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카앙-!
날카로운 소리가 다시 울려 퍼진다.
팽헌홍은 정신을 집중하여 도를 휘두르는 팽길산의 등을 바라보며, 감탄을 숨기지 못했다.
‘현철(玄鐵)을 저렇게 가르시다니…….’
현철은 보통 철이 아니다.
전설처럼 황제만이 가지고 있다는 만년한철이 아니라면 중원에서 구할 수 있는 금속 중에 가장 강력한 금속이다.
현철을 제련하려면 극도의 고온이 필요하다.
잘 만든 가마에 불을 칠주야 간 태우고, 그 불로 철을 태워 더 높아진 온도로 겨우 제련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니 온도를 높이지 않고, 도를 이용해 한철을 끊어놓는다는 것은 절정고수들도 생각지 못한 일.
카앙-!!
하지만, 팽길산이 도를 휘두를 때마다, 조금씩이지만 벽은 조금씩 쪼개어지고 있다.
그는 도를 마치 도끼를 다루듯 거칠게 휘두르고 있었지만, 도날은 상하지 않았다.
그의 중후한 내력으로 도를 보호하며 휘두르고 있기 때문이었다.
쩌어억-
도가 쉴 새 없이 움직이고, 결국 한계점에 도달했는지 패이다 못해 길게 금이 갔다.
팽길산이 씨익 미소짓는다.
이토록 맘껏 도를 휘둘러본 적이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데, 오래간만에 개운하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후우-”
팽길산이 크게 숨을 한 번 내쉬었다.
힘들어서 내쉬는 숨은 아니었다.
다시 한번 전열을 다듬어 더 큰 힘을 내려는 심호흡이었다.
‘저렇게 즐거운 얼굴이시라니…….’
팽헌홍은 그의 아버지의 표정을 바라보며 하현을 떠올렸다.
넘기 힘든 장애물이 있으면 좌절하거나 포기하는 것이 아닌 거 즐거워하는 것.
강적을 앞에 두고 하현이 보이는 태도와 비슷했다.
‘자신을 뛰어넘는 과정을 즐기는 것인가? 그게 아니라면……. 극복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기에 즐길 수 있는 것인가?’
팽헌홍의 마음속에 작은 심마(心魔)가 피어올랐다.
여태까지 자신이 무공을 즐긴 적이 있나? 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져보았다.
그리고, 그 결론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종종 있었으나, 많지는 않았다.’
감은 그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갑자기 마음에 들어선 심마라는 벌레가 그의 심상을 조금씩 갉아 먹기 시작했다.
원래 무인이란 자들이 이렇다.
범인들이 볼 때는 신이나 신선이라 할 수도 있을 만한 힘과 무공을 가졌으면서 이토록 자신의 마음 하나 가누지 못하는 자들이다.
그렇기에 면벽을 하고, 좌양을 하며 정신 수양을 하는 자들이 그렇게 많은 것이다.
‘내가 과연 무재라 불릴 만한가?’
어렸을 적부터 그는 주변으로부터 많은 칭찬과 칭송을 받아오며 컸다.
또래보다 항상 빠른 성취를 보였기에, 주변으로부터 견제까지도 받아오며 살아온 그다.
그런데 그의 생각은 남궁세가에 몸을 의탁하면서부터 산산이 조각났다.
비단 하현 때문에 그런 것만은 아니다.
남궁민, 남궁환, 남궁소화같은 직계의 후기지수들은 물론, 이미 정예대원에 이른 무인들을 지켜볼 때면 그는 평범한 재능이었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콰가가각-!
이전과는 다르게 들려오는 거대한 소리에 팽헌홍이 눈을 떴다.
팽길산은 기어코 벽에 머리 하나가 들어갈만한 틈을 만들어 내는 것에 성공했다.
아직 사람이 나다니려면 한참을 더 갈라야 하지만, 처음이 어렵지 이제부터는 쉽게 진행될 것이다.
그가 잠시 숨을 돌리려는 듯 허리를 펴며 팽헌홍을 돌아보았다.
