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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세가 천재 외손자-173화 (173/304)

173화

황보정환은 서둘러 원로들을 헤치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그의 아버지가 반쯤 몸을 일으킨 채 앉아 있었다.

“가, 가주님!”

“정환아…!”

“어떻게…. 어떻게…?”

“그동안 고생이 많았구나.”

가주가 쇳소리가 나는 목으로 말하며 황보정환에 손을 뻗었지만, 그는 그 손을 잡지 못했다.

‘어째서…. 왜 하필 오늘….’

그가 처음 든 생각은 기쁨이 아니었다.

그는 아버지를 원망하는 마음마저 들었다.

일주일만…. 아니, 이틀만 더 늦게 일어났어도 그의 계획에는 차질이 없을 터였다.

“정, 정말 다행입니다. 아버지. 몸은 괜찮으신 겁니까?”

하지만 그는 금세 표정을 바꾸고 말했다.

지금 그 속내를 들킬 수는 없었으니까.

“내가 누워 있는 동안 무척이나 많은 일이 있었더구나.”

“네. 정말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황보영철이 황보정환의 어깨를 조심히 짚으며 말했다.

“정환아. 아버지께서는 깨어나신 지 얼마 되지 않으셨다. 자세한 이야기는 시간을 두고 하는 게 어떻겠느냐.”

“…알겠습니다. 원주님.”

그는 얌전히 고개를 숙이고서는 가주에게 말했다.

“아버님. 빨리 쾌차하시길 빌겠습니다. 쉬시고 계시면 제가 금방 찾아뵙겠습니다.”

“그래. 너무 오래 움직이지 않았는지 팔, 다리에 힘이 하나도 없구나…. 최소한 며칠은 이 방에서 나가지 못할 것 같다.”

“더 좋은 방으로 모시는 게 어떻습니까? 이 방은 너무 외진 곳에 있기도 하고요.”

황보세가주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이 방이 편하다. 그리고 왜인지…. 이 방 밖을 나가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야….”

황보세가주의 눈빛은 흐릿했다.

오랜 시간 쓰러져 있으며 마음의 병을 얻은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알겠습니다. 아버지.”

그런데 그때 황보세가주가 불안한 눈빛으로 황보영철에게 말했다.

“영철.”

“네. 가주님.”

“자네도 함께 나가 주지 않겠나?”

“저는 왜…?”

“이 방에 사람이 있는 것이 불안하네. 어째서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 혼자 있었으면 하네.”

황보영철이 앞으로 한 발 나서며 대답했다.

“안됩니다. 그러면 가주님의 수발은 누가 듭니까? 용변이나 식사는 어떻게 하시려고….”

“그건 내가 알아서 하겠네. 나를 더는…. 수치스럽게 하지 말아주시게나.”

“아…. 죄송합니다.”

황보영철이 이제야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뒤로 몇 발을 물러섰다.

하기는 기절해 있을 때야 어쩔 수 없다고 쳐도, 그에게도 무인의, 남자의 자존심이 있다.

깨어나서도 그런 수발을 받는 것은 그의 자존심이 허락지 않아 보였다.

“모두 나가주게나.”

“알겠습니다!”

황보영철과 정환을 포함한 모두가 가주의 방 밖으로 나갔고, 그 문은 굳게 닫혔다.

“후우. 자네도 봤지?”

“봤습니다.”

“많이 심약해지신 모양이야. 아무래도 심력을 되찾으실 때까지는 원하시는 대로 해야 할 것 같네.”

“원하시는 대로라면?”

황보영철이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되도록 오랜 시간을 혼자 있게 해드려야 하지 않겠는가? 가주님은 우리 모두의 가주님이기도 하지만, 자네의 아버지이기도 하지. 혹여 우리가 가주님을 소홀히 모신다고 오해할까 봐 말해 주는 것이네.”

“전혀 오해하지 않습니다. 아버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을 저도 듣지 않았습니까?”

“그래. 다행이네. 그나저나 걱정이군. 저러다가 갑자기 급사하시기라도 하면 큰일인데…….”

“급사요……?”

황보영철은 당황한 듯 말을 얼버무렸다.

“아, 아니. 이런 경우가 왕왕 있지 않은가. 멀쩡해 보였던 분들이 갑자기 위독해지는……. 흠흠. 내가 실언했군. 이만 들어가 보겠네.”

“네. 들어가 보십시오.”

그대로 등을 돌려 그의 방으로 돌아가려던 황보영철은 다시 몸을 돌려 황보정환을 바라보았다.

