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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세가 천재 외손자-175화 (175/304)

175화

하현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황보세가주와 황보미견 사이에 앉았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도 처음 해보는 겁니다. 그래도 잘 해보겠습니다.”

“자네를 믿네…….”

황보세가주는 이제 그의 몸 안에 소용돌이치는 기운을 버텨내기가 버거운지 숨을 헐떡이면서도 하현에게 웃어보였다.

“저도 믿어요.”

짧은 한마디.

하지만 하현은 마주쳐오는 그녀의 눈에서 깊고 강한 신뢰를 느꼈다.

저런 눈빛을 받은 지금 그에게 실패라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갑니다.”

화아아악-

황보세가주와 황보미견의 등에 손을 하나씩 올려놓은 하현은 수미천왕신공으로 기운을 일으켰다.

‘수미천왕신공의 진짜 묘리는 기운을 내 안에서 자유자재로 변형시킬 수 있다는 거야.’

이 개념은 하현에게는 가장 큰 기연과도 같았다.

그는 몸에 쌓이는 내공을 물 같은 느낌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래서 단전에 쌓여있는 내공이 온몸을 흐른다고만 결론지었다.

하지만, 수미천왕신공은 그것이 다가 아님을 가르쳐주었다.

‘예로부터 황보세가의 무공이 끊임없는 내공이라고 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는 거야.’

당연하지만 내공은 액체가 아니다.

몸속을 흐르는 이 미증유의 기운은 액체처럼 몸속을 흐르기도, 고체처럼 단단하게 뭉쳐지기도, 또는 기체처럼 가고 싶은 곳은 어디든 갈 수도 있다.

슈우욱-

황보세가주의 등에 대고 있는 왼손이 그의 기운을 빨아들인다.

그리고 황보미견의 등에 대고 있는 오른손으로는 그 기운을 서서히 방출한다.

‘월룡과의 경험이 없었다면 이런 방식은 생각도 못 했겠지.’

완전히 똑같은 기운을 주고받는 것.

이것도 모두 해봤기에 할 수 있는 것이다.

중간에 하현이 없었더라면 황보세가주가 아무리 기운이 끓어 넘친다고 하더라도 황보미견에게 직접 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하현이 있기에 해낼 수 있다.

이건 수미천왕신공이 대단한 것이 아니라, 하현이 해내는 것이다.

‘미견 소저가 기운을 받아들이는 속도가 심상치 않다. 이것이 황보세가의 핏줄이라는 것인가?’

황보미견의 단전은 가뭄의 논처럼 기운을 끊임없이 받아들였다.

내공 심법을 배운지 이제 열흘밖에 안 된 무인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고오오오-

하현은 이제 잡생각을 그만두고 다시 집중하기 시작했다.

* * *

가주의 기운을 황보미견에게 옮겨주는 것은 생각보다 꽤 긴 시간을 필요로 했다.

그동안 모두 일어난 원로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혼절한 황보정환을 단단히 포박하였다.

그리고 황보영철은 날카로운 눈으로 원로들에게 말했다.

“이 일은 오늘 밤에 무조건 끝내야 한다. 절대 큰 소란을 내지 않도록 주의해라.”

“네. 원주님.”

원로들은 황보영철이 굳이 어디로 가라고 지시하지 않았음에도 그들이 가야 할 길을 미리 아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고는 순식간에 신법을 전개해 사라졌다.

그들이라고 해서 그동안 놀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황보영철은 아직도 혼절해 있는 황보정환을 바라보았다.

‘우리가 세가의 발전을 위해 움직이지 못한 것은 너 때문이었다.’

원로들은 그동안 황보정환의 모든 것을 추적하고 있었다.

그가 자체적으로 만든 세력은 어느 규모인지, 세가 내에서 그를 따르는 사람은 얼마나 있는지.

그리고 그자들은 마음을 다해 따르는 것인지 아니면 마지못해 따르는 것인지.

원로들은 황보세가 내부의 그들을 세세하게 구분해 놓았고, 그들을 제압하기 위해 출발한 것이다.

‘모든 정보를 정리해 놓고서도 아무것도 못 하는 것만큼 비참한 것도 없었지.’

황보세가의 원로원주로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원로원은 황보세가를 지키기 위하여 존재한다.

그렇기에 황보영철로서는 가주가 잘못되었을 때 유일한 후계자인 황보영철을 벌하지도,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놔두지도 못하는 처지였던 것이다.

‘허나 저 청년의 등장으로 모든 것이 뒤집혔다.’

그는 가주의 방에 있을 하현을 떠올렸다.

고작 열흘이다.

하현은 그가 십 년 동안이나 해결하지 못했던 일들을 열흘 만에 모두 해결해주었다.

그리고 황보미견의 발견 역시 하현의 덕이었다.

그들이 황보정환을 이렇게 벌하기로 결심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황보세가의 후대를 이어줄 황보미견의 존재 덕이었으니까.

‘하늘께서 우리 황보세가의 처지가 딱하여 보내주신 천군일지도 모른다.’

