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그 방법이라 하면 혹시…! 그 말뚝을 말하는가?”
팽길산은 쓰러져 있던 하현의 주위에 이리저리 널브러져 있던 말뚝과 원통을 떠올렸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팽길산이 놀랐는지 눈을 부릅떴다.
그곳의 광경을 팽길산과 함께 본 팽헌홍은 고개를 끄덕였고, 분가주는 무슨 소리인지 모르기에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때의 모습을 팽헌홍이 설명해주고 나서야, 그도 모두와 같이 이해할 수 있었다.
하현이 팽길산에게 물었다.
“혹시 이 선화분가의 위치는 어르신께서 직접 고르신 겁니까?”
“아니다. 전대 분가주였던 내 동생이 고른 위치다.”
“그랬다면 우연이 겹친 것일 수도 있겠군요.”
“우연이라니?”
“바로 이 위치에서 미약하게나마 자연의 기운이 느껴집니다. 혈마는 이곳의 기운마저도 탐이 났던 것이겠죠.”
하현을 제외한 나머지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팽헌홍은 근본적인 의문이 들었다.
“도대체 그 기운이라는 것을 어떻게 느낀다는 것이야? 사실 나는 뭐가 다른지 전혀 모르겠는데.”
“저도 그 방법은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특이체질일 수도 있고요.”
하현은 팽길산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그저께의 그곳에 다시 한번 가보고 싶은데, 가능하겠습니까?”
“그래. 곧바로 본가에서 무인들을 불러 그곳을 지키게 하고 있지. 아직까지 아무런 연락이 없는 것으로 보아, 아직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역시나 빠른 일 처리였다.
우람한 근육과 패도적인 도법으로 인해 자칫 팽길산을 힘만 센 무인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그는 만약 관직에 들었다면 크게 출세했을 것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머리 회전도 빨랐다.
하현이 하늘을 올려다보고는 말했다.
“어르신이 괜찮으시다면 지금 당장 가보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당연히 고개를 끄덕일 것이라 생각했던 하현의 생각과는 달리, 팽길산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오늘은 너무 늦었다. 그리고……. 몸 상태가 아무리 괜찮다고 하여도, 조금 전까지 너는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오늘 밤은 푹 쉬고 내일 아침에 일어나서 가자꾸나.”
팽길산은 그렇게 말하고서는 눈짓으로 그의 오른쪽에 있는 분가주를 가리키더니 하현에게 눈을 찡긋해주었다.
“아……. 알겠습니다.”
하현은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팽길산이 무슨 말을 하려는 지 알 것 같았다.
지금 곧바로 가자고 하면 당연히 옆에 있는 선화분가주나, 아직 가까이에 있는 팽상철이 함께 간다고 할지도 모를 일이다.
꽤 크게 다친 그들을 자연스럽게 더 쉬게 하고픈 가주의 마음이었다.
“헌홍아. 하현이를 방으로 데려다주어라.”
“네. 아버지.”
하현은 팽헌홍과 함께 조금 전까지 그가 누워 있던 방에 돌아왔다.
“현아. 내일 아침 일찍 다시 오겠다.”
“안 그러셔도 돼요. 팽형도 느끼고 계시겠지만, 제 몸 상태는 정상입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일 테니까. 조금 성가시더라도 며칠만 잠자코 있어라.”
“하하. 알겠습니다. 덕분에 팽형이 제 호위를 서주시는 호사를 누리겠군요.”
팽헌홍이 피식 웃었다.
“그래. 그 호사 실컷 누려라. 그럼 난 가보겠다. 혹여 무슨 일이 있으면 크게 소리를 쳐라. 저기 보이는 행랑채에 있을 터이니.”
“네. 고맙습니다.”
하현과 팽헌홍은 싱긋 웃으며 헤어졌다.
방 안에 가만히 앉은 하현은 이제야 조용히 아까 꾸었던 꿈을 가만히 떠올렸다.
그 기억의 끝자락에 유지혁은 그의 기억을 지운 것이 처음이 아니라는 말을 했었다.
‘이 기억이 갑자기 떠올랐다는 것은 다른 지워진 기억들 역시 내가 떠올릴 방법이 있다는 거야.’
이번처럼 그가 기억을 찾으면 마교를, 유지혁에 대한 더 중요한 정보를 얻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정보들은 지금은 수면 아래로 숨어들어 있는 마교를 찾을 수 있게 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떻게 찾아야 할지 방법은 요원하지만, 곧 찾을 수 있을 거야. 내 몸, 내 기억이니까.’
하현은 그렇게 생각하며 차분히 그의 속으로 침잠해갔다.
* * *
[재귀주성화도흔적, 요증원(在貴州省找到了痕跡 要增援)]
(귀주성에서 흔적을 찾았다. 증원이 필요하다.)
