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팽헌홍은 생각했다.
아무리 실력 차가 크다고 하더라도, 최소 열 합은 버틸 자신이 있다고.
“호오. 괜찮은 표정이구나. 네 실력도 그 표정만큼 하는지 확인해 봐야겠다.”
두두두두- 화악!
양진이 땅을 접어 달려오는가 싶더니, 묵직한 기운을 실은 주먹이 날아왔다.
특별한 초식도, 기교도 없는듯한 주먹이건만 그 압박감이 상당했다.
쩌엉!
팽헌홍이 그의 주먹을 그대로 올려쳤다.
그러자 마치 징 울리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주먹과 칼의 부딪힘임에도 그랬다.
잘 단련된 권각의 달인은 온몸이 흉기라 했는데, 눈앞의 양진이 딱 그 모양새였다.
“오호.”
양진의 얼굴에 흥미가 깃든다.
팽헌홍이 이토록 쉽게 자신의 주먹을 막아낼지 몰랐다는 표정이다.
콰아앙-!
그때 그들의 옆에서는 마치 벽력탄이라도 터진 것 같은 폭발음이 터져 나온다.
양효승과 팽사홍의 병장기가 서로 부딪히며 만들어낸 소리였다.
그 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팽헌홍의 눈동자가 돌아갔다.
“애송이, 네가 한눈팔 여유는 없을 텐데?”
“헙!”
우웅-
어느새 팽헌홍의 코앞까지 다가온 양진의 손에 엄청난 기운이 몰려들었다.
아주 잠시 한눈을 판 결과였다.
그때 팽헌홍의 머리에 떠오른 것이 있었다.
대연검법.
하북팽가가 아닌 남궁세가에서 배운 수비 특화의 검법이 팽헌홍의 도에서 펼쳐졌다.
아주 짧은 시간에 생각해낸 수법이다. 하지만 수천, 수만 번의 연습 덕분에 꽤 완성도 있는 검법이었다.
쿵! 쿵! 쿠과과과-
몇 번이나 내뻗는 양진의 주먹이 닿을 때마다, 팽헌홍의 도가 비명을 질렀다.
연신 뒤로 물러나며 대연검법으로 막아내었기에, 팽헌홍에게는 큰 충격이 가지 않았지만, 그 충격은 고스란히 그의 도가 감당해야 했다.
도면이 아닌, 도날로 막아냈음에도 그랬다.
“하하! 제법이구나!”
쿠웅-!
이전의 공력 운용을 털어내는 듯 발을 구름과 동시에 그는 또다시 팽헌홍에게 쏘아졌다.
빙글거리며 웃는 얼굴 아래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패도적인 권격이 함께였다.
엄청난 속도였건만, 어느새 팽헌홍은 그 속도에 눈이 있었다.
샤악-
이번엔 팽헌홍이 동시에 출수했다.
날카로운 도 날이 번뜩였다.
마치 힘과 힘의 대결을 펼치자는 듯한 출수에 양진이 어디 해보라는 듯 계속해서 주먹을 뻗었다.
그리고, 주먹과 도가 부딪히려는 찰나.
스윽.
팽헌홍이 휘두른 도의 궤적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의 주먹을 아주아주 미세한 정도로 피해 갈 만큼의 작은 변화였다.
하지만, 그 변화의 결과는 작지 않았다.
빠악-!
팽헌홍의 도가 양진의 가슴을 때리는 데 성공했다.
도에서 묵직한 감각이 느껴지는 순간, 팽헌홍은 보법을 뒤로 전개하여 양진과 거리를 벌렸다.
‘무슨 사람의 몸이……?’
타격을 입힌 것은 팽헌홍이건만, 도리어 낭패한 표정은 그가 지었다.
도에서 느껴지는 감각은 사람이 아니라, 바위나 아름드리나무를 향해 칼을 휘두른 듯한 느낌이었다.
양진을 바라보니 타격이 전혀 없어 보이지는 않지만, 결코 치명상을 입은 모습은 아니다.
그는 도에 의해 갈린 자신의 앞섬을 내려보았다.
