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하현의 말은 큰 파장을 가지고 왔다.
당장이라도 하현을 때려죽이려던 노인은 어찌나 놀랐는지, 공력이 흐트러지기까지 했으니까.
“네, 네놈이 거짓을 고한다면……!”
“의식은 없지만, 맥박과 호흡은 정상이고 기혈이 계속해서 들끓고 있지 않습니까?”
“그걸 네가 어떻게?”
원로들은 몹시도 놀랐다.
하현이 가주의 상태를 정확하게 짚어냈기 때문이다.
“그 기혈을 진정시키기 위하여 여러분들께서는 직접 가주님의 몸에 기운을 불어넣었을 것이고요.”
원로들은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며 말했다.
“맞다. 원기를 주입하면 그때는 기혈이 안정되곤 했으니 말이다.”
“좋은 방법은 아니었지만…. 여러분의 그 노력 때문에 가주님께서는 여태껏 살아계실 수 있으셨던 것도 맞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그러는 너는 지금 가주님의 상태가 어떤지 알고 있다는 뜻이냐?”
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마 제가 아니었다면 이 세상 누구도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도대체 자꾸 무슨 소리를 하는…….”
키가 땅딸막한 노인이 노호성을 터뜨리며 하현에게 달려드려 할 때, 처음에 하현을 죽이려 양손에 기운을 모았던 노인이 그를 제지했다.
“근주! 잠시 기다려보게. 저자의 말을 끝까지 듣고 나서 때려죽여도 늦지 않네.”
그는 싸늘하게 하현을 바라보고는 말을 이었다.
“말해보아라. 가주님이 어떤 상태인지.”
하현은 그의 눈을 마주치며 입을 열었다.
“주화입마입니다. 아니, 정확히는 수미천왕신공이 폭주한 상태입니다. 그리고 가주님은 그 기운을 다스리려 지금도 스스로와 싸우고 계실 겁니다.”
“수미천왕신공이 폭주를…? 그게 사실이라고 치자. 네가 어떻게 가주님을 깨어나게 한단 말이냐?”
“보십시오.”
하현은 말을 끝내자마자 기운을 끌어올렸다.
우웅- 고오오오-
마치 이전부터 준비하고 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떠오른 하현의 웅혼한 내력이 방안을 서서히 채우기 시작했다.
하현이 갑자기 기운을 끌어올리자 깜짝 놀라 잔뜩 경계하던 노인들은 곧 하현의 기운이 굉장히 익숙하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둘 경계를 풀기 시작했다.
“이, 이 기운은…….”
“설마……?”
어느새 기운을 거둔 하현이 그들을 보며 말했다.
“저도 수미천왕신공을 익혔으니까요.”
“수미천왕신공을……?!”
“그러면 우리 황보세가의 실전된 무공을 전달하러 왔다는 것이 수미천왕신공이었다는 말이냐?”
“그렇습니다.”
그러자 조금 전에 근우라고 불린 땅딸막한 노인이 바로 옆의 깡마른 노인을 붙잡고 말했다.
“자네는 정환이가 이 아이를 왜 불렀는지도 모르고 감시했다는 말인가?!”
“정환이 그 자식이 또 나를 속였네! 내가 물어보았을 때는 태산십팔반검(泰山十八盤劍)의 전인이라고 했단 말일세.”
그 역시 굉장히 억울하다는 듯한 말투였다.
하현은 몹시도 당황해 보이는 표정의 그들을 보며 생각했다.
‘역시, 진실 속에 거짓을 섞었군. 수미천왕신공을 완전히 익히고 나서 이들에게 말할 생각이었던 거야. 혹시 모를 방해가 있을지 모르니.’
땅딸막한 노인이 하현에게 고개를 돌리곤 물었다.
“자네는 그 무공을 어찌 아는 것인가?”
“그래. 이전까지는 우리 황보세가와 연도 없던 자가 아닌가?”
하현은 원로들을 바라보았다.
‘나도 진실 속에 거짓을 섞는다.’
순간 생각을 마친 하현이 입을 열었다.
“혹시 정후라는 분을 아십니까?”
“정후? 황보정후를 말하는 것인가?”
“성은 지금 처음 들었지만, 맞는 것 같습니다.”
하현은 이 비급을 황보미견에게 보내 달라고 한 의뢰인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고, 그 이름을 말했다.
그의 예상이 적중했는지 정후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원로들은 눈에 띄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십 년 전에 정철이와 함께 자취를 감춘 정철이의 오른팔이 아니더냐?”
“저도 그렇게 들었습니다.”
“정후가 아직 살아 있단 말이냐? 도대체 어째서 지금까지 세가에 나타나지 않고……?!”
“세가에 그가 돌아오지 않았으면 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하현의 말에 모두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들의 뇌리에는 모두 한 명의 이름이 스쳤다.
