니다.
‘내가 어디에까지 끼어들어도 될까?’
하현은 스스로 질문을 던졌다.
지금 그가 나서는 것도 분명 오지랖일 수 있다.
평생 그와 관계없을 수도 있는 황보세가의 일.
그런데 그 순간, 하현은 그의 두 사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현아. 세가를 나가게 되면 그때부터는 너의 뜻이 곧 남궁세가의 뜻이다. 네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따라라.’
‘할아버지…….’
한쪽은 그의 사부님이자 할아버지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또 한쪽은 취월걸개였다.
‘의를 숭상하고, 악을 멸하는데 따지고 재는 게 어디 있냐! 네 꼴리는 대로 해라!’
“풋-”
취월걸개를 떠올리자 웃음부터 난다.
하지만 그 덕분에 하현은 고민 따위는 모두 잊어버렸다.
그는 개방에 있는 오직 한 가지 규율만을 떠올리자 마음이 평온해졌다.
‘의를 숭상하라.’
그것만을 생각하자 하현의 눈에는 다시 확신이 깃들었다.
* * *
다시 야심한 밤.
하현은 황보미견에게 수미천왕신공을 가르쳐 주다가 말했다.
“소저. 오늘은 여기까지 해야 할 듯합니다.”
“아…. 벌써요?”
평소라면 동이 트기 직전까지 그녀에게 무공을 가르쳐 주던 하현이다.
그런데 지금은 평소보다 한 시진은 더 빨랐다.
“네. 오늘은 알아봐야 할 게 있어서요.”
“알아봐야 한다니요?”
“소저께서는 황보세가주…. 그러니까 할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인가요?”
그녀가 잠시 기억을 떠올리고는 말했다.
“한 육 개월 전쯤이었던 것 같아요. 정신이 들지는 못하셨지만, 의식이 없으신 할아버님께 인사를 올렸거든요.”
“가주님께서 살아계신 것은 확실하고요?”
“네. 분명히 살아 계셨습니다. 혈색도 그리 나쁘지 않으시고 숨도 쉬셨으니까요.”
하현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물었다.
“그러면 할아버님께서는 지금 원로원에 계신 거예요?”
“네. 제가 듣기로는 원로들께서 쓰러진 할아버지를 돌보고 있다고 들었어요. 그분들께서 돌아가시면서 주기적으로 할아버님께 원기를 불어넣고 있다고 했거든요.”
“그래서 혈색이 좋았던 것이군요.”
그녀가 불안한 눈빛으로 하현을 보았다.
“네. 그런데 왜 그러시죠? 무슨 일이라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좀 궁금해서 그래요. 제가 가르쳐준 것 내일 오후에 만나기 전까지 꼭 익혀 놓으셔야 해요. 내일은 조금 더 어려운 부분을 가야 하니까요.”
“알겠어요. 꼭, 꼭 익혀 놓을게요.”
하현은 두 주먹을 꽉 쥐고 다짐하듯 말하는 그녀를 보고는 맑게 웃어준 후에 창문으로 몸을 빼냈다.
“저, 저기.”
하현의 몸이 다 빠져나가기 직전, 황보미견이 하현을 불렀다.
“네?”
“무슨 일을 하시려는지는 모르겠지만…. 조심하세요.”
“고마워요.”
하현은 그녀에게 생긋 웃어준 후에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어후…….”
그녀는 하현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서는 침상에 털썩 주저앉았다.
“요즘 왜 이러지…? 무공의 부작용인가?”
그녀는 최근 갑자기 열이 오르고 땀이 나는 등 이상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손으로 얼굴에 부채질하던 그녀는 침상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럴 때가 아니야. 부지런히 익혀야지.”
그녀는 상념을 털어내고 다시 구결을 떠올렸다.
오늘에서부터야 온전히 느끼기 시작한 수미천왕신공의 기운이 그녀를 어루만져주는 듯했다.
* * *
스윽- 사락-
하현은 어둠에 몸을 숨긴 채 은밀하게 움직였다.
‘이곳이 원로원.’
원로원이라는 거창한 이름치고는 아주 평범하고 넓은 단층 전각이었다.
다만 방의 칸수가 무척이나 많았는데, 언뜻 헤아려 본 바로는 서른 개 정도의 방이 있는 것으로 보았다.
‘원로의 숫자가 스물여덟이라 했었나.’
하현은 이 원로원의 존재 자체에 대한 의구심이 들었다.
스물여덟이나 되는 초고수들이 세가에 일절 관여를 하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그런데 또 가주의 승인은 원로원에서 한다고 하니, 도무지 그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분명히 무슨 이유가 있을 거야.’
하현은 황보미견이 해준 말을 떠올리며 기척을 지우고 천천히 움직였다.
그녀는 가주가 원로원의 가장 가운데 위치한 가장 큰 방에 뉘어 있다고 했다.
스윽-
고개를 돌려 건물을 둘러본 하현은 속으로 감탄을 삼켰다.
‘단순한 전각인 것 같지만, 파고들면 전혀 다르다. 저 가운데 방에 접근하는 자는 다른 모든 방에서 지켜볼 수 있도록 설계가 되어 있어.’
하현은 정말 오랜만에 긴장이 돼 오는 것을 느꼈다.
