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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세가 천재 외손자-179화 (179/304)

179화

그리고 이틀이 흘렀다.

언영은 그 시간 동안 최선을 다해서 그녀가 깨달은 것들을 하현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 덕에 하현은 권법에 대해서 대략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언영 역시 한창 알아가는 도중이기에 하현에게 가르쳐준 것이 많이 모자랐지만, 하현은 그 모자란 부분은 스스로의 깨달음을 천천히 쌓아 갔다.

“내가 가르쳐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야.”

언영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녀가 가르쳐줄 수 있는 게 더 없다는 것은 곧 하현을 여기에 잡아둘 구실이 없다는 것과 같은 말이었지만, 그녀는 이미 마음을 다잡은 듯 우울한 내색은 전혀 없었다.

“고마워. 덕분에 많은 걸 배울 수 있었어.”

“이 정도면 네가 날 도와준 것에 대한 보답이 조금은 됐을까?”

“조금뿐이겠어? 충분히 차고도 넘칠 정도야.”

“넌 정말 무공을 좋아하는구나?”

하현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렇게까지 무공을 열심히 익히는 거야?”

“무인이 무공을 열심히 익히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그건 맞는데……. 그거 말고 진짜 이유는 없어?”

“진짜 이유 말이지….”

하현은 잠시 뜸을 들였다.

어째서인지 언영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 부끄럽다는 생각이 조금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지 말고 말해주라. 나도 네 얘기를 듣고 더 큰 동기부여를 가질 수도 있잖아?”

“흠……. 알겠어.”

하현은 흠, 흠 하며 헛기침을 하고는 말을 이었다.

“힘이 없어서 소중한 사람을 잃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야.”

“소중한 사람?”

“응. 할아버지, 형, 누나 같은 세가 가족들. 그리고 몇 명 안되기는 하지만, 내 친구들…….”

“친구들?”

언영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하현에게 물었다.

“그 친구에는 나도 들어가 있는 거야?”

“그럼. 당연하지.”

“나도 너한테 소중한 사람이네?”

“응. 소중해.”

애써 숨겨놓았다고 생각했던 마음이 또 덜컥 내려앉는다.

하지만 언영은 애써 마음을 동여매고 대답했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그러면 너는 더 강해져야겠다. 나중에 내가 위기에 처했을 때 도와주려면.”

“위기에 처하지 않는 것이 제일 좋긴 하겠지만.”

하현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 웃음에 언영도 미소로 화답했다.

이 년 전 둘이 했던 약속은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

그날 밤.

언영은 언형철의 처소로 향했다.

언제나 그림자처럼 함께하는 앵앵도 뒤따르지 않았다.

처소 앞에서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난 그녀는 언형철의 방문 앞을 지키는 호위무사에게 아버지를 보러 왔노라 말했고, 그가 말을 전하자 곧 언형철이 그 입구로 나왔다.

“영아. 이 시간에 무슨 일이냐?”

언형철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이 늦은 시간에 언영이 직접 처소로 찾아온 것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일단 안으로 들어와라.”

그는 언영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모용비영이 언영을 보고 놀란 눈으로 물었다.

“어머, 영아. 무슨 일 있니?”

“무슨 일이라기보다는……. 어머니도 같이 들어주세요.”

언형철과 모용비영, 그리고 언영은 탁자에 마주 보고 앉았다.

도대체 언영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나 불안해하고 있을 그때, 언영이 입을 열었다.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는데. 그냥 바로 말씀드릴게요.”

“도대체 무슨 이야기길래 그러느냐?”

“저……. 하현 공자와의 약혼을 파혼하고 싶어요.”

“뭐?!”

언형철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의자가 우당탕 넘어졌다.

조금 전 저녁 식사 때까지만 해도 이런 낌새도 없었기에, 그는 정말 놀랐다.

언형철이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몰라 언영을 바라보고 있을 때, 모용비영이 쓰러진 의자를 일으켜 세워주며 나긋이 말했다.

“자. 진정하시고, 앉아서 이야기를 좀 들어봐요. 아직 영이 얘기가 끝나지 않았어요.”

“허어…….”

그 덕에 언형철은 이성을 조금 찾았고, 다시 의자에 앉아 언영에게 말했다.

“후우…. 그래. 이유를 말해보거라.”

언영은 감사의 눈길을 그녀의 어머니에게 보낸 후에 입을 열었다.

“가장 큰 이유로는 제가 언가에 욕심이 생겼기 때문이에요.”

“언가에……?”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저는 무공에도 큰 관심이 없었고…. 솔직히 말해 우리 진주언가의 대를 잇는 것도 큰 관심이 없었어요.”

언형철은 잠자코 언영의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까지 말괄량이 같던 언영의 말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언영은 정말 진중하게, 하지만 조심스럽게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고민도 많으셨던 것도 잘 알고 있고요. 아마 저마저 시집을 가게 되면 제 사촌 중에서 한 명을 뽑아 후계로 삼으실 예정이라는 것도요.”

