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화
하현과 팽길산이 아래로 내려가고, 팽사홍은 그의 막냇동생인 팽헌홍을 바라보았다.
‘헌홍이의 성장세도 무시무시하군.’
동생이라고는 하지만, 아버지와 아들이라고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나이 차다.
그렇기에 그는 애초에 팽헌홍을 경쟁 상대로 보지도 않고 있었다.
차기 가주는 당연히 자신일 것이라 생각했고, 팽헌홍은 그다음 대와 가주 자리를 놓고 경쟁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팽헌홍을 자세히 바라보며 그는 자신의 생각이 틀렸었음을 깨달았다.
‘이미 무홍이와도 필적할 만큼 성장했다. 우리 형제 중 자질로만 따지면 헌홍이가 가장 위였다는 것인가?’
그는 문득 팽헌홍이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닿으니, 그 생각의 고리는 자연스럽게 아버지와 함께 지하로 내려간 하현에게까지 닿았다.
‘하기는…… 그런 괴물의 곁에서 따라가려 하니 당연히 무섭도록 발전할 수밖에.’
조금 전 그가 생각한 것처럼 하현은 괴물이라는 말 말고는 따로 표현할 말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현의 나이 때에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를 떠올려보니, 아버지께 무공을 배우며 투로를 계속 잊어버려 혼났던 일들이 생각날 뿐이었다.
“헌홍아.”
“네. 큰형님.”
입으로 무언가를 중얼거리던 팽헌홍이 팽사홍을 돌아보며 대답했다.
“뭘 그렇게 외고 있느냐. 비 맞은 중도 아니고.”
“이것은…….”
팽헌홍은 잠시 말을 멈칫했다.
있는 그대로 말해도 될지를 고민하는 듯했다.
그 얼굴을 보며 팽사홍은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놈은 나를 경쟁자로 생각하는 것이 확실하다.’
그는 어째서인지 웃음이 나올 뻔한 것을 참아내었다.
그때 팽헌홍이 고민을 끝냈는지 입을 열었다.
“제 심법 구결 중 아직도 온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어 입으로 계속 외워봤습니다. 입 밖으로 말을 내뱉으면 조금이라도 더 이해되는 부분이 있을까 하여.”
“심법 구결?”
팽사홍의 얼굴에 의문이 든다.
하북팽가에서는 어릴 때 심법 구결을 모두 외게 한다.
패도적인 도법을 구사하는 가문이지만, 모든 것의 근간은 내공심법이라는 팽길산의 가르침에 따라서였다.
팽헌홍이 팽사홍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아직 팽사홍은 하현의 도움을 받아 혼원벽력신공을 만들어낸 것에 대해 알지 못한다.
“최근에 새로운 심법을 익힐 기회가 있었습니다. 저만 다른 도법을 익히고 있는 것은 형님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팽사홍이 고개를 끄덕였다.
팽헌홍에게 혼원벽력도를 전수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처음 아버지에게 들었을 때, 자신은 팽길산이 팽헌홍을 후계 구도에서 떨어뜨릴 테니 막냇동생을 해코지하지 말라는 뜻으로 받아들였었다.
“혼원벽력도의 복원에 큰 진전이 있었습니다. 그에 따라 혼원벽력도에 맞는 심법을 창제하여 익히고 있습니다.”
“창제……?”
그가 놀란 눈으로 되묻는다.
팽헌홍의 입에서 무공을 창제했다는 말이 비현실적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그 얼굴을 눈치챘는지, 팽헌홍이 곧장 대답했다.
“제가 온전히 만든 것은 아닙니다. 다 만들어진 밥상에 제가 혼원벽력도를 복원하며 깨달은 지점을 아주 조금 얹은 것뿐이지요.”
“그럼 아버지께서 만들어 주신 거냐?”
“아니요. 아버지께서는 혼원벽력도를 익히시지도 않으신 것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러면 누구냐?”
그때 팽사홍의 뇌리에 한 명의 이름이 스친다.
그는 자신이 물어보고, 자신이 곧장 대답했다.
“설마…… 남궁하현이냐?”
“그렇습니다. 혼원벽력도의 진전을 이은 것은 저 혼자만이 아닙니다. 검법의 형태로, 그만의 형태로 변형되었지만, 하현도 혼원벽력도의 진전을 이었습니다.”
“그런……!”
팽사홍이 두 눈을 부릅떴다.
혼원벽력도는 가문에서 내려오는 신공이다.
그런 신공이 외부로 나갔다는 소리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팽헌홍은 평온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이미 아버님께서도 알고 계시는 일입니다. 그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시지 않은 이유는 하현이 없었더라면 혼원벽력도도 이만큼 복구해낼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팽헌홍의 눈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 눈빛을 보니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원래 팽사홍이 기억하는 팽헌홍은 이런 아이가 아니었다.
항상 주변에 날이 서 있고, 융통성이 없어 대화가 잘 통하지 않는 아이였다.