“아참. 그런데 자네는 여기까지 무슨 일로 온 것인가? 평소에는 그리 자주 오지도 않더니.”

“그게……. 오랜만에 아버님께 문안을 올릴까 싶어 찾아왔습니다.”

“그래? 평소에는 잘 오지도 않더니.”

“이상하게 오늘 유독 아버님 생각이 났습니다. 아마 깨어나신 것을 느꼈는지도 모르지요.”

“그럴 수도 있겠군.”

이번에는 황보정환이 먼저 그에게 인사했다.

“그러면 저야말로 내려갔다가 나중에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혹여 아버님께 무슨 일이 생긴다거나 하면 바로 말씀해주십시오.”

“그래. 내가 멀리서나마 잘 살펴보겠네.”

황보정환은 그대로 등을 돌려 원로원을 빠져나왔다.

‘도대체, 도대체 왜 지금이야.’

그는 원로원을 내려가는 중에도 속으로는 쉴 새 없이 지껄였다.

지금 그에게 아버지와의 정 따위는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 * *

밤이 깊었다.

원로원에 갔다 온 그는 자기 방이 아닌 서재에 틀어박혔다.

그 방에서 그는 식음도 전폐하고 밖으로 단 할 발자국도 나오지 않았다.

방에 있는 부인도, 그의 충실한 부하도 만나고 싶지가 않았다.

지금 그의 앞에서 누군가 거슬리게 하면 정말로 죽여버릴 수도 있을 정도의 심정이었다.

“제길. 이날을 얼마나 기다렸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는 분이 가시질 않았다.

그를 더 화나게 하는 것은 또 있었다.

“도대체 그 몰골은 무엇이란 말이냐.”

십 년 만에 일어난 아버지의 모습은 말 그대로 처참했다.

과거의 당당하고 기백 있던 그 모습은 전혀 떠올릴 수도 없을 정도였다.

그의 모습은 무인으로서는 이미 죽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오랜 시간 동안 괴로워하며 생각하던 그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아버지께서 살아 있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는 것인가?’

지금 아버지는 가주로서도, 무인으로서도, 남자로서도 정상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삶을 유지하느니…. 편히 보내드리는 것이 내가 할 일이다…!’

그는 결국 최악의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순간, 원로원주 황보영철이 스치듯 했던 말이 기억났다.

‘저러다가 급사하시기라도 하면….’

그의 눈에 살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는 아버지가 정상적인 판단을 할 수 없다고 했지만, 사실 정말로 정상적인 판단을 할 수 없는 것은 욕심에 미쳐버린 그였다.

‘그래. 노인이 갑자기 죽는 일은 그리 부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십 년 동안 누워있던 병자라면 더더욱. 마지막 회광반조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래. 이것 하나만큼은 도와주시는구려.’

조금 전 아버지는 그의 방에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었다.

그러니 분명히 지금도 그의 방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지난 열흘간 급격하게 발전한 그의 무공 수준은 그를 자만하게 했다.

이전 같으면 원로원의 모든 고수를 속이고 가주를 암살하고 나온다는 계획은 꿈도 꾸지 못할 것이었으나….

‘수미천왕신공을 완벽하게 익힌 지금의 나라면 가능하다.’

그는 큭큭 웃음을 흘렸다.

인제 와서 생각해보니 하늘이 자신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아버지를 보며 언제 깨어날지 불안해하지 말라는 하늘의 도움일 수도 있었다.

‘그래…! 하늘은 역시 날 선택했다.’

드르륵-

그는 창문을 열고서 지붕으로 올라섰다.

발전한 그의 무공은 신법도 몇 단계를 더 발전시켰고, 어둠을 틈타 원로원으로 가는 것은 식은 죽 먹기일 터였다.

파앗-!

그가 지붕을 박차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스슥-

그리고 그가 신경 쓰지 못했던 또 지붕의 반대편.

그곳에는 어둠에 녹아 있던 한 사람의 신형이 나타났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흑색 잠행복을 입고 있기에 누구인지 알 수는 없지만, 맑은 눈빛만은 그가 하현이라는 것을 숨길 수 없었다.

“이틀은 고민할 줄 알았는데 바로 오늘 밤이라니…. 기회를 준 의미가 없어지네.”

그는 조금은 슬퍼 보이는 목소리로 황보정환이 사라진 어둠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황보정환이 충분히 멀리 갔다는 판단이 들었을 때, 그도 그의 뒤를 쫓아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 *

휘익- 탁-

황보정환은 지붕을 넘고 넘어 원로원에 도달했다.