언영의 말은 사실이었다.

언형철은 슬하에 아들은 없이 딸만 셋.

그 중의 막내가 언영이었다.

그는 언영까지 모두 시집을 보내고 나면 조카 중에서 가장 자질이 뛰어난 아이를 후계로 삼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언가에 욕심이 난다는 것이 무슨 말이냐?”

“말 그대로예요. 제가 아버지의 딸이잖아요. 제가 진주언가의 후계가 되고 싶다는 말이에요.”

“후계?”

“지난 이 년간, 제가 노력한 건 아버지도 잘 알고 계시죠?”

“그렇지.”

언형철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전까지는 무공에는 관심도 없고, 시집가기 싫다며 가출을 일삼던 그녀다.

그런데 이년 전부터 완전히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며 엄청난 성장을 거듭하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다른 사촌들보다도 더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게 되었다.

“그 노력과 제 성장을 통해서 깨달았어요. 저보다 우리 진주언가를 더 발전시킬 사람은 없다고요.”

“네 생각이 그런 건 알겠다. 그런데 왜 그것 때문에 파혼을 하겠다는 것이야?”

“데릴사위 때문이에요.”

“데릴사위?”

언형철이 되물을 때, 옆에서 가만히 듣고만 있던 모용비영이 알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하현 공자는 우리 가문에서 데릴사위로 들이기가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구나.”

“네. 하현 공자는 뼛속까지 남궁세가 사람이니까요.”

언형철은 며칠 동안 봐 왔던 하현을 떠올렸다.

말 그대로 엄청난 재능과 오성.

거기에 때때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남궁세가에 대한 자부심과 사랑까지.

그가 생각하기에도 하현은 진주언가가 품기에는 너무 큰 그릇으로 보였다.

그렇기에 데릴사위는 생각도 하지 않았었다.

“그래서……. 하현 공자와는 이야기해 본 것이냐?”

“네. 오기 전에 먼저 얘기해봤어요.”

“뭐라더냐?”

“제 뜻을 존중해주시겠다고 해요.”

“기분 나빠하지는 않았고?”

“네.”

언형철은 오히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진주언가도 대단한 가문이라고는 하지만, 남궁세가는 명실상부 천하제일가다.

혹여나 이런 결정 때문에 심기를 건드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흠…….”

그는 침음성을 흘리며 생각에 잠겼다.

언영은 숨을 죽이고, 그가 생각을 마치기를 기다렸다.

그녀가 초조해하는 것을 눈치챘는지, 모용비영이 조용히 언영의 손을 잡아주었다.

‘엄마…….’

언영이 애틋한 눈으로 모용비영을 바라보자, 그녀는 입가에 미소를 살짝 띠고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때 언형철이 입을 열었다.

“후우…. 그래. 네 뜻은 알겠다. 그런데 하현 공자와 이야기를 좀 해봐도 되겠느냐?”

“아…! 지금 제가 불러올까요?”

“아니, 내가 가야지. 하현 공자와 둘이서만 이야기하고 싶구나.”

언영의 눈동자가 조금 흔들렸다.

언형철이 하현에게 무슨 말을 할지 가늠이 안 갔기 때문에.

그런데 모용비영이 언영의 손을 꼬옥 잡으며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를 믿어보라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

“아……. 그러면 같이 가요. 아버지. 만약 아직 깨어 있으면 제가 빠져드릴게요.”

“알겠구나.”

언형철은 곧바로 일어났다.

그리고 앞장서는 언영의 뒤를 따랐다.

모용비영은 문밖으로 사라진 두 모녀를 보며 웃음 지었다.

‘영이가 그이 앞에서 저렇게 얘기 한 건 처음이야. 그이가 저렇게 이야기를 들어 준 것도 처음이고.’

그녀는 오늘을 기점으로 세가에 새로운 변화의 바람이 불어올 것이라는 강한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 예감이 든 순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하현의 얼굴이 떠올랐다.

진주언가에 불어온 이 바람은 명백히 그 소년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었기에.

***

하현이 머무는 작은 장원.

담벼락으로 둘러싸인 그곳 대문 앞에서 언영은 문을 두드리지 못하고 뜸을 들이고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 언형철이 하현에게 무슨 말을 할지 가늠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평소 불같은 아버지의 성격으로 보아, 갑자기 하현에게 화를 낼 수도 있는 일이었으니.

‘제발 아무 일도 없기를……!’

그녀는 속으로 생각하며 대문을 두드리려 했다.

그런데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앗!”

깜짝 놀란 그녀는 문에서 몇 발자국을 물러서고 말았다.

“언영. 이 시간에 여기는 무슨 일이야?”

“어떻게 알고 나왔어?”

“마당에 있었거든. 소리가 들려서.”

그렇게 말하는 하현의 시선은 언영을 지나쳐 그 뒤를 향했다.

하현이 문을 열고 나온 것은 상당히 강력한 기운이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언가주 언형철의 기운이었다.

“하현아. 늦은 시간에 미안한데…….”

