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하현이 명상을 끝났을 때는 이미 아침 해가 밝게 떠오르고 난 후였다.
아쉽게도 그의 머릿속에 숨겨져 있는 옛 기억을 떠올릴 수는 없었다.
‘특별한 방법이나 계기가 있어야 기억의 봉인이 풀리는 것인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에는 그 계기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자연의 기운을 몸에 끼얹은 것이 그 계기인가 싶기도 하지만, 당장 확인 할 방도가 있는 것도 아니니.
‘그것도 아니라면……. 내 기억을 지우는 술법을 행한 자에게 다시 복구할 방법을 찾으라 하던가.’
술법을 행한 자는 유지혁이다.
하현은 그를 찾아야만 하는 이유가 한 가지 더 생겼다고 생각했다.
바깥에서 팽헌홍의 기척이 천천히 다가오는 것이 느껴진다.
아직 하현이 일어났는지를 몰라 안을 살피는 중이리라.
하현은 가볍게 일어나 먼저 밖으로 나갔다.
“팽 형. 잘 주무셨어요?”
“일어나 있었구나. 난 잘 잤다. 네 몸은 좀 어떠냐?”
“아주 좋습니다. 평소의 그 상태에요.”
간밤에 옛 기억을 떠올리지는 못했지만, 하현은 운기조식을 하며 내상을 입었던 그의 내부를 온전히 복구할 수 있었다.
“그러면 아버님께 가 보자. 어제 그곳에 다시 가 보자고 하셨으니.”
“네. 도제 어르신께서는 기침하셨겠죠?”
“그래. 아버지는 예전부터 아침잠이 별로 없으셨으니.”
그들이 팽길산에게 찾아갔을 때, 팽헌홍의 예상대로 그는 이미 일어나 몸단장까지 끝내놓은 상태였고,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깨울 것 없이 곧바로 출발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깨어 있는 하인에게 말만 전해 놓은 후에 그들은 며칠 전의 그곳으로 향했다.
경공을 전개하여 가는 와중에, 팽길산은 조심스럽게 하현에게 물었다.
“하현아. 내가 한 가지만 물어도 되겠느냐?”
“물론입니다.”
“어젯밤부터 의문이 든 것인데……. 마교는 이 자연의 기운을 추출하여 어찌하려는 것인지도 알겠느냐?”
“어르신께서는 이미 짐작하고 있으신 바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빠른 와중에도 팽길산의 마음이 전해져온다.
자신이 이해하지 못한 말을 입 밖으로 꺼내기가 어려운 모양이었다.
그래서 하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 기운을 사람의 몸에 담으려 저토록 노력하는 것 같습니다.”
“자연의 기운을 사람의 몸에 담는다니! 그게 가당키나 한 말인가?”
“그럼 마교의 술법을 통해 땅에서 지기를 뽑아내는 것은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팽길산의 말문이 막혔다.
구십이 넘는 오랜 시간을 살아왔음에도 상상하지도 못했다.
애초에 다른 사람의 기운을 뺏는 흡성대법도 전설 속에서만 내려오는 무공일진데, 하물며 자연의 기운에서야.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팽헌홍은 고개를 돌려 시야에 하현을 담았다.
그와 비등한 속도로 달리면서도 힘든 기색이 하나 없는 그를 보며 그는 가슴 속 가장 깊이 들었던 의문을 말하고야 말았다.
“그런데…… 자네는 이런 것들을 어찌 알고 있는가?”
사실 지금까지 물어보지 않은 것이 더 이상했다.
마음속의 의문이야 처음부터 들어섰지만, 이 질문을 입 밖에 꺼내는 것이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저도…… 정확히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원래 신가장에 몸을 의탁했었지만, 지금은 배신하고 마교로 돌아간 유지혁. 그자와 모든 것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유지혁이라…….”
팽길산은 말끝을 흐렸다.