게다가, 주변 사람들을 신뢰하지 못하여 항상 의심의 눈초리를 하고 있었다.
그런 팽헌홍이 수년 만에 나타나 저런 눈빛을 보여줄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었다.
“이것 참…… 전통을 깨었다고 분개해야 하는지, 전통을 이어주었다고 은인으로 대해야 할지…….”
“은인으로 대해 마땅합니다. 그리고 그 덕분에, 우리 가문은 천하제일가와 천고 제일의 기재를 가장 가까운 우방으로 두게 된 것이니까요.”
“천하제일가?”
팽사홍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아무리 남궁세가에서 유학하기로서니, 자신의 가문을 두고 다른 가문을 천하제일가로 지칭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네. 남궁세가에서 오래 있었던 저여서 더 확실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의 천하제일가는 남궁세가입니다.”
“허!”
팽사홍이 헛웃음을 터뜨리자, 팽헌홍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형님. 저는 ‘지금’의 천하 제일가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현재를 확실히 직시하고, 가문의 힘을 키운다면 분명 머지않은 미래에는 우리가 천하제일가에 오를 수 있을 것입니다.”
“흠…… 그래. 네 뜻은 알겠다.”
비로소 팽사홍의 미간의 주름이 풀렸다.
쓸데없이 자존심을 세우는 것이 아닌, 실질적으로 발전해나갈 방안을 찾자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이전 같으면 화를 냈겠지만…….’
그는 알겠다는 듯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하북팽가는 정파지만, 힘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가문이다.
예전 팽헌홍은 실력에 비해 말이 앞서는 아이였다.
꽤 좋은 자질을 가지고 있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으나, 세가의 미래를 논할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지금은 이미 세가의 중요한 부분을 책임질만한 무인으로 성장했다.
“천하제일가? 허허. 어디 정파의 위선자들끼리만 줄 세워놓은 오대세가니, 팔대세가니 하는 놀음으로만 천하를 갈음한단 말인가?”
그때 홀연히 나타난 중년인 하나가 나무 사이에서 나오며 입을 열었다.
그는 흑색 장포를 입고 있었는데, 그 재질이 무척이나 부드러운 것이 아주 고급의 장포로 보였다.
그는 아직도 이십 장(약 60m) 정도 되는 꽤 먼 거리에 있었음에도, 그의 목소리는 귀에다 대고 말을 하는 것처럼 또렷이 들렸다.
“누구……?!”
팽사홍이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사람이 이토록 가까이 올 때까지 기척을 알아채지 못했다.
게다가 저 중년인이 나온 숲에도 순찰하고 있던 팽가의 무인이 있다.
‘그들 모두가 저 사람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인가? 그게 아니면…… 모두 소리도 없이?’
중년인의 발걸음은 무척이나 가벼웠다.
눈을 흐리게 하고 보면 마치 공중을 걸어 다니는 것 같이 보일 정도의 발걸음이었다.
“천하제일가는 남궁이니 팽가니 하는 곳이 아니라, 우리 양가니라.”
“양가?”
팽사홍이 반사적으로 물었다.
그가 아는 양가가 몇몇 있기는 하지만, 천하를 논할 정도의 가문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과거 고절한 창법으로 양가창법이라는 걸출한 무공을 남긴 가문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이미 역사 속으로 스러진 지 오래였다.
“쯧쯧. 이래서 어린 것들이랑은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양가라고 했는데, 우리 신강양가(新疆楊家)를 떠올리지도 못하다니.”
팽헌홍이 눈을 부릅떴다.
예전에 하현이 사천에 다녀와서 말해준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신강양가라면 마교의……?!”
“오! 네놈이 더 어려 보이는데, 우리 가문의 이름을 잘도 알고 있구나.”
하현은 현재 마교가 신강양가(新疆楊家), 천마유가(天魔劉家), 대산천가(大山陳家)라는 세 가문이 마교를 떠받치고 있다고 말해주었었다.
그 말인즉슨, 눈앞의 저자는 마교의 고수라는 소리였다.
챙-!
팽헌홍이 반사적으로 도를 꺼내 들었다.
이곳은 마교에서 사용하던 곳을 탈취한 것이나 다름없다.
상대가 좋은 뜻으로 여기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
팽사홍도 마교라는 단어를 듣고서 낌새를 눈치챘는지, 곧바로 도를 뽑아 들었다.
그런데 그의 뒤에서 한 사람이 더 나왔다.
“삼 장로! 먼저 그렇게 가시면 어쩌자는 것이오? 아직도 뒤에 남은 떨거지들이 한가득이었거늘.”
“클클. 나는 이렇게 혈혈단신이고, 자네는 많은 수하들이 있으니 걱정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이런 아무것도 아닌 일에 내 수하 하나가 부상을 입었단 말이오. 우리 마륜대(魔輪隊)는 소수정예일진대, 한 명 한 명이 엄청난 손실이란 말이오.”
