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그들은 곧장 지하로 내려갔다.
하현은 팽길산이 팽헌홍에게 이곳에서의 일을 알리고, 다른 사람을 데려오라고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팽길산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아……. 다른 무인의 도움은 필요 없다는 자신감이야.’
도제는 그 이름만으로도 엄청난 무게감을 가진다.
어차피 그가 이길 수 없는 무인이 나타난다면 이 일대에서 그 무인을 이길 수 있는 무인은 전무하다.
“후. 덥군.”
지상에서 타오르던 열기 때문일까? 지하는 불이 모두 진화되었음에도 후끈했다.
팽길산이 웃옷을 나풀거리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옷자락이 펄럭일 때마다 언뜻 비치는 그의 몸은 구순을 넘은 노인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할 정도로 잘 발달 되어 있었다.
그는 내공을 끌어 올려 열기로부터 그를 보호했다.
그러고 나니 언뜻 하현이 생각나 돌아보며 말했다.
“하현아. 기운을 끌어 올릴 수 있겠느냐?”
하현이 조금은 힘들어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직 무리입니다.”
“지하의 열기가 생각보다 너무 뜨겁구나. 올라가서 기다리겠느냐?”
“괜찮습니다. 저도 들어가 보고 싶습니다.”
벌써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지만, 하현은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꼭 내부에 직접 들어가 보고 싶었다.
‘아닐 수도 있지만……. 마교가 우리 신가장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 알 수 있는 기회일지도 몰라.’
하현은 지하에 무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신가장을 떠올렸다.
신가장뿐만아니라 다른 멸문한 군소방파에서도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하게 비워진 방이 하나씩은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만약에 이곳에서도 그때와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면 그 실마리를 얻어낼지도 모를 일이었다.
“흠…. 그래. 알겠다. 만약 너무 힘들면 꼭 말해야 한다. 바로 위로 올려줄 터이니.”
“감사합니다. 어르신.”
그때 먼저 안쪽을 확인하러 들어갔었던 팽헌홍이 입과 코를 가리며 돌아왔다.
“안에 무엇이라도 있더냐?”
“빼돌릴 수 있는 것은 모두 빼돌린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안쪽에서도 불을 놓았었는지 온통 그을음입니다.”
“불은 이미 꺼졌나 보구나.”
“네. 살아있는 불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생각보다도 크기가 매우 큽니다. 끝까지 다 들어갔다간 너무 늦어질 것 같아서 일단 돌아왔습니다.”
팽길산이 팽헌홍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발을 옮겼다.
“그래. 잘했다. 내부가 그렇게 크다면 분명히 챙기지 못한 것이 있을 것이다.”
“네. 내부에는 빼곡히 야명주(夜明珠)가 박혀 있습니다. 그것을 챙길 여유는 없던 것으로 보입니다.”
“후에 사람을 불러와 남김없이 회수해야겠구나. 마교놈들. 속이 꽤 쓰리겠어.”
그는 허허 웃고는 말을 이었다.
“횃불을 들어야 하나 걱정했는데, 그럴 필요는 없겠구나. 그럼 들어가 보자꾸나.”
“네. 저를 뒤따라 오시면 됩니다.”
그들은 팽헌홍을 따라 앞으로 들어갔다.
들어가며 주위를 둘러보니, 지하는 단순히 동혈만 파 놓은 것이 아니었다.
안에서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는 아직 짐작 가는 것은 없지만, 무언가를 제대로 하려는 듯 벽과 바닥까지 제대로 만들어 놓은 모습이었다.
“이 통로가 앞으로도 한참 이어집니다. 그리고 그 뒤에는 꽤 넓은 공간이 나옵니다.”
하현과 팽길산은 팽헌홍의 설명을 들으며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허억- 허억-.”
팽헌홍의 말대로 들어가는 통로는 꽤 길었는데, 온도도 높고 하현의 몸 상태도 정상은 아니었기에 하현은 가쁜 숨을 내쉬었다.
팽길산과 팽헌홍은 그 소리를 들으면서도 일부러 내색하지 않았다.
혹여 하현의 무인으로서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후욱-
한참을 걸어가자 탄 냄새가 훅 올라오며 상당히 넓은 강당같이 생긴 곳이 나왔다.
이곳이 팽헌홍이 말한 넓은 곳인 것 같았다.
“여기는… 도대체 무엇을 하던 곳이지?”
팽길산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그들이 있는 곳은 바닥을 화강암으로 깎아 놓은 넓은 공터였는데, 정사각형의 모양으로 가로 세로가 열 장(약 30m)은 충분히 되어 보였다.
