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네, 네놈이……!”
“아버지……!”
황보정환이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아버지. 제가 설명하겠습니다.”
“설명?! 이 상황에 무슨 설명을 하겠다는 것이냐……!”
황보세가주의 얼굴에는 노기가 가득했다.
황보정환은 그 눈빛에서 위화감을 느꼈다.
지금 그의 눈빛은 낮에 그가 보았던 병약한 노인이 아니었다.
그가 십 년 전에 알고 있던 당당하고 기백 있는 바로 그 눈빛이었다.
“아버지!”
“그 입으로 아버지라 부르지도 말아라!”
황보정환은 빠르게 주위를 살폈다.
아직 주변 원로들의 움직임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 상황을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어 보였다.
‘이제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이미 황보세가주는 황보정환이 불순한 의도로 이곳에 쳐들어 왔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는 얼굴이다.
이런 상황에 이러쿵저러쿵 말을 붙이는 것보다 더 빠른 방법을 알고 있었다.
‘최대한 빠르게 처리한다. 기절만 시켜도 그다음은 쉬울 테니…!’
후욱-!
황보정환은 가주가 생각할 틈도 없이 기운을 끌어 올렸다.
열흘 전보다 기운을 끌어올리는 속도 역시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수미천왕신공은 그에게 이 정도의 자신감을 가져다주었다.
“아, 아니. 그 기운은……!”
가주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보며 황보정환이 엷게 미소 짓는다.
“내가 이것을 배웠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겠지요.”
“네가 어떻게 그것을……!”
“가주님께서 쓰러져 있는 동안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냥 계속 누워있지 그러셨습니까?”
“뭐, 뭐라고?”
“열흘……. 아니 며칠만 더 누워 계셨어도 이런 일까지는 없었을 것을……. 모두 가주님께서 자초한 일이라고 생각하십시오……!”
화아악!
그가 재차 기운을 끌어 올렸다.
조금 전에는 내공을 제대로 사용하기 위해 기운을 끌어올린 정도였다면 지금은 정말로 공격해 들어가려 마음먹은 듯했다.
‘원로들……. 그 늙은이들 때문에 큰 소리를 내서는 안 된다.’
이 와중에도 그는 주변 상황을 살폈다.
그가 더욱 신경 쓰는 것은 원로들이었다.
이제 자리에서 일어나 내공을 제대로 쓰지도 못할 눈앞의 늙은이는 그의 안중에도 없었다.
스슥!
황보정환이 은밀하게 보법을 밟아 가주에게 공격해 들어갔다.
그가 노리는 곳은 가주의 혼혈이었다.
최대한 소리를 죽이며 그를 제압해야 했기에, 최대한의 공력을 담지는 못한 공격이었다.
터억!
그 때문인지 가주는 그의 일격을 막아내었다.
황보정환은 호락호락하게 끝나지 않을 것은 예상했었는지, 그리 당황한 눈치는 아니었다.
그는 점점 더 큰 힘을 팔에 쏟아가며 가주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가주는 그 힘에 대항하려고 온 힘을 쏟으면서도 기어이 말을 꺼냈다.
“크윽. 한 가지만 물어보겠다.”
“이 상황에서도 궁금한 게 있으시오?”
“정철이, 네 형 정철이는 어떻게 되었느냐!”
황보정환의 눈빛이 아주 잠깐 흔들렸다.
가주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팔에 기운을 더욱 쏟으며 다시 물었다.
“네 형의 행방에 대해서 아는 게 없냐고 물었다!”
파앗-
그 질문을 들은 황보정환은 가주와 힘겨루기를 하던 것을 멈추고 뒤로 물러섰다.
가주가 이것을 물어볼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모양이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음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철……. 내 형이자 가주님의 큰아들 말이오……? 나는……. 나는 모르오.”
“……!”
모른다는 질문에는 오히려 황보세가주가 놀랐다.
당연히 황보정환의 소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씨익-
그런데 그 놀라는 표정을 보고는 황보정환이 깊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황보세가주에게 말했다.
“나는 정말 모르지. 안휘성 어디쯤이었나? 깎아질 듯한 절벽 아래로 밀어 넣고 나서는 찾아본 적이 없거든.”
“뭐, 뭐라?!”
