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하현은 조금 전 혈마의 등을 때렸던 감각을 떠올렸다.
‘단단해.’
검을 쥔 오른손이 아직도 울리고 있다.
적룡검이 상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
쿵- 쿵- 쿵-
그 검을 쥐고 있는 손의 맥박도 느껴졌다.
눈을 번쩍 뜨고 혈마를 바라본다.
무슨 마공인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저기 께름칙한 기운을 발산하고 있다.
“흐읍…!”
하현은 그간 쌓아온 정순한 기운을 수미천왕신공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기운을 적룡검에 불어넣기 시작했다.
그러자 검 손잡이부터 조금씩 하얀 빛무리가 일기 시작했다.
혈마가 그 빛무리에 두 눈을 크게 뜬 순간, 하현의 오른손이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쾅!
혈마의 바로 눈앞에서 기파가 터져나왔다.
겹겹이 쌓인 하현의 기운이 그에게 닿기 전, 혈마는 가까스로 검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우드득!
마룻바닥이 부서지며 치솟는 나뭇조각들과 함께 혈마의 몸이 뒤로 튕겨 나갔다.
‘이놈이 설마!’
혈마는 두 눈을 부릅떴다.
조금 전 검을 휘두른 하현의 의도가 파악되었기 때문이다.
하현은 그를 베어내려 하지 않았다.
넓은 면을 때리며 충격파를 보내어 그의 내부를 진탕 시키려 했다.
‘너무 얕았어.’
하현은 속으로 아쉬움을 삼켰다.
기습의 묘를 살리지 못하고, 제대로 맞히지 못한 까닭이었다.
넓은 면으로 내부를 진탕 시킨다는 방법을 부지불식간에 맞으면 효과가 크겠지만, 노리고 할 수는 없다.
동작이 워낙 크고, 한 점으로 받아치면 이쪽의 검격이 산산이 조각나 버린다.
‘하지만, 한 번은 더 쓸 수 있다.’
하현은 혈마가 크게 당황했다는 것을 눈치챘다.
자신이 곧바로 대응책을 마련하는 것에서 놀란 것처럼 보였다.
하기는, 지금 하현이 하는 방법이야말로 그의 유일한 약점일 테니 말이다.
팟!
땅에 발을 디딘 혈마다 다시금 자세를 잡으려는 찰나, 하현은 강하게 발을 구르더니 혈마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형환위라 해도 믿을 만큼의 신속한 신법이었다.
화아악!
그의 바로 오른쪽에서 터져 나오는 강력한 기운에 혈마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시야에 한가득 하현이 들어왔다.
고개를 돌리기 전 그의 사각에서 검을 휘둘러 왔다.
그 검에서 느껴져 오는 진기가 만만찮았다.
‘마음의 검에 수미천왕신공을 담는다.’
하현은 그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해냈다.
전혀 다른 경로로 익힌 두 가지의 무공이 섞여 더 강한 무공이 탄생했다.
파괴력이 약한 마음에 검에, 진기를 가득 실을 수 있는 수미천왕신공을 통해 월룡에게서 받은 기운을 담았다.
쩌어엉!
하현의 검이 혈마의 팔에 닿자 엄청난 굉음이 울려 퍼졌다.
무공이 약한 혈사파 문도 중 몇몇은 괴로워하며 귀를 막고 혼절했을 정도였다.
‘검면으로?’
혈마는 폭풍 한가운데에 내던져진 느낌을 받았다.
하현은 검으로 그를 베려 하지 않았다.
엄청난 기운이 담긴 검의 넓은 면으로 그를 때렸다.
마치 거대한 몽둥이로 얻어맞은 듯한 감각이었다.
콰악!
뒤로 한참을 물러날 뻔했던 혈마. 그는 발바닥 용천혈에 기운을 끌어당기며 발을 떼지 않았다.
그리고, 도리어 팔 하나를 움직여 하현의 검을 잡아버렸다.
검날까지 한 번에 잡아버렸건만, 출혈은커녕 생채기 하나 나지 않았다.
구우우우-
검을 잡은 혈마의 손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에게는 하현도 따라가기 힘든 깊은 내공이 있다.
그는 상대적으로 내공이 얕은 하현을 그대로 밀어붙이려 힘을 주었다.
지이잉-
검을 타고 전해져오는 힘을 상대하려는 하현의 팔이 떨려왔다.
수십 년이라는 무공을 익힌 시간의 차이가 이런 양상을 만들었다.
깨달음은 동류…. 아니, 하현이 더 깊은 깨달음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이렇게 힘으로 찍어내리는 상대에게는 한 수를 접어줄 수밖에 없다.
‘아냐. 언제까지 내공이 없는 것을 핑계 삼으려고.’
하현의 눈에 의지가 깃든다.
그는 아직도 녹여내지 못한 몸 안 월룡의 기운을 떠올렸다.
사실 그 기운만으로도 하현은 절세고수라 할 만했다.
아직 활용을 못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부족함이다.
“하압!”
