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궁세가 천재 외손자-169화 (169/304)

169화

다음 날.

하현은 황보정환에게 또 오늘 분량의 구결을 가르쳐 주었다.

황보정환은 생각보다 더 무공의 재능이 뛰어났다.

수미천왕신공의 구결을 정확히 절반째 듣고 난 그는 그대로 가부좌를 틀고 무아지경에 빠져 구결을 이해하려 노력했다.

이제는 하현에 대한 의심을 모두 거두었는지, 아직 하현이 자리를 뜨지 않았음에도 아무런 방비를 하지 않았다.

‘지금 만약 저자를 죽인다면……?’

하현은 아주 잠시 이런 생각이 스쳐 갔다.

여러모로 보았을 때, 현재 황보세가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자였으니까.

만약 하현이 지금 그를 죽인다고 해도 원로원에서 나서서 비호해 줄 것이 분명하니, 명분도 문제가 되지 않을 터였다.

‘아니다. 이 자에 대한 심판은 내가 할 일이 아니야.’

하지만 곧 그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도 세가의 일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는 것이지만, 확실치도 않은 일에 손을 쓸 수는 없는 일이니까.

조용히 숙소로 돌아온 하현은 서신 하나가 도착해 있는 것을 확인했다.

며칠 전 남궁세가에 이번 일 때문에 황보세가에 며칠을 더 머물겠다며 보낸 서신의 답장이었다.

서신에는 첫 장에는 당연하게도 하현의 임무를 승낙한다는 대답이 돌아와 있었다.

그리고 그 뒷장에는 하현으로서는 처음 보는 소식이 적혀 있었다.

[의뢰인 정후 사망. 흉수 미상]

“이런…….”

하현의 미간이 좁혀졌다.

자연스럽게 그의 시선이 황보정환의 연무장이 있는 방향을 향했다.

흉수가 미상이라고는 하지만, 하현은 당연히 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안휘에서 정후를 죽이고, 올라오는 길에 추성을 들른 거야.’

하현의 눈이 잠시 감겼다 떠졌다.

그의 눈은 아주 차갑게 식어 있었다.

‘당신은 그 욕심 때문에 너무 많은 사람을 죽였어.’

하현이 판단하기에 황보정환은 명실상부 악인이었다.

그는 악인은 절대 그냥 지나치지 말라는 교육을 수도 없이 들었다.

‘이미 그냥 지나치지 않고 있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니 서신을 불태운 하현은 전각 밖으로 나갔다.

그는 황보미견에게 무공을 더 제대로 가르쳐줘야 하는 이유가 최소 한 가지는 더 늘어났다고 생각했다.

* * *

그날 밤 자정.

하현은 어제와 같이 조심해서 원로원으로 움직였다.

하지만 어제처럼 지붕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그는 가볍게 가주의 방 입구에서 신형을 멈추었다.

“왔군……!”

“기다리고 계셨습니까?”

그곳에는 황보영철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원로들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가 아예 오지 말라고 지시를 한 것 같았다.

“다른 분들은요?”

“내가 오지 말라고 했네. 혹시나 자네가 신경 쓰일까 봐서.”

“배려해주셨군요. 감사합니다.”

그는 허허 웃으며 하현을 데리고 가주의 방으로 들어갔다.

황보세가주의 방은 어제보다 한층 더 밝았다.

어제는 외롭게 촛불 하나가 빛을 밝히고 있었는데 오늘은 제법 개수가 되어 보였다.

하현은 곧바로 가주의 옆에 앉았다.

“시간이 모자를 수도 있으니, 곧바로 시작하겠습니다.”

“부탁하네.”

황보영철이 하현의 호법을 서듯 방 한 가운데에 서고, 하현은 거침없이 가주의 몸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콰과과과-

처음에는 쏟아지는 폭포 같은 기운을 따라 조심히 기운을 흘려보낸다.

같은 수미천왕신공이기 때문일까? 다행히 가주의 몸은 거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긴, 원로들이 불어 넣어준 기운들도 잘 받아들였다고 했으니까.’

지금 가주는 의식이 없어도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는 것이다.

몸을 지배하려는 수미천왕신공의 기운에 맞서 최대한 살아남으려 발악하고 있다.

‘조금은 더 버텨내실 거라 믿습니다.’

후우우욱-

가주가 자신의 기운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다고 생각한 하현은 강하게 그의 기운을 밀어 넣었다.

그러자 가주의 몸이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하현은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생각하며 더욱 큰 정신과 기운을 그에게 쏟았다.

‘한 번 해봤으니 분명히 할 수 있어……!’

구오오오오-

하현의 몸에서 터져 나온 기운이 가주의 몸에 쏟아지고…. 하현은 그대로 눈앞이 컴컴해졌다.

* * *

하현이 다시 눈 뜬 곳은 어제와 비슷한 동굴이었다.

