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산동성을 지나쳐 하북성에 드디어 도착한 하현과 팽헌홍.
하북팽가와 진주언가로 가는 갈림길 앞에서 둘은 인사를 나누었다.
“팽형. 그러면 저는 진주언가에 들렀다가 하북팽가로 가겠습니다.”
“그래. 먼저 가 있으마.”
하현과 팽헌홍 모두 남궁세가를 출발했을 때와는 분위기가 달라졌다.
둘 다 한층 더 고수의 면모를 풍기고 있었다.
“몇 년 만에 가보는 집인데, 기분이 어떠세요?”
“고작 집에 가는 건데 뭐. 아무렇지도 않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팽헌홍의 입꼬리가 미미하게 씰룩거린다.
이전보다 많이 변한 그의 모습을 아버지에게 조금이라도 빨리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도제 어르신께서 많이 좋아하실 겁니다.”
“그랬으면……. 좋겠구나.”
팽헌홍이 진심을 담아 대답했다.
하현은 그를 보며 씨익 웃어주고는 말했다.
“그러면 저는 이만 이쪽으로 가보겠습니다. 황보세가에서의 일 때문에 약속보다 조금 늦어서요.”
“그래. 그럼 곧 보자.”
둘은 서로를 보며 포권을 해 보이고는 그대로 뒤를 돌아 각자 갈 길을 갔다.
그들의 발걸음은 거침없었다.
금방 다시 만날 것을 알고 있기에, 그들의 헤어짐은 가벼웠다.
***
하북성 진주에 위치한 진주언가.
그곳에서 언영은 세가 밖으로 나가보지도 못하고 온종일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아가씨. 그런다고 오지 않는 사람이 빨리 오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가만히 못 있으세요.”
“원래 하현이가 오기로 한 날에서 벌써 열흘이나 흘렀어. 천천히 왔다고 해도 며칠이지, 열흘이나 아직 오지 않았는데 걱정되지도 않아?”
“걱정이요? 누구를요?”
“누구긴, 하현이지!”
앵앵은 잠시 하현의 모습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전혀 걱정이 안 되는데요……? 하현 공자께서 어디 녹림도에게라도 당할 사람입니까?”
“그건 아니지. 녹림채주가 오면 또 몰라도.”
“그렇죠? 오는 길에 무슨 일이 있으셔서 해결하시고 오실지도 모르죠. 오지랖이 대단하신 분이니까.”
“뭐?”
하현을 나쁘게 말하자 언영이 도끼눈을 뜨고 앵앵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 그녀는 한숨을 푹 쉬었다.
“아이고… 우리 아가씨께서 어쩌다가 그런 화화공자한테 홀랑 넘어가셔가지고…….”
“화화공자가 아니라니까!”
“네네. 그러시겠죠. 그러면 저는 대단하신 하현 공자께서 혹시 오셨는지 한 번 더 물어보고 올게요.”
“그, 그래. 알겠어.”
언영이 마지못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앵앵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방문을 열려고 하는 그 순간.
“아가씨. 손님이 오셨습니다.”
그녀의 방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하인이 말했다.
휘익-
언영이 순식간에 신법을 전개해 문을 드르륵 열고는 그에게 말했다.
앵앵이 말릴 새도 없을 정도로 재빠른 신법이었다.
“무슨 손님?!”
“남궁…….”
“맞아! 지금 어디 있어?”
“일단 접객당…….”
“고마워!”
파앗!
그녀는 하인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접객당을 향해 발을 놀렸다.
문까지는 나왔지만, 순식간에 멀어져 가는 그녀를 보며 앵앵이 고개를 절레절레했다.
“무공수련을 저렇게 하시면 내년 칠봉의 자리는 따고도 남은 당상이실 텐데…….”
이렇게 말하면서도 그녀는 이미 언영의 뒤를 따라가고 있는 그녀였다.
순식간에 접객당에 도착한 언영은 그 문을 벌컥 열려다가 멈추고는 자신의 행색을 점검했다.
구겨진 옷도 탁탁 펴고, 흐트러진 머리칼도 정리하며 용모 확인을 끝낸 그녀는 급하게 달려오지 않은 척 슬며시 문을 열었다.
그리고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것은 지객당 한쪽에 세워져 있는 작은 조각품을 구경하던 하현이었다.
그는 언영을 보고는 눈부시게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어, 어…. 하현?”
“응?”
하현을 만나면 자신이 성장한 모습을 꼭 보여주겠다고 다짐한 언영이었건만, 2년 만에 만난 하현의 자태 앞에서 그만,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분명히 그녀와 비슷하거나 조금 큰 정도였던 하현이건만, 지금은 그녀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져 있었다.
그리고 아이 같던 얼굴이 이제는 제법 사내 티가 나기 시작하며, 그녀가 생각해오던 그것보다 훨씬 멋진 모습이었다.
“왜 그래. 괜찮아? 얼굴이 빨간데.”
“아, 아냐. 괜찮아.”
그녀는 한 발자국 다가오는 하현을 보고는 번뜩 정신을 차렸다.