그는 지금 하현이 말하는 자연의 기운을 사람에 담는 술법을 하현이 받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현이 정신을 잃었을 때, 그는 하현을 위해 끊임없이 추궁과혈(推宮過穴)을 해주며 그의 내부를 자세히 관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과도하게 정순하다는 것만 제외하면 분명히 평범한 내공이었다. 아니, 과도하게 정순하다고 말하는 순간 평범하다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게다가 분명히 소림의 월룡과 비슷한 체질에 같은 기운을 가지고 있기에 그의 내공을 전수받았다는 이야기도 분명히 들었다.
그의 몸에서 단단하게 응어리져 있는 그의 내공도 찾아낼 수 있었다.
“자세한 것은 시간이 더 지나고 봐야만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도 이전까진 자연의 기운을 이렇게 잘 느낄 수는 없었습니다. 어렴풋이 그런 것이 존재한다고만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었을 뿐. 하지만, 어떤 계기를 통해서인지 일종의 각성을 했고 그 덕에 느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말이 빨랐다.
하현도 자기 입으로 말을 내뱉으며 정리해가는 것으로 보였다.
결국, 팽길산도 알겠노라 고개를 끄덕이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잠시 후 그들은 무너지고 다 타버린 전각에 도착했다.
여러 무인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는데, 그들은 하북팽가 본가에서 온 무인들이었다.
익숙한 얼굴이 그들을 맞이했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그래. 밤새 고생이 많았다. 별일은 없었느냐.”
“네. 다가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를 보며 팽헌홍이 반사적으로 몸을 움찔했다.
그는 팽길산의 맏이이자, 팽헌홍의 큰형 팽사홍이었다.
하북팽가에서도 손꼽히는 강자인 그가 이곳에 직접 당도한 것이다.
분가라고는 하나, 하북팽가의 무인이 죽었으니, 그가 이곳에 있을 이유는 충분했다.
마침 팽사홍도 하현을 보았는지, 둘의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팽사홍의 얼굴에 의문이 깃든다.
‘어떻게……?’
겨우 며칠.
연회가 끝난 하현을 미행까지 하여 대화를 나눈 지 고작 며칠밖에 흐르지 않았다.
그런데 하현의 기도가 달라져 있다.
“우리는 아래로 내려가 보겠으니, 계속 잘 부탁한다.”
“아, 알겠습니다.”
그의 상념은 팽길산의 말로 인해 깨어졌다.
아버지를 따라 지하로 내려가는 하현을 보며, 팽사홍은 더욱 욕심이 나는 것 같았다.
이번 일이 마무리된다면 하현과는 꼭 붙어보아야겠다고까지 생각하는 그였다.
* * *
지하 가장 깊숙한 곳으로 내려간 하현은 현철로 된 벽에 달라붙어 있는 수많은 사람을 발견했다.
“이들은 누구입니까?”
“북경에서 가장 철을 잘 다루는 공방에서 온 자들이네. 본가 무인들을 부를 때, 이들을 꼭 데려오라 일렀지.”
장인들은 망치와 끌을 가지고 벽에서 현철을 조심스럽게 파내고 있었는데, 그들의 얼굴에는 힘든 기색이 하나 없었다.
오히려 이렇게 많은 양의 현철을 확보할 수 있어서 기뻐하는 얼굴로 보였다.
“도제 어르신, 오셨습니까?”
그들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고개를 숙이며 다가왔다.
백발이 군데군데 보이는 것으로 보아, 그도 중년을 넘어 노년을 바라보는 나이임이 틀림없어 보였지만, 팽길산을 큰 어른 모시듯 깍듯이 대했다.
그리고, 그와는 잘 아는 사이인 듯 막역하게 인사하는 모습이었다.
“소학산(疎學産). 일에는 진전이 있는가?”
“아주 느리지만, 진도는 있습니다. 길면 달포 안에 모두 철거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알겠네. 수고해주게. 그토록 원하던 현철을 손에 넣을 기회 아닌가?”
“덕분에 평생소원을 풀게 생겼습니다.”