“그러면 정철이도 혹시 정환이가……?”
하현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저도 잘 모르는 일입니다. 저는 정후님에게 수미천왕신공을 전수 받았고, 그 전수 받은 것을 황보미견 소저에게 전달해주려고 온 것뿐입니다.”
“그러면 지금 이곳에는 왜 온 것이냐? 너는 미견이에게 수미천왕신공만 건네주고 사라지면 될 일 아니냐?!”
깡마른 노인은 날카롭게 물었다.
하현은 이 물음에는 일부러 날 선 어투로 말하기 시작했다.
“같은 정파로서, 무림세가의 일원으로서 현재의 황보세가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숙부에게 목숨을 위협받고 있는 황보미견 소저를 그냥 두고 갈 수도 없었고요. 만약 그랬다면 그게 정녕 정파의 무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으음…….”
하현은 원로들의 눈을 하나하나 맞추며 말했다.
“그리고 현재 황보세가는 정상이 아닙니다. 무사들은 열정으로 무공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의무감에 겨우 수련을 하고 있고, 이곳에 몸을 의탁하고 있던 수많은 무인들이 수년 전부터 세가를 떠나고 있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그, 그것은 가주가…….”
“가주의 부재는 그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
노인의 말을 끊은 하현은 일부러 점점 언성을 높이며 계속해서 말했다.
“가주의 부재가 큰 문제라는 것은 저도 인정합니다. 세가를 앞에서 끌어주고, 방향을 결정해줄 가주가 없다는 것은 치명적일 테니까요. 허나, 가주가 쓰러져 있다고 십 년이나 그 자리를 공석으로 두고, 다음 가주를 뽑지 않은 것도 결국은 이 세가의 원로로서 직무를 유기한 것 아닙니까?”
“…….”
하현의 말에는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오늘 이곳에 온 것도 다른 이유가 아니었습니다. 황보세가주님께서 어떤 상황인지,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세가가 이 지경이 되도록 놔둔 것인지 알아보기 위해서입니다. 같은 정파 무림인으로서 걱정하는 마음에.”
말이 끝나자 정적이 맴돌았다.
지금까지 날 선 얼굴로 하현을 쏘아붙이던 깡마른 노인도.
계속 흥분하여 하현에게 달려들려던 땅딸막한 노인도 꿀 먹은 벙어리처럼 하현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허허. 이쯤 하시게. 저 소협의 말이 맞는 것 같으니…….”
그때 백발의 머리에 흰 수염이 명치까지 길게 늘어진 노인이 원로들을 비집고 나오며 말했다.
“원주님!”
“형님……!”
그는 하현을 보고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반갑네. 남궁세가의 남궁하현이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나는 황보세가의 원로원주 황보영철이라 하네. 자네의 이야기는 모두 들었네. 직무유기라….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그는 슬픈 눈으로 누워 있는 가주를 바라보고는 말을 이었다.
“허나 우리로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네. 사실 수미천왕신공을 익히지 못했기에 가주의 이양을 할 수 없다고 한 것은 일종의 구실이었네. 우리는 살아있는 가주를 폐하고 정환이를 가주로 만들 수 없었던 게야.”
“황보정환이 가주가 되면 안 되는 큰 문제라도 있는 겁니까? 비록 방향은 다를지라도 충분히 결단력 있고 힘 있는 가주의 재목으로 보이는데요.”
그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 아이는…. 가주가 되어서는 안 되네.”
“이유가 있습니까?”
황보영철은 하현은 지긋이 바라보았다.
과연 하현에게 어디까지 이야기해도 좋을지를 가늠하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그는 이내 마음을 먹은 듯, 입을 열었다.
“그 아이는 제 형을 죽일 정도로 욕심이 많기 때문이네.”
그는 힘겹게 말을 이었다.
“우리 원로원이라고 놀고 있었던 것은 아니네. 지금껏 정철이를 찾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했지. 우리가 알아낸 것은 단 하나였네.”
“무엇입니까?”
“정철이가 마지막까지 같이 있었던 사람은 바로 정환이었다는 것뿐.”
황보영철의 수염이 부르르 떨렸다.
그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 증거가 없었군요. 황보정환을 벌할만한 확실한 증거가.”
“그렇네. 그리고 또 한 가지. 지금 가주님께서 쓰러져 계신 상황에 정환이마저 폐한다면 황보세가는 그 명맥을 잃어버리게 된다네.”
그는 황보정환에게는 몇 명의 자식이 있었지만, 그의 자식들에게도 세가를 맡길 수는 없다고 말하고는 하현을 바라보고는 말을 이었다.
“가주님을 깨울 수 있다고 하였는가?”
“확신은 아닙니다. 하지만, 오직 저만이 시도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애절한 얼굴로 하현에게 말했다.