“이곳은…….”
하현이 비척비척 가운데로 걸어가며 말했다.
“연무장으로 보이는군요.”
“연무장?”
팽길산이 하현의 곁으로 다가오며 되물었다.
하현의 말에는 확신이 담겨있었는데,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곳을 연무장이라고 말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바닥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팽길산은 하현의 말을 따라 바닥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지우려 노력했지만, 채 지우지 못한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여러 사람의 발자국이었다.
탁 타닥 탁-
하현이 발을 놀리며 발자국에 발을 맞춰간다.
기운이 없는 와중에도 희미하게 미소를 띠고 있는 모습이었다.
팽길산과 팽헌홍은 한참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하현이 발걸음을 멈추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온통 땀범벅이었다.
“허억, 허억, 방금 이것… 마교의 보법인가 봅니다. 기초 보법인 것 같은데 특이하군요.”
하현은 가쁜 숨을 내쉬며 말했다.
팽헌홍은 무엇을 익힌 것인지, 무엇이 특이한지를 물어보고 싶었지만, 지금 하현의 상태가 툭 치면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기에 나중에 물어보자고 생각했다.
“일단은 들어가 보자. 현이 너는 숨 좀 고르고.”
“네. 어르신.”
하현이 호흡을 되찾고서 그들은 더욱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여기서부터는 아까 와보지 못한 곳입니다. 조금 더 조심히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팽헌홍이 앞장을 서고 팽길산이 그의 등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계속 앞으로 가던 그들은 통로의 제일 끝에 세 개의 방으로 나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번에는 팽길산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세 방을 모두 탐색해봐야겠지?”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네……. 좋습니다.”
하현은 조금 전에 무리한 까닭인지, 그게 아니면 찌는듯한 더위 때문인지 점점 안색이 안 좋아지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하현의 옆에 서게 된 팽헌홍이 살짝 하현을 부축하며 말했다.
“하현아. 괜찮으냐?”
“네. 숨쉬기가 조금 어렵지만, 괜찮습니다. 내공이라는 게 이렇게 소중한 것이었군요.”
하현은 이 와중에도 여유를 잃지 않았다.
팽헌홍은 하현의 정신력에 속으로 감탄했다.
그는 내공으로 자신을 보호하고 있음에도 숨쉬기가 갑갑할 정도로 공기가 뜨거웠다.
이런 더운 공기를 계속 들이마시어 혹여나 하현의 폐라도 상할까 봐 걱정되었다.
“너무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제 몸에 이상이 생길 것 같으면 곧바로 말씀드리기로 도제 어르신과 약속했거든요.”
“그래. 너무 무리는 말아라.”
팽길산은 둘의 대화가 마치기를 기다렸다가 가장 왼쪽의 문을 열었다.
내부에서는 곧장 탄내가 훅 나왔다.
이곳에도 불을 놓은 것이 분명했다.
다행히 방 안쪽에도 바깥처럼 촘촘히 박혀 있지는 않지만, 내부를 구별할 수 있을 정도의 야명주는 박혀 있었다.
“탄 잔해로 보았을 때, 이곳은 몇몇 사람들이 기거하던 숙소로 보이는구나.”
“네. 불에 다 타기는 했지만, 이런 것들은 침상으로 보입니다.”
팽헌홍이 잔해를 뒤적거리며 대답했다.
그는 하현을 흘긋 바라보았지만, 하현은 굳은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무언가 바로 떠오르는 게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곧장 오른쪽 방문 앞에 섰다.
팽길산은 주저 없이 문을 열어젖혔다.
“헛…?!”
“엇?”
그리고 그 안을 바라본 그들은 헛숨을 들이킬 수밖에 없었다.
안에는 불에 새카맣게 타버린 시체가 대여섯 구 누워있었기 때문이다.
팽길산이 먼저 조심히 그들에게 다가가 상태를 살폈다.
“모두 죽었어. 그런데 아직 죽은 지 그렇게 오래되지는 않았군.”
“그렇다면 마교에서 도망갈 때 이자들을 죽이고 불까지 놓고 갔다는 말입니까?”
“그래. 이 잔혹한 놈들…….”
팽길산이 으득 이빨을 갈았다.
그가 마교를 싫어하는 가장 큰 이유가 이것이다.
마교 놈들은 사람 생명을 너무나도 우습게 생각한다.
“이 버러지만도 못한 것들이……!”
불에 탄 사체들을 유심히 보던 팽길산이 이번에는 더욱 큰 분노를 터뜨렸다.
그들은 모두 약관도 되지 못한 나이로 보였기 때문이다.