그는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하현은 그에게 느껴지는 이질적인 기운에 그를 자세히 보았다.
‘고수……인가?’
분명히 무공을 익힌 것 같은 느낌은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강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 것 같냐고 하면 그것은 또 아니다.
공력은 느껴지지만, 무인에게서는 으레 느껴지는 투기(鬪氣)나 살기(殺氣)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학산. 이쪽은 내가 말했던 그 아이네.”
“아! 검존 어르신의 외손자라는!”
그는 남궁무룡도 익히 알고 있는 듯, 익숙하게 그를 부르며 하현의 앞으로 다가왔다.
“반갑네. 하북 철무문(鐵撫問)의 문주 소학산이라고 하네.”
“처음 뵙겠습니다. 남궁세가의 남궁하현입니다.”
하현은 소학산이 인사하며 내미는 손을 반사적으로 잡아버렸다.
보통의 무인들은 악수하지 않고, 포권으로 서로의 예를 다한다.
눈앞의 소학산은 정말로 무림인은 아닌 것으로 보였다.
“철무문은 옛날에 여러 공방과 장인들이 모여 만든 대장장이들의 문파라네. 문중에 내려오는 내공심법을 이용해서 철을 제련하고, 여러 가지를 만들고 있지.”
“그랬군요. 어쩐지 무공을 익히신 것 같기는 했습니다.”
“자네 할아버님과는 수십 년 전에 철탑을 쌓을 철괴를 깎아드리며 친분을 맺게 되었지.”
청룡각 수련생에서 정식 대원으로 승급하기 위한 시험에 무너뜨려야 하는 철탑이 저절로 떠올랐다. 당시에도 이렇게 정교한 철괴를 어떻게 만들었나 했는데, 그것이 이 사람의 작품이었다.
그때의 생각을 떠올리며 고개를 주억거리던 하현을 보며 소학산이 갑자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엇……?!”
“왜 그러십니까?”
“자네 허리에 있는 그 검……!”
하현이 자신의 허리를 내려보았다.
검집에 들어가 있는 적룡검이 눈에 들어왔다.
“적룡검 말씀이십니까?”
“그래! 적룡검. 청룡검과 함께 두 자루가 있었을 텐데. 혹시 맞는가?”
“맞습니다. 어찌 아십니까?”
하현의 반문에 그가 호탕하게 웃고는 말을 이었다.
“이렇게 우리 철무문과 연이 닿는군. 청룡검과 적룡검은 지금은 타계하진 전대 문주님의 역작 중 하나라네. 호수(護手) 아랫부분 끝에 보면 무(撫)라는 글자가 쓰여 있을걸세.”
“아! 있습니다. 무슨 의미인지 항상 궁금했었는데.”
“그게 우리 철무문의 표식이라네. 그 검들의 행방은 알 수가 없었는데, 인연이군. 한 번 볼 수 있겠나?”
하현은 거리낌 없이 적룡검을 꺼내 그에게 건네주었다.
본디 검을 타인에게 건네는 것은 금기 중의 금기이나, 하현은 크게 개의치 않아 보였다.
“오오…… 이 이렇게나 잘 관리되어 있다니. 적룡아. 아낌받고 있구나.”
그는 마치 아기를 다루는 듯 적룡검을 한참 어루만지더니 하현에게 다시 돌려주었다.
“청룡검의 소재는 어떻게 되는지 물어도 되겠는가?”
“청룡검은 저희 가문의 형님이 가지고 있습니다. 저와 한 자루씩 나누어 가졌지요.”
“헛! 혹여 청룡신검 남궁민을 말하는가?”
“맞습니다.”
“하하하! 청룡신검과 청룡검이라니. 천생연분이 따로 없구만!”
그가 무엇이 그리 기쁜지 손뼉까지 쳐대며 기뻐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팽길산이 피식 웃으며 하현에게 말했다.
“자네가 이해하게. 원래 여기가 검이나 철에 관련된 이야기만 나오면 정신을 못 차려서 말이야.”