얕은 상처를 입었는지, 아주 조금씩 피가 배어 나오기는 했지만, 상처라고 하기보단 생채기라고 해야 더 어울릴만한 상처였다.
“하하. 정말 제법이구나. 마지막에 호신기를 끌어올리지 않았더라면 나도 큰일이 날 뻔했어.”
그는 아직도 여유롭게 말했다.
쾅- 쾅- 콰아앙-!
옆에서는 팽사홍과 양효승이 서로 칼을 주고받으며 주변을 아수라장으로 만들고 있음에도 그랬다.
“여흥은 여기까지다. 더 놀아주고 싶지만, 빨리 돌아가야 해서.”
지금까지 별다른 초식도 쓰지 않던 양진이 두 팔꿈치를 등으로 가게 하는 기괴한 기수식을 취했다.
팽헌홍 그가 펼칠 수 있는 최고의 도법인 혼원벽력도를 준비했다.
우웅-
혼원벽력신공이 그의 기운과 정신을 일깨워주며, 한층 세상이 또렷이 보였다.
눈앞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는 양진의 모습도 똑똑이 시야에 들어왔다.
부웅- 후웅-
그가 도를 몇 번 휘두르며 감각을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그리고.
쾅-!
소리가 한 번만 들렸을 정도로 두 무인은 동시에 땅을 박차 서로에게 쇄도했다.
고오오오-
팽헌홍의 도와 양진의 주먹.
둘의 병장기는 서로 닿기 직전에 공중에서 멈춰 섰다.
각자가 내뿜은 기파가 공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팽헌홍의 눈이 흔들렸다.
양진이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것이 본능적으로 느껴져 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지금 필사적으로 기운을 내뿜는 중이었다.
온몸의 혈관을 쥐어 짜내는 것 같고, 목에 오른 핏줄도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올랐다.
파악-
마륜대주 양진은 두 손이 아닌, 왼손만으로 팽헌홍의 도격을 감당하는가 싶더니 자유로워진 오른손으로 팽헌홍의 왼손을 잡아채었다.
“잡았다.”
우득-
양진은 잡은 손목을 이대로 부숴버리려는 듯 손에 힘을 주었다.
그 덕에 팽헌홍이 겨우 붙잡고 있던 집중이 무너져 내리며 기파가 흔들렸다.
겨우 소강상태를 유지하고 있던 그의 도와 양진의 왼손은 급격하게 균형을 잃기 시작한다.
“크윽-”
팽헌홍은 고통에 신음성을 내뱉으면서도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공력을 이끌어 올렸다.
후욱-!
어려서부터 수많은 영약을 접했고, 최근엔 혼원벽력신공을 익히며 또 한 번 내력이 진일보한 팽헌홍이었다.
그의 몸으로부터 거대한 기운이 폭사하며, 양진을 밀어내었다.
“……!”
이번 수는 양진마저 조금은 당황하게 했을 정도였다.
팽헌홍이 이토록 막대한 내공을 가지고 있을 줄 몰랐던 그의 손이 아주 잠시 느슨해진 틈을 타 팽헌홍이 다리를 올려쳤다.
“큭!”
팽헌홍의 손목을 쥐고 있던 오른팔을 다리로 얻어맞은 그가 팽헌홍의 손목을 놔 버렸고, 팽헌홍은 서둘러 뒤편으로 몸을 빼냈다.
“으윽.”
팽헌홍은 곧장 왼손을 감싸 쥐었다.
벌겋게 피어오른 손자국이 아직도 양진이 그의 손목을 움켜쥐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일게 했다.
팽헌홍은 머리가 핑 도는 것을 느꼈다.
일순간에 너무 큰 기운을 뿜어낸 탓이다.
그는 텅 비어버린 단전을 느꼈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척 태연하게 일어나 다시 양진에게 도를 겨누었다.
“이것 참. 지금 죽이기에는 아까운 인재로구나. 순식간에 빠져나간 내공의 결핍으로 눈앞도 잘 보이지 않을 진데, 그 정도의 기개를 보이다니.”
