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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세가 천재 외손자-181화 (181/304)

181화

이윽고 하현이 진주언가를 떠나는 날이 왔다.

그는 얼마 되지도 않는 단출한 짐을 챙겨 마당으로 나왔다.

장원을 둘러보니 새삼 좋은 숙소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특히 좋았던 것은 지금 그가 서 있는 마당.

“하하. 많이도 해 먹었네.”

마당 한쪽 구석에는 쪼개지거나, 부서지거나, 하다못해 주먹 자국이라도 진하게 박혀 있는 통나무가 열댓 개는 쌓여 있었다.

중요한 것은 저 통나무는 하현이 지금까지 사용한 것을 모아둔 것이 아니라, 어젯밤에만 사용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언가주는 하현이 진심으로 마음에 들었는지, 하인들을 시켜 매일 전날 썼던 통나무를 수거하고, 새 통나무를 가져다 두도록 하였다.

그런 배려 덕분에 하현은 원 없이 주먹을 날리며 권법에 대해서도 스스로 정립할 수 있었다.

“하현아! 아직 있어?”

그때 대문 밖에서 언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현은 속으로 의아해하며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그 앞에는 경공을 극한으로 펼쳐 여기까지 한달음에 달려왔는지 조금은 상기된 얼굴의 언영이 서 있었다.

“언영.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지금 오전 수련하고 있을 시간 아니야?”

“맞아. 그런데 아버님께 말씀드리고 나왔어. 아니, 아버지께서 먼저 말씀하셨다고 해야 하나?”

“그게 무슨 말이야?”

언영과 하현은 어젯밤에 이미 작별 인사를 마친 터였다.

오늘은 그녀의 수련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용히 떠나기로 했었다.

“아버지께서 갑자기 너한테 줘야 할 게 생각났다고 하시고는 같이 수련하시다가 먼저 사라지셨어.”

“나한테 또 뭘 주신다고? 그게 뭔데?”

“그건 나도 모르겠어. 말도 안 해주시고 네가 떠나기 전에 줘야 한다고 급하게 나가셨거든.”

하현은 무슨 선물인지는 모르겠지만, 언형철의 진심이 느껴지는 것 같아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 너는……. 그냥 한 번 더 인사하러 온 거야?”

“응. 오늘 만나지 않기로 한 이유가 내 수련 때문이잖아. 그런데 수련을 안 하게 되었으니까…….”

그녀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끝을 흐렸다.

“잘했어. 나도 또 보니까 좋다.”

“나도……. 우리 앞으로 자주 보기 힘들겠지?”

“응. 서로 할 일이 있으니까.”

하현의 말에 언영의 눈꼬리가 처지고 입이 삐죽 나왔다.

“말만이라도 자주 보자고 하면 안 되는 거야?”

“하하. 너한텐 빈말하면 안 될 것 같아서. 딱 지킬 수 있는 말만 하려고.”

“뭐? 너 진짜!”

하현은 눈을 흘기는 언영을 보며 크게 웃었다.

그 모습을 보던 언영도 결국은 그를 따라 웃어 버렸다.

“내년 용봉지회가 있잖아. 그때 다시 만나자. 그렇지 않아도 참가하려 했다며.”

“응. 너도 나올 거지?”

하현이 대답 대신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고 환한 미소를 지은 언영이 하현을 불렀다.

“하현아.”

“응?”

“고마워. 내 인생을 바꿔줘서.”

“그건…….”

“그건 다 내가 한 거라고 얘기했었지? 아니야.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그 모든 걸 할 수 있도록 용기를 주고 등을 밀어준 게 너였어. 정말 고마워.”

그녀는 이제 정말 하현과 헤어진다고 생각하니 감정이 복받쳤는지,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그럼 갈게.”

“응. 조심히 가. 나는……. 여기 조금만 더 있을게.”

“그래. 다음에 봐.”

하현이 그녀를 두고 대문으로 다가갔다.

언영이 자신 앞에서 울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애쓰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빨리 자리를 비켜주려 한 것이다.

그의 손이 대문에 닿기 직전.

와락-

언영이 하현의 뒤에서 그를 안아버렸다.

하현이 놀라서 뒤를 돌려 하는데, 언영이 다급하게 말했다.

“뒤, 뒤돌지 마! 잠시만……. 이렇게 있어 줘.”

그 말에 하현은 잠자코 언영의 마음이 추슬러질 때까지 기다렸다.

아주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이윽고 언영은 하현의 등에서 떨어졌다.

“잘 가.”

“응. 너도 잘 있어.”

하현은 그녀와 몇 마디를 더 나눈 후에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는 그녀는 한참 눈물을 훔쳤다.

오늘 이후로는 절대, 절대로 울지 않으리라 다짐하는 그녀였다.

하현이 문밖을 나서 대문으로 가는 도중.

그는 뜻밖의 한 사람이 길목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하현 공자. 아가씨는 만나 뵈셨습니까?”