“흠…….”
그는 팽헌홍의 표정을 보자마자 침음성을 흘렸다.
“헌홍아.”
“예. 아버지.”
“내 말 잘 듣거라.”
“경청하겠습니다.”
대답은 곧장 했건만, 팽헌홍은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갑자기 무슨 말씀을 하신다는 것일까?
“자질로만 따진다면 분명 네가 하현보다 부족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나와의 격차를 걱정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아!”
팽헌홍은 제대로 대답도 하지 못했다.
별다른 내색도 하지 않았건만, 팽길산은 단번에 그의 마음을 알아챈 것이다.
“어, 어떻게…….”
팽길산이 피식 웃었다.
“아비가 되어 자식의 마음도 몰라서야 되겠느냐. 그리고, 지금 네가 느끼고 있을 감정은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팽헌홍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평생을 도제라는 이명으로 남들에게 추앙받으며 살아왔을 줄 알았던 아버지가 자신의 마음에 공감한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무림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시기가 매우 늦었다. 전쟁을 시작하면서였지.”
“전쟁이라면…….”
“오십사 년 전. 정사대전에서였다. 그때 내 나이 마흔이었지. 그전까지, 나는 내 친우들에 비해서 무림에서 큰 명성을 얻지도, 월등히 뛰어난 무력을 가지지도 못했었지.”
팽헌홍이 무언가를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
팽길산은 그에게 눈을 찡긋하고는 말을 이었다.
“네가 하현에게 그런 감정을 느꼈다면 나는 무룡이에게 그런 감정을 느꼈지. 그뿐만이겠냐? 주원, 유엽에 취월걸개까지. 다들 나를 앞서나갈 때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내실을 다지는 것뿐이었지.”
대답은 하지 않지만, 팽길산이 말을 이어감에 따라 팽헌홍의 눈에 생기가 다시 돌아오기 시작한다.
얄궂게도 아버지의 말 몇 마디에 심마를 물리치고 있는 그였다.
“우리 팽가의 무공은 끝까지 가야 안다. 일희일비하지 말 거라. 끝까지 가면 가장 강한 것이 우리 하북팽가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팽헌홍이 확신에 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얼굴이다.”
팽길산이 그를 보며 빙긋 웃어주고는 미련 없이 뒤를 돌았다.
알겠다고는 했지만, 팽헌홍에게 시간이 필요함을 잘 알고 있다.
그가 할 일은 눈앞에 있는 벽을 마저 박살 내는 것.
분명히 그가 다 모두 해내기 이전에 팽헌홍은 자신의 마음을 단단히 할 것이다.
‘저 나이의 나보다 훨씬 뛰어난 아이니.’
하현 때문에 조금 가려져 있다뿐이지, 팽헌홍은 사실 여태껏 하북팽가에서 태어난 무인 중에 가장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있다.
그의 세형들은 물론, 심지어는 도제 자신보다도.
‘그걸 언제 깨닫게 될지는 자신이 몫이지.’
우우웅-
그는 내공이 잔뜩 들어가 기분 좋게 떨려오는 도병을 가볍게 잡아들었다.
벽 건너편에서 무슨 일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는 빠르게 하현에게 가야 했다.
* * *
“으, 으음-”
하현은 신음을 흘리며 슬며시 눈을 떴다.
그가 있던 곳은 어느 방 안.
주위를 둘러보니 어째서인지 낯익은 풍경이었다.
‘여기가……. 어디지?’
최근의 기억을 떠올렸지만, 이곳에 온 기억은 나지 않는다.
‘선화분가인가? 아니야. 분명히 와본 적이 있는 곳인데.’
하현은 일단은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그것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분명히 그 원통을 뽑아낼 때, 몸은 다 회복이 되었었다.
그러니 몸에 이상이 있는 것은 아닐 터.
그는 몸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기운을 끌어올렸다.
‘어?!’
그런데 그는 진심으로 당황했다.
