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파혼이라니. 그게 그렇게 쉽게….”
“쉽게 생각한 건 아니야. 사실 꽤 예전부터 계속해서 생각하고 있었어.”
언영은 처연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 얼굴에는 굳은 의지도 함께 담겨 있었다.
너무도 놀라 아무 말도 못 하는 하현에게 살짝 웃어준 그녀가 말을 이었다.
“애초에 지금까지 나를 도와준 거잖아. 정말로 우리가 혼인까지 할 거는 아니었고. 그렇지 않아?”
“그건……. 그렇지.”
그녀의 말이 맞다.
이 약혼의 시작은 언영이 아버지의 간섭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줄 목적이었으니까.
어찌 됐든 언젠가는 끝날 약혼이었다.
“너는 홀가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내가 발목 잡지 않아서.”
“발목이라니. 그래도 너무 갑작스럽잖아. 이렇게 파혼하는 건 생각도 못해봤단 말이야.”
“어머, 그래?”
언영이 짐짓 과장된 목소리로 하현에게 한 발자국을 다가가며 말했다.
“그러면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우리 아버지가 네가 무척이나 마음에 드셨나 봐. 그게 제일 큰 문제야.”
“그게 어째서? 아. 혹시……?”
언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혼인을 서두르자고 하실 것 같아.”
“그렇구나. 아까의 그 대련 때문인가?”
“그게 큰 역할을 했겠지. 예전에 내가 이야기한 적 있는 것 같은데, 우리 아버지는 한번 결정한 일은 어지간히 큰일이 있지 않은 이상 끝까지 밀어붙이시거든.”
“그렇다고 해도…….”
“하현.”
언영이 무언가 말을 하려는 하현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리곤 하현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로 나랑 혼인할 생각이 있어?”
“…….”
하지만 하현은 이 질문에는 대답하지 못했다.
혼인까지 생각하기에 그는 아직 할 일이 너무 많았고, 또 너무 어렸다.
“거봐.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최선이야.”
언영이 미소지었다.
그 미소에는 어떤 미련도 남아 있지 않았다.
“파혼하게 되면……. 언가주님과 또 갈등이 생기는 거 아니야?”
“그럴 거야 아마. 너희 집안 어른들도 놀라시겠다. 이런 걸 네 맘대로 결정해도 되는 거야?”
“응. 모두 내 의견을 존중해주실 거야.”
너무나도 확신에 찬 하현의 말에 언영이 감탄사를 흘렸다.
“와…. 부러워. 나도 너희 가문에서 태어났다면 이렇게 복잡한 일은 없었을 텐데.”
그녀는 무거운 분위기를 반전하려는 듯 일부러 밝게 말했다.
“자. 그러면 나는 할 말 다 했으니, 돌아가 볼게. 너 언가에는 언제까지 있을 거야?”
“따로 계획을 잡고 오진 않았어.”
“그러면 그건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네가 떠나는 날 아버지께 말씀드리게.”
“떠나는 날…….”
“그래야 너한테 불똥이 안 튈 거잖아.”
언영이 히죽 웃었다.
그는 어두운 표정의 하현에게 말했다.
“그런 표정 짓지 마. 네가 벌어준 이 년의 시간 덕분에 내가 아버지와 싸울 힘을 기를 수 있었어. 물론 정말로 주먹다짐을 하겠다는 것은 아니고.”
하현은 그녀에게서 무인의 향기가 풍겨 나온다고 생각했다.
“그래. 너라면 분명히 잘 해낼 거야.”
“그럼! 내가 누군데. 나 정말 간다!”
그녀는 생긋 웃으며 하현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는 다시 담을 넘어 바깥으로 사라졌다.
하현은 그녀가 사라진 방향을 한참이나 보고 있었다.
그녀의 말대로 하현이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모두 도와주었다.
이제부터는 그녀가 이겨 나가야 할 싸움.
하현은 언영이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
언영은 신법을 전개하지 않고, 터덜터덜 걸어서 그녀가 기거하는 전각 앞까지 도착했다.
전각 주위를 호위하던 무사가 그녀를 발견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다가왔다.
“아, 아가씨! 이 시간에 어디를 다녀오시는 겁니까? 나가시는 것도 못 봤는데.”
“아무 일도 아니야. 나 좀 올라가도 될까?”
“그럼요!”
그녀는 더는 말할 기운도 없는 듯 대꾸도 없이 전각으로 들어섰다.
이 층 그녀의 방에 도착한 언영은 힘없이 문을 열고는 방으로 들어와 그대로 침상에 무너졌다.
“잘…한 거야. 이게 최선이야.”
그녀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혼잣말했다.
올해로 벌써 열일곱인 그녀는 이제 아이가 아니었다.
