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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세가 천재 외손자-177화 (177/304)

177화

“듣기로는 자네의 한 수에 당했다지?”

“아, 그때는….”

하현이 말끝을 흐렸다.

그때가 분명히 기억이 났다.

언영이 가출했을 때, 그녀를 쫓는 나쁜 사람으로 착각하여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고 출수했었다.

“어떤가. 관심이 있는가?”

“네. 부탁드리겠습니다.”

하현의 대답에 언영이 한숨을 푹 쉬며 뒤로 빠졌다.

하현이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그녀가 반대할 명분이 없기 때문이었다.

언형철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하인 하나를 불러 유춘을 불러오게 시켰고, 그가 오는 동안 하현은 그가 직접 다려 준 백호은침을 마셨다.

“검존 어르신께서 나와 이토록 취미가 맞을지는 몰랐군. 언젠가 한 번 남궁세가에 가 봐야겠어.”

“할아버님께서 분명 좋아하실 겁니다. 다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즐기시거든요.”

언형철은 하현이 차에 대해 잘 아는 것에 기분이 좋아 보였다.

하현은 처음으로 할아버지께 다도를 어릴 적부터 꾸준히 배워놓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쿵쿵-

그들이 한창 차를 마시고 있을 때, 누군가 그 방문을 두드렸다.

“유춘입니다.”

“들어와라.”

문이 열리고 한 청년이 들어왔다.

하현은 사실 그의 얼굴을 이렇게 자세히 보는 것이 처음이었다.

그는 그렇게 크지만은 않은 키에 눈썹은 먹으로 그려놓은 듯 진하고, 주먹코를 가진 외모였다.

‘제법 좋은 기운을 풍긴다.’

하현은 그를 꽤 높게 평가했다.

지금까지 만난 다른 고수들보다 결코 더 강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제법 강단이 있어 보였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그래. 이쪽이 네가 그토록 만나보고 싶어 하던 하현 공자다.”

유춘이 하현쪽을 보고는 정중하게 포권하며 말했다.

“진주언가의 언유춘이라 입니다.”

“남궁세가의 남궁하현입니다.”

“소협과는 구면인데, 통성명은 처음이로군요.”

“……그것도 구면이라고 할 수 있는 건가요?”

하현이 곤란해하며 얘기하자, 옆에서 듣고 있던 언형철이 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무림에서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 하지 않는가? 그 정도면 큰 인연이지.”

“하긴, 옷깃보다 더한 게 스치긴 했죠.”

하현도 피식 웃으며 유춘이 서 있는 곳까지 와 그의 앞에 섰다.

유춘이 하현에게 말했다.

“저는 주로 권을 씁니다. 익힌 무공은 언가권입니다.”

하현은 목검을 하나 내어달라고 하려다가 그냥 유춘을 보며 말했다.

“사실 제가 주로 사용하는 것은 검입니다. 하지만 오늘은 저도 권으로 해보고 싶군요.”

“권법을 따로 익힌 적이 있으십니까?”

하현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닙니다. 다만, 최근에 깨달은 바가 조금 있어서.”

유춘의 미간이 미미하게 좁혀졌다.

하현이 자신을 무시하고 있다고 생각한 까닭이었다.

하지만 하현은 그를 무시하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는 그저 자신을 시험하고 싶을 뿐이었다.

“알겠습니다. 한 수 부탁드립니다.”

“저야말로 부탁드립니다. 진짜 권법을 드디어 눈앞에서 보겠군요.”

하현과 유춘이 동시에 언가주를 바라보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시작하시오!”

팟!

먼저 치고 들어온 것은 유춘이었다.

그는 하현이 어리다고 하여 손속을 봐줄 생각은 없었다.

‘나보다 훨씬 고수라고 생각해야 한다!’

벌써 수년 전이건만, 그는 하현의 그 한 수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비록 부지불식간에 날아온 공격이긴 했지만, 그는 무엇이 날아오는지 알지도 못하고 그대로 기절했었다.

‘이번에는 다를 것이다!’

파악-!

그는 하현을 향해 직선으로 주먹을 뻗었다.

지난 수년 동안의 수련을 증명해 보이려는 듯 군더더기 하나 없는 동작이었다.

스윽!

하현은 날아오는 주먹을 손바닥으로 흘려내었다.

항룡십팔장의 형태에 대연검법의 묘리를 섞은 장법이었다.

“……!”

너무나도 쉽게 막혀버리는 자신의 주먹에 유춘은 조금 놀라고 말았다.

세가 내에서도 그를 이토록 쉽게 다루는 사람은 흔치 않았기에.

그런데 그가 모르고 있는 사실이 있었으니, 사실은 하현도 속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주먹이……. 아니, 팔 전체가 무슨 돌덩어리 같잖아?’

솔직히 말해서 유춘의 내공 자체는 그리 대단하지 않았다.