하현이 기합을 내지르며 양손으로 잡고 있던 검에서 오른손을 떼어내었다.
가뜩이나 힘겨웠던 힘겨루기였건만, 하현이 손까지 떼어내자 그 떨림이 심상치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하현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다리, 허벅지, 허리 순으로 회전을 주며 강하게 오른 주먹을 앞으로 뻗어내었다.
보통이라면 하현과 혈마의 거리가 너무나도 가깝기에 제대로 된 힘을 낼 수 없었겠지만, 하현에게는 언영에게서 배운 발경이 있다.
빠아악!
하현의 주먹은 혈마의 가슴팍에 정확히 꽂혔다.
‘으윽.’
그는 오른손에서 엄청난 고통이 전해졌으나, 겨우 속으로 씹어 삼켰다.
마치 바위를 맨손으로 때린듯한 고통이었다.
파박!
하현이 잠깐 멈칫하는 사이, 혈마는 뒤로 수 장을 물러났다.
“쿨럭!”
가슴에 충격이 제대로 들어간 덕인지, 그는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하고 캑캑거렸다.
낭패한 모습이건만, 하현은 분명히 치명상을 주지 못했음을 알고 있다.
그는 아직도 얼얼한 손을 탈탈 털었다.
분명히 공격은 자신이 했건만, 어째서인지 반격을 당한 것 같은 기분이다.
타다다!
하현은 이 싸움을 오래 끌고 가고 싶은 생각은 없는지 앞으로 보법을 전개해 나아갔다.
무한보는 남궁세가의 가장 기초적인 보법이지만, 가장 궁극적인 보법이기도 하다.
무한이라는 이름처럼 사용하는 자의 재량에 그 효과가 크게 달라진다.
하현은 이번에는 빠르기에 치중하여 보법을 밟았다.
파박!
혈마 역시 마찬가지의 생각인지, 하현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는 한 손은 들어서 모가지를, 또 한 손은 아래로 내려 낭심을 노리는듯한 특이한 기수식을 취했다.
쒜에엑-!
병기가 아닌 그의 몸으로 펼쳐내는 무공은 강력하면서도 간결했다.
그의 손이 빠르게 움직이자 그 주위에 핏빛 안개라도 펼쳐진 거 같은 착시가 일어났다.
핏빛 안개는 혈마의 손 주위에서 아지랑이 피듯 움직이더니, 그의 손을 더더욱 붉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저게 진짜 수강(水罡)인가?’
그 와중에도 하현은 혈마의 수법에 호기심이 인다.
이 정도면 거의 병이나 다름없었다.
다행히 싸움의 집중력을 잃지는 않았다.
혈마의 손은 정말로 강력한 기운을 담고 있다.
저 손에 인간의 피육이 걸린다면, 뼈까지도 모두 끊어낼 것처럼 보이는 무시무시한 기운이다.
원래 같으면 피해내는 것이 상책이나, 하현의 눈에 욕심이 깃든다.
고오오오-
하현의 검에 기운이 가득 차오른다.
적룡검이 보검인 까닭은 다름이 아니다.
하현이 기운을 얼마나 밀어 넣든, 탐욕스럽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꾸역꾸역 잘도 받아먹는다.
보통의 철검이었다면 진즉에 스러지고도 남았을 기운을 불어넣어도, 적룡검은 모두 받아주었다.
키이이이-
어찌나 많은 기운을 불어넣었는지, 검은 떨리다 못해 음 높은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검에 한 올 한 올 실이 쌓이기 시작한다.
이미 이것만으로도 이룬 자를 손꼽을 수 있다는 검사(劍絲)의 경지.
하현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으윽.’
한순간에 너무나도 많은 기운을 끌어모았기 때문일까?
그는 머리가 핑 도는 것이 느껴졌다.
엄청난 기운을 버티지 못하고, 내장이 진창이 되는 기분에 욕지기까지 치밀어 오른다.
사락- 사락-
적룡검에 기로 짜인 실이 계속해서 겹겹이 쌓인다.
실이 겹치고 겹쳐 겨우 한 뼘.
하지만 하현이 조금 전에 한 것이 가지는 의미는 엄청났다.
검강(劍罡).
비록 한 뼘뿐이지만, 하현은 검강을 구현해내는 데 성공했다.
이 모든 것이 혈마가 하현을 향해 손을 내지르는 그 찰나의 순간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하현은 그대로 검을 움직여 날아오는 혈마의 손에 그저 검을 가져다 대었다.
쩌어어엉-!!
엄청난 충격이 하현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너무나도 극심한 내공의 소모에 하현은 순간 손을 빼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하현은 그리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대로 버티고만 있지도 않았다.
그는 혈마에게로부터 전해져 들어오는 엄청난 기운을 동시에 몸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받아들인 기운은 수미천왕신공을 타고 하현의 몸을 이동하다가….
꽝!
또 하나 있는 월룡의 기운을 들이박았다.
꽝!
또 한 번 기운이 곤두박질친 순간.
