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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세가 천재 외손자-193화 (193/304)

193화

하현은 자꾸만 감기려 하는 눈을 억지로 부여잡았다.

일어날 힘도 하나 없는 몸으로도 어떻게든 일어나려 애썼다.

“하북성은 우리 팽가의 영역이다. 내가 어느 곳에 있든 그게 이상한가? 내가 볼 때는 네가 여기에 있는 것이 더 이상한데……. 어째서 이곳에 와 있는 것이지?”

하현은 기어코 몸을 일으켰다.

도제의 전투를 두 눈으로 직접 볼 기회는 흔치 않다.

아니, 평생 가도 다시는 못 볼 수도 있었다.

가로로 누워 있던 시야가 똑바로 세워지며, 팽길산의 거대한 등이 보였다.

‘이것이, 수십 년간 하북을 책임진 이의 등이구나.’

넓고 굴곡지다.

그간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는지 하현으로서는 다 알 수 없지만, 그 등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만으로도 간접적으로 느껴지는 듯했다.

“그러고 보니 내 앞에 있는 게 혈마가 아니라 검마인가? 아니, 검마는 저번에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팽길산이 여유롭게 말했다.

지금 혈마가 외팔이인 것을 조롱하는 것이다.

혈마는 자신과 죽은 검마를 동시에 조롱하는 말에 부아가 치밀어 올랐지만, 하현의 때처럼 곧장 화를 내지는 못했다.

눈앞의 팽길산은 전 무림에서도 손꼽을 수 있는 최강자 중 하나.

34년 전 정마대전 당시에도 혈마가 이기지 못한 상대 중의 하나였다.

“팽길산……!”

“그 팔……. 다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혹시 이 아이에게 당한 것인가?”

팽길산이 놀란 눈을 하고 혈마의 팔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혈마는 하현에게 당했다는 것에 큰 부끄러움을 느꼈는지, 상처를 가리며 혀를 차는 것으로 그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자 팽길산은 허허 웃으며 하현을 흘긋 돌아보았다.

그의 눈에 바위 위에 꼿꼿이 앉아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하현이 돌아왔다.

“저렇게 앉아 있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거늘.”

조금 전 하현을 안아 들었을 때, 그는 자연스럽게 하현의 기혈과 몸 상태를 확인했다.

당장 죽을 정도는 아니지만, 온몸에 기운은 바짝 메말라 있고 기혈은 여기저기 찢긴 상태였다.

곧바로 졸도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태였건만, 하현은 저리도 버티고 있는 것이다.

“천천히 하려 했건만, 뒤의 아이는 우리 싸움이 끝나기 전에는 잠에 들 생각이 없어 보이는군.”

“뭐라고?”

“그러니 서둘러야겠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라. 그것은 들어 줄 터이니.”

마치 어린아이를 대하는 듯한 팽길산의 태도에 혈마는 결국 분노를 터뜨리고 말았다.

“이 노망난 늙은이야! 내 너는 꼭 저승으로 데리고 갈 것이다!”

“그것참, 유언으로는 적절치 못하구나.”

콰앙-!

어느새 핏빛으로 물든 혈마의 손이 팽길산의 도를 때렸다.

후욱!

강맹한 기파가 머리칼을 흩날렸다.

팽길산의 눈에 이채가 뜨인다.

혈마의 기세가 생각보다도 더 강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받아내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그가 놀란 것은 이런 큰 내공을 가진 혈마와 하현이 지금까지 싸움을 이어왔다는 것에서였다.

‘헌홍이는 혈마와 싸워서 이만큼 버틸 수 있을까?’

결론은 빠르게 났다.

절대 불가능하다.

하현처럼 팔 하나를 떼어내기는커녕 십초지적이 되려는 지도 의문이다.

언젠가 하현이 정파무림의 희망이라고 했던 것을 상기했다.

자신들이 죽고 나면 정파무림을 책임질 수 있을 만한 인재가 없어 불안해하고 있던 터.

그는 그 구심축이 하현이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프스스-

혈마의 몸이 점점 붉은색으로 물들어 가기 시작한다.

팽길산은 이 수법을 전에도 본 적이 있었다.

혈괴공.