아무리 내공을 끌어올리려 해도, 그가 움직일 수 있는 내공이 한 톨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 감각이 묘했는데, 몸 상태가 좋지 않아 기운을 끌어올릴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아예 몸에서 느껴지는 내공이 하나 없이 텅텅 비어있는 것 같았다.
심지어는 혈맥 군데군데 똬리를 틀고 존재감을 내비치던 월룡의 기운마저 느껴지지 않았다.
“하현아-.”
그때 방 밖에서 그를 부르는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현은 그 목소리 역시 누구인지 한 번에 깨달을 수 없었다.
‘분명히 내가 아는 목소리인데.’
“하현아. 일어났어?”
“응. 일어났어요.”
하현은 또다시 당황하고 말았다.
그가 말해야겠다고 생각지도 않았건만, 그의 입이 알아서 대답했기 때문이다.
‘어……?’
그런데 그의 목소리가 이상하다.
최근 변성기가 지나가며 조금은 굵어졌던 목소리였는데, 앳된 옛날의 그 목소리가 그대로 귀로 들려왔다.
“읏챠.”
하현은 스스로 몸이 일으켜지는 것을 느꼈다.
일어나고 보니, 그가 보던 시야보다도 훨씬 낮다.
마치…. 어린아이가 된 듯했다.
두근-
하현의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안개 속에 있었던 것 같지만……. 조금씩, 조금씩 이곳이 어디인지 알 것 같았다.
‘여기는 신가장이야……!’
그리고 또 한 가지를 깨달았다.
지금 그는 어린아이의 몸이었다.
대략 일고여덟 살 정도의 과거였다.
‘아… 꿈이구나.’
하현은 지금 이 상황이 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꿈이라는 것을 깨닫는 꿈을 자각몽이라고 한다.
하지만, 하현의 자각몽은 조금 달랐다.
보통 자각몽을 꾸게 되면 꿈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겠지만, 하현은 아이일 때의 시선을 따라 그대로 지켜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무엇을 보여주고 싶은 거야?’
하현은 그의 무의식이 그에게 무언가를 보여주고 싶어 이런 꿈을 꾸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그는 아주 조금 기대감이 들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한 번 더 볼 수 있지 않을까?’
평소에도 그는 부모님의 얼굴을 단 한 번만이라도 더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왔다.
너무 급작스럽게 헤어졌기에, 작별 인사를 한 번이라도 하고 싶었다.
하현은 이 나이 때의 자신이 항상 일어나서 부모님께 문안인사를 올렸던 것을 떠올렸다.
그러면 분명 두 분을 뵐 수 있으리라.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하나 있었으니, 조금 전 문밖에서 하현을 부른 사람이다.
그 목소리는 분명 아버지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벌컥-
어린 하현이 옷매무시를 똑바로 하고는 문을 열었다.
그리고, 문 앞에 서 있는 남자를 보았을 때, 하현은 와락 인상을 구기고 말았다.
아니, 정말로 그럴 수는 없으니 인상을 구기고 싶은 심정이었다.
‘유지혁!’
그의 눈앞에 있는 자는 다름 아닌 유지혁이었다.
이 시절에는 신지혁이라고 불리고 있을 터였다.
“하하. 현아. 또 머리가 잔뜩 뻗쳤구나. 이쪽으로 오렴.”
“네. 삼촌.”
신지혁은 다정하게 하현의 머리를 정리해주었다.
피는 이어져 있지 않지만, 친삼촌보다 더 따랐던 신지혁이다.
하현은 곧 그의 손을 잡고 어디론가 향했다.
‘죽이고 싶다.’
하현이 가슴 속 깊이 숨겨두었던 고개를 빼꼼히 들어 올렸다.
하지만, 어린 하현의 몸은 그의 뜻대로 움직일 수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이것은 꿈이다.
꿈에서는 그를 죽인다 해도 과거와 현재는 바뀌지 않는다.
머리에 냉정을 품고, 그가 하는 행동과 말에서 마교에 대한 실마리를 조금이라도 더 알아낼 수 있도록 정신을 바짝 차릴 뿐이다.