남궁세가에 도착한 서신은 세가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이 서신을 받자마자, 검존 남궁무룡은 그의 두 아들과 현재 세가에 있는 정예대원 몇몇을 불러 모았다.
창천각에 모두가 모인 것을 확인하자, 남궁무룡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내가 직접 가겠다.”
“아버지!”
남궁기철이 놀란 눈으로 남궁무룡을 바라보았다.
“왜.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
“아버님께서는 이제 연세도 있으시고, 최근 몸 상태도 그리 좋지 못하신데 무리라도 하시면…….”
“무리……?”
남궁무룡의 눈빛이 조금 날카로워졌다.
삽시간에 분위기가 얼어붙는다.
그 눈빛의 의미를 알아챈 남궁기철이 아차 하는 표정으로 재빨리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가주님. 실언했습니다.”
“하하, 아니다. 내 나이도 나이이니, 그렇게 생각하는 게 자연스럽지.”
순간 살얼음 같았던 분위기가 남궁무룡이 웃음을 띠자 봄이 온 듯 풀어졌다.
남궁기철은 속으로 안도하며 말했다.
“아직은 가주님께서 움직이시기에 조금 이르다는 생각이 듭니다. 흔적을 찾아냈다고는 하지만, 마교가 그곳에 있다는 것이 확실한 상황도 아니고 가주님께서 세가를 너무 오래 비우시면 세가의 내정에 혼란이 올 것입니다.”
남궁무룡은 빙긋 웃으며 남궁기철을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세가의 내정이라 하였느냐?”
“네.”
“최근 수년간 세가의 내정을 실질적으로 책임지고 있는 것은 누구지?”
“그거야…….”
남궁기철은 말문이 막혔다.
몇 년 전부터 실질적인 가주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모든 업무를 보고, 정리해서 최종적으로 남궁무룡에게 보고를 하면 그가 최종결재를 하는 형식으로 업무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나는 도장을 찍은 것밖에는 할 일이 없다만?”
“…….”
남궁기철은 남궁무룡의 말에 대답할 수 없었다.
지금 그는 남궁무룡이 귀주성으로 가는 것을 반대할 명분이 모두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제는 내가 직접 가는 것에 더는 반대할 수 없겠지?”
“그러면 제가 함께 가겠습니다.”
“실질적인 가주가 세가를 너무 오래 비우면 세가의 내정에 혼란이 오지 않겠는가?”
“아…….”
남궁무룡은 남궁기철이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고는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이번에도 남궁기철은 할 말을 잃었다.
남궁무룡은 얼굴에서 장난기를 빼고는 말을 이었다.
“지금 중원에 나보다 마교에 대해서 더 잘 아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내 생각엔 나보다 강한 자도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데?”
나직이 내뱉는 말이건만, 창천각에 앉아 있는 모두는 그 말에 어떠한 반론도 제기할 수 없었다.
몇몇은 여기 있는 모두가 합공하더라도, 검존이라면 능히 감당할 수 있다고까지 생각했다.
“헛걸음이어도 좋다. 기철이와 기현이 너희는 예전에 내가 혈랑 채형석과 싸웠던 일을 기억하느냐?”
둘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의 전투 결과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하늘 위에 노니는 용이라고 생각했을 정도였던 그들의 아버지와 호각으로 맞붙어 싸우던 혈랑의 무위도 놀라웠고, 다친 아버지의 모습도 난생처음 봤기에 더더욱 그랬다.
“숨어서 지내는 동안 무슨 깨달음이 있었는지, 채형석은 무척이나 강했다. 정마대전 당시보다 훨씬 강했던 것은 물론이고, 그 당시의 교주보다도 더 강했었다.”
“그런……!”
“인제 와서 그런 무인이 나오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다. 심지어는 저번 사천에서 검마까지 나타났지 않은가? 마교의 고수들이 하나, 둘씩 나오는 지금의 시점에 우리 정파 무림에서도 고수들이 나서야 한다.”
고수.
보통 무림에서는 꽤 좋은 실력을 갖추고만 있어도, 고수로 인정해준다.
하지만 지금 남궁무룡의 입에서 나온 고수는 겨우 그런 고수들을 말하는 것은 아닐 터였다.
‘진짜 고수들…….’
남궁기현은 머릿속에 스쳐 가는 몇몇 이름이 있었다.
주원대사, 주엽진인, 취월걸개와 같은 검존의 친우들은 물론이고.
구파일방의 장문인들, 무림세가의 가주들의 얼굴도 떠올랐다.
“그렇게 되면……. 정말 전면전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 전면전. 만약 정말로 귀주성에 마교의 분타가 있다면……. 이번엔 뿌리를 뽑고 말 것이다.”