피를 딱딱하게 만들어 강철과도 같은 경도를 얻어내는 마공이다.

저 마공을 수련하기 위해서는 수백, 수천 명분의 피가 필요하다.

그렇기에 마공인 것이다.

지금까지 오래도록 살아온 저 노괴(老怪)는 지금껏 수천 명 이상의 사람을 자신의 무공 수련을 위한 제물로 바쳐왔을 것이다.

빠득-

도를 잡은 팽길산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팔뚝 위로 굵은 힘줄이 솟아올랐다.

“이 아이 덕분에 너와의 은원은 여기서 마칠 수 있겠구나.”

“누구 맘대로!”

다시금 온몸이 핏빛 붉은색으로 물든 혈마가 기운을 폭사시켰다.

조금 전 전각 안에서 끌어올리던 기운과는 그 결이 다르다.

하현을 얕본 이유도 있지만, 그 전각이 무너지면 안 된다는 생각에 무의식적으로 힘을 조절한 탓이다.

그리고 지금 눈앞에 있는 상대는 절제한 기운으로는 상대할 수 없는 자인 것도 사실이다.

우오와앙-!

혈마의 몸에 어찌나 많은 기운을 모았는지, 주변 공기가 일그러지는 것이 보이는 듯하다.

그는 짧지 않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큰 기운을 끌어모았다.

부웅-

팽길산이라고 해서 가만히 있지 않았다.

한쪽 팔이 없고, 체력과 내력을 소모했다 하더라도 혈마는 명실상부 마교의 최고수 중 하나이다.

그는 처음부터 그가 낼 수 있는 최선의 패를 꺼내기로 결심했다.

고오오오-

팽길산이 들고 있는 검에 기운이 뭉쳐지는가 싶더니, 황색 빛이 도는 빛무리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도강(刀罡)을 뿜어낸 것이다. 흰색인 하현의 그것과는 달리 황색의 강기였다.

‘아……!’

하현은 그 광경을 바라보며 감탄을 속으로 삼켰다.

아니, 입을 떼어낼 힘도 나지 않았다.

그는 필사의 공력과 노력을 다하고, 심지어는 보물처럼 품어오던 월룡의 기운을 하나 소모하면서까지 만들어 낸 도강이건만, 팽길산은 그냥 뿜어낸 모습이 격차를 실감 나게 했다.

콰앙!!

팽길산의 도강과 혈마의 수강이 부딪히자 숲 전체를 뒤흔드는 굉음이 터져 나왔다.

도에서 느껴지는 반탄력이 엄청났다.

팽길산은 그 반탄력을 이용하려는 듯 그대로 빙글 한 바퀴 돌며 도 등으로 혈마를 강하게 휘둘러 쳤다.

빠작!

예상치 못한 도제의 수에 얻어맞은 혈마가 뒤로 상당히 밀려났다.

밀려난 것은 분명 혈마건만, 인상은 팽길산이 쓰고 있다.

도로 바위를 내리친 것 같이 손에 충격이 전해져 왔기 때문이다.

지이잉-

도에서 진동이 전해져 온다.

팽길산은 도를 꽉 잡아 도의 진동을 멈추었다.

그의 표정에 흥미가 깃든다.

과연 그의 도가 저 단단한 것을 끊어낼 수 있을지에 대한 호기심이다.

도는 뼈를 끊어내고, 검은 뼈를 잘라낸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도는 파괴력을 중심으로 한다.

어떻게 보면 혈마를 상대하기에 아주 좋은 병기라는 뜻이다.

척-

그가 도를 아래로 늘어뜨렸다.

하현은 저 기수식을 본 기억이 있다.

호랑이를 닮은 무공이라고 생각했었다.

하북팽가의 독문 무공이자 그를 지금의 도제에 올려놓아 준 무공. 오호단문도의 기수식이었다.

쿵-

팽길산이 강하게 땅을 밟아 혈마에게 쏘아졌다.

그가 몸을 움직이는 방법은 팽헌홍에게서도 수없이 보았던 미허신보(彌虛神步)였다.

하지만, 그 운용이 궤를 달리했다.

도제가 그의 배분의 초고수들 중 신법이 가장 약하다고 했는데, 보법은 또 다른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팽길산은 신선이라도 되는 것처럼 몇 번의 보폭만으로 혈마의 코앞에 다다랐으니까.