“아닙니다. 저도 재밌었습니다.”
하현은 호들갑스럽게 반응하는 소학산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좋아하는 바를 진심으로 즐기는 듯한 태도가 인상적이었다.
어째서인지 다른 사람들이 새로운 무공을 익히며 즐거워하는 자신을 볼 때 이런 느낌일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럼 계속 고생하게나. 우리는 들어가 볼 테니.”
그들은 장인들을 지나쳐 더욱 안쪽으로 들어갔다.
가장 끝에 다다르자, 하현의 입에서는 저절로 감탄이 튀어나왔다.
그가 빨려 들어갔던 그 벽이 갈기갈기 찢겨 있었는데, 보통 공력으로 해낸 것이 아닌 것 같았다.
그는 반사적으로 팽길산을 돌아보았다.
팽길산은 그 시선이 머쓱한지 콧등을 긁으며 말했다.
“일격에 가르지 못했다. 수백 번의 칼질을 하고 나서야 저렇게 만들었지.”
사실은 겸양의 말이 필요 없는 대단한 결과다.
하현은 그 절단면을 손으로 쓸어보며 안으로 들어갔다.
절단면은 깔끔하지 않았다.
거칠거칠한 게 잘못 스쳤다간 살갗이 찢어질 수도 있을 것 같은 정도.
슬쩍 팽길산의 도를 바라봤지만, 도는 어디 한 군데 상한 것 같지도 않다.
엄청난 내공으로 도를 보호한 것이다.
‘대단해.’
주변의 초고수들을 바라보며 하현은 그가 나아갈 방향이 보이는 듯했다.
“하현아. 지금도 그 기운이 느껴지느냐?”
“아니요. 이제는 멈췄습니다. 그 원통을 뽑아내면서 땅이 기운을 뿜어내기를 그만둔 것 같습니다.”
하현은 그렇게 말했음에도 굳이 안을 들어가 보았다.
조금씩 새어 나오던 자연의 기운들도 모두 멎었다.
이곳을 더 파 내려가면 다시 뿜어낼지도 모를 일이지만.
원통이 꽂혀있던 곳에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나를 확인하려 구멍 속으로 내려가 보기도 했지만, 삼 장(약 10m) 정도의 평범한 구멍일 뿐, 어떠한 단서도 찾을 수 없었다.
하현은 아쉬운 대로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말뚝 하나를 집어 들고는 다시 올라갔다.
소학산에게 이 말뚝의 재질이 무엇인지를 묻기 위함이었다.
“아, 아니. 이걸 어디서 가져온 겐가?”
말뚝을 보자마자, 그는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현철을 눈앞에서 보고 있는 그다.
이 말뚝은 현철보다 더 희귀한 금속임에 틀림없었다.
“이건 오금철(烏金鐵)이라 하는 금속이네. 튼튼하고 탄성이 좋아 검을 만드는 게 대부분일진대, 왜 말뚝을 만들어 놓았지?”
그가 의문을 흘렸지만, 하현과 팽길산은 그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를 보며 의문을 흘렸다.
“어르신 들으셨습니까?”
“그래. 내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니구나.”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팽길산이 엄숙한 얼굴로 소학산에게 말했다.
“자네. 내가 괜찮다고 하기 전에는 절대로 이 위로 올라와서는 안 되네. 자네뿐만 아니라, 철무문 장인들 모두.”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팽길산이 말하는 사이, 하현은 이미 검을 뽑아 들고 경공을 펼칠 태세였다.
스르렁-
도제 역시 허리춤에서 그의 애도를 꺼내며 말했다.
“싸움이 있는 모양이네. 불청객이 온 모양이야.”
파앗-!
그들은 순식간에 신법을 전개해 뛰어 올라갔다.
조금 전 아주 작은 소리지만, 그들의 귀에 챙- 하는 금속 부딪히는 소리가 들린 까닭이었다.
남궁세가 천재 외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