“그러니 살아 있을 수도 있소. 단전을 폐하고, 가슴에는 깊은 자상을 입었지만……. 내가 죽은 시체를 확인하지는 않았으니까.”
황보세가주는 이 순간 그의 둘째 아들의 얼굴이 악귀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렇게 끔찍한 말을.
그것도 제 아비에게 저런 얼굴로 말할 수 있다니.
그는 이 순간이 현실이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혹시 모르지. 이제 곧 저승에 가시면 그곳에서 찾을 수 있을지?”
하지만 그의 마지막 말에 황보세가주는 이성을 되찾았다.
결국, 그는 자신이 형을 죽였노라고 고백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형에 이어 제 아비까지 죽이려 하고 있었다.
“이, 이노옴!”
“쉿! 원로들이 깨어나면 곤란해지지 않소? 그러니 우리끼리 빨리 해결을 봅시다.”
황보정환은 다시 한번 기운을 끌어올렸다.
이번에는 보통 내공이 아니었다.
‘항거할 수 없게 해야겠다.’
그는 이 순간, 그가 가진 수법 중 가장 자신 있고 강력한 금나수를 수미천왕신공을 통해 일으켰다.
가주에게만 내려오는 비전 무공이 가주를 죽이기 위해 펼쳐지려 하고 있었다.
고오오오-
그는 온 기운을 끌어올리고는 가주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가주의 눈도 보통은 아니었다.
이제는 분노도, 슬픔도 없는 차가운 눈이 황보정환을 바라보고 있었다.
슈우우욱!
그의 몸 주위에서도 기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황보정환 역시 가주가 끌어올린 기운이 무엇인지 단번에 눈치챘다.
“수미천왕신공…….”
두 부자는 눈을 마주쳤다.
누가 이겨도 승자가 없는 슬픈 싸움.
그 싸움에 포문을 연 것은 황보정환이었다.
과아아악!
황보정환의 두 손이 대기를 가르며 가주에게 짓쳐 들었다.
깃털처럼 가벼운 보법은 덤이었다.
어느새 황보세가주는 기수식을 취하고 있었다.
벽력신장(霹靂神掌).
이 역시 오랜 전통을 가진 황보세가의 절기 중 하나였다.
구우웅-!!!
두 사람의 손끼리 맞부딪치자 거대한 울림이 진동했다.
이 정도의 울림이라면 당연히 누군가 눈치를 채고 오는 것이 당연했으나, 지금 황보정환은 그런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이, 이게 무슨!’
그는 황보세가주를 압도하지도 못했다.
아니, 조금 더 솔직히 말하면 오히려 가주에게 더욱 밀려 버렸다.
“겨우 그 정도의 힘을 가지고 나를 맞서려 한 것이냐?”
“이럴 리가 없는데……!”
황보세가주는 병상에서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런데 자신은 바로 오늘 아침까지도 무공 수련을 하며 감각을 끌어올리지 않았던가?
있을 수 없는 일에 당황했지만, 곧 그는 자신이 왜 밀리는지에 대해서 순식간에 판단했다.
‘벽력신장이다! 나는 평범한 금나수였고. 나도 무공을 써야 해.’
스릉-
그는 주저 없이 검을 뽑아 들었다.
‘조금 전의 일 합으로 어차피 모두 알아챘을 터. 최대한 빠르게 처리하고, 아버지가 미쳐서 나에게 달려들었다고 둘러대면 될 것이다. 수미천왕신공을 익히고 있는 직계는 오직 나밖에 없기에 원로도 나를 어쩌지는 못할 것이야.’
그리고는 더욱 큰 기운을 끌어 올렸다.
황보세가주 역시 그에 맞추어 거력을 끌어냈다.
도무지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노인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완전해 보이는 그의 몸 상태에 황보정환은 불안감을 느꼈지만, 곧 마음을 다잡았다.
‘수미천왕신공에 있어서라면 완전하게 이해했다. 내가 밀릴 이유는 전혀 없다……!’
그는 자신의 성명 절기나 다름없는 태산십팔반검(泰山十八盤劍)의 기수식을 취했다.
이 검법이라면 벽력신장에 결코 밀리지 않는 절기였다.
휘릭 휘릭- 쒜엑-!!
황보정환의 검이 공기를 찢으며 질러 들어갔다.