후우웅!

팽길산의 기운을 고스란히 받아낸 그의 애도(愛刀)가 번개처럼 휘둘렸다.

그 도가 지나가는 자리에는 광풍이 함께했다.

스윽!

혈마는 직선으로 날아오는 도를 잡아내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 역시 초절정의 고수라는 방증인 듯, 도가 날아오는 투로를 정확히 읽은 대처였다.

샤악-

하지만 그 역시 예상한 바였다.

팽길산의 도는 직선이 아닌, 뱀의 허리처럼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곡선으로 움직였다.

빠각!

그의 도가 혈마의 손등을 때렸다.

이런 공격으로도 혈마의 손은 깨지지 않았건만, 그 손이 아래로 떨어지는 것만은 피할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그의 목과 얼굴이 훤히 드러났다.

손이 한 개인 것이 너무나도 아쉬운 순간이었다.

쿠과과과과-

거친 기운을 머금고 있는 팽길산의 도가 여전히 광풍을 뿜어내며 혈마의 목을 향해 쏘아졌다.

거침없이 혈마의 목까지 다다른 도가 폭발하듯 기운을 뿜었다.

꽈앙!!

혈마의 머리에서 폭환이라도 터진듯한 굉음이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실 끊어진 연처럼 한참을 날아간 혈마가 나무에 부딪혔다.

우지끈!

어찌나 강하게 날아갔는지, 나무 하나가 그만 넘어가고 말았다.

“쿨럭!”

혈마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팽길산의 도가 때린 얼굴은 여러 갈래로 금이라도 간 것처럼 선이 나 있었지만, 부서질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받은 내부의 충격만은 어찌할 수 없었는지, 그는 입으로 피를 한 움큼 토해내고 말았다.

‘이럴 수가……!’

하현은 두 눈을 부릅떴다.

실로 압도적인 차이였다.

그는 조금 전 팽길산의 수에서 최근에 배운 발경을 떠올렸다.

손등을 때린 팽길산의 도가 머리를 때리는 순간은 찰나였다.

그 찰나에 팽길산은 허리를 회전시키며 그 짧은 거리에서도 낼 수 있는 최대한의 도격을 펼쳐낸 것이다.

‘도법에서 부르는 이름이 따로 있을지는 모르지만, 발경을 권법만의 수라고 생각했던 것은 내 시야가 너무나도 짧았구나.’

하현은 도제의 움직임 하나, 휘두르는 도 하나를 다 눈에 새기려 노력했다.

츠츠츠-

팽길산은 미처 모르고 있었지만, 하현의 눈에는 조금씩 생기가 돌아오고 있었다.

까무룩 잠이 들 뻔한 하현이었지만, 그의 심상에 이미 똬리를 튼 창궁대연신공은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마치 어머니의 온기처럼 하현을 품어내며 계속해서 그를 치유해주고 있었다.

콰앙-!

다시금 굉음이 터져 나온다.

외견으로만 보면 혈마가 낭패하다 못해 곧 죽어도 이상할 것 없는 외견이다.

하지만 그는 끈질겼다.

계속해서 팽길산의 공격을 막아내고, 피해내며 어떻게든 시간을 끌려는 것으로 보였다.

‘시간을 끈다……?’

하현의 뇌리에 언뜻 빛이 스쳤다.

그는 순간적으로 혈마의 입장이 되어 생각했다.

만약 혈마라면 팽길산을 마주하는 순간 어떤 판단을 했을까?

‘한 가지 확실한 건, 도제 어르신을 이길 수 있다는 판단은 아닐 것이다.’

도제라는 이름이 그렇다.

무림에서 검존과 맞붙을 수 있다는 몇 되지 않는 최강자 반열에 든 고수.

몸도 성하고, 기운도 완전할 때 붙어도 겨우 비벼볼 수 있을까 말까 한 고수다.

그런데 지금 그는 한쪽 팔도 없고, 하현에게 꽤 많은 기운을 소모하기까지 했다.

이런 상황에 도망가도 모자를 그가 이렇게 필사적으로 도제를 붙잡고 있다는 것은 분명히 목적이 있을 것이다.

“……!”