어릴 때야 남에게 민폐를 끼치든 아니든 하고 싶은 대로 하려 했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 대상에는 당연히 하현도 포함이다.
“여태까지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운 일이야.”
그녀는 하현에게 진한 고마움을 느꼈다.
도대체 세상 어떤 사람이 그녀를 도와주겠다고 약혼까지 해줄 수 있을까?
그렇게 순수하고 착한 사람은 세상 또 어디 없을 것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툭-
그렇게 하현의 좋은 점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녀는 더욱 슬퍼져 결국 눈물을 한 방울 떨구고 말았다.
똑똑-
그때 누군가 방을 두드렸다.
“아가씨.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서 나와봤습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어디 나가신 건 아니지요?”
언영의 바로 옆 방을 사용하는 앵앵이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한가득 묻어 있었다.
“앵앵. 나 여기 있어.”
언영은 겨우 울음을 참아내며 말했지만, 그 목소리의 이상함을 찾아내지 못할 앵앵이 아니었다.
“아가씨 우세요? 무슨 일 있으신 거예요? 저 들어가겠습니다.”
“들어오지 마…….”
앵앵은 언영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녀는 그대로 문을 열고 언영의 방으로 들어왔다.
앵앵의 생각대로, 침상에 반쯤 쓰러져 있는 언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가씨…….”
“아니… 들어오지 말랬잖아.”
앵앵을 보는 순간 겨우 막아내고 있던 감정의 둑이 툭 하고 터져버렸다.
“흑, 흐흑. 앵앵.”
“아가씨…….”
항상 당차게만 보이던 언영이지만, 그녀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앵앵은 알고 있다.
그녀가 얼마나 여리고 정이 깊은 사람인지를.
앵앵이 조심스럽게 언영을 안아주었다.
언영은 그대로 앵앵에게 안겨 흐느끼기 시작했다.
앵앵의 손이 그녀의 등을 토닥인다.
그 손은 언영의 흐느낌이 잦아들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잠시 시간이 흐르고, 언영은 울음을 멈추었다.
그녀는 두 눈이 퉁퉁 부은 채로 앵앵에게 말했다.
“고마워.”
“제가 뭘 했다고요.”
앵앵은 언영에게 그 어떤 것도 물어보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그녀가 감정을 모두 쏟아내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언영은 그런 그녀를 보고 있자니 마음 한편이 든든해지는 기분이었다.
세상 어떤 일이 있더라도 앵앵은 자기편을 들어줄 거니까.
“아까 무슨 일이 있었냐면…….”
언영은 앵앵에게 조금 전 하현을 만나고 온 일을 이야기해주었다.
이 이야기를 하는 동안 그녀는 울지 않았다.
그저 담담히 이야기하며 오히려 조금씩 마음을 추스르고 있었다.
“그래서 하현 공자는 파혼하겠대요?”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어. 그래서 내가 다시 물어봤지. 나랑 결혼할 생각이 있느냐고.”
“그랬더니 뭐래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더라고.”
앵앵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현에게 화라도 내려 했지만, 아무리 다혈질인 그녀도 잘 알고 있다.
이번 일은 하현이 언영을 위해 많은 희생을 해주었었다는 것을.
이렇게 생각하니 새삼 대단하다.
길에서 우연히 만난 생면부지의 여자아이를 위해 이토록 해줄 수 있다는 것도 사실은 하현이 굉장히 좋은 사람이라는 반증이었으니까.
“아가씨는 많이 좋아하셨잖아요.”
“나…? 그랬지.”
“그러면 조금 더 억지라도 부려보시기 그랬어요.”
언영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억지를 부리고 싶지 않았어. 나도 이제 나 스스로 할 수 있을 만큼 힘을 키웠는걸.”
앵앵이 보기에도 언영은 이 년 전에 비해 많이 발전했다.
지금은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을 무인이다.
“그러면 방법은 딱 하나 남았네요.”
“무슨 방법?”
“하현 공자의 마음을 얻을 방법이요.”
언영의 눈이 동그래졌다.
앵앵이 미소를 지으며 언영을 보았다.
“지금 하현 공자는 무공 때문에 여인 자체에 관심이 없는 거로 보여요.”
“나한테도 그렇게 말했어.”
“그러면 하현 공자를 사로잡을 방법은 무공밖에 없어요.”
“무공……?”
앵앵이 확신을 담은 눈으로 말했다.
“제가 지금껏 무림에서 지내오며 저런 유형의 남자를 여럿 만나보았거든요. 남자들은 그가 목표로 한 바가 있으면 절대 그걸 방해하면 안 돼요. 대신에 내가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될 여자라는 것을 보여주는 거죠.”
“도움이 될 사람……?”
“냉정하게 들리실지는 모르지만, 우리 여자들이라고 해서 가만히 앉아서 남자들이 선택해주기만을 기다리면 절대, 절대 안 돼요.”
