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하현은 작게 숨을 헐떡이며 바닥에 꿈틀거리는 혈마를 바라보았다.
폭풍처럼 몰아치는 탈력감에 그는 바닥에 주저앉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주변에 사람이 너무 많아.’
이 층에서 실감나지 않는다는 눈으로 여기를 내려다보고 있는 혈사파의 잔챙이들은 차치하더라도, 빠르게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마교의 무사들은 무시할 수 없는 실력이다.
그의 상태가 정상적이었다면 모를 일이지만, 하현은 지금 더는 움직이고 싶지도 않았다.
‘기혈이 너무 많이 상했어.’
일순간이나마, 검강의 경지에 오른 대가는 혹독했다.
온몸의 기혈과 근육은 모두 늘어져 있고, 단전에는 공허함마저 느껴졌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것은 바로 조금 전 깨어내 버린 월룡의 기운을 온전히 흡수하지 못하고, 밖으로 흘려버려야 했다는 것이다.
으득-
하현은 저도 모르게 몰아치는 안타까움과 분노에 입술을 깨물었다.
단순히 기운이 아까워서 그러는 것은 아니었다.
월룡이 하현에게 건네준 기운은 단순한 내공이 아니다.
월룡의 의지와 마음, 그리고 소림에서 깨달은 하현의 정신이 담겨 있는 기운이다.
‘일순간 성취에 눈이 멀어 일부분을 잃어버리고 말았어.’
받아들이지도 못한 기운을 깨버렸다.
“크으윽!”
계속해서 고통에 찬 신음을 내지르는 혈마가 다시 한번 눈에 들어왔다.
물론, 그런 수법을 쓰지 않았더라면 혈마에게 이기지 못했으리라는 것도 사실이다.
자신의 목숨과 기운을 맞바꾸었다고 생각하니 조금은 속이 나아졌다.
저벅- 저벅-
하현은 천천히 그에게 걸어갔다.
혈마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토록 엄청난 고통을 입은 것은 난생처음이다.
최근 수십 년 동안은 고통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스스슥
점점 그의 몸의 붉은 기운이 빠져나가고 원래의 색으로 돌아오기 시작한다.
저 정도의 신공을 유지하려면 엄청난 집중력을 유지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말일 터.
고통이 그의 정신을 흩어 놓는 듯했다.
‘지금……. 지금 죽여야 해.’
하현은 태연한 척 말을 잘 듣지도 않는 다리를 움직였다.
그리고 두 팔을 번쩍 들었다.
보통의 철검보다도 훨씬 가벼운 무게의 적룡검이건만, 마치 바윗덩이를 드는 것처럼 무겁다.
하지만 지금 그를 보는 눈이 너무나도 많기에 그런 내색을 할 수는 없다.
후웅-!
하현의 검은 혈마의 목줄기를 향해 떨어졌다.
목에서도 검붉은 색이 많이 빠져 보였다.
까앙!
하지만, 하현은 그의 목을 베어낼 수 없었다.
철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목에 얕은 자상이 생기며 피를 흘리기는 했으나, 아직 혈괴공의 기운이 다 빠지지는 않았는지 하현의 검을 퉁겨내고 말았다.
콰당-
그 반탄력에 하현은 그만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제길.’
그는 속으로 상소리를 삼켰다.
지금 넘어지는 모습은 누가 봐도 어색했다.
그가 지금 기운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들켰을 수도 있다.
눈을 굴려 이 층을 바라보았지만, 혈사파의 잔당들은 다행히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부스럭
하지만, 가까이서 들려오는 소리에 하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고통에 정신을 잃은 것 같던 혈마가 움찔한 것이다.
그도 이 경지에 오르기까지 누구보다도 힘든 길을 걸어왔을 것이다.
그 인내심으로 어떻게든 고통을 이겨낸 그가 몸을 일으키는 소리였다.
빠드득-
혈마가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를 어찌나 세게 물었는지, 이가 갈리는 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하현도 적룡검을 지팡이 삼아 몸을 일으켰다.
다리가 이제는 그만 쉬자고 소리치는 듯했지만, 하현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탁탁탁-
몸을 완전히 일으킨 혈마는 성한 오른팔로 잘린 왼쪽 어깨의 혈도를 두드려 지혈했다.
흘긋 잘려나간……. 아니, 부서진 그의 팔을 바라보았다.
검으로 깔끔하게 잘려나간 것이라면 교로 가지고 가 마의(魔醫)에게 봉합을 부탁해볼 수도 있겠으나, 그의 팔은 깨어진 수정 조각처럼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그 조각들을 바라보며, 그는 점점 정신이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네…이놈…!”
정신이 돌아오자 가장 먼저 찾아온 감정은 분노였다.
그는 멀쩡한 척 검을 드리우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하현을 바라보았다.