그는 당장에라도 박장대소를 터뜨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여기까지 넘어오는 것이 이토록 쉬운 일이었다니! 이 힘이 더욱 먼저부터 있었다면 이토록 고생할 필요는 없었거늘…!’

그는 자신감을 가질 만도 했다.

발전한 신법과 보법은 그가 움직이는 소리를 거의 내지 않도록 했으며, 더욱 예민해진 기감은 어디에 사람이 있는지를 정확히 알 수 있게 해주었다.

그 덕에 그가 이렇게 황보세가에서 가장 강한 고수들이 모여있다는 원로원 고수의 머리 위에 있음에도 아무도 알아채고 나온 사람 하나 없지 않은가?

‘후후. 늙은이들. 내가 갑자기 이렇게 강해졌을 줄은 누구도 예상치 못했겠지.’

그가 서슴없이 이런 결심을 내릴 수 있었던 것에는 이런 생각도 한몫했다.

원로들은 그가 이렇게 흔적 없이 이곳에 들어올 수 있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할 것이다.

타닥- 탁

그는 지붕을 가볍게 타고 올라 가주의 방 지붕에 도착했다.

열려 있는 창문은 없고, 문도 굳게 닫혀 있고.

주변을 둘러보던 그는 조심히 기와를 한 장씩 떼어내기 시작했다.

하현이 했던 것과 같은 행동이었다.

서까래까지 들어내고 그의 몸이 들어갈 공간을 만들어낸 그는 슬쩍 고개를 내밀어 아래쪽을 바라보았다.

“......”

다행히 아래쪽은 고요했다.

늦은 밤이라 가주는 잠자리에 들었는지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천천히 어둠에 눈을 적응시켜 방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없다.’

그는 기꺼운 마음에 두 눈이 반달처럼 휘었다.

혹여라도 원로원주가 과잉 충성으로 옆을 지키고 있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스윽

툭-

그는 바닥으로 내려왔다.

가주는 정신을 잃고 있을 때의 그 자리에 똑같이 누워 있었는데, 정말로 자고 있는지 숨소리만 들려왔다.

저벅-

그는 말없이 가주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조심한다고 했건만, 긴장 때문일까 생각보다 발소리는 크게 울려 퍼졌다.

그는 깜짝 놀라 가주를 바라보았다.

“......”

하지만 가주는 잠에서 깨지 못한듯했다.

그는 속으로 한심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어찌하여 이리도 약해졌소. 곧 편하게 해드리리다.’

그는 한편으로는 불쌍하다는 생각까지 하며 천천히 가주에게 다가갔다.

정신도 못차리는 노인 하나를 처리하는 것은 그에게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이다.

조용히 다가가 그의 사혈 하나를 조금 세게 짚기만 하면 되는 것.

그가 노리는 곳은 제문혈(臍門穴)이다.

제문혈은 배꼽으로부터 왼쪽으로 두 마디, 위로 세 마디에 있는 혈 자리다.

인간의 몸에는 여러 사혈이 있지만, 그가 이곳을 노린 이유는 단 한 가지다.

‘흔적이 남지 않기 때문이지.’

천령혈, 당문혈, 기문혈도 대표적인 사혈이고 더욱 빠르게 사람을 죽일 수는 있지만, 그 흔적이 남게 된다. 천령혈은 머리가 움푹 꺼지고, 당문혈은 피를 토하며, 기문혈은 혀가 잘리게 된다.

최대한 자다가 자연사를 한 것처럼 보이게 해야 하기에 그는 이 혈을 택했다.

스으윽-

그는 최대한 소리 없이 손을 뻗었다.

점점 손가락은 가주의 배에 가까워져 간다.

그의 손이 혈자리에 닿기 직전.

황보정환의 손가락이 멈칫했다.

인제 와서 패륜을 저지른다는 것에 양심의 가책을 느낀 것일까?

‘후우-’

그는 소리 없이 심호흡하고 마음을 다잡았다.

어차피 여기까지 온 것,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

그가 눈을 질끈 감고 손가락을 누르려는 그 순간.

척-

“헛…!”

그의 손을 잡아 오는 느낌에 황보정환이 깜짝 놀라 소리를 내고 말았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가주의 얼굴을 바라보니, 그가 두 눈을 번쩍 뜨고 황보정환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궁세가 천재 외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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