앵앵은 언영의 눈을 똑바로 보고 말했다.
“원하는 게 있으면 쟁취해야 해요. 그것이 남자든, 무엇이든.”
“쟁취라니…….”
언영은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앵앵의 말에 점점 빠져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내년 용봉지회! 그때를 노리시는 겁니다.”
“용봉지회를?”
“권봉의 자리를 쟁취하셔서 하현 공자께 보여드리는 거예요. 아가씨가 얼마나 노력하고 있고, 얼마나 발전했는지를. 그리고 하현 공자를 얼마나 진심으로 생각하는지를.”
언영은 앵앵에게 말려 들어가는 것 같았지만, 이상하게도 앵앵이 하는 말에 신빙성이 있어 보였다.
“하긴…. 지금 하현이가 나에게 마음이 없는 거지,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는 거잖아?”
“맞아요. 그건 아가씨가 하시기에 따라 달린 거고요.”
언영이 갑자기 침상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래! 앵앵. 고마워. 역시 나는 앵앵밖에 없어.”
“뭘요. 앞으로 제가 더욱 도와드리겠습니다.”
“응!”
언영은 언제 울었냐는 듯 앵앵을 보며 씨익 웃었다.
꼭 쥐인 두 주먹과 반짝이는 두 눈은 얼핏 비장함까지 엿보였다.
***
빠악!
하현의 주먹에 맞은 나무판자가 두 쪽으로 너무나도 쉽게 쪼개어졌다.
“오…….”
그는 자신의 주먹을 내려다보며 감탄사를 흘렸다.
지금 하현이 언영에게 배우는 것은 발경의 하나인 촌경(寸勁).
팔을 모두 뻗지 않는 상황에서도 큰 힘을 주먹에 실을 수 있는 방법이다.
“역시 대단해. 나도 이 원리를 깨닫는 데까지 며칠이나 걸렸는데, 너는 듣자마자 해내는구나.”
옆에서 보고 있던 언영이 솔직하게 말했다.
그녀는 어젯밤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하게 하현을 대했다.
그 덕에 처음에는 그녀와 어색할 뻔했던 하현도 평소처럼 그녀를 대할 수 있었다.
“촌경에서 더 발전하게 되면 상대와 완전히 붙어 있는 상태에서도 타격을 줄 수 있는 분경(分勁)의 경지까지 오를 수 있어.”
하현은 그녀의 말을 들으며 몇 번 몸을 움직여 그녀가 가르쳐준 것을 복습했다.
그가 이해한 발경이란 무게중심과 몸의 회전력을 이용해 최소한의 거리에서 최대한의 힘을 이끌어내는 수법이었다.
‘이 느낌은 검에도 충분히 적용할 수 있겠어.’
일반적으로 검사를 상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두 가지.
검의 사정거리 밖으로 떨어지거나, 아예 검을 휘두르지도 못하게 바짝 붙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권사가 검사에게 유리하다는 평가를 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 수법을 제대로 펼칠 수만 있다면 그 약점은 사라진다.
상대가 바짝 붙어 있더라도, 내가 충분히 타격을 입힐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다음에 가르쳐줄 거는 상대의 힘을 역이용하는 수법이야. 이것도 내가 이해한 대로 말해볼 테니까, 잘 들어봐.”
그 후로도 언영은 하현에게 여러 가지를 가르쳐 주었다.
그녀는 오늘을 위해 지금까지 정리해오고, 연구해왔던 것을 하현에게 아낌없이 가르쳐 주었다.
당연히 진주언가의 비전심법이나 무공의 구결을 전수해주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하현에게는 이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되었다.
오늘은 이만하기로 하고, 하현은 그대로 연무장 바닥에 앉아 물을 마시며 언영에게 물었다.
“조금 서두르는 거 같은데,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야?”
“아니. 무슨 일이라기보다는…….”
그녀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그냥. 너를 빨리 보내주려고.”
“그렇구나…….”
하현은 그가 잘못한 것이 없음에도 뭔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언영은 그런 하현의 앞에 똑바로 서서 말했다.
“그런 표정 짓지 마. 내가 미안해지잖아.”
하현이 물끄러미 언영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언영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살짝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넌 이렇게 계속 앞으로 나아가. 나는 열심히 그 뒤를 따라갈게.”
그녀는 모든 것을 결정하고 내려놓은 듯 밝게 미소지었다.
두 눈에서는 조금씩 눈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언젠가, 네 마음에 여유가 생겼을 때 뒤를 한 번만 돌아봐 줘. 그때는 너랑 가장 가까이 있을 수 있도록 노력할 테니까.”
하현은 대답 대신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 끄덕임에 언영은 한층 더 밝게 웃었다.
그녀는 끝까지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남궁세가 천재 외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