주륵-
너무나도 과한 운용이었던 탓에 하현의 입에서는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는 혈마의 눈에 웃음이 깃든다.
자신과의 내공 싸움에서 하현이 엄청난 내상을 입어 각혈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끝이다 애송이!”
사실 그는 장기전으로 끌고 가려 했다.
하현처럼 어린 무인이 이토록 거대한 기운을 오랫동안 유지할 수 없으리라 보고, 방어에 최선을 다하며 하현의 기운이 다하기를 기다리려 했다.
하지만, 하현의 입가에 흐르는 피를 보자, 그는 의기양양했다.
생각보다도 그때가 더욱 빨랐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꽝!
하지만 하현에게는 그의 말이 닿지 않았다.
하현에게 들리는 것은 오직 하나.
그의 내부에서 서로 맞부딪치는 두 기운이 내는 굉음뿐이었다.
하현은 싸움 중이라는 것도 잊고, 무아의 지경에 빠졌다.
쩌억-
월룡의 기운 하나에 금이 가기 시작하며, 그 틈 사이로 엄청난 기운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평소 같으면 그 기운을 축기하기 위해 열심히 일주천을 하며 온몸 구석구석과 전신세맥으로 기운을 받아들이려 하였지만, 이번에는 그 기운이 향할 곳이 정해져 있다.
화아악!!
기운들은 고삐 풀린 말처럼 하현의 검으로 달려 들어갔다.
검에 도달한 기운들은 앞다투어 적룡검에 쌓이기 시작했다.
검들은 신묘하게도 계속해서 실을 쌓아갔고, 겨우 한 뼘이던 검강이 이제는 두 뼘까지 자라났다.
“이, 있을 수 없다!”
혈마는 귀가 찢어져라 소리쳤다.
입에서 피를 흘리기에 곧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더니, 그를 압박하는 기운은 조금 전보다 훨씬 더 거대했고, 심지어는 검강도 더욱 늘어나 그의 손이 버티기 힘든 정도에까지 왔다.
사락-
어느새 감고 있던 하현의 눈이 슬며시 뜨였다.
그의 시야에는 필사적으로 온 기운을 뿜어내면서도 얼굴에는 놀람과 경악으로 가득 찬 혈마의 얼굴이 들어왔다.
꾸욱-
하현은 상체를 앞으로 기울여 더욱더 그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앞으로는 또 한 발을 내디뎌 나아가는 데 성공하기까지 했다.
주르륵-
혈마는 바퀴라도 달린 것 마냥 하현이 미는 대로 고스란히 뒤로 밀린다.
이 시점에 하현의 기운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리라.
‘이제 끝내야 한다.’
하현은 이제는 이 싸움을 더 끌고 가면 안 된다는 판단이 들었다.
지금이야 압도하고 있다지만, 그의 내장이 급격하게 상해가고 있었다.
여기서 더 끌면 그가 심각한 내상을 입거나, 주화입마에 빠질 가능성도 있었다.
파사사-
그때 핏빛 혈무가 그의 눈 앞을 가렸다.
혈마가 마지막 힘을 끌어모아 양손으로 막고 있던 검에서 한 손을 떼내어 하현에게 반격한 것이었다.
조금 전 하현의 수를 그대로 돌려주려는 의도도 섞여 있었다.
핏빛 수강이 하현을 향해 쏟아졌다.
터벅-
하지만 하현은 그 와중에도 막을 생각보다는 우직하게 한 발을 밀고 나갔을 뿐이다.
지금은 혈마가 한 손으로 막고 있기에, 오히려 더 수월하다는 생각마저 드는 하현이었다.
꽝-! 쩌억!
그 순간 금만 가 있던 월룡의 기운 하나가 결국 반으로 완전히 쪼개어져 버렸다.
“끄아아악!”
하현은 급격하게 넓어진 세맥에서 느껴지는 끔찍한 고통에 비명을 지르면서도 그 기운을 유도해 검으로 쏘아내었다.
빠득- 빠득- 쩌억!
너무나도 강한 기운이 실려서일까.
강철같이 단단하던 혈마의 손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더니, 이윽고 유리가 깨지는 것처럼 금이 가기 시작했다.
휘익!
하현에게 쇄도하는 수강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이쯤 되면 검을 놓고 피해야 했으나, 하현은 자신을 믿으며 호신기를 끌어올렸다.
쩌엉-!
넘치는 하현의 내공은 호신기마저 두텁게 만들었다.
혈마의 수강은 호신기를 대부분 깨어내 버렸지만, 끝까지 없애지는 못하고 파스스 흩어져 버렸다.
혈마의 눈에 경악이 깃든다.
하현의 입가에는 반대로 미소가 차오른다.
빠자작! 빠작!
“끄아아아악!”
혈마는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며 뒤로 몇 발자국을 몸부림치듯 떨어졌다.
그는 어깨 아래로 아무것도 없었다.
하현은 혈마의 팔을 베어…. 아니, 부숴 버리는 데 성공했다.
남궁세가 천재 외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