“네. 지금 만나고 오는 길입니다.”

“휴. 결국, 가셨군요.”

그를 기다리던 언영의 호위 앵앵이었다.

하현은 앵앵을 조금은 경계했다.

지금까지 그녀는 항상 하현에게 적대적인 모습만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현의 예상과는 달리, 앵앵은 정말이지 공손하게 하현에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공자. 덕분에 우리 세가에 큰 변화가 온 것 같습니다. 지금껏 오해해온 것도 사과드립니다.”

“아닙니다. 영이를 너무 생각하셔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해합니다.”

“감사합니다.”

“이 말씀을 하시려고 기다리고 계셨던 겁니까?”

앵앵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것도 있고, 가주님께서 대문으로 가시기 전에 잠시 가주님의 처소 앞에 들러 달라는 말을 전해 달라고 했습니다.”

“가주님의 처소요?”

앵앵이 빙긋 웃었다.

하현은 그녀가 저렇게 웃는 얼굴은 처음 본다고 생각했다.

“저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아마 좋은 일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아가씨는 아직 공자께서 머무셨던 장원에 계시는 거죠?”

“네. 제가 나올 때까지는 거기에 있었어요.”

“알겠습니다. 나중에 다시 뵙기를.”

그녀는 하현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신법을 전개해 하현이 왔던 길로 사라졌다.

하현은 대문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옮겨, 언형철의 처소로 향했다.

언형철의 처소 바로 앞에 있는 공터에 다다르자, 하현은 언가주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의 옆에는 보통의 말보다 반 배는 커 보이는 거대한 말이 한 마리 서 있었다.

“오. 자네. 왔는가?”

“네. 가주님. 원래는 언영 소저와 수련을 하실 시간이시기에 조용히 나가려고 했었는데…….”

“우리가 어제 그렇게 이야기하긴 했지만, 가문의 은인을 어떻게 그냥 보낼 수 있겠는가? 자네에게 무엇을 줄지 고민하다가……. 이 말을 주자고 생각했네.”

“이 말 말입니까? 척 봐도 보통 말은 아닌 것 같은데요.”

언형철이 자랑스럽게 말의 갈기를 쓸며 말했다.

“그럼. 보통 말이 아니지. 이 말은 먼 옛날 명마로 이름을 날렸던 오추마(烏騅馬)의 후손으로 불리는 명마네.”

“정말 멋진 말입니다.”

검은색 털에는 윤기가 흐르고, 뻣뻣하지 않고 부드럽게 온몸에 빼곡히 나 있기에 절로 비단을 떠오르게 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근육질로 이루어진 몸이 달리고 싶다는 말을 전해오는 듯할 정도였다.

“하하. 황제에게도 진상되는 귀한 품종이니 아마 실망하진 않을 걸세.”

“이 말을 저에게 주신다는 말씀입니까?”

“그래. 이 말도 중원 곳곳을 누비고 싶을 거야. 자네도 잘 알겠지만, 가주라는 자리는 세가를 비우기가 어려운 자리이기도 하니까.”

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큰 외삼촌인 남궁기철에게 대부분의 일을 맡기고 있다.

“나 대신 이 말이 중원 곳곳을 돌아다닐 수 있도록 해주게나.”

그는 사람 좋게 웃었다.

말이야 이렇게 했지만, 결국은 하현에게 이 말을 선물로 주고 싶다는 소리였다.

하현은 언형철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제가 잘 돌보겠습니다.”

“하하. 안 받는다고 하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받아주는군.”

“좋은 말과 함께라면 그만큼 무림이 좁아지니까요.”

“그렇지. 이 말의 선조 격인 오추마는 하루에 천 리를 달렸다고 하니까.”

하현이 말에게 다가가 살짝 손의 냄새를 맡도록 했다.

말은 거부감 없이 하현의 냄새를 맡더니, 머리를 툭 하고 하현의 몸에 가져다 대었다.

“하하. 선풍은 자네가 마음에 들었나보구만.”

“선풍. 이 말의 이름입니까?”

“그렇네.”

“돌개바람. 좋은 이름이군요.”

하현이 말의 갈기를 슥슥 쓰다듬었다.

선풍도 기분이 좋은지 콧김을 식식 내뿜었다.

“자네가 타고 온 말은 사람을 시켜 남궁세가에까지 잘 데려다 놓겠네.”

“감사합니다. 사실 사천에서 빌려온 말인데, 저도 언젠가는 다시 데려다 놓아야 해서요.”

“그러면 우리가 남궁세가가 아니라 사천으로 보내주도록 하지.”

“아……! 그래 주실 수 있으십니까?”

언형철이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 그게 뭐 그리 대수라고. 어디인지 위치만 말해주게나.”

하현은 사천의 끝자락에 있는 역참의 위치를 그에게 설명해주었고, 그는 곧 그쪽으로 보내주겠노라 대답했다.

