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언형철은 깜짝 놀라 하현에게 다가가 그의 팔을 만져보았다.
힘을 주지 않은 하현의 팔은 보통 사람의 그것처럼 부드러웠다.
그럼에도 이런 권력을 보일 수 있다는 것은 하현이 권법에 대한 이해도가 굉장히 깊다는 방증이었다.
‘고작 이틀 만에 모두 이해했다는 것인가?’
그는 지금 그들이 이야기하던 주제도 잊고 하현을 감탄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자신도 언가의 가주, 언영이 아버지이기 이전에 한 명의 무인이다.
옛날 언젠가는 무공에 미쳐본 적도 있었고, 무림에서 인정받은 적도 있던 무인.
그런 무인이기에 순수한 재능 앞에서 그는 흥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 며칠간 영이에게 권법을 전수받은 것인가?”
“굳이 말하자면 그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네가 보여주는 것이 모두 영이의 깨달음이라고 한 것이군.”
“그렇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직 성취가 낮아 언영 소저의 움직임과 깨달음을 따라 하는 수준에 그치지 않습니다.”
언형철은 하현을 경이롭다는 눈으로 보았다.
깨달음이 어디 따라 한다고 따라 해지는 것이던가?
하현의 자질이 어디까지인지 그는 가늠이 가지 않았다.
“그렇…군. 자네가 보기에 우리 언영이에게 자질이 보인다는 말이지?”
“네. 이렇게 말씀드리면 건방지게 들릴 수도 있으나, 언영 소저의 재능은 제가 보증할 수 있습니다.”
“하하. 자네가 이렇게 말할 정도라니…….”
그는 굉장히 기분 좋아 보였다.
세상 어느 아버지가 자기 자식이 재능이 있다는 말에 웃지 않을 수 있을까?
“앞으로는 가주님께서 언영 소저를 직접 가르쳐 보시면 어떨까 싶습니다.”
“내가……?”
“제 입으로 말하기는 민망하지만, 제 재능을 만개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제 조부님께서 저를 성심을 다해 가르치셨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가주님 정도의 고수께서 재능있는 후기지수를 가르치신다면…… 그 결과는 불 보듯 뻔한 것 아니겠습니까?”
“흠…….”
언형철이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점점 하현에게 말려 들어가는 것을 느꼈지만,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자네 말은 잘 알겠네. 내 진지하게 생각해보도록 하지.”
하현은 그 말을 듣고서 빙긋 웃었다.
마치 자신이 인정받은 것처럼 기분 좋은 얼굴이었다.
“그냥… 딸아이의 아빠로서 하나만 물어봐도 되겠는가?”
“네. 말씀하세요.”
“자네한테 언영이는 어떤 의미인가?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해서 내 딸을 도와주려 하는 것이지?”
이 의문은 언형철이 아버지로서 가진 순수한 질문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하현이 언영을 이렇게까지 도와주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딸에게 잘해주는 것은 당연히 좋은 일이지만, 너무 잘해주니 의심이 가기도 했다.
연정이 있어서라면 그나마 이해도 가지만, 그렇다면 또 순순히 파혼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친우입니다.”
“친우?”
“네. 그것도 아주 소중한 친우죠.”
담담하게 말하는 하현의 눈은 올곧았다.
그는 살짝 미소를 띠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언영 소저가 가출했을 때, 돕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 약속을 성실히 지킬 뿐입니다.”
“하하. 자네가 유춘을 때려눕혔을 때 말인가?”
“아…. 그때 맞습니다.”
하현이 멋쩍게 뒷머리를 쓸며 웃자, 언형철의 얼굴에도 비로소 웃음이 번지기 시작했다.
“하하하. 그래. 자네의 이야기는 잘 들었네. 이 늦은 시간에 이렇게 긴 시간 내주어 정말 고맙네.”
“아닙니다. 저에게도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그럼 잘 자게.”
언가주는 인사하고서 미련 없이 뒤돌아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하현은 언가주가 나가고서도 전각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마당에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사실 언형철은 지금껏 언영을 억압해오기는 했지만, 그것은 사랑하는 마음의 잘못된 표현법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하현은 아주 조금은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할아버지…….”
그런데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올리려 하자, 자연스럽게 할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느새 남궁무룡은 하현에게 부모와도 같은 의미였다.
“형들이랑 누나는 뭐 하고 있으려나.”
그리고 사촌들은 형제나 다름없었다.
“팽가에만 들렸다가 얼른 집으로 돌아가야겠어.”