하현의 몸이 미미하게 떨려온다.
그는 분노했던 것도 잊고 자신도 모르게 픽- 웃어 버렸다.
“괜찮은 척 연기해도 소용없다. 검만 겨우 들고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하현이 움찔했다.
혈마 정도의 초고수를 속이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긴 했다.
허나 하현은 호기로운 태도를 놓지 않고 입을 열었다.
“연기인지 아닌지는 다시 붙어보면 될 것 아닌가? 왜, 오른팔도 부서질까 봐 겁이 나나?”
하현은 일부러 혈마를 도발했다.
지금 같은 상황에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방법은 혈마가 이성을 잃고 하현에게 달려드는 것이다.
직선적인 공격을 유도하고, 그 틈을 노리는 것.
그것만이 유일하게 남은 방법이라고 판단했다.
툭-
하현은 어느새 그의 왼손에 잡혀 있는 비검을 만지작거렸다.
비장의 수는 의외에서 나온다.
그 의외를 비검으로 만들어내려 했다.
“크…큭…. 그래. 내 너를 인정하마.”
“……?”
그런데 혈마는 하현에게 더는 접근하지도 않고 웃어젖혔다.
“넌 나에게는 미치지 못했지만, 교에 들어온다면 능히 무각(武閣)주에는 다다를만한 실력이다.”
하현은 무각이라는 곳이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속으로 낭패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혈마와 비등한 싸움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애초에 혈마가 하현을 얕잡아 보고 방심했기 때문이다.
방심이 바탕이 되어 있기에, 하현의 무공이 더욱더 강하게 보일 수 있었다.
“이제 너를 실력자로 인정하고, 친히 네 멱을 따주마.”
하지만, 그는 이제 하현을 한 명의 무림인으로 인정해버렸다.
방심 따위가 없는 것은 당연하고, 혈마가 이성을 잃을 가능성도 현저하게 낮아졌다.
‘아, 아직 멀었구나.’
하현은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취월걸개 사부는 검마와 대등한 싸움을 했었다.
혈마가 자신의 입으로 검마보다는 자신이 강하다고 말했지만, 실은 대등할 것이다.
하현은 거기서 자신의 한계를 느꼈다.
‘내 모든 것을 걸어서 팔 하나.’
물론 하현의 나이를 생각하면 말도 되지 않는 성취다.
그리고 만약 혈마가 아니라 다른 고수였다면 하현의 마지막 일격에 팔만 부서지는 것이 아니라, 목숨을 잃었을 가능성도 크다.
하지만, 싸움에 가정은 무의미하다.
지금 중요한 것은 하현은 움직이기 힘든 상태이고, 팔 하나는 없지만, 혈마는 건재하다는 것이다.
스슥
하현이 재빠르게 품에서 손을 넣었다 빼었다.
그의 손에 들려있는 것은 봉환.
봉환을 터뜨려 구조를 요청하려면 전각 밖을 나가서 터뜨려야 하지만, 지금 상태로는 건물 밖으로 나가다가 혈마의 손에 붙잡힐 것이 뻔했다.
그래서 하현은 반대로 생각했다.
먼저 터뜨리고, 전각을 나가자고.
펑!
전각 바닥을 향해 냅다 봉환을 집어던지자, 그 충격에 터진 봉환에서 갈색 연기가 무럭무럭 퍼져나오기 시작했다.
연기는 곧바로 위로 올라가 이 층에 있던 무인들의 눈도 가렸다.
휘익!
하현이 마지막 기운을 짜내어 창문으로 몸을 던졌다.
혈마가 무서운 속도로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틱-
창문으로 빠져나가려는 그 순간, 그의 손가락이 옷깃에 스치는 것을 느껴졌지만, 하현은 창문 밖으로 빠져나오는 것에 성공했다.
하현은 낙법을 할 새도 없어 바닥에 철푸덕 떨어졌지만, 그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벌떡 일어나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휘익-!
‘움직여라. 다리야!’
하현은 말을 잘 듣지 않는 허벅지를 주먹으로 쾅쾅 쳐 내리며 다리를 움직였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말을 듣는 것인지, 그나마 남은 내공을 짜내어 신법을 전개할 수 있었다.
쾅-!
그의 뒤쪽에서 굉음이 들려왔다.
마음이 급한 혈마가 전각의 벽을 아예 부숴버리고 나온 것이다.
“콜록, 콜록! 잡히면 갈기갈기 찢어 줄 테다!”
그는 연신 기침을 해대더니, 저 멀리 도망가고 있는 하현을 바라보았다.
두다다-
그의 신법은 투박했다.
익힐 필요가 없어 익히지 않은 것인지, 혹은 애초에 신법에는 좋은 스승이 없었는지는 모르지만, 신법을 전개하는 그의 몸은 무거워 보였다.
‘이 속도라면 도망갈 수도 있다.’