무림에서는 능히 고수 반열에 들 수 있을 만한 공력이었지만, 월룡의 기운을 흡수하고 황보세가주의 넘치던 기운까지 받아들인 하현에게는 전혀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하현이 놀라게 한 것은 유춘의 육체 그 자체였다.

“외공을 익히신 건가요?”

“우리 언가는 내가중수법을 중요시합니다.”

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유춘의 저 말만으로도 대충 유추가 가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말로만 듣던 강시공이로군요.”

유춘이 놀랐는지 눈이 살짝 커졌다.

이 무공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었다.

“견식이 넓으시군요.”

“할아버지께서 말씀해주신 적이 있습니다. 언가의 사람들은 그 무공으로 무쇠 같은 팔, 다리를 얻으신다고.”

“할아버님이라면……. 검존 어르신이시겠군요.”

그는 검존이라면 충분히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지, 별 물음 없이 기수식을 취했다.

이번에 먼저 움직인 것은 하현이였다.

다다다-

하현은 보법을 밟아 유춘에게 다가갔다.

서로의 손발을 맞추는 대련을 위해 천천히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실전을 방불케 하는 신속한 보법이었다.

그는 눈앞의 이 유춘이라는 무사가 하현과 맞붙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는 모르지만, 적당히 봐주면서 몇 합을 겨루는 것보다는 온 힘을 다하는 것이 그에게 더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쒜에엑!

이번에 하현이 쓴 수법은 창궁무애검법을 권법으로 변환한 주먹이었다.

언젠가 모용세가에서 할아버지가 쓰는 것을 보고 하현도 틈틈이 연습해왔었다.

“헛?!”

유춘은 헛숨을 들이켰다.

지금껏 상대해본 적도 없는 빠른 보법과 더불어, 이전에는 장법을 쓰던 하현이 느닷없이 권을 질러 왔기 때문이다.

빠악!

하현의 팔에 담긴 내공이 엄청났다.

유춘이 팔을 들어 겨우 막아내었건만, 그 고통은 팔을 맞은 것인지, 주먹을 맞은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하현은 거기서 멈출 생각이 없었다.

그는 호흡을 들이마시며 곧바로 내뻗을 주먹을 준비했고, 다음에는 호흡을 내쉬며 순식간에 여러 번 주먹을 내질렀다.

퍼버버버벅!

강시처럼 딱딱해지게 만든다 하여 이름 붙여진 강시공.

하현의 주먹이 그 팔 위에 쏟아졌다.

이미 하현도 내공으로 주먹을 보호하여, 철판도 내리쳐도 될 정도였다.

“크으윽!”

그 주먹의 힘을 감당하지 못하여 유춘은 계속해서 뒤로 밀려났다.

반격할 생각도 하지 못하는 그를 보며 하현은 마지막 일격을 준비했다.

‘검법을 권법으로 바꾸는 것도 가능했다. 그렇다면 장법을 권법으로 바꾸는 것은 더 쉽지 않을까?’

하현은 이 순간에서 머릿속으로는 또 새로운 방식을 고안했다.

그가 떠올리고 있는 무공은 취월걸개의 주특기이자, 어느새 하현이 가장 좋아하는 무공 중의 하나가 되어버린 항룡십팔장 항룡유회.

본디 항룡유회의 기수식이라면 허리에 양 주먹을 가져다 대고 기운을 끌어 올려야 하건만, 하현은 왼손은 앞으로 뻗은 채, 오른 주먹만 허리에 가져갔다.

우우우웅-!

그 찰나의 순간.

하현이 만족할만한 기운이 빠르게 모였다.

며칠 전보다 확연히 빨라 보이는 속도였다.

‘이 속도는 수미천왕신공의 덕.’

하현은 최근에 익힌 수미천왕신공을 실제로 펼쳐볼 기회가 없었는데, 이번이 그 기회가 돼주었다.

콰앙!

오른 허리에서 은은히 빛을 발하던 주먹이 대포를 발사하듯 앞으로 쏘아져 유춘의 팔을 가격했다.

그 순간 유춘의 팔에서는 뿌득 거리는 소리가 날 정도였다.

쾅!

결국, 하현의 힘을 감당하지 못한 유춘은 그대로 뒤로 날아가 벽에 몸을 부딪치고는 쓰러졌다.

“유춘!”

언형철이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크윽, 쿨럭!”

유춘은 곧 비틀거리며 일어나기는 했지만, 약하게 내상을 입었는지 입가에서는 가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하현은 조금은 당황하여 얼른 그쪽으로 다가갔다.

“괜찮으세요?”

“윽, 괜찮다고 하면 거짓말이겠군요.”

유춘은 미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조금 전까지 그렇게 심각한 표정으로 하현과 대련을 하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제가 졌습니다. 이렇게 정정당당한 승부에서도 져 버리니, 오히려 후련하군요.”

그는 곧바로 패배를 인정했다.