남궁세가를 떠올리자 비어있던 가슴 한쪽이 채워지는 듯한 기분이다.
하현은 전각으로 들어갔다.
오늘은 수련 대신에 잠을 택하기로 했다.
내일이 빨리 와야 남궁세가로 빨리 돌아갈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혹시 모르지 않는가? 보고 싶은 가족들을 꿈에서라도 볼 수도 있는 일이니.
아무리 어른스럽다고는 해도 하현은 이제 겨우 열넷이다.
아주 가끔은 그도 어리광을 부리고 싶을 때가 있다.
***
언형철이 하현과 언영이 파혼을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던 가장 큰 이유는, 두 가문 간의 약혼을 온 무림에 공표하지 않은 것이었다.
혹여나 그랬더라면 체면 때문에 쉽지 않은 결정이 될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자. 어서 들게.”
“감사합니다. 가주님.”
며칠이 흐른 지금, 하현이 언영과 파혼하고 싶다는 서신을 남궁세가에 보내고 나서도, 언형철은 하현에게 극진한 대접을 계속했다.
하현의 출신이 남궁세가라서 그런것도 있지만, 언형철은 언영의 절친한 친구에게 이런 대접을 하는 것을 전혀 아까워하지 않았다.
“이따가 오후에는 자네도 함께 내 다도실로 찾아오면 좋을 것 같네만.”
“다도실 말입니까?”
“오늘은 뭐랄까…… 이론 수업이라고 해야 할까? 하하. 영이가 홀로 수련하며 잘못 깨우친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볼 생각이네.”
하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언가주가 말한 것은 지금 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가 다시 배웠던 것을 복기하며 부족한 부분을 채워넣을 수도 있지만, 언가주 정도의 고수가 이렇게 직접 가르쳐 주는 것이 훨씬 효율이 좋은 건 당연한 사실이다.
“제가 그 자리에 있어도 되는 것입니까?”
“그럼. 부담 갖지 말고 오게나.”
며칠 새에 가장 크게 바뀐 것은, 언형철이 언영에게 직접 무공을 사사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언형철은 하현과 대화를 나눈 바로 그다음 날부터 언영을 예의 그 다도실로 부르기 시작했고, 그곳은 그들만의 연공실이 되었다.
그리고 간간이 하현도 그 수련에 동참하기도 하면서 며칠의 시간이 더 흘렀다.
오늘도 언영과 함께 언형철의 가르침을 듣고 있을 때.
다도실의 문을 누군가 두드렸다.
평소에 언형철이 딸과 함께 수련을 하고 있을 때면 어지간히 급한 일이 아니면 수련을 방해하지 않던 언가의 무사들과 하인이었기에 언형철은 한달음에 문으로 달려갔다.
“무슨 일인가?”
“남궁세가에서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오, 그래?”
기다리고 기다리던 남궁세가에서의 서신이었다.
그는 하인들에게 미리 남궁세가에서 서신이 오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말고 가장 빠를 때 보고하라고 일러두었기에 그들이 문들 두드린 것이다.
“고맙네.”
“아닙니다. 가주님.”
서신을 건네준 하인은 언형철에게 인사를 올리고는 문을 닫았다.
그는 하현을 향해 걸어오며 말했다.
“자네에게 온 서신이니, 자네가 뜯지 않겠나?”
“그러죠.”
하현은 언형철에게 다시 서신을 건네받고는 남궁세가의 상징으로 봉인된 서신을 뜯었다.
서둘러 서신을 열어 본 하현은 그만 피식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왜, 뭐라고 쓰여 있는데?”
언영이 관심을 보이며 다가와 하현의 서신을 읽었다.
[네 뜻대로 하거라. 그리고 어디 아픈 곳이나 다친 곳이 있으면 당장 돌아오거라.]
너무나도 간결한 한 줄의 서신.
하지만,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정보는 모두 담겨 있었다.
“표정을 보니, 반대는 안 하신 것 같구나.”
“네. 하현이가 말한 대로 하현이의 뜻을 존중해주네요.”
하현은 그 둘을 향해 빙긋 웃었다.
이 서신은 할아버지께서 직접 쓰신 서신이다.
꾹꾹 눌러 쓴 이 서신에서 할아버지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서신을 조심히 접어 품 안에 넣은 하현은 언가주에게 말했다.
“가주님. 제가 가정사에 멋대로 끼어들었었기에 죄송합니다. 이제야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갔군요.”