“부디 가주님을 살려주시게. 그리고…. 우리 황보세가를 구해주시게.”
그는 일흔 살은 더 어린 하현을 향해 공손하게 고개를 푹 숙였다.
“부탁하네!”
그를 따라 다른 원로들 역시 하현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하현은 그들을 보며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정도면 겨우 정리된 것 같네.’
원로들이 하현의 선의를 받아준 것이 다행이었다.
혹시나 아무것도 못 하고 쫓겨나면 어떡해야 하나까지 고민한 하현이였다.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면 한시가 급하니, 가주님의 상태부터 확인하겠습니다.”
“그래 주시게.”
“그런데…. 모두 이곳에 계셔야만 합니까? 조금 부담스러워서요.”
황보영철이 하현의 말에 문득 뒤를 돌아보자, 그곳에는 십 수명의 원로가 하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흠흠. 그렇군. 나를 포함하여 세 명 정도는 괜찮겠는가?”
“네. 그 정도는 괜찮습니다.”
그가 하현을 보며 멋쩍게 웃어 보이고는 원로들을 향해 말했다.
“근주와 관학만 남고 나머지는 전부 방에 돌아가 있게나.”
“원주님. 저희도…….”
“어허. 돌아가 있으래도? 나를 못 믿는 건가?”
“아, 아닙니다!”
원로들은 아쉬운 눈빛을 보내오면서도 하나둘 가주의 방을 떠났다.
이윽고 그곳에는 아까의 땅딸막한 노인과 깡마른 노인. 그리고 원로 원주만 남게 되었다.
“나는 황보근주라 하네. 아까는 흥분해서 미안하이.”
“나는 황보관학이네.”
“네. 어르신들. 아까는 놀라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하현은 그들과 인사를 나눈 후에 황보세가주의 옆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언젠가 의원이 이렇게 하는 것을 기억한 하현은 가주의 손목을 다시 잡았다.
쿠과과과!
다시 한번 급류처럼 느껴지는 가주의 기운.
하지만 이번에는 손을 떼지 않았다.
‘조심히 들어가야 해. 놀라게 해서는 안 돼.’
하현은 천천히 그의 기운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가주의 내부에서 흐르는 기운은 생각보다도 더 맹렬하게 흐르고 있었다.
‘때때로 느껴지는 이질적인 기운들. 원로들이 불어넣은 기운이겠지?’
그들이 채워준 원기는 가주가 지금까지 살아있게 해준 원동력이지만, 역설적이게도 그가 깨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에도 단단히 한몫하고 있었다.
그 기운들은 모두 합쳐져 마치 가주의 기운인 것마냥 흐르고 있었다.
‘요령은 어제 내가 해봤던 것과 똑같아. 조금씩, 천천히 흩어야 해.’
모든 판단을 마친 하현은 슬그머니 기운을 거두고 가주에게서 손을 떼어냈다.
“가망이 있겠는가?”
“가주님께서 일어나실 수 있겠는가?”
하현이 숨을 내쉬며 한발 물러서자,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황보근주와 관학이 곧바로 하현에게 물어왔다.
하현은 그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충분히 가능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게 정말인가?!”
“네. 다만 오늘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어째서인가?”
하현이 살짝 열린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미 하늘에는 어스름한 새벽 해가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시간이 굉장히 오래 걸릴 것으로 보입니다. 아시겠지만, 저는 아침마다 황보정환을 만나러 가야 합니다. 오늘 제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의심할 것이 분명합니다.”
노인들은 하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가주가 되기 위해 제 형들까지 죽인 그다.
만약 가주가 일어날 수 있다고 하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그였다.
“내일 밤에 다시 오겠습니다. 자정쯤에 뵙도록 하죠.”
“알겠네.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되겠는가?”
“물론입니다.”
황보영철은 조금 뜸을 들이다 이내 입을 열었다.
“자네…. 검존과 어떤 사이인가?”
하현은 오랜만에 듣는 반가운 별호에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제 조부님 되십니다.”
“그랬군. 왜 그것부터 말하지 않았는가?”
“저는 검존의 손자 남궁하현이 아니라, 남궁세가의 남궁하현이니까요.”
황보영철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네. 내일 보지.”
“네. 내일 뵙겠습니다.”
하현은 그가 들어왔던 지붕의 구멍으로 다시 뛰어올라 서까래와 기와를 제자리로 돌려놓고는 다시 숙소로 사라졌다.
“원주님 저자는 대체…….”
“아무 말도 말게. 내일까지는 잠자코 기다리고 싶네만.”
“아…. 알겠습니다.”
황보영철의 얼굴은 걱정 하나 없이 평온했다.
하현에게서 희망을 본 까닭이었다.
남궁세가 천재 외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