“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 오는 길에 황보세가에 잠시 일이 있었어서.”
“일?”
“응. 그 가문의 일이기에 내가 뭐라고 말해 주기는 조금 어렵지만.”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의 가정의 비사에 관심을 두는 것은 명문정파의 자제가 할 행동은 아니었다.
“괜찮아. 덕분에 나도 차분히 무공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어. 그렇게 많이 늦지도 않았고.”
“그래? 고마워.”
그녀는 하현이 눈웃음을 칠 때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지만, 애써 마음을 부여잡고 태연하게 하현을 대했다.
“가주님께서 들어 오십니다.”
그때 하인 하나가 그들에게 말했다.
하현에게 거의 바짝 붙어 있던 언영은 서둘러 뒤로 몇 발자국을 물러나 하현과 거리를 떨어뜨렸다.
곧바로 그리 큰 덩치는 아니지만, 단단하다는 느낌을 절로 들게 하는 중년인 하나가 접객당에 들어섰다.
‘철권 언형철.’
하현은 그가 누구인지 설명을 듣지 않아도 알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팔과 주먹은 척 봐도 딱딱해 보일 정도였으니까.
언형철은 하현을 보고 반갑게 웃으며 인사했다.
“하현 소협. 처음 뵙는구려. 언형철이라 하오.”
“남궁세가의 남궁하현입니다.”
“언제 한번 보나 했는데, 드디어 이렇게 얼굴을 보는군. 할아버지를 닮았는지 인물이 출중하시오.”
그는 호탕하게 웃었다.
그를 보고 있자니 하현은 작은 외숙부 남궁기현이 저절로 떠올랐다.
덩치가 그처럼 크지는 않았지만, 쾌활하고 호쾌해 보이는 성격이 그랬다.
“말씀 편하게 하셔도 됩니다. 언가주님.”
“그래도 되는가? 하하. 이런 자리가 어색해서.”
그는 빙긋 웃고는 언영을 바라보았다.
“영이는 벌써 와 있구나.”
“네. 아버지.”
그는 다소곳하게 말하는 언영을 한 번, 그리고 하현을 한 번 바라보고는 큭큭 웃더니 하현을 보고 말했다.
“먼 길을 왔을 텐데, 시장하지는 않은가? 마침 식사 때라서 말이네.”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럼. 특별한 손님이지 않은가? 있는 동안 불편한 점이 있다면 무엇이든 말해주게.”
“감사합니다. 가주님.”
언형철은 하현과 언영을 이끌고 진주언가의 혈족들만이 사용하는 식당에 데리고 갔다.
그 사이에 앵앵이 자연스럽게 언영의 뒤에 따라붙었다.
진주언가는 상주해 있는 사람이 굉장히 많았다.
그들의 사이를 지나갈 때마다 하현은.
‘저 사람이 아가씨의 약혼자인가 봐.’
‘남궁세가 출신이라고 하던데, 무공 수준은 어느 정도일까?’
등등 그들끼리 수군대는 소리를 들었다.
하현의 예민한 귀가 아니었다면 듣기 힘들었을 소리.
하지만 그는 그다지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세가가 활기차네.’
바로 그제까지 황보세가에 있다가 와서 더욱 비교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진주언가는 황보세가와는 달리 무인들의 눈이 살아 있었다.
당대의 오대세가에는 들지 못하지만, 그 뒤를 바짝 쫓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하현은 확실히 그런 가세를 가질만한 곳이라고 생각했다.
“이곳일세.”
도착한 식당은 매우 큰 규모였다.
현재 남궁세가의 혈족은 숫자가 적어 이토록 큰 식당이 필요하지 않았기에 하현은 신기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들어갔다.
식당 안에는 이미 꽤 여럿의 사람이 식사하고 있었다.
“혈족분들이 대략 몇 분 정도 되시는 겁니까?”
“우리가 다른 세가에 비해 혈족이 좀 많아 보이지? 직계와 방계를 모두 합쳐 마흔 명 정도는 될 걸세.”
“마흔이나요?”
“우리 할아버님과 아버님, 그리고 나도 형제가 많다네.”
자신은 오남이녀 중 첫째라며 설명을 덧붙이고는 그를 데리고 더 안쪽에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언제나 언영의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던 앵앵도 자연스럽게 이 방에까지는 따라오지 않았다.
“이곳은 직계만 사용하는 방인가 보군요.”
“정확하네. 그런데 사실 평소에는 나도 이곳을 애용하는 편은 아니라네.”
“왜 그런지 연유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나는 슬하에 아들을 낳지 못했지. 딸만 셋뿐이네.”
그는 살짝 언영을 바라보고는 말을 이었다.
“그나마 딸들과 같이 이곳을 쓸 때는 자주 왔었네. 그런데 첫째와 둘째는 시집을 가서 이 집에 없네. 내 처와 영이 이렇게 셋이서만 이 넓은 방을 쓰자니 쓸쓸한 마음이 들어서 말이야.”
“그러셨군요.”
그들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동안 누군가 또 하나가 들어왔다.
언영을 쏙 빼닮아 아름다운 중년의 여인이었다.