유춘에게 큰일이 있나 싶어 다가온 언가주가 하현과 유춘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자네. 정말 대단하군. 마지막에 쓴 권법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대단한 권법이었네. 그리고 유춘. 어디 다치지는 않았는가?”

“팔이 조금 다친 것 같습니다.”

“허허……. 하현 소협이 강시공을 뚫고 상처를 냈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언가주는 자신의 수하를 다치게 했건만, 오히려 하현을 대단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이 아이가 겨우 열넷이라 했던가?’

그는 갑자기 그의 딸 언영이 기특해졌다.

처음 남궁세가에 매파를 보내 달라고 했을 때 그저 변덕인 줄만 알았는데, 이렇게 엄청난 아이와 약혼을 하게 될 줄이야.

“유춘. 자네는 빨리 가서 치료부터 하게.”

“알겠습니다. 가주님.”

그는 가면서도 하현을 향해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인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유춘이 문밖으로 나가고, 언가주는 하현을 다도상이 있는 쪽으로 이끌었다.

이전보다 훨씬 친절해진 모습이었다.

“자네는 혹시 어디 다친 곳이 없는가?”

“네. 다행히.”

“그래. 이쪽으로 와서 이제 편하게 차나 한잔하세.”

하현과 차를 마시며 이야기하는 도중에도 언가주는 뭐가 그리도 기쁜지 연신 웃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언영의 표정은 점점 굳어갔다.

그녀의 아버지와 약혼자가 잘 지내는 모습을 보면 기뻐해야 마땅하거늘.

어째서인지 그녀의 표정은 밝지가 못했다.

***

차까지 모두 마신 하현은 언가주가 불러준 하인을 따라 숙소에 도착했다.

뜻밖의 대련까지 했으니 어서 들어가서 쉬라는 언가주의 배려였다.

하현이 도착한 곳은 마당까지 딸린 작은 장원이었다.

“여기를 통째로 제가 쓰라고요?”

“네. 가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까지 큰 곳은 필요 없는데…….”

하현은 장원 안에 있는 건물을 둘러보았다.

일 층으로 되어 있지만, 방이 몇 칸이나 되는 꽤 큰 건물이었다.

언가는 무엇이든 커다랬다.

진주언가에 상주하는 사람도 많았고, 장원의 면적도 남궁세가의 그것의 세 배는 족히 되어 보였다.

그 덕에 안에 들어있는 건물들, 전각들 하나하나가 그 규모가 달랐다.

“하여튼 감사합니다. 깨끗하게 쓸게요.”

“하하. 편하게 쓰셔도 됩니다. 언제든 필요하신 일이 있으시면 여기에 있는 종을 흔들어 주십시오.”

하인은 대문 바로 옆의 담벼락에 종을 하나 걸어두고서는 밖으로 나갔다.

하현은 언가주가 신경 써준 것에 마음속으로 감사함을 전하며 건물로 들어섰다.

어차피 혼자 쓰기에 방 하나만을 쓰게 될 테지만.

시간은 흘러 밤이 되었다.

그동안 하현은 천천히 자신의 무공을 정리했다.

그는 이 마당을 혼자 쓸 수 있게 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무공수련을 하기에 더없이 좋았기 때문이다.

황보세가에서 얻은 여러 가지 깨달음들을 정리할 시간도 없었던 하현에게는 귀중한 시간이었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어느 정도 수련이 끝난 하현은 그림자로 가려진 마당 한쪽을 향해 말했다.

아무도 없는 것 같던 그곳이 부스럭거리더니 사람 한 명이 스윽 나타났다.

“어, 어떻게 알았어?”

“네 기운도 완전히 가리지 못했고, 숨소리도 계속 들렸거든.”

나타난 그 사람은 언영이었다.

그녀가 하현이 수련하는 것을 훔쳐보고 있던 것이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

“네가 담을 넘기 직전부터 알았지.”

“아예 처음부터잖아?”

울상을 짓는 언영을 보며 하현이 눈부시게 미소지었다.

달빛이 하현의 얼굴에 부딪혀 부서졌다.

언영은 그 미소가 몹시도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이 시간에는 무슨 일로 온 거야?”

“아……. 할 말이 있어서.”

“할 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큰 결심이라도 한 듯, 양손을 꽉 쥔 그녀는 하기 힘든 말을 억지로 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사실 며칠 더 있다가 얘기하려고 했어. 너한테 내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이제는 정말 나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서 말 하고 싶었거든.”

“무슨 말을 하려고? 네가 이렇게까지 긴장하는 걸 보니까 왠지 무서운데?”

하현이 웃으며 말했지만, 언영의 표정은 계속 심각했다.

한참을 뜸을 들이던 그녀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내 변덕과 나약함 때문에 너에게 폐만 끼치고 있는 것 같아. 이제는 나도 아버지에게 제대로 맞설 마음의 준비가 끝났어.”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

다음에 이어지는 말은 하현도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우리 파혼하자.”

남궁세가 천재 외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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