하지만, 그의 실력을 아득히 상회하는 고수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팽헌홍은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허나, 그렇기에 더욱 지금 죽여야겠다. 살려두었다가는 훗날 우리 교에 무슨 해악을 가져올지도 모를 일이니!”
쿵- 쿵-
그가 팽헌홍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는 굳이 보법을 밟아오지도, 신법을 전개하지도 않으며 천천히 기운을 끌어올리며 다가왔다.
그럼에도 팽헌홍이 어찌할 방도는 없었다.
지금 후들거리는 다리를 붙잡고 겨우 서 있는 것만으로도 한계였다.
“오랜만에 즐거웠다. 애송이!”
그는 왼손을 앞으로 뻗고, 오른 주먹을 어깨까지 잡아당기는 기수식을 취하고는 그대로 팽헌홍을 향해 내뻗었다.
펑-!
주먹의 속도가 어찌나 빨랐던지, 원래 주먹이 있던 곳에서 작은 폭발음이 들린다는 착각까지 일 정도였다.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사이.
반사적으로 감았던 팽헌홍의 눈이 채 뜨여지기도 전에, 양진의 주먹이 그의 얼굴까지 닿았다.
쩌어엉-!
화악
팽헌홍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엄청난 굉음과 함께 그의 얼굴을 밀어낼 정도로 강력한 바람이 그의 얼굴을 밀어내었다.
내공으로 귀를 보호했음에도 불구하고 귀 안쪽이 간질간질할 정도로 큰 소리였다.
바람이 멎고, 팽헌홍은 비로소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처억-
팽헌홍의 앞을 지키는 것은 거대한 도와 거대한 등이었다.
“아버지!”
“다친 곳은 없느냐?”
“없습니다.”
그는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에 힘을 주어 겨우 일어났다.
아버지에게 꼴사나운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었다.
“일단 저기 한산한 곳으로 벗어나 운기부터 하여라. 이 자는 내가 맡을 터이니.”
팽헌홍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싸움의 권역에서 벗어나 멀찍이 떨어져 자리를 잡고 앉았다.
“참으로 감동적인 재회군. 팽길산.”
“마륜대주. 삼십 년 전에 그렇게 당해 놓고서도 중원에 다시 발을 디딜 용기가 났나 보지?”
“섬서에서의 이야기라면 그 입을 닥쳐라. 화산의 장문인과 비겁하게 합공을 펼치지만 않았어도, 내가 패배하는 일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비겁하다고 하기에는 네놈도 수십의 부하와 함께였지 않는가?”
둘은 이미 서로를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럴 만도 했다.
정마대전 당시 각자의 진영 가장 최전선에서 싸웠던 그들이다.
몇 번이고 전장에서 부딪히지 않을 리 없었던 것이다.
콰아앙-!
그들의 옆에서는 다시 한번 굉음이 터져 나왔다.
양효승과 팽사홍이 싸운 여파였는데, 팽사홍이 땅으로 내팽개쳐지듯 떨어지며 내는 소리였다.
둘의 싸움에서 팽사홍은 밀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입가에는 가는 피를 흘리고 있었고, 의복도 이미 여기저기 흙투성이가 되어 있다.
팽길산은 팽사홍의 상대를 보고서는 놀란 눈을 했다.
“마통검(魔通劍)……?”
팽길산은 한눈에 그를 알아보았다.
마통검 양효승.
그는 과거 정마대전에서 청성파의 장문인을 격살한 전적이 있는 초고수였다.
마교의 삼대 가문 중 하나인 신강양가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의 강자가 바로 그였다.
그의 존재만으로도 놀랄 일인데, 팽길산은 다른 것 때문에도 또 놀랐다.
그는 나이를 먹지 않은 것처럼 삼십사 년 전의 외모와 지금의 외모가 똑같았기 때문이다.
“마통검까지? 이곳이 그렇게 중요한 곳인가? 도대체 무슨 꿍꿍이지?”
“곧 죽을 목숨이 궁금한 것도 많구나.”
“네놈의 실력으로 나를 죽일 수 있을 것 같으냐?”
“크하하. 그 기백은 여전하구나. 그런데 잊고 있는 것 같은데?”
