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하현과 혈마는 서로 대치하고 있다.
그 와중에 하현은 이 객잔같이 생긴 건물 주위로 꽤 많은 무인들이 다가오는 것을 감지하고 있었다.
‘열, 열다섯…. 스물인가?’
그들이 누구일지는 뻔하다.
혈마를 따르는 마교의 무리일 것이다.
스윽
하현은 살짝 눈을 돌렸다.
이 전각의 생김새를 머리에 완전히 그려 놓기 위함이다.
‘도대체 여기는 뭐 하는 곳이지?’
막상 들어왔을 때는 별다른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들어오고 나니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의문이었다.
단순한 전초기지였다면 이렇게 공을 들여 이 층으로 만들 필요까진 없었을 것이다.
분명히 무언가 목적이 있을 텐데, 하현으로서는 도저히 알 방도가 없었다.
“다시 묻겠다. 네놈이 혈수마공을 어찌 알고 있는 것이냐!”
하현은 대답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혈마는 더욱 분노한 얼굴로 재차 말했다.
“최근 들어 청홍쌍괴가 갑자기 얼굴을 보이지 않더니, 홍괴와 관련이 있는 것이냐?”
“뭐라고? 당신 청홍쌍괴가….”
하현이 저도 모르게 말하려다가 입을 닫았다.
그는 속으로 조금 놀랐지만, 전혀 놀란 티를 내지 않으려 했다.
‘청홍쌍괴가 죽은 것을 모르고 있어?’
분명히 저 태도는 그들의 죽음을 모르는 자의 태도다.
혹여나 하현을 기만하려는 것일 수도 있지만, 혈마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
‘분명히 유지혁을 보았다고 형님께서 말씀하셨는데.’
남궁민은 분명히 그를 보았다.
그리고 남궁세가의 정예대원들과 개방 방도들, 그리고 조사차 나온 무림맹 무사들 역시 그의 흔적을 찾아낼 수는 없었다.
분명히 마교로 돌아갔으니, 이번 일을 마교에 알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무슨 꿍꿍이지?’
하현은 그의 행동을 도무지 예측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 생각은 그만두고, 남궁세가로 돌아가면 마교에서 청홍쌍괴의 죽음을 모르는 것 같다고 전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청홍쌍괴에 대해 아는 게 있는 것이냐?!”
“있지.”
“뭐라…?! 그들은 수십의 교도를 이끌고 나가 그대로 사라졌다. 그놈들의 행방을 안다는 것이지?”
하현이 피식 웃었다.
혈마가 완전히 헛다리를 짚는 것이 웃기기도 했고, 그에게 일부러 여유로운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당신은 짐작도 못 하나 보군. 교에서 중요한 위치가 아닌가 봐?”
“뭐라? 내가 삼마 중의 혈마다! 나를 무엇으로 보고…!”
“그런데 이런 것도 모르다니…. 당신과는 할 말이 없을 것 같군.”
“이노옴!”
격노한 혈마가 기운을 끌어올렸다.
“조금 전에는 내가 손속에 사정을 봐준 것도 모르고…!”
“그랬나? 나는 못 느끼겠던걸.”
으득!
몰아치는 분노에 어찌나 입을 꽉 물었는지, 혈마의 턱에서 뼛소리가 날 정도였다.
그는 손을 검붉은 색으로 점점 물들이며 입을 열었다.
“한 가지만 묻겠다. 이곳에 우연히 온 것이냐?”
“하하…. 우연일까?”
“우연이 아니라면 대업을 방해하러 온 것이구나…!”
여전히 하현은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말로 한 가지 실마리를 가지게 되었다.
‘대업.’
마교에서 무언가 꾸미고 있다는 것은 확실해진 것이다.
하현은 그를 떠보기로 했다.
“홍괴가 내가 무공을 가르쳐주며 말했지. 대업의 완성이 코앞이라고.”
“뭐라…! 그 배신자가!”
쿵-!
그의 몸으로부터 커다란 기파가 터져 나왔다.
그는 하현이 던진 말을 그대로 믿어버리는 듯했다.
“배신자들의 위치를 말해라. 내 당장 머리를 터트리러 갈 것이다!”
“그 전에 나를 지나쳐야 하지 않을까?”
“닥쳐라 애송이!”
쾅-!
혈마가 진각을 밟으며 엄청난 속도로 하현에게 다가왔다.
하현은 여유롭게 뒤로 훌쩍 뛰었다.
그의 오른손에는 적룡검이, 왼손에는 당가주의 비검이 역수로 들려있었다.
혈마는 조법을 사용한다.
양손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 무공인 만큼, 양손에 병기를 하나씩 들어야 상대하기 수월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하현이다.
따당!
혈마의 손을 막아낸 검에서 찌르르한 진동이 전해져 온다.
조금 전 보다 훨씬 강력한 힘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하현은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정말로 분노했어. 상당한 다혈질이었군.’