‘황보세가의 원로들이라면 두 번의 전쟁을 모두 거친 백전노장들일 가능성이 크다. 내가 그들의 이목을 모두 속일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질문은 던졌지만, 그 해답은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해낼 수 없을 것 같은 도전을 앞두고, 그는 그 어느 때보다 즐거운 미소를 짓고 있었으니까.
톡-
하현의 이윽고 발을 뗐다.
때마침 하늘도 하현의 편을 들어주는 것처럼 구름이 달을 가려 사방이 캄캄해져 왔다.
‘지금!’
스슥- 스슥-
그 어둠을 틈타 하현은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발을 디딜 때 나는 소리는 풀이 바람에 스치는 소리보다도 작았다.
그리고 기운 한 톨 밖으로 흘려내지 않았다.
‘사천사살이라고 했던가.’
하현은 사천에서 만났던 살수들이 기운을 안으로 갈무리하여 하현마저 속였던 것을 떠올렸다.
황보세가의 원로 중 하현만큼 기감이 뛰어난 자가 있더라도, 틀림없이 알아채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타탁- 탓!
구름이 달을 지나가고 다시 달빛이 내려올 때.
하현은 이미 가주의 방 옆에 바짝 붙어 있었다.
‘휴우. 성공이야. 이제 이 방에는 어떻게 들어가지? 좋아. 이렇게 하자.’
하현은 지붕으로 뛰어 올라갔다.
그리곤 소리 없이 지붕에 얹혀 있는 기와를 하나씩 들어내기 시작했다.
사람 하나가 딱 지나갈 정도의 기와를 걷어내자 그 밑에 쌓인 서까래가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그 서까래까지 몇 개를 걷어내었다.
우둑-
그 과정에서 아주 작은 소음이 일었으나, 다행히 주변 그 누구도 알아채지 못한 듯 보였다.
서까래까지 걷어내자 비로소 방 안이 보였다.
방 안은 촛불만이 켜져 있었는데, 한쪽 끝에 누워 있는 자를 제외한다면 그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저 사람이 황보세가의 가주.’
하현은 방 안을 면밀하게 살핀 후에 바닥으로 툭 내려왔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가주를 지키고 있는 사람은 없다.
저벅
하현은 조심히 가주에게 다가갔다.
쌔액- 쌔액- 하는 숨소리가 그가 숨 쉬고 있음을 알리는 듯했다.
두 눈을 꼭 감고 있는 그의 얼굴은 황보정환과도 닮아 있었다.
하긴, 부자간이기에 얼굴이 닮은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정말로 혈색이 좋다. 쓰러진 지 십 년이나 된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야.’
하현은 아주 잠깐 가주가 쓰러진 척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
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그가 굳이 그래야만 하는 이유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병 때문이라고는 했지만…. 이건 병이 아니야.’
하현은 그를 보는 순간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주화입마.
보통의 주화입마가 보이는 형태는 아니지만, 분명히 하현은 그렇게 느꼈다.
그리고 그렇게 느낀 이유는 간단했다.
그를 마주하는 순간부터 하현의 수미천왕신공이 날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스윽-
그는 이불을 걷어내고 황보가주의 손목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의학에 조예가 있어 진맥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가만히 손을 대고 그의 기운을 느껴보려 했다.
콰과과과-
“헛!”
하현은 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흐름에 깜짝 놀라 육성으로 소리를 내며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이 상태는……!’
가주의 상태는 하현에게 몹시도 익숙했다.
하현이 다시 가주에게 다가가려는 찰나.
쾅!
갑자기 문이 열리고, 순식간에 몇 명의 고수가 가주의 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모두 하나같이 백발이 형형한 것으로 보아, 원로원의 원로들로 보였다.
“가주님의 방에 침입자라니!”
“웬 놈이냐!”
“이 야밤에 어째서 이곳에 몰래 숨어들어온 것이냐?!”
하현이 조금 전에 놀라 작은 소리를 낸 것이 화근이었다.
신경 써서 기척을 지울 때는 들키지 않을 수 있었지만, 이들은 모두 무림에서도 내로라하는 고수.
그 소리를 그냥 지나치지 않은 것이다.
“잠시만요. 제 말을 잠시만 들어주세요.”
하현은 양팔을 들고 그들을 진정시키려 했다.
그가 가주를 해할 목적으로 온 것이 아니었기에.
“아니, 너는 남궁세가에서 온 자 아니더냐?!”
그중의 한 명이 하현을 알아보았다.
멀리서 느껴지던 시선 중의 한 명인 것 같았다.
“그렇습니다. 남궁세가의 남궁하현입니다.”
“정환이의 귀빈 대접을 받는 네가 이곳에는 무슨 일이냐. 혹시 그 패륜아가 아비까지 죽여달라고 부탁하더냐……!”
그의 양손에 강맹한 기운이 응어리지기 시작했다.
오해를 해도 단단히 한 모양이었다.
하현은 더 큰 사달이 나기 전에 재빨리 입을 열었다.
“제가 가주님을 깨울 수 있습니다.”
“뭐……?”
“뭐라고?!”
하현의 눈은 올곧았다.
원로들은 어째서인지 그 눈에 압도당하는 느낌이었다.
남궁세가 천재 외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