“괜찮아. 나도 가주님과 대화를 해보고 싶었거든.”

“응?”

말하지도 않았는데, 먼저 이렇게 말하는 하현을 보며 언영의 눈이 동그래졌다.

“흠흠. 그랬는가.”

언영 대신 그녀의 뒤쪽에 서 있던 언형철이 대신 대답했다.

“네. 안으로 드시겠습니까? 좋은 곳을 마련해주신 덕분에 안에서 말씀을 나누어도 될 것 같습니다.”

“하하. 좋지. 영이는 이만 들어가 있거라.”

“네. 아버지.”

생각보다 평온한 분위기에 언영은 순순히 물러갔다.

장원 마당에 든 언형철은 먼저 말을 꺼냈다.

“영이에게 간단하게는 들었네. 정말로 자네와 잘 이야기해서 결정한 것인가?”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곧바로 알아들은 하현은 그에게 대답했다.

“네. 충분히 이야기하고 상의한 결과입니다.”

“세가의 어른들께서는 이 일 때문에 기분 나빠 하시지 않겠는가?”

“전혀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허허……. 그렇군.”

그는 화를 내지도, 흥분하지도 않았다.

사실 지금껏 그는 이런 날을 기다려 왔을지도 모른다.

그의 자식이 가문을 진심으로 생각하게 되고, 이 진주언가의 대를 이으려 하는 이날을.

“자네를 품기에는 우리 진주언가가 너무 작다는 것에는 나도 동감하네. 그리고 자네를 한 곳에 묶어 두는 것은……. 온 무림의 손해이기도 하고.”

“과찬이십니다.”

“자네가 볼 때, 언영이가 잘 해낼 것 같은가?”

언형철의 질문이 떨어짐과 동시에 하현이 경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언영 소저는 분명 잘 해낼 겁니다.”

“어떤 점을 보고 그리 생각하는가? 나는 사실……. 아직도 어린아이로만 보인다네.”

하현이 빙긋 웃었다.

언형철의 고민이 무엇인지 그대로 느껴지는 듯했기 때문이다.

“우선 언영 소저는 생각의 전환이 빠르고, 행동력도 있습니다. 결단력 역시 충분하죠.”

“하하. 영이에게 그런 면이 있었는가? 아비인 나보다도 자네가 더 잘 아는군.”

“가주님께서도 이미 알고 계실 것입니다. 다만 아직 보려 하지 않으실 뿐이죠.”

“내가……?”

하현이 웃는 낯으로 반쯤 농담을 섞어 말했다.

“가출을 몇 번이나 강행한 것으로 보아 행동력과 결단력은 충분합니다. 그리고 지난 이 년간 단 하루도 빼먹지 않고 수련을 계속해온 것으로 보아 끈기도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언영 소저는 무공에 큰 재능이 있습니다.”

“무공이라……. 난 영이가 무공을 좋아하는지는 잘 모르겠네. 그게 가장 걱정이야. 우리는 결국 무가(武家)이지 않은가? 절대 무공으로 어디 가서 무시당하는 일은 없어야 하네.”

“그건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미 소저는 권법에 대한 깨달음도 깊고, 수련도 게을리하지 않으니까요.”

말을 마친 하현은 마당 한쪽에 꽂혀 있는 통나무 옆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수련을 위해 마련해 놓은듯한 이 통나무는 척 보기에도 굉장히 두껍고 단단해 보였다.

“가주님께서는 며칠 전에 제가 대련을 할 때 썼던 권법을 보셨을 것입니다.”

“그랬지. 사실 권법이라고 하기보다는……. 검법을 주먹으로 펼치는 것처럼 보였네.”

“정확하십니다.”

하현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역시나 권법에 있어서는 무림에서도 손꼽을 강자인 그였기에 정확히 보았다.

“이제부터 제가 보여드릴 것은 제 깨달음이 아닌, 언영소저의 깨달음입니다.”

“영이의……?”

언형철은 하현이 무엇을 보여준다는 것인지 잠시 의아했으나, 요 며칠간 언영과 하현이 계속 연무장에 같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고는 잠자코 하현이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후우…….”

심호흡을 한 번 내뱉은 하현은 그의 오른 주먹을 통나무 앞으로 가까이 가져갔다.

주먹과 통나무 사이의 거리는 겨우 손바닥 하나 정도.

그 짧은 거리에서 하현은 그대로 온몸을 비틀며 주먹을 뻗어냈다.

빠악! 쩌억-!

주먹에 맞은 통나무가 하현의 주먹을 견디지 못하고, 반으로 쪼개어져 버렸다.

그 광경을 눈앞에서 본 언형철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발경을 이토록 자유롭게 쓰다니?!”

하현이 슬며시 미소지으며 말했다.

“대련할 때와 지금의 제 권의 차이를 느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언형철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 모습을 보며 하현이 말을 이었다.

“세기와 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이것이 언영 소저의 깨달음입니다.”

남궁세가 천재 외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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