누군가 들으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하겠지만, 그의 표정은 진지했다.

그는 아무도 보고 있지도 않건만, 가주의 방을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를 올렸다.

지금 그 인사는 황보세가의 가주를 위함이 아니라 오롯이 하현을 위한 것이었다.

* * *

황보정환이 붙잡히고, 그를 추종하는 무리 역시 원로원 고수들에 의해 제압되며 황보세가에 큰 난리가 났던 밤.

그날 밤 이후로 벌써 이틀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하현아, 오늘 떠날 생각이냐?”

하현의 방에서 팽헌홍은 짐이랄 것도 없는 것을 챙기고 있는 하현에게 말했다.

“네. 이제 슬슬 출발해야지요. 왜요. 팽 형은 여기 더 있고 싶으셔서요?”

“하하. 그게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겠구나. 내 살면서 이런 극진한 대접을 받아 본 적은 처음이니.”

“하하하. 정말로 그것이 이유였군요.”

하현은 물론이고, 팽헌홍 역시 황보세가에서 영웅 대접을 받고 있었다.

비단 하현의 일행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저께 원로원 고수들이 황보정환의 추종자를 제압하던 때, 몇몇 눈치가 빠른 자들은 세가에 불을 지르고 도망치려 하였다.

그런데 그 순간에 나타난 것이 그 시간까지 수련을 하고 있던 팽헌홍이었다.

그는 그 무사들과는 현격한 차이를 보이며 순식간에 그들을 제압해냈고, 심지어는 원로들을 따라 황보정환의 세력을 처치하는 데 큰 공을 세우기까지 했다.

“할아버지들 얘기를 들어보면 팽 형이 엄청난 신위를 보였다고 하던데요?”

“과장이 섞여 있다. 남궁세가에서 출발할 때보다는 분명 발전하기는 했지만.”

“역시. 조만간 대련을 한 번 해봐야겠군요.”

“너와의 대련이라면 언제든지 환영이지.”

하현은 진지하게 말하는 팽헌홍에게 빙긋 웃어주었다.

“그럼 저는 가주님을 뵙고 오겠습니다.”

“그래. 조금 전에 극진한 대접 때문에 이곳을 머물고 싶다는 것은 농담이었다.”

“어휴. 알아요. 알아. 팽형은 농담도 그렇게 진지하게 하시네요.”

한바탕 웃고 나서 하현은 황보세가주의 집무실로 향했다.

조금 더 몸조리하라는 원로들과 다른 세가 사람들의 만류가 있었지만, 황보세가주는 곧바로 가주로서의 일에 복귀했다.

하현이 집무실에 들어서자 황보세가주는 처리하고 있던 서류는 한쪽으로 밀어두고 반갑게 하현을 맞이해 주었다.

“자네. 왔는가?”

“네. 벌써 업무를 시작하셨나 보군요.”

“벌써라니. 십 년이나 늦었지.”

그는 빙긋 웃어주고는 하현을 위해 의자를 빼 주었다.

그는 의자에 앉는 하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그날은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한 일투성이네. 자네 정말 사람이 맞는 건가?”

“사람이 아니면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글쎄. 신선…?”

“하하. 농담이 지나치십니다. 저는 도는 닦아 본 적도 없는걸요.”

하현이 멋쩍게 말했지만, 황보세가주는 알고 있다.

하현의 마음은 수십 년 도를 닦은 도인보다도 더 투명하리라는 것을.

“그래……. 이제 떠날 생각인가?”

“네. 원래의 목적지가 있으니까요.”

“자네와 내가 본 것은 겨우 며칠뿐이건만, 떠난다고 하니 벌써 아쉬운 마음이 드네.”

“저도 이곳에서의 경험을 절대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황보정환의 처분은 어떻게 됩니까?”

그날 이후로 황보정환은 황보세가의 뇌옥에 갇혀 밀착감시를 받고 있었다.

사실 지금은 거의 모든 내공을 빼앗겼기에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아도 되지만, 가주는 절대 방심하지 않았다.

“그 처분은 내가 아닌 집행당과 원로원에서 결정하게 될 걸세.”

“그렇군요.”

“다만……. 세가의 후계를 살해하고, 가주를 살해하려다 미수에 그친 것은 엄청난 중죄지……. 나는 그들이 어떤 결정을 하든 따를 생각이고.”

혹여나 그들이 황보정환을 죽이는 것으로 결정을 내리더라도 받아들이겠다는 말이었다.

하현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려운 결정이셨을 텐데요.”

“그리 어렵지는 않았네. 정환이만 내 자식이 아니지. 황보세가도 내 자식이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은 없지만……. 썩어가는 손가락은 잘라내야지.”

그는 단호한 표정이었다.

하현은 아무리 자신을 죽이려고 했다고 해도 자식에게 그런 엄벌을 내린다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공감이 되는 듯했기에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 눈을 마주치던 황보세가주는 멋쩍게 웃어 버렸다.

“하하. 그런 눈으로 볼 필요 없네. 그나저나 자네가 떠나면 미견이가 굉장히 섭섭해하겠군.”