“현아. 오늘은 뭐 한다고 했는지 기억하느냐?”
“네! 오늘은 우리 집 주변에 지기(地氣)가 어떻게 흐르는지 가르쳐 주신다고 하셨잖아요.”
“옳지. 역시 기억력도 좋구나. 우리 무인들이 쌓고, 연마하고, 사용하는 기운은 결국 모두 자연에서 나오는 기운이란다. 그리고 이 신가장은 그 기운이 가장 충실히 흐르는 곳 중에 하나거든.”
자신과 신지혁의 이야기를 듣던 하현은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 이 대화…. 전혀 기억이 나질 않는데?’
어렸을 적 아니, 태어났을 때부터 남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오성을 가지고 태어난 하현이다.
그렇기에 세 살, 네 살 때의 일도 모두 기억하고 있다.
하물며 일곱 살 때의 기억을 잊었을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하현은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자. 따라 나오거라.”
신지혁은 어린 하현을 데리고 이곳저곳을 계속해서 돌아다녔다.
이렇게 보니, 섬서성의 신가장이 있던 곳은 상당한 명당이었다.
신가장의 조사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풍수지리에 굉장히 밝았던 사람이었으리라.
하현은 어린 하현의 눈을 빌려 그 광경을 뇌리에 깊숙이 담아두었다.
저번 남궁민의 구출 임무를 할 때도 가봤었지만, 이토록 자세하게 주변을 볼 생각도, 여유도 없었다.
후에 시간이 남는다면 언젠가 다시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렇게 지맥이 굽이치고, 나무가 유독 높게 자라 있는 이런 곳도 기운이 고여있는 곳이란다. 이런 곳에서 운기를 하면 그 효율이 더 높아지지.”
“저도 빨리 무공을 배우고 싶어요!”
“하하. 그건 형수님께 허락을 받아야 하는 일이라 내가 도와줄 수가 없구나. 저번에 너에게 호흡법을 가르쳤다가 치도곤을 치른 생각을 하면…….”
신지혁은 과장된 몸짓으로 몸서리를 쳤다.
하현은 그 모습을 보며 저도 모르게 속으로 웃었다.
어머니의 성정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신지혁은 그러고서도 하현과 함께 여러 곳을 더 들렸다.
“자. 이제 돌아가자. 엄마한테 혼날라.”
그런데 어린 하현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지금 있는 위치와 신가장의 그 사이에 있는 작은 골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런데 삼촌. 저쪽은 왜 안 보는 거예요?”
“저쪽은 뭔가 특별한 게 없을 거라서 말이야. 아까 내가 말해준 이론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 곳이란다.”
“어…? 그런데 아까 거기보다 저기에서 더 큰 게 느껴지는데요.”
“응?”
신지혁이 놀란 눈을 하고 하현을 바라보았다.
“느껴진다니……?”
“아까부터 말씀하신 게 이거 아니에요? 땅에 손을 데면 우웅- 하는 것 같은 이 느낌.”
하현이 천진난만하게 말했다.
하지만, 신지혁의 눈은 곧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이 커졌다.
그는 하현의 양어깨를 덥석 잡았다.
“다시 말해 봐라. 울리는 것 같은 게 느껴진다고? 여기에서? 아니면 저쪽에서도?”
“아, 삼촌. 아파요.”
“미, 미안하구나. 나도 모르게 그만.”
신지혁이 반사적으로 어린 하현에게서 떨어졌다.
“아까 삼촌이 말한 곳에서는 저런 게 다 느껴졌었어요. 그런데 저기가 제일 커요.”
“언제부터 느껴온 것이야?”
“모르겠어요. 얼마 전부터인 것 같기도 하고, 아주 옛날부터였던 것 같기도 하고.”
신지혁이 하현의 머리에 손을 툭- 올렸다.
잠시 후에 그가 손을 떼며 조금은 허망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법이 완성되어 상단전이 열렸구나…….”
남궁세가 천재 외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