카가가강-
막아내는 그의 한 수, 한 수에서 깊은 분노가 전해져 온다.
분노는 더 큰 힘을 끌어낼 수는 있지만, 시야가 좁아지게 된다.
아무리 빠르고 강력한 공격이라고 할지라도, 직선적인 몇 가지의 방향으로만 온다면 얼마든지 막아낼 수 있다.
‘내 비검은 잘 회수했으려나?’
하현은 선화가주에게 회수해달라고 부탁한 세 자루의 비검을 떠올렸다.
세가로 돌아가면 대장장이 방산 아저씨에게 똑같은 크기로 몇 자루를 더 만들어 달라고 부탁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익!”
여유로워 보이는 하현의 모습에 혈마는 더더욱 열이 받았다.
그는 공격을 멈추더니, 수를 거두고 하현에게서 몇 발자국 떨어졌다.
“후우-”
그는 길게 심호흡하며 조금씩 냉정을 찾기 시작했다.
비로소 하현의 눈에도 긴장이 감돌기 시작한다.
이제부터 제대로 된 전투가 시작될 것이라 생각한 까닭이다.
“사실은 교주님께서 나를 이곳에 보내셨을 때,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지. 이런 변두리에 어떤 위험요소가 있겠냐고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너를 만났군.”
그는 하현을 보고는 히죽 웃고는 두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말을 이었다.
“내가 어째서 혈마라 불리는지 가르쳐주랴?”
혈마는 혼자 말하고, 혼자 답하더니, 다시 앞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결코, 빠른 속도는 아니었다.
슈우욱!
하지만, 그가 한 걸을 내디딜 때마다 주변의 모든 기운을 빨아들이듯 그가 가진 기운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분명히 실내임에도 갑자기 바람이 휘몰아칠 정도였다.
“…!”
혈마의 모습을 보던 하현이 처음 보는 광경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분명히 양손만 검붉은 색으로 변했던 혈마였건만, 그 검붉은 색이 번지듯 그의 몸 전체를 뒤덮기 시작한 것이다.
스으윽-
그는 순식간에 목을 지나 얼굴까지 모두 붉어졌다.
혈마가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이렇게까지 해본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구나. 크흐흐.”
혈마는 피부가 저릿저릿할 정도로 강한 기운을 내뿜었다.
정말이지 오랜만에 자신의 모든 능력을 개방한 그는 차오르는 충만감에 미소를 흘렸다.
목과 어깨를 풀며 슬며시 하현을 바라보았다.
그는 항상 이때를 가장 좋아했다.
너무나도 압도적인 차이에 절망하고 낙담하는 상대방의 얼굴을 볼 때를.
“…?”
그런데 이번에는 그 즐거움을 누리지 못했다.
하현의 얼굴표정이 묘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기운을 온몸으로 받아내면서도 절망한다던가 공포에 질린다든가 하는 표정을 짓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굳은 결의를 다진다던가, 기백을 내뿜는다든가 하는 것도 아니다.
‘기대…?’
하현의 표정은 딱 그랬다.
기대감.
부모님에게 받은 선물 상자를 풀어보기 직전의 바로 그 얼굴이었다.
그는 분노라기보다는 조금은 허탈한 감정이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누군가가 떠올랐다.
‘소교주.’
그도 항상 강자와 싸울 때는 저런 얼굴을 했었으니까.
두근두근
하현은 고동치는 심장박동을 느꼈다.
솔직히 그는 혈마에게서 압도당한다는 기분이 들지 않은 것은 아니다.
지금 당장 맞붙어서 그와 이길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하현은 웃었다.
그리고 그 역시 그가 끌어올릴 수 있는 최상의 진기를 끌어 올렸다.
구우우-
하현이 끌어올린 기운이 혈마의 그것과 부딪치자, 구름에서나 날 법한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혈사파 문도 중 기질이 약한 몇몇은 다리가 후덜덜 떨릴 정도의 충돌이었다.
혈마의 눈에 의지가 깃든다.
잠시 하현을 보며 소교주가 떠올랐기에 마음이 약해졌던 것도 사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간단한 깨달음을 얻었다.
‘이놈이 여기서 살아간다면, 우리 교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될 것이다.’
그래서 하현을 죽이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흘끗 문을 바라보았다.
여기서 하현과 싸웠다가 이 전각이 무너지기라도 하면 큰 낭패를 본다.
그는 자연스럽게 밖으로 나가 싸울 방도가 있는지를 확인했다.
“이 전각에 소중한 게 있나 보군.”
“뭐라?”
“이 와중에 나에게서 눈을 떼고, 밖을 보다니. 이 전각을 지키고 싶어 하는 걸 너무 티 내는 건 아닌지 몰라.”
하현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처음에 봤을 때는 전혀 그렇지 않았는데, 능구렁이같이 느물거리는 태도였다.