“아닐세. 자네가 아니었다면 나는 평생 딸아이와 이렇게 이야기해 보지도 못하고 살았을 걸세.”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언영이 흥! 하고 콧방귀를 귀며 끼어들었다.
“이미 다른 세가로 시집을 가서 못 봤을 수도 있잖아요.”
“그럴…수도 있겠구나.”
혼인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언가주가 딸에게 쩔쩔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언영과 함께 무공을 수련하고, 서로 대화를 많이 하게 되며 언가주는 지금껏 그녀를 위한다고 생각하며 해온 것들이 사실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이라도 너를 잃지 않아서 다행이구나.”
“아버지…….”
언형철은 자신이 말해놓고서도 민망한지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흠흠. 오늘은 이만하자꾸나.”
그는 하현과 언영에게 대강 인사하고는 다도실에서 나가버렸다.
“하현아. 나… 아버지한테 저런 얘기 처음 들어봐.”
“너도 노력하고 있지만, 가주님께서도 노력하고 있으셔. 시간이 필요하실 거야.”
“응……. 그러면 나도 천천히 나아갈게. 아버지 속도를 맞춰드려야지.”
“그래. 잘 생각했어.”
그녀가 무언가가 생각났는지 눈을 깜빡이더니 하현에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가 집무를 보실 때도 많이 달라졌다고 하더라고.”
“그래?”
“우리 아버지지만, 가주로서도 조금은 독선적인 모습을 많이 보이셨거든. 그런데 요즘은 많이 달라져서 우리 가신들이나 다른 무인들의 의견을 조금 더 받아들이려고 노력하신다나 봐.”
“그랬구나. 잘 됐다.”
하현은 호탕하게 웃는 언형철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진주언가도 만만치 않겠어.’
며칠간 하현이 겪어온 진주언가는 굉장히 힘 있고 가능성이 있는 가문이었다.
일단 구성원의 숫자가 많고, 내려오는 가문 무공도 뛰어나다.
거기에 언가주까지 열린 마음으로 다 함께 가문의 발전을 도모한다면 발전하지 않을 이유는 전혀 없었다.
“모두 네 덕이야. 넌 정말……. 나를, 진주언가를 구해주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준 아이 같아.”
언영이 하현을 향해 말했다.
그녀는 하현의 열성적인 추종자라도 된 듯한 표정과 말투였다.
하현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 지으며 말했다.
“아니. 이건 다 네가 한 거야.”
“하하. 아니야. 나는 한 게 아무것도 없어.”
조금은 익살스러운 미소가 하현의 입가에 걸렸다.
“가출해서 나에게 도와달라고 얘기한 것도 너고, 어느 날 갑자기 혼담을 보내온 것도 너야. 그 덕에 만들어진 이 년의 시간 동안 피나게 수련한 것도 너고, 마지막에 약혼을 파혼하자고 한 것도 너인데……. 이래도, 한 게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
“아… 그건…….”
언영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렇게 들으니 그녀가 지금까지 하현에게 어떤 민폐를 끼쳤는지 일목요연하게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하하. 이제부터는 네가 만든 기회를 잘 살릴 때야. 네가 성장하는 만큼 진주언가가, 정파 무림이 함께 성장한다고 생각해.”
언영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얼굴에서는 비장함 마저 엿보였다.
“마지막으로 나는 네가 가주가 못 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해.”
“어……?”
언영이 놀란 눈으로 하현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가주가 된다는 것은 생각해본 적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데릴사위를 들여야 한다고 얘기했던 것이고.
“나한테 누나가 하나 있거든. 그런데 누나는 항상 언젠가 남궁세가의 가주가 될 거래.”
“여인이 가주가 될 수도 있어?”
“우리 가문이 이상한 걸지도 모르는데……. 할아버지가 그러시더라고. 지금 무림맹주도 여인인데, 자격만 맞으면 못할 게 뭐가 있겠냐고.”
언영의 얼굴에 또 한 번 감탄이 일었다.
“역시, 저번에도 말했지만 진짜 부럽다. 너희 가문.”
“부러워만 하지 말고, 네가 그런 가문을 만들어 보는 건 어때?”
“내가? 할 수 있을까?”
하현이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충분히 할 수 있어. 네가 자격만 갖춘다면.”
“자격…….”
언영은 그 단어를 몇 번이고 곱씹었다.
어째서인지 자격이라는 단어는 곱씹을수록 점점 더 무겁게 느껴졌다.
남궁세가 천재 외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