슥 스스슥-
그때 양진이 서 있던 곳 뒤에 있는 나무 사이에서 꽤 많은 무인이 걸어 나왔다.
그들이 입고 있는 무복은 양진이 입고 있는 그것과 같은 모양이었다.
“마륜대…….”
그들의 검에는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는데, 주변의 팽가 무인들을 죽이며 이곳까지 온 듯했다.
“난 누구와는 다르게 방심하지 않아서 말이야. 마륜대! 나와 너희들은 저 늙은이를 최대한 오래 묶어두는 것에 집중한다. 섣불리 나서서 당하지 않도록!”
그리고 그는 연신 마통검에게 밀리고 있는 팽사홍을 슬쩍 보고는 팽길산에게 말했다.
“큰아들을 제법 잘 키웠군. 이제 곧 죽을 목숨 같아 보이지만.”
양진이 킬킬거리며 웃었다.
“가주님!”
그 와중에 살아남은 팽가의 무인들이 팽길산의 뒤쪽으로 결집했다.
그들의 숫자도 어림잡아 스물 정도는 되어 보였다.
양진은 그들을 보았음에도 표정에서 여유가 사라지지 않았다.
“숫자가 열이 늘었든, 스물이 늘었든 아무 상관없다. 우리는 발목만 잡는다. 장로께서 저자를 죽이고 이쪽에 가세하면 균형은 무너지게 되어 있으니.”
팽사홍이 당금 무림에서는 인정받는 엄청난 고수라고는 하나 전대의 노고수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는 연신 신형을 뒤로 미루며 마통검의 검을 겨우겨우 받아내고 있었다.
초식과 내력에서 모두 부족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팽사홍은 자신의 죽음을 생각했다.
하북팽가의 일반 무사들은 이 엄청난 기파의 소용돌이를 파고들 능력이 없었고, 아버지는 현재 양민과 대치 중이어서 자신을 도우러 올 수가 없다.
‘큰 변수가 없다면 이대로 죽는 수밖에 없다.’
그의 마음속에는 아주 조금씩 절망이 깃들고 있었다.
패배감과 더불어 스스로에 대한 무력감이 서서히 고개를 내밀었다.
‘나는 겨우 이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여태껏 그리도 자만했다는 것인가?’
터엉!
올려치는 마통검의 검에 의해 팽사홍의 팔이 번쩍 들렸다.
그 덕에 훤히 드러난 가슴을 향해 마통검의 검이 무자비하게 짓쳐들어온다.
쒜에에엑-!
공기를 찢어버리며 베어오는 검에 팽사홍은 온 힘을 다하여 도를 아래로 내리쳤지만, 마통검의 검이 그의 도보다 빠를 것은 자명해 보였다.
팽사홍이 가슴에 호신기를 최대한 끌어모으는 가운데.
피잉-!
그의 귀 뒤에서 빛 한줄기가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빛줄기는 말 그대로 섬광의 속도로 나아가 팽사홍의 가슴을 베어내려는 마통검의 검에 적중했다.
카앙-! 채앵!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검의 속도가 현격히 줄어들었다.
그 덕에 팽사홍은 도를 내리쳐 마통검의 검을 겨우 막아낼 수 있었다.
마통검이 팽사홍의 뒤를 노려보았다.
“웬 놈이냐! 당문의 종자가 어떻게 이곳에 있는 것이지?”
그의 검을 막아낸 것은 한 자루의 비검이었다.
일전 사천당문과도 싸워본 적이 있는 그는 조금 전 그의 공격을 방해한 것이 사천당문의 무인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저벅-
그러나 땅에 떨어진 비검을 회수하며 나타난 것은 당문의 사람이 아니었다.
“하현……!”
그는 하현이었다.
순식간에 팽사홍을 구명한 그는 팽사홍의 옆에 섰다.
“큰형님. 제가 이쪽을 지원하겠습니다. 도제 어르신 쪽은 헌홍 형이 몸을 추스르고 다시 합류할 예정입니다.”
“그래. 알겠다!”
팽사홍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그토록 바라던 변수의 등장이었다.
남궁세가 천재 외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