“그럼, 이제 먼 길을 가야 할 텐데 더 잡지 않겠네. 잘 가시게나.”

“감사합니다.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선풍도 정말 감사합니다. 언젠가……. 선풍을 타고 진주언가에 다시 들르겠습니다.”

“얼마든지. 자네는 언제 어떤 상황에 오더라도 우리 진주언가의 귀빈이네.”

“그리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하현은 언형철과 인사를 마친 후에 선풍의 위에 올라탔다.

다른 말들보다 훨씬 높은 높이에 조금은 당황했지만, 하현은 곧바로 적응해냈다.

오히려 다른 말보다 시야점이 높아서 말을 타기에 더 쉽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럼, 이만. 가자!”

하현은 마지막으로 인사하고는 기분 좋게 진주언가를 나섰다.

그의 다음 목적지인 하북팽가는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다.

아마도 선풍의 속도라면 저녁때쯤 도착할 수도 있다.

“이랴!”

하현은 위쪽으로 말을 몰았다.

***

하현이 진주언가를 출발할 때쯤.

팽헌홍은 하북팽가의 연무장 위에서 다른 누군가와 대치하고 있었다.

“헌홍아. 지금이라도 실언했다고 인정하면 이 대련을 그만둬주마.”

“아버지께서 우리 둘이 대련으로 해결을 보라 하신 일입니다. 그런데 왜 형님께서 그만두어라 말라 하시는 겁니까?”

“하! 남궁세가에서 오래 있더니, 많이 건방져졌구나.”

팽헌홍과 마주 보고 있는 자는 팽헌홍의 세 형 중에 가장 나이가 어린 셋째 형 팽무홍이었다.

헌홍의 바로 위의 형이라고는 해도, 헌홍과는 무려 열일곱 살 터울이었다.

삼촌과 조카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의 나이 차.

하지만 팽헌홍은 그런 셋째 형과 당당히 마주하고 있었다.

“건방져진 것이 아닙니다. 형님께서 제가 변한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으시는 것이죠.”

“고작 사 년이다. 그 시간 동안에 갑자기 그렇게 기고만장해져서는…….”

이 사건의 발단은 어젯밤 식사자리에서의 대화부터였다.

어제 거나하게 술을 한 잔 걸친 팽무홍은 팽헌홍과 대화하다가 이제 남궁세가에서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세가로 돌아오라는 말을 했다.

그 말에 팽헌홍은 남궁세가에서도 굉장히 좋은 가르침을 얻고 있기에 원하고자 하는 바를 모두 얻기 전까지는 세가로 돌아올 생각이 없다고 했고, 그 말에 팽헌홍이 하북팽가를 무시한다고 생각하여 팽무홍이 화를 내고 말았다.

“기고만장이 아닙니다. 저는 그만큼 발전했으니까요.”

“그러니까. 여기서 그것을 증명해 보이라는 말 아니냐.”

팽헌홍은 연무장 바로 옆에 놓여 있는 커다란 의자에 앉아 그들을 지켜보는 그의 아버지, 도제 팽길산을 곁눈질로 흘긋 쳐다보았다.

어젯밤, 팽헌홍에게 화를 내는 팽무홍에게 팽길산은 지금 이러지 말고, 내일 연무장에서 결판을 내라 일렀다.

하북팽가는 정파에서는 특이하게 힘의 논리가 통하는 세가.

각자 누구의 말이 맞는지를 힘으로 증명하라는 것이었다.

‘정말이지……. 남궁세가와는 달라도 너무 다르군.’

팽헌홍은 지난 사 년간 남궁세가의 분위기에 너무 익숙해진 자신이 웃기고 신기하여 속으로만 웃었다.

남궁세가 역시 하북팽가만큼이나 구성원들끼리 대련을 자주 한다.

하지만 하북팽가가 누구 말이 맞는지, 누가 더 강한지 견주어보자는 느낌이라면, 남궁세가는 서로의 장단점을 서로 배울 기회로 삼으려 한다는 것이 다른 점이었다.

‘언젠간 우리 세가도 그처럼 만들 것이다.’

채앵-

그가 생각하며 칼집에서 그의 애도를 꺼내 들었다.

이전처럼 붕대로 둘둘 말려있지 않았다.

그가 도를 꺼낸 것은 예쁜 장식이 그려진 꼭 맞는 도집이었다.

그가 남궁세가를 떠나기 전, 소화가 팽헌홍을 위해 만들어준 것이었다.

“좋습니다. 형님. 예전의 제가 아님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스윽-

팽무홍도 도를 뽑아 들었다.

“남궁세가에 갔기에 검을 쓸 줄 알았더니, 그래도 우리 팽가 사람이라도 도를 쓰는가 보구나. 내가 너에게 도란 무엇인지 가르쳐 주마!”

타앗!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들은 서로를 향해 쇄도했다.

까앙!!

둘의 도가 부딪히자, 푸른 불꽃이 튀어 올랐다.

남궁세가 천재 외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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