하현의 시선이 싸우고 있는 그들을 건너 저 멀리 전각이 있던 방향을 향했다.

그러자 언뜻 생각났다.

하현이 전각 바닥을 부쉈을 때, 질겁하던 혈마의 얼굴이.

그는 팽길산에게 저 전각을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가 ‘대업’이라고 말했던 그 무언가를 들키고 싶지 않은 것이다.

쾅-! 콰광!

혈마는 죽음까지 생각했는지, 방어를 도외시하며 팽길산에게 달려든다.

궁지에 몰린 쥐라고 할지라도 고양이를 무는데, 혈마 정도의 고수가 그렇게 달려들면 팽길산으로서도 쉽사리 쳐낼 수가 없었다.

쿠구궁- 콰당-

그들이 부딪히는 곳곳마다 나무가 우수수 쓰러질 정도로 격렬한 싸움이 지속되었다.

쩌엉-!

도가 한 번 혈마의 몸을 두드릴 때마다, 그의 몸에서는 조금씩 금이 갔다.

팔로 막아내면 팔에, 어깨로 막아내면 어깨에 생겨나는 금은 점차 커져가고 있었다.

혈마의 얼굴표정이 굳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직감한듯한 얼굴이다.

콰득!

다시 한번 울려 퍼지는 굉음.

하지만 이전까지와는 울려 퍼지는 그 소리의 질이 달랐다.

그간 뚫어내지 못하던 팽길산의 도가 혈마의 팔에 반쯤 틀어박히며 내는 소리였다.

우직!

팽길산은 그대로 더욱 내공을 주입하여 팔을 끊어 버렸다.

와장창-

땅에 떨어진 혈마의 팔이 유리조각처럼 깨어지며 사방으로 비산한다.

혈마는 양팔을 잃고서도 그 눈빛이 꺼질 생각을 안 했다.

“온전한 상태로 붙어보았다면 충분히 손속을 나눌 수 있었을 것을!”

“그래도 결과는 같았을 것이다.”

낮고 굵은 팽길산의 음성.

지금 그는 혈마 앞에 나타난 저승사자였다.

우우웅-!

오호단문도의 도결을 머금고, 팽길산의 농후한 내공을 잔뜩 들이마신 도가 혈마의 목을 향해 겨눠졌다.

팽길산이 도를 휘두르려는 순간이었다.

쾅- 콰광- 콰과과광-!!

별안간 지축을 뒤흔드는 거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곳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서 나는 소리는 아니었다.

그 소리를 들은 혈마의 눈에 언뜻 기쁨이 스쳐 간다.

그리고 그는 모든 것을 체념이라도 한 듯 두 눈을 감았다.

스스슥-

필사적으로 붙잡고 있던 혈괴공의 구결.

그는 미련 없이 혈괴공을 내려놓았다.

붉었던 몸이 원래의 색으로 돌아오고, 잘린 팔에서는 피가 콸콸 쏟아졌다.

“이게 무슨 소리냐?!”

도제가 물었지만, 혈마는 빙긋 미소짓고 눈을 감고 있을 뿐이다.

그때 도제의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방향에 전각이 있습니다. 증거를 인멸하려 폭약을 터뜨린 것으로 보입니다.”

그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하현이 어느새 손을 짚지 않고도 몸을 일으킬 수 있을 만큼 기운을 차린 상태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각이라니……?”

그는 이 근처에 전각이 있다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기에 하현에게 되물었다.

“어르신!!”

쒜에엑-!

하현의 외침에 도제가 급히 뒤를 돌았다.

등을 돌리고 있는 혈마가 마지막 기운을 끌어모아 도제에게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양팔도 없는 그였기에 이빨로라도 팽길산을 해하려는 속셈이었다.

후웅-!

팽길산이 반사적으로 도를 휘둘렀다,

그의 얼굴이 팽길산에게 닿는 것보다, 도제의 도가 훨씬 빨랐다.

도는 혈마의 목을 스쳐 갔다.

털썩- 툭.

혈마의 몸과 목이 분리되어 바닥으로 떨어졌다.

한때 중원을 공포로 내몰았던 삼마 중 한 명이 유명을 달리한 순간이었다.

남궁세가 천재 외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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