그의 검에는 수미천왕신공으로 겹겹이 쌓아 올린 내공이 폭발할 듯 분출되었다.
모두 하현이 일러준 구결을 온전히 이해한 방식대로였다.
‘이 일 검은 내 생애 최고의 일격이다……!’
황보정환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 검이라면 저 손바닥을 뚫고 가주의 심장에 닿을 수 있으리라.
그는 확신을 가졌다.
턱-
그의 검이 가주의 손에 잡아내기 전까지는.
슈우우욱!
“어어, 어엇?!”
그는 자신도 모르게 멍청한 소리를 내었다.
황보세가주가 잡은 검에서 갑자기 기운이 증발하듯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 이게 무슨…!”
그의 눈이 경악으로 물 들었을 때, 황보세가주가 천왕보(天王步)를 밟아 그에게 접근했다.
그리고 쏜살같이 짓쳐들어오는 그의 장.
텁-
장법이 그의 가슴을 두드릴 것으로 생각해 오만상을 썼던 황보정환의 눈에 의문이 깃든다.
황보세가주는 가만히 그의 가슴에 손을 가져다 대기만 했던 것이다.
혹여 아버지가 차마 아들을 죽이지 못해 손속에 사정을 봐준 것이라는 생각이 스쳐 갈 때쯤.
슈우우우욱-!!
조금 전과 같은 현상.
그런데 조금 전보다 더욱 많은 기운이 증발했다.
팟!
검까지 손에서 놓아버리고 황보세가주의 팔을 뿌리쳐버린 황보정환이 뒤로 급하게 물러섰다.
기운을 끌어올려 보지만, 조금 전 두 번의 이상한 느낌을 받을 때 엄청나게 많은 공력이 흩어졌는지 그가 느껴지는 내공이 현격히 줄어들어 있었다.
“이, 이게 무슨 사술을…!”
“너는 그 기운을 가질 자격이 없다!”
황보세가주는 노호성과 함께 보법을 밟아 다시 황보정환에게 달려들었다.
황보정환이 가주의 손을 막아내려 팔을 들었지만, 가주의 목표는 애초부터 그를 타격하는 것이 아니었다.
척-!
“으아아악! 이게 도대체 무슨!”
가주는 막아낸 팔에 그대로 손을 가져다 대었고, 그 팔을 통해 또 엄청난 기운이 사라진다.
황보정환은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팔로 막으면 팔에서, 다리로 막으면 다리에서 그의 기운이 뽑혀가는 듯했으니까.
“흡, 흡성대법! 이런 마공을! 그러고도 당신이 정파 가문의 가주입니까!”
“흡성대법이라고? 내가 익힌 것은 단지 수미천왕신공일 뿐이다. 그리고 네 입에서 정파를 논하다니! 부끄럽지도 않느냐?”
“말도 안 되는, 이렇게 남의 내공을 가져갈 수 있는 심법이 흡성대법 말고 세상천지에 어디에 있소!”
황보정환은 기어이 악에 받쳐 소리쳤다.
그는 가주가 흡성대법을 익혔다고 굳게 믿고 있는 듯했다.
가주는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는 황보정환을 차가운 눈으로 보며 말했다.
“남의 내공을 마음대로 가져간다면 그건 흡성대법이 맞지. 그런데 네가 익힌 것이 과연 진짜 수미천왕신공이냐?”
“뭐, 뭐라고?!”
“네가 익힌 무공은 그냥 수미천왕신공이 아니다. 수미천왕신공을 익힌 자에게는 네 공력을 아낌없이 나누어줄 수 있는 수미천왕신공의 개량품이지!”
“개, 개량품……?”
황보정환의 머릿속에 순간 비릿하게 웃는 하현의 얼굴이 스쳐 갔다.
“설, 설마……. 내가 익힌 구결이! 그런 말도 안 되는!!”
“처음에 들었을 때는 나도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을 해낼 수 있는 불세출의 천재가 세상에 있더군!”
“남궁하현!!”
“그래. 모두 남궁소협이 안배한 것이다! 이제 포기해라!”
파앗!
몸과 몸이 부딪히고, 가주의 손이 닿을 때마다 황보정환의 기운은 계속해서 가주에게 넘어갔다.