“어머! 이쪽이 하현 소협이로군요. 저, 영이 엄마 모용비영이에요.”
“처음 뵙겠습니다. 모용세가 출신이시군요.”
“호호. 몇 년 전에 남궁세가와 모용세가가 일이 있었죠?”
모용세가가 남궁세가를 도발해 가문전을 치른 것을 말하는 듯했다.
“네. 지금 생각해보면 재미있는 경험이었죠.”
“그 일의 진상을 모두 알고서 저도 오라버니한테 한소리 했었어요.”
“오라버니요?”
“냉혈검 모용비산이 제 오라버니거든요.”
“그러셨군요.”
그녀는 무척이나 밝아 보였다.
언영의 성격이 누구로부터 왔는지 하현은 확실히 알 것 같았다.
곧 하인들이 식사를 가지고 들어왔고, 자연스럽게 모두 자리에 앉고서 식사가 시작되었다.
밥을 먹는 동안의 대화는 대부분 모용비영이 주도했다.
그녀는 하현이 오는 오늘만을 기다려 왔는지 하현에게 질문세례를 퍼부었다.
“주로 사용하는 병기는 검이라고요?”
“네. 맞습니다.”
“검존 어르신의 손자인 건 알고 있는데, 그러면 할아버님께 무공 전수를 받나요? 아니면 따로 스승이 있는 거예요?”
“원래는 따로 있는데, 저는 그 사부님이 할아버님이세요.”
“아! 그렇군요. 우리 진주언가 직계는 따로 스승은 없이 공통으로 무공을 전수하는 방식이거든요. 조금 다르네요.”
그 외에도 너무 많은 것들을 물어보는 통에 하현은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너무나도 심한 질문세례에 보다 못한 언영이 어머니에게 그만 좀 하라고 이야기하고 나서야 모용비영은 조용해졌다.
‘생각보다 좋은 가족인데?’
하현은 이들을 보며 그의 걱정은 기우였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는 언영의 사정을 듣고는 조금은 딱딱한 분위기를 생각했는데, 실상은 그게 아녔다.
언형철은 분명 무뚝뚝하기는 했지만 그리 강압적인 아버지는 아니었고, 언영과의 사이도 좋아 보였으니까.
“자. 식사를 마쳤으면 잠시 차라도 한잔하지 않겠나?”
“좋습니다.”
“혹시 좋아하는 차라도 있나?”
“백호은침을 좋아하지만, 다른 차도 괜찮습니다.”
“오. 백호은침을 아는가? 흔히들 아는 것은 아닌데.”
“할아버지께서 다도를 즐기셔서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습니다.”
언형철은 하현을 보고 제법이라는 듯한 표정을 보이며 그를 데리고 다도실로 데리고 갔다.
그 다도실 역시 굉장히 넓었다.
그리고 아주 특이한 형태였는데, 차를 마실 수 있는 다기와 상이 한쪽 벽에 몰려 있고, 가운데에는 꽤 넓은 공간이 있는 형태였다.
“상당히 특이하군요. 차만 마시는 공간은 아닌 것 같은데.”
“그래 보이지? 우리 언가는 대련을 즐긴다네. 그래서 만들어진 형태지.”
“아하…… 대련을 하기 위한 곳이군요.”
하현이 주변을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시 보니 바닥이 보통 나무 바닥으로 보이진 않았다.
대련으로 인한 손상을 막으려는 의도로 보였다.
“이 공간은 차를 마시는 곳이기도 하지만, 내 입회하에 대련을 하는 곳이기도 하네. 우리 언가에서는 누구든 상대와 대련하고 싶을 때 할 수 있거든.”
그가 하현을 슥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어떤가. 자네도 식후에 운동이나 할 겸 가볍게 한 번 해보지 않겠나?”
“아버지!”
언영이 소리를 빽 질렀다.
“손님한테 그게 무슨 결례에요. 언가를 우습게 보겠어요.”
“그래? 여기 하현 공자의 표정은 그렇지 않아 보이는데?”
그의 말대로 하현은 호기심이 생긴 눈빛이었다.
언제나 강자와 한 판 붙어보는 것을 마다할 그가 아니었으니까.
“혹시 가주님과 대련할 기회가 있는 겁니까?”
하현의 물음에 언형철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가 이렇게 나올 줄은 전혀 몰랐던 것이다.
언형철은 박장대소를 터뜨리고는 하현에게 말했다.
“하하하! 패기가 넘치는군. 그렇지 않아도 나도 자네와 손속을 나누어 보고 싶지만, 아쉽게도 자네가 오기를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던 자가 있어서 말이야.”
“그게 누구입니까?”
“언영이의 호위무사 중 한 명인 언유춘이라는 무사네.”
“유춘……?”
하현은 그 이름을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다고 생각하며 기억을 떠올렸다.
아주 잠깐 사이, 그는 그 이름이 기억났다.
“아! 혹시 제게 기절 당했던…?”
“하하. 맞네. 그날 이후로 자네에게 복수하고 싶다며 벼르고 있다네.”
남궁세가 천재 외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