하지만 어제와 다른 점이 무척이나 많았다.

하현의 동굴과 비교하여 동굴의 크기가 거의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게다가 하현의 동굴이 온통 새하얀색이었는데 반해, 군데군데 거무튀튀한 곳이 많이 보였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미 물이 무릎까지 차올라 있었다.

“조금만 더 시간을 지체했다면 위험했을 수도 있겠어.”

하현은 재빨리 발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움직임에 있어서 제약은 없었다.

검을 떠올리니 왼쪽 허리에 검이 달려 있고, 내공을 끌어올리니 그 역시 그의 뜻대로였다.

“다행히 내 심상 안에서와 같아.”

그럼에도 그는 서둘렀다.

분명히 여기 어딘가에 있을 황보세가주를 찾기 위함이었다.

한참을 물줄기를 따라 올라가던 하현은 이윽고 동굴 벽에 붙어 있는 한 노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황보가주!’

그는 조금 전 현실에서 보았던 황보세가주였다.

그런데 그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분명 현실에서는 혈색도 좋고 건강해 보이는 그였지만, 이곳에서는 깡마르고 온몸에 힘이 없어 보였다.

‘십 년이나 시달린 거야. 이 물줄기에 휩쓸리지 않게 항상 신경을 곤두세우면서.’

하현은 제대로 정신을 차리고 있지도 못하는 그에게 달려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가주님……?”

하지만 그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마치 비 맞은 중처럼 계속해서 알아듣지 못할 말만 중얼거릴 뿐이었다.

생각보다 나빠 보이는 상태에 하현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이 기운을 진정시킨다고 해도, 그가 제정신으로 깨어날지는 미지수로 보였다.

스릉-

하지만, 하현은 일단 검을 꺼냈다.

할 수 있는 것을 먼저 하자고 생각하며 하현은 더욱 상류로 치고 올라갔다.

조금 더 상류로 올라갔을 때, 하현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굉음이 들려오는 것을 느꼈다.

쿠구구구구-

익숙한 소리.

기운이 급류가 되어 내려오는 소리였다.

하현은 검을 꽉 쥐고 정면을 응시했다.

그가 심호흡하며 충분히 준비를 끝냈을 때, 급류 같은 기운이 맹렬하게 하현을 덮쳐왔다.

촤아악-!

하현은 거침없이 검을 휘둘렀다.

한 번 해보았으니 요령도 알고 있다.

하현의 검에 닿는 기운은 안개처럼 흩어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순조로웠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어제보다 더욱 쉽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지금 황보세가주의 몸 안에 흐르는 수미천왕신공의 기운은 하현이 깨트린 월룡의 기운과 비교했을 때 보다 작은 양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현이 간과한 것이 하나 있었다.

‘치잇! 기운들이 정순하게 흐르는 것이 아니라 제멋대로 날뛴다.’

황보세가주의 몸 안에 흐르는 수미천왕신공의 기운과, 원로들이 그의 몸에 불어넣은 기운은 하현과 월룡의 기운처럼 정순하고 얌전하지 않았다.

마치 우리 안을 빠져나가고 싶어 하는 맹수처럼 기혈이 제멋대로 날뛰었기에 막지 못하고 뒤로 흘려내는 기운들이 상당히 많았다.

그리고 문제는 또 있었다.

‘점점 흩어지는 양이 줄어들고 있어.’

말 그대로였다.

처음에는 하현이 한 번 검을 휘두를 때 뭉텅이로 흩어지던 기운이 이제는 그 절반 정도밖에 흩어지지 않았다.

다행히 하현은 어째서 이런 현상이 벌어졌는지 알 것 같았다.

‘황보세가주께서 받아들일 수 있는 양의 한계가 있는 거야.’

하현이 흩트린 기운이 흡수된다는 것은 어제의 경험으로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이다음이 문제였다.

팔을 멈출 수는 없기에 계속 휘두르고는 있다만, 만약 기운이 더는 흩어지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하현이 끊임없이 생각하고 있을 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 자네는…. 누군가?”

“황보가주님?”

“그래…. 나는 가주다. 황보세가의 가주였지.”

하현이 흘긋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그는 조금 전 하류에서 혼자 중얼거리고 있던 황보세가주가 틀림없었다.

계속해서 기운을 흡수시킨 덕에 겨우 정신을 차린 것으로 보였다.

“이렇게 뵙게 되어 정말 기쁘군요. 그런데 일단 이 급류부터 어떻게 하면 좋을지 이야기를 나눌까요?”

“이 급류를…. 막고 있는 건가?”

하현은 그에게 현재 상황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했다.

오랜 시간 정신을 잃고 있었음에도 한 가문의 가주까지 올라섰던 그의 능력 덕분인지 그는 현재 상황을 빠르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정신을 잃은 것이 이것을 통제하지 못해서였다고?”