가주의 기세는 점점 강해지고, 황보정환은 점점 무공을 익히지 않은 자와 다를 바 없는 몸이 되어갔다. 누가 보아도 어른과 아이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황보세가주가 압도해갈 때.
“이제 여기까지 하자. 바로 죽이지는 않으마. 너는 죗값을 치러야 한다.”
빠악!
“커헉!”
기운이 충만하게 담긴 황보세가주의 주먹이 황보정환의 복부를 강타했고, 그 한 번의 수만으로 황보정환은 축 늘어지고 말았다.
“허억, 허억…….”
황보세가주는 완전히 혼절해버린 황보정환을 내려다보며 숨을 몰아쉬었다.
무공을 익힌 고수가, 그것도 이렇게나 넘치는 기운을 가지고 있는 그가 겨우 이것 움직인 것 때문에 힘들어서 숨을 몰아쉬는 것은 아니었다.
비틀-
황보세가주는 비틀거리기까지 했다.
그는 어지럽기까지 하는지 겨우 벽을 짚어 몸을 지탱했다.
벌컥-!
그때 문이 열렸다.
그 문으로는 원로원주 황보영철과 하현이 함께 들어왔다.
“가주님!”
“영철…….”
황보영철은 당장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기세였다.
원로원의 모든 고수는 황보정환이 이렇게 나오리라는 것을 하현에게 이미 들었다.
그렇기에 황보정환과 가주가 싸움을 시작했을 때부터 당장이라도 튀어나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잘… 참았네…….”
“아닙니다. 도움이 되지 못하여……. 흑.”
황보영철은 결국 눈물을 쏟고 말았다.
가주는 그런 황보영철을 보며 아주 작게나마 피식 웃고는 하현을 바라보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소협. 나는 이제 어찌 되는가? 십 년 전…… 기운이 폭주하여 쓰러졌을 때와 똑같은 기분이네.”
“황보정환의 모든 기운을 지금 몸에 담고 있으니 그럴 것입니다. 아직까지는 버티고 계시지만, 일각만 더 그 기운을 품고 있게 되시면 다시 그 심상에 갇히시겠지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또 자네가 구하러 와 줄 텐가?”
하현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그 기운은 바로 다른 사람에게 넘기면 되니까요. 같은 수미천왕신공을 익힌 사람이라면 능히 그 기운을 넘겨줄 수 있을 것입니다.”
“후후…. 결국, 자네에게 넘기라는 것이군….”
그는 괴로운 듯 숨을 헐떡이면서도 하현에게 빙긋 웃었다.
“얼마든지… 가져가게. 세가를 구해준 보답이 이거로 충분했으면 좋겠군…….”
그는 정말로 기분 좋다는 듯 흔쾌히 웃었다.
자신이 감당하지도 못할 기운.
하현이 가져가 준다면 더할 나위 없다고 생각하는 그였다.
그런데 하현이 그를 보며 화답하듯 눈부시게 미소지었다.
“저는 이미 큰 보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기운에는 더 어울리는 주인이 있습니다.”
“어울리는 주인……?”
“잊으셨나 본데, 우리 말고도 수미천왕신공을 익히고 있는 사람은 한 명 더 있습니다. 심지어는 엄청난 무재이기도 해서 그 기운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서, 설마……!”
가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현이 이렇게 나올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현은 이런 반응마저도 예상했는지 덜덜 떨리는 황보세가주의 손을 꼭 잡아주며 문밖을 향해 외쳤다.
“소저. 들어오세요. 시간이 없습니다.”
“아…! 아…!”
황보세가주는 하현을 한 번, 그리고 들어온 사람을 한 번씩 둘러보며 감탄사 말고는 아무 소리도 내뱉지 못했다.
환한 달빛과 함께 그의 방에 들어오는 사람은, 그의 손녀이자 수미천왕신공의 후계자.
황보미견이었다.
“혹여 자네는 여기까지 계산한 것인가……?”
황보세가주의 놀란 목소리에 하현이 씨익 웃었다.
“어떻게 인간이 모든 일을 계산할 수 있겠습니까? 황보정환이 모두 제 생각대로 움직였고, 가주님께서 마음을 굳게 드신 덕분이지요.”
하현이 황보미견을 황보세가주 앞에 데려다 놓은 것으로, 그의 마지막 한 수가 맞춰줬다.
남궁세가 천재 외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