하현은 뒤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기척을 느끼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내달렸다.
그 모습을 보는 혈마는 속으로 분통을 터뜨렸다.
‘팔만 성했어도!’
사실은 그의 신법 공부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갑자기 사라진 팔 하나 때문에 균형을 잡지 못하는 것이었다.
팔은 몸의 균형을 잡는 데 엄청나게 큰 역할을 하기에 그는 곧바로 적응하지 못했다.
두두두두-
대신 그는 다리에 모든 기운을 집중하며 내공과 힘을 이용해 억지로 앞으로 달려나갔다.
마치 하체가 먼저 가고, 상체는 뒤따라 오는 듯한 이상한 신법이었다.
휘익-!
하현은 물먹은 솜처럼 몸이 무거웠다.
게다가 점점 더 무거워져 가는 중이다.
당장 쓸 수 있는 기운은 완전히 바닥을 보이고 있고, 육체의 힘은 이미 다 빠져나간 지 오래다.
움직일 수 없는 육체를 미약한 내공의 힘으로 겨우겨우 끌고 가고 있는 모양새였다.
“멈춰라!!”
뒤에서 혈마가 소리를 지르며 쫓아온다.
그리고 그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혈마 정도의 고수가 되기 위해서는 노력은 물론, 기감과 무공에 대한 재능까지 모두 뛰어나야 한다.
그는 벌써 팔 하나 없이도 균형감각을 조금씩 찾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균형감각을 찾을수록 그의 속도는 점점 빨라져 가고 있었다.
점점 느려지는 하현.
점점 빨라지는 혈마.
둘의 사이는 점점 좁혀져 가고 있었다.
‘왼쪽은 숲. 오른쪽은 절벽. 어느 쪽이 내게 유리하지?’
하현의 눈앞에 숲과 절벽이 나타났다.
그는 목을 돌리기도 힘들다는 듯 눈동자만 왼쪽, 오른쪽으로 굴리며 생각했다.
‘그래, 숲으로 가자.’
하현은 숲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절벽으로 뛰어내린다면 지금 그의 기운으로는 절대로 살아남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쪽으로 왔을 때처럼 나무 위로 초상비를 펼칠 수도 없었다.
내공 소모가 큰 방법이기도 했고, 혈마가 그의 뒤에 바짝 쫓아왔기에 그의 손에 걸릴 수도 있다.
“잡았다 이놈!”
쒜에엑-!
어느새 지척에 다다른 혈마가 하현을 향해 손을 내뻗었다.
하현은 필사적으로 빙글 돌아 그의 손을 쳐내었다.
퍼억!
그의 손에 잡히지는 않았지만, 그 충격을 흘려낼 수는 없었다.
혈마가 어찌나 힘을 실었는지, 하현은 숲으로 그만 퉁겨지고 말았다.
하현은 공중에서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그는 그대로 나무를 향해 던져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번개처럼 가까워지는 나무를 보며, 하현은 눈을 질끈 감았다.
포옥-!
그런데 하현은 나무에 부딪히지 않았다.
숲 안쪽에서 나타난 무언가에 부딪히고 말았다.
아니, 부딪혔다기보다는 폭 안겨버리고 말았다.
그 충격 때문일까. 아니면 때마침 기운이 다해서일까?
하현은 저도 모르게 스르륵 눈이 감겼다.
‘따뜻해.’
하현은 저도 모르게 따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할아버지의 품처럼.
‘할아버지가 오신 건가……?’
말도 안 되는 소리이건만, 하현은 어쩐지 할아버지가 자신을 구하러 와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현이 손을 움직여 그와 부딪힌 사람을 꼭 잡았다.
‘응……?’
그런데 그 감각이 조금 낯설었다.
할아버지라고 하기에는 과도하게 딱딱한 느낌이었다.
하현은 언뜻 정신이 들었는지,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았다.
“현아. 너무나도 고생 많았구나. 좀 쉬어라.”
“……!!”
그는 하현은 양손으로 번쩍 들어 올리더니, 평평한 바위 위에 하현을 눕혀 놓았다.
하현은 너무나도 놀란 나머지 말도 하지 못하고 입만 벙긋거렸다.
그가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스르렁-
도가 뽑히는 소리가 스산하게 울려 퍼졌다.
“네, 네놈이 어찌 여기에……!”
하현의 뒤를 쫓던 혈마가 말을 더듬었다.
지금까지 하현이 들은 혈마의 목소리 중에 가장 볼품없는 목소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혈마. 이게 몇 년 만이지? 삼십 오 년은 된 것 같은데.”
“네가 어찌 여기 있는 것이냐. 팽길산!”
하현의 앞에 나타난 자는 하북팽가의 가주이자, 도의 신, 도제(刀帝)라고도 불리는 팽길산이었다.
남궁세가 천재 외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