“흥! 겨우 이깟 놈들한테 부상을 당하는 놈이라면 그다지 정예라고 할 수 없을듯한데?”
그들은 팽사홍과 팽헌홍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자기들끼리만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를 귀 기울여 듣던 팽사홍이 싸늘하게 말했다.
“남은 떨거지라니. 혹시 숲에 있던 우리 가문의 무사들을 보고 말하는 것이냐?”
이제야 그들은 팽사홍을 되돌아보았다.
잊어버렸던 것이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한 태도였다.
“너도 하북팽가의 떨거지인가?”
“네놈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감히 입에 올릴 가문이 아니다!”
그러자 장로라고 불린 중년인이 팽사홍을 노려보며 말했다.
“감히? 지금 내 앞에서 감히라고 말했는가?”
쿵- 후욱!
그가 팽사홍에게 한 발자국 다가가며 진각을 밟았다.
굉장히 먼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가진 고고한 기파가 팽사홍과 팽헌홍에게까지 닿았다.
“…고수!”
그의 기운이 부딪히자마자, 팽사홍은 두 눈을 부릅떴다.
팽사홍도 하북팽가에서 내로라하는 초고수 중의 한 명이건만, 무언가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을 느꼈기 때문이다.
중년인은 농밀한 기운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팽사홍에게 말했다.
“아해야. 혈마를 죽인 것이 네 솜씨냐?”
팽사홍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에 중년인과 그 뒤에 서 있는 자의 기운을 가늠하려 조심히 감각을 끌어올려 유심히 그들을 보고 있었을 뿐이다.
“귀가 먹었느냐? 네 솜씨냐고 물었다.”
본래 혈마와 연이 있었는지, 그는 계속해서 흉수를 물었다.
팽헌홍이 대답하려는데, 그가 스스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되었다. 흥미가 떨어졌으니. 넌 혈마를 죽인 흉수라도 죽고, 아니라도 오늘 죽을 것이다.”
그때 옆에서 입을 꾹 다물고 있던 팽헌홍이 입을 열었다.
“몸이 시뻘게지는 노인네를 말하는 것이라면 내가 죽였다.”
그러자 중년인의 얼굴에 의아함이 깃든다.
“겨우 네 수준으로 혈마를 베었단 말이냐? 뭐. 안될 건 없지. 수비 일변도의 반푼이는 공력을 운용하는 틈만 잘 노리면 될 테니.”
“말이 너무 길군. 무인은 말 대신 무공으로 말하는 것 아닌가?”
팽사홍이 말하고는 곧장 목소리에 내공을 실어 크게 소리쳤다.
“팽가 무인들은 이쪽으로 집결하라!!!”
상당한 내력을 실어 멀리까지도 퍼져가는 목소리였다.
‘내 목소리가 아버지에게 닿았어야 했는데.’
팽사홍이 소리를 지른 것은 팽가 무인을 부르기 위함도 있지만, 지하에 있는 아버지에게 목소리를 닿게 하려는 것이 진짜 목적이었다.
“어린 것이 제법 그럴싸한 공력을 가지고 있구나.”
그는 장포를 촥- 하고 펼쳐 펄럭이는 다리 부분을 뒤로 넘기더니 말을 이었다.
“나는 신강양가의 장로 양효승이다. 네 놈의 목숨을 가져갈 자의 이름 정도는 가르쳐 주는 것이 인지상정이겠지.”
“하북팽가의 팽사홍이다.”
“사홍? 팽 늙은이의 첫째 아들이었군.”
양효승은 팽사홍의 이름을 알고 있는 듯했다.
“마륜대 대주 양진이다. 흑표(黑豹)라 불리던 것이 바로 나다.”
양손에 수투를 끼고 있는 것으로 보아 권각법을 쓰는 자로 보였다.
그는 자연스럽게 팽헌홍을 바라보았다.
“내 상대는 자연스럽게 네가 되겠군. 이름이 뭐지?”
“하북팽가의 팽헌홍이다.”
“처음 듣는 이름이군. 하지만 홍자 돌림인 것으로 보아 둘이 형제쯤 되는가 봐. 그렇지?”
양진은 여유롭게 말하며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쿠구구-
패도적인 기파가 그에게서 천천히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그는 겉으로 발산되는 것이 아닌, 속으로 침잠되는 듯한 기운으로 몸 주변을 감쌌다.
그 모습이 꼭 검은 가죽을 뒤집어쓴 것 같았는데, 어째서 흑표라고 불리는지 알 것 같았다.
‘보통 공력이 아니다.’
팽헌홍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양효승과 양진이 내뿜는 기파는 지금까지 그가 겪어왔던 어떠한 적들보다도 더 강력했다.
솔직히 말해, 자신이 몇 합을 받아낼 수 있을지도 확실히 장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열 합만 버티자. 아버지가 올라오실 거야.’
그는 목표를 바꾸고서는 다시 눈에 활기가 돌았다.
남궁세가 천재 외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