“소저가요?”

“그래. 자네에게 많이 의지하고 있는 것 같던데.”

“제가 할 일은 끝났습니다. 가주님께 넘겨받은 내용을 자신의 것으로 흡수하는 것은 소저의 몫이고, 황보세가의 무공은 가주님께서 잘 가르쳐주실 테니까요.”

“그 의지를 말한 것은 아니네만.”

황보세가주는 순진무구하다 못해 투명해 보이기까지 하는 하현의 눈동자를 보고는 피식 웃어 버렸다.

‘미견이가 앞으로 마음고생을 좀 하겠구나.’

앞으로 손녀의 연애사가 그리 밝지만은 않을 것 같다고 예상하는 그였다.

“흠흠. 아무것도 아니네. 곧바로 떠날 것인가?”

“네. 안면이 있는 분들께 인사만 드리고 바로 갈 생각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작별이겠구만.”

“언젠가 인연이 닿으면 뵙겠지요.”

“하하! 노인네가 할 법한 소리인데, 자네가 하니 잘 어울리는 것 같네.”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황보세가주는 슬쩍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완전히 고개를 숙여 하현에게 인사를 올리고는 정중하게 포권을 하며 말했다.

“정말 감사하네. 황보세가를 대표하여 자네에게 감사 인사를 올리네. 자네는 황보세가의 은인이네.”

하현도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하며 말했다.

“할 일을 해야 했을 뿐입니다. 앞으로 황보세가에도 무구한 발전이 있기를 바랍니다.”

황보세가주는 하현의 말에 기분 좋게 웃으며 생각했다.

‘이번 일에서 여러 가지를 얻었지만, 그 중의 제일은 이 청년과 인연을 맺은 것이다.’

그는 언젠가 이 인연이 황보세가에 가장 큰 힘이 될 것이라는 강한 예감이 들었다.

* * *

하현이 황보미견의 방에 찾아갔을 때, 그녀는 수련하러 갔는지 자리를 비웠다.

그녀의 호위인 임주수에게 그녀의 행방을 물었지만, 그녀도 모른다고 대답했다.

이것도 소소하게 바뀐 것 중의 하나였다.

원래 임주수는 황보미견이 어디를 가든 그림자처럼 따라다녔지만, 이제는 세가 안이라면 황보미견 혼자서 돌아다니도록 했다.

그녀를 위협할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한 까닭이었다.

‘수련을 방해할 수는 없지.’

하는 수 없이 원로원에 들러 황보영철과 근주, 관학 등 안면이 있는 원로들과도 인사를 나눈 후에 숙소로 돌아온 하현은 숙소 앞에 서 있는 익숙한 인영의 사람을 발견하였다.

“소저?”

“공자! 오셨군요.”

“언제부터 여기 계셨던 거에요?”

“바, 방금 왔습니다.”

“그래요?”

그때 창문이 드르륵 열리더니 팽헌홍이 얼굴을 빼꼼 내밀고는 말했다.

“소저가 그곳에서 기다린 지 한 시진은 족히 되었다.”

그리고는 창문으로 쏙 들어가 버렸는데, 황보미견의 얼굴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한 시진이면 하현이 황보세가주를 만나러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녀가 도착했다는 소리다.

“추운데 왜 여기서 기다렸어요. 길이 엇갈렸네요.”

하현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보자, 황보미견이 땅을 보며 말했다.

“괜히 움직였다가 또 엇갈릴 것 같아서요. 여기에 있으면 제가 이곳에만 있으면 공자는 언제고 돌아올 테니까요.”

“아무리 그래도…….”

황보미견이 하현을 올려다보았다.

“곧 떠나신다 들었어요.”

“네. 가던 길을 마저 가야 해서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하현의 다리를 잡고 싶은 마음은 결단코 없었다.

“저는 이곳에 있을 거예요.”

“네?”

“조금 전과 같아요. 조금 늦게 만나더라도, 한 곳에서만 기다리겠습니다.”

“소저….”

“늦어도 좋아요. 언제든 이곳을 지나가실 때, 그때는 제가 공자를 맞이하러 나올게요.”

“감사합니다. 덕분에 산동성에 올 이유가 생겼네요.”

하현이 생긋 웃었다.

황보미견은 그 웃음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저를 잊지 말아주세요.”

“절대 잊지 않을게요. 제가 기억하는 게 특기라서요.”

마지막 하현의 말에 결국 그녀는 풉 하고 웃고 말았다.

하현으로서는 처음 보는, 정말 행복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그럼 이만. 가시는 길 무탈하시길 빌게요.”

그녀는 살짝 고개를 숙여 목례하고는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하현은 그녀가 사라진 방향을 한참 보다가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언젠간 꼭 다시 만나길.”

하현은 팽헌홍을 데리고 말을 찾아 곧바로 황보세가를 떠났다.

그리곤 더 북쪽으로, 북쪽으로 말을 몰았다.

그렇게 며칠.

그들은 드디어 하북성에 도달할 수 있었다.

남궁세가 천재 외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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