남궁무룡의 목소리에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마교와의 길고 긴 싸움을 이번에 끝내고자 하는 의지가.
똑똑-
그때, 작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 앞에 있는 하인이 두드리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냐”
“팽가로부터 온 서신입니다. 촌각을 다툴 정도로 급히 드려야 하는 서신이라고 하여 무례를 무릅쓰고 문을 두드렸습니다.”
“팽가에서……? 어서 가지고 들어오게.”
그는 하인이 서둘러 건네준 서신을 재빠르게 읽어나갔다.
내용을 모두 확인한 남궁무룡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졌다.
안에 있던 무인들은 모두 신경을 곤두세웠다.
가주가 주관한 회의를 방해하면서까지 급하게 가지고 온 서신이다.
대수롭지 않은 내용이 적혀있지는 않을 것이다.
“가주님. 팽가라면 하현이와 헌홍이가 가 있는 곳 아닙니까?”
“혹시 둘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겁니까?”
궁금증을 참지 못한 남궁기철과 기현이 남궁무룡에게 물었다.
하지만, 남궁무룡은 대답 대신에 콧김을 뿜으며 서신을 끝까지 읽어나갔다.
“흠…….”
서신을 모두 읽은 그가 침음성을 흘렸다.
잠시 무언가 고민을 하는 듯했다.
이번에 형제는 가만히 남궁무룡이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남궁무룡이 저런 표정으로 고민에 빠졌을 때는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의 생각을 방해할 수 없었다.
“나는…….”
이윽고 남궁무룡의 입이 열렸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다소 충격적인 말이었다.
“귀주성에 가지 못할 것 같구나.”
“이유를 여쭤도 되겠습니까?”
“하북에 혈마가 나타났다.”
“설마……? 마교의 삼마 중 혈마 말입니까?”
남궁무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런데 도제가 직접 나서서 그의 목을 쳤다고 한다.”
“아……! 도제 어르신이.”
“그런데…. 현이가 정신을 잃어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현이가 혈마와도 싸웠나 봅니다. 크게 다쳤답니까?”
“아니. 다행히 외상이나 내상은 없다는구나.”
그는 고개를 들어 남궁기현을 바라보고는 말했다.
“기현아. 네가 열 명의 정예대원을 이끌고 귀주성에 먼저 가거라. 나는 하북에 들러 하현이를 데려다 놓고서 따라갈 것이다.”
“알겠습니다.”
남궁기현은 갑자기 결정을 번복한 남궁무룡에게 토를 달지도 않고 곧장 고개를 숙였다.
마교의 일도 정말 중요하지만, 남궁세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족이다.
더군다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세가의 미래이자 정파무림의 미래인 하현의 일이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는 남궁무룡의 결정에 동의했다.
“오늘은 이 정도로 마무리해야 할 것 같구나. 하북으로 곧장 떠날 것이다.”
“가주님 혼자 가시려는 겁니까?”
“그래. 최대한 빨리 가려면 그게 제일일 것이니라.”
“아, 알겠습니다.”
남궁기철은 마음먹고 달리는 그의 아버지를 따라갈 수 있는 무인은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는 곧바로 그 말에 수긍했다.
남궁무룡은 그런 남궁기철에게 신뢰의 눈빛을 보내오며 입을 열었다.
“기철이는 답답하더라도 내정에 힘써주거라. 그리고 기현이는 인원 선정이 끝나면 기철이에게 확인받고서 곧장 출발해도 좋다. 정기적으로 파발을 보내는 것을 잊지 말아라.”
“네. 가주님.”
“알겠습니다.”
남궁무룡은 두 아들의 대답을 듣고서는 곧장 창천각을 나가버렸다.
그가 나갔음에도, 나머지는 자리에서 꿈쩍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기현아. 귀주에는 누구를 데리고 갈지부터 빨리 정해라.”
“네. 형님. 여기 나와 함께 가고 싶은 사람이 있소?”
기현의 질문에 몇몇 정예대원이 곧장 손을 든다.
남궁기철은 그의 아버지가 나간 문을 잠시 응시하다가, 곧바로 회의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진짜 회의는 이제부터 시작이었기 때문이다.
화아아악-!
한창 귀주성에 갈 인원을 추리고 있을 때, 그들은 한순간에 발산되는 엄청난 기파를 느꼈다.
가주전에서 시작된 이 기파는 창천각까지 뒤흔들더니, 북쪽으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남궁무룡이 창천각에서 나가고서 이 다경도 채 흐르지 않은 시간이었다.
검존 남궁무룡은 그의 막내 외손자를 찾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신법을 펼친 여파였다.
몇몇은 저절로 경외를 가져오게 하는 그의 무위에 혀를 내둘렀고, 또 몇몇은 하현에 대한 사랑에 고개를 내저었다.
남궁세가 천재 외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