하현과 팽헌홍의 사이쯤의 나이로 보였다.
팽길산이 이를 얘기하자, 하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얘기했다.
“어쩐지, 저도 그런 생각이 들긴 했습니다. 연무장에 찍힌 발자국의 크기가 작고, 보폭이 작았습니다.”
하현은 안타까운 눈으로 사체의 수를 헤아려보고는 말을 이었다.
“이곳에 죽은 자들이 여섯. 조금 전 발자국도 대략 대여섯 명의 흔적이었습니다. 아마도 이들의 발자국인 것으로 보이는군요.”
“그래. 조금 전 숙소도 이들이 쓰던 것일 가능성이 크겠다.”
팽길산은 사체를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더니 말했다.
“이들은 바로 불에 타 죽은 것이 아니다. 모두 급소를 스쳐 가는 자상(刺傷)이 남아있다. 검이나 도 같은 날붙이에 베어 죽고 난 다음 불을 붙여 증거를 인멸하려 했다는 것인데……. 이상한 점은 이들에게 반항한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야.”
팽길산이 안타깝다는 듯 사체에게서 눈을 돌렸고, 팽헌홍이 벽을 손바닥으로 쓸며 물었다.
“이 방은 무엇을 하는 방일까요?”
“모르겠다. 남은 흔적이 얼마 없으니. 나중에 조사관을 데리고 와서 더 자세히 알아보게 하고, 일단 우리는 움직이자꾸나. 아직 방이 하나 남아있으니.”
그들은 별 수확을 얻지 못하고 방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마지막 가운데에 있는 방.
그 문 앞에서, 하현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쿠구구-
안쪽에서 무언가 알 수 없는 기운이 똬리를 틀고 있는 느낌.
그렇다고 해서 안에 무인이 있다거나 하는 구체적인 기운은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팽길산이 진작 알아챘을 것이지만, 그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듯했다.
‘분명히 언젠가 한 번은 겪어 본 것 같은 느낌인데…….’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떠올려봐도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 몸이 안 좋아서 그런가?’
하현은 일단은 안으로 들어가 보기로 했다.
그는 현재 무공을 쓸 수 없는 몸 상태지만, 팽길산과 함께인데 무엇이 두려우랴.
끼이익-
팽길산이 문을 열자, 오히려 안쪽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없었다.
다만, 큰 차이점이라면 이 방은 양쪽에 비해서 크기가 서너 배는 되어 보이는 크기였다는 것이다.
“이곳도 상황은 비슷하군.”
“하지만 워낙 넓어서 조금 더 살펴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 흩어져서 쓸만한 게 있는지를 찾아보자.”
“알겠습니다.”
팽길산은 작게 대답하며 고개를 주억거리는 하현을 바라보았다.
하현은 땀을 너무 많이 흘려 머리칼까지 젖어 있을 정도였다.
‘정말 독종이야.’
그는 하현을 보며 그 옛날의 남궁무룡을 떠올렸다.
지금이야 나이를 먹으며 많이 유해졌다고는 하지만, 남궁무룡 역시 온 무림에서 알아주는 독종이었다.
그는 문득 저런 기질도 유전이 되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는 하현에게 염려의 말을 전하려던 생각을 접고 등을 돌려 수색을 시작했다.
어차피 하현을 만류해도 절대로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저벅-
하현은 그런 팽길산의 등을 바라보다가 발걸음을 옮겼다.
어지간하면 그도 팽길산의 걱정을 받아들여서 지상으로 올라갈까 했지만, 여기서 느껴지는 이 이질적인 기운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아무도 느끼지 못하는 기색이기에 더욱 뒤돌아설 수 없었다.
“후우…….”
한참을 수색하던 하현은 점점 가빠지는 숨에 심호흡했다.
땀은 이제 흐르다 못해 물에 흠뻑 젖은 기분마저 든다.
“어……?”
그러던 중 구석에서 완전히 타지 않은 종이 하나가 보였다.
재빨리 그쪽으로 가 종이를 집어 샅샅이 살펴본 하현은 글자 몇 개를 발견할 수 있었다.
“실패작……?”
가장 먼저 보이는 단어는 그 단어였다.
드문드문 불에 타고 찢기어 온전히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하현은 그 아래로도 몇 가지 문장을 읽어낼 수 있었다.
“실패작에 무공을 가르치는 것에는 성공……?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이지?”
너무나도 많은 부분이 타버렸기에 내용을 완전히 알 수 없는 것이 아쉬웠지만, 실패작이라는 단어에서 하현은 어째서인지 조금 전에 불에 타죽은 자들이 떠올랐다.
남궁세가 천재 외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