“정확합니다. 가주님께서도 빨리 이쪽으로 오세요.”

“내가… 할 수 있을까?”

그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자신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럴 만도 했다.

십 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곳에 갇혀 정신을 놓아버린 그였으니까.

“가주님이 깨어나시기를 기다리는 분들이 많습니다. 원로원의 원로들도, 세가의 무사들도…. 손녀분이신 황보미견 소저까지도요.”

“미견이…! 미견이는 어떻게 컸는가?”

“아름답고 훌륭하게 컸습니다. 일어나셔서 직접 눈으로 보셔야지요.”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했던가.

그의 자식과 손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이전보다 그의 눈에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정철이는? 정철이는 세가로 돌아왔고?”

“일단은 이것부터. 궁금하신 것들은 깨어나시고서 이야기 나누셔도 늦지 않습니다.”

“알겠네!”

하현은 의도적으로 그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피했다.

지금은 그 이야기를 사실대로 하여 득 될 것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우웅-

황보세가주의 양 주먹에 진기가 모이기 시작했는지 그 주변 공기가 진동하기 시작한다.

가주가 주로 쓰는 무공은 권법인 것으로 보였다.

‘황보세가의 권법은 무림 일절이라던데.’

하현은 그 와중에도 그가 쓰는 무공에 관심을 가졌다.

황보세가주는 그런 하현의 시선은 생각지도 않고, 하현이 겨우 막고 있는 급류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구오옹- 퍼엉!

그의 주먹이 닿은 곳에서는 작은 폭발마저 일었다.

천왕권(天王拳).

수미천왕신공과 더불어 황보세가의 가주에게만 내려오는 비전 권법이 이 자리에서 펼쳐졌다.

‘대단한 힘이다. 타고난 용력을 자랑하려는 것 같을 정도야.’

비쩍 말라 있지만, 이제 보니 황보세가주는 키도 무척이나 크고 어깨도 떡 벌어져 있었다.

노인이라고 하기에 민망할 정도의 모습이었다.

푸학! 쾅!

하현과 황보세가주는 정신없이 기운을 흩트렸다.

황보세가주는 그간 이 기운들에게 당한 것들을 한풀이라도 하듯 권을 쏘아댔다.

십 년이나 누워 있던 노인의 그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할 권력이 쉴 새 없이 쏘아져 나갔다.

기운이 흩어지는 만큼 황보세가주가 흡수하는 것이기에 그의 주먹은 점점 더 매서워졌다.

“쿨럭!”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신명 나게 권을 내지르던 그가 별안간 큰기침을 해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아무리 공격해도 기운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한계까지 기운을 받아들인 거야.”

하현은 검을 휘두르던 것을 멈추고 황보세가주를 부축해 신법을 전개했다.

그에게 거의 안겨있다시피 한 황보세가주가 겨우 입을 열어 말했다.

“큭…. 기운은 분명 넘치는데…. 숨을 쉴 수가 없네.”

“가주님의 그릇이 모두 차서 그런 것입니다.”

“내 그릇이… 그래. 이 기운들이 모두 사라져야 내가 깨어날 수 있다 하지 않았는가?”

“맞습니다.”

그는 체념한 표정으로 하현에게 말했다.

“그러면 방법이 없는 것인가?”

“방법…. 생각해 봐야죠.”

황보세가주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지 곧바로 입을 열었다.

“남은 기운들을 아예 몸 밖으로 흘려보내면 어떻겠는가?”

“그렇게 되면 그 기운들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없기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하현이 신법을 펼치면서도 그에게 대답했다.

황보세가주는 곧바로 하현에게 말했다.

그의 표정에는 단호함마저 엿보였다.

“그러면 이 기운들. 자네가 받아줄 수 있겠나?”

“네……?”

“자네의 심상이 내 앞에 투영되며 이어진 것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예. 그랬었습니다.”

황보세가주는 하현이 처음에 설명해준 내용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자네의 기운을 불어넣어 이렇게 넘어올 수 있었다면 이 기운들을 자네에게 보낼 수도 있는 것 아니겠는가?”

“솔직히 저도 잘 모릅니다. 어떤 부작용이 어떻게 나올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요. 그리고 가주님께서 여태껏 모아오시고 살아남으시려 애쓰신 공력입니다. 그 공력이 상당 부분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하현의 말에 그는 계속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해주게. 깨어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네.”

“알겠습니다.”

하현은 발걸음을 멈추고는 황보세가주를 내려놓았다.

그리곤 다시 쏟아지는 기운을 향해 달렸다.

시작할 때보다는 현격히 작아 보이긴 했으나, 지금 이 정도라면 황보세가주에게 엄청난 부담을 줄 수도 있는 양이다.

휘익! 철퍽!

하현은 그 기운으로 뛰어들어 온몸으로 기운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남궁세가 천재 외손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