싸움이 시작되면 성격이 바뀌는 사람이 있다더니, 하현이 그런 사람인 것 같았다.
타앗-!
하현이 보법을 전개해 혈마에게 달려들었다.
언제 집어넣었는지 비검은 품에, 적룡검은 허리춤에 다시 찔러 넣은 채, 맨손으로 달려들었다.
화륵!
하현의 양손에는 혈수마공의 붉은 기운이 피어올랐다.
하현은 양 허리에 손을 가져다 댔다가, 그대로 앞으로 질렀다.
단순하지만 하현이 알고 있는 무공 중 가장 파괴력이 강한 무공.
항룡십팔장의 항룡유회였다.
콰앙-!
혈마가 팔을 들어 막아내기는 했지만, 거대한 굉음이 울렸다.
팔에서부터 넘어오는 충격이 생각보다도 더 컸다.
만약 온몸을 붉게 물들이지 않았더라면 이 한 수만으로도 약한 내상을 입었을 정도.
혈마가 뒤로 주르륵 밀린 것을 확인한 하현이 곧바로 다시 한번 팔을 휘둘렀다.
쾅!
“어엇!”
하현의 행동에 혈마가 놀란 소리를 내었다.
하현의 팔이 향한 곳은 그가 아닌 전각의 바닥.
쪼개어진 나뭇조각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바닥에는 아름드리나무만 한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이놈이 뭐 하는 짓…!”
쾅!
하현은 그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똑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구멍은 조금 전보다 더욱 커져 있었다.
“그, 그만!”
쾅! 쿠구구광-
세 번째 장을 날리자, 바닥의 일부가 무너져 내렸다.
그러자 견고하게 만들어 놓은 지하가 모습을 드러냈다.
“떨어져라!!”
휘익-! 파바바박!
흥분한 혈마가 하현에게 곧바로 달려들어 맹수의 발톱같이 꺾인 손으로 하현의 급소를 노렸다.
하현은 아직도 활활 타오르는 듯한 두 손으로 침착하게 혈마의 공격을 막아내었다.
하지만, 강력한 혈마의 내공에 뒤로 한참 밀려나야 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 아래에 있는 것이 무엇이지?”
“이놈…!”
“그게 아까 말한 대업인가와 관련 있는 것 아닌가?”
“……!”
혈마는 무공에 있어서는 초절정의 고수였지만, 심계가 깊은 자는 아니었다.
그는 표정으로 하현에게 모든 것을 이실직고하고 있었다.
하현은 그럼 그렇지라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이제 당신에게 더 들을 건 없겠어.”
“네놈이 명을 재촉하는구나.”
“살인멸구라도 할 셈인가?”
“네놈은 곱게 죽이진 않겠다!”
가뜩이나 붉어진 그의 손이 이제는 피가 뚝뚝 떨어져 내릴 것 같을 정도로 더욱더 붉어졌다.
사삭!
혈마의 신형이 좁혀온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그의 손이 흔들렸다.
그의 오른팔이 사라졌다가 갑자기 나타난 것과도 같은 쾌속한 수법이었다.
카앙!
그 수법을 막아낸 것은 하현의 마음의 검이었다.
마음의 검은 최강의 공격 수법이기도 하지만, 최강의 방어 수법이기도 했다.
하현이 인지하기만 하면 검이 알아서 따라 나가는 듯한 착각이 일 정도였으니.
스학-
마음의 검은 막는 데 그치지 않고, 바람이 흐르듯 자연스럽게 혈마를 공격해 들어갔다.
혈마는 검이 지척에 다다를 때까지, 하현의 검을 알아채지도 못했다.
그런데, 그 순간 도리어 몸을 웅크리며 몸을 회전하여 허리로 들어오는 검을 등으로 받아버렸다.
피하는 것을 포기한 것으로 보일 정도였다.
까앙!
분명히 등에 검이 박혔거늘, 쇠붙이와 부딪히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치 갑옷이라도 입은 듯 그의 몸은 단단했다.
타닷
뒤로 몇 발자국을 떨어진 하현이 적룡검을 살폈다.
다행히도 검날은 전혀 상하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혈마를 바라보았다. 그에게서 출혈은 보이지 않았다.
검으로 찢어진 옷 사이로 붉은 피부가 보인다.
혈마의 이상한 무공은 단순히 손만 강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 것으로 보였다.
‘붉어진 곳은 모두 강철처럼 단단해진다는 것인가?’
마음의 검 정도의 파괴력으로는 저 몸을 벨 수 없다,
저 단단한 몸을 어떻게 베어낼 것인가.
씨익-
미미하게, 아주 미미하게 하현의 입꼬리가 씰룩거린다.
난공불락의 상대를 어떻게 공략할지 생각하는 것에서 순수한 재미를 느낀 것이다.
그는 다음 수를 떠올렸다.
남궁세가 천재 외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