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화
온통 새까만 세상.
하현은 이내 자신이 정신을 잃었고, 지금은 심상 속으로 침잠해 들어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쓰러지기 직전까지만 해도 심각한 내상으로 온몸에서 고통이 느껴졌으나, 정신과 육체가 분리된 덕분에 그는 고통을 느끼지 않을 수 있었다.
“후. 요즘 들어 부쩍 기절을 많이 하는 것 같은데.”
혼잣말하듯 가볍게 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정말로 혼잣말은 아니었다.
스윽-
하현의 시선이 향한 곳에서 땅에서 갑자기 생겨나듯 한 사람의 인영이 떠올랐다.
그의 깨달음과 식견으로 빚어 만든 그림자 무사였다.
뚜벅뚜벅 걸어오는 그를 보며 하현이 피식 웃었다.
“왜. 한심해 보여?”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건만, 하현은 마음속으로 그의 이야기가 들리는지 또다시 입을 열었다.
“나도 알아. 아직은 많이 약하다는 거. 최근 새로운 무공도 너무 많이 접했고, 사건 사고도 엄청나게 많았는데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 시간이 없었지.”
하현은 아쉬운 표정으로 입을 앙다물었다.
그가 깨달은 것들을 제대로 정리할 시간만 있었더라면 마통검에게 이렇게까지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뭐 어쩌겠어. 이미 지난 일. 여기에 들어와 있다는 건 내가 죽은 건 아니라는 소리잖아?”
그림자 무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현은 그를 은근한 눈으로 보다가 슬쩍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의 무공…… 잘 봤지?”
그가 멈칫했다.
있지도 않은 동공이 흔들리는 것이 느껴지는 것 같다.
“뭐야 제대로 보지 못한 거야?”
그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서 가만히 있었다.
하현이 투정 부리듯 말했다.
“내 눈에는 잘 안 보였다고 해도, 너는 잘 봤어야지. 나보다 항상 네가 빠르면서.”
하현의 힐난에 그가 또다시 멈칫하더니, 갑자기 하현에게서 몇 발자국을 떨어졌다.
그의 손에는 어느새 기다란 검이 들려 있었다.
그 검은 적룡검의 형태가 아니라, 할아버지가 들고 있던 기다란 검의 형태를 끼고 있었다.
처억-
그림자 무사가 간결한 기수식을 취한다.
하현은 그 기수식을 보며 속으로 감탄을 삼켰다.
“할아버지의 기수식이구나!”
그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서는 앞으로 몇 발을 내디디며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휘익! 화악!
분명히 그 위력은 다르지만, 할아버지가 이번에 마통검을 상대했을 때 보여주었던 검로(劍路)를 제법 그럴싸하게 따라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하현은 또 한 번 감탄하고 말았다.
“특별히 기교가 많이 들어가거나, 특별한 검법을 사용하신 것도 아니었구나.”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단순한 찌르기와 내리치기가 그런 위력을 만들어 냈다는 것이 두 눈으로 보고서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나는 언제쯤…….’
하현은 조급해지려는 마음을 겨우 부여잡았다.
시간은 그의 편이다. 조금 더 당기려다가 기반을 무너뜨리는 일은 최대한 없어야 한다.
“다시 보여줄래?”
그림자 무사가 다시 한번 검을 휘두른다.
검이 멈추면 다시, 또 멈추면 또다시.
하현은 수도 없이 할아버지의 검술을 돌려보았다.
그리고 그 시간은 하현이 눈을 뜰 때까지 계속되었다.
* * *
심상 속에 얼마나 있었을까.
하현은 현실로 돌아왔음을 깨달았다.
욱신거리는 고통이 그를 맞이했다.
그 덕에 깨어났다는 것이 더욱 실감이 났다.
“흠, 흠.”
목에 모래라도 걸린 것처럼 꺼끌꺼끌했다.
목마름과 동시에 드는 것은 허기다.
이번에는 도대체 며칠 동안 누워 있었던 것인지 텅 비어버린 위장이 먹을 것을 내놓으라고 아우성친다.
하현은 천천히 기운을 끌어올려 그의 몸 상태를 확인했다.
온몸의 기혈과 혈맥이 모조리 상해있다.
다행이라면 중간에 끊기거나 역류한 곳은 없어 보였다.
‘한참 동안 육체 수련은 꿈도 못 꾸겠네.’
그는 현재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시간이라는 생각을 했다.
천천히 요양하며 내상을 다스리고, 이번 강호행에서 얻은 깨달음을 천천히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이렇게까지 몸이 상해버리니 조급함이 사라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오히려 이 편이 나은가?’
이토록 크게 다치지 않았더라면 무리해서라도 곧바로 수련한다고 설쳤을 텐데.
“기척이 있구나. 일어났느냐?”
그때 그가 누워있는 방 바깥에서 부드럽지만 강인한 기운이 흐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현은 이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대번에 깨달았다.
평소에도 사랑해 마지않지만, 이번에는 특히 그를 위해 안휘에서 하북까지 한달음에 달려온 할아버지의 음성이었다.
“할아버지. 저 일어났습니다.”
“그래. 들어가마.”
문이 열리고 할아버지가 들어왔다.
하현은 이제야 그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었다.
남궁무룡은 평소에 입고 다니는 연녹색이나 무채색의 장포 대신에 남궁세가의 무복을 제대로 차려입고 있었다.
하현이 자연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남궁무룡은 평소와 똑같은 태도로 하현의 앞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하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몸은 좀 괜찮고?”
“저는…… 솔직히 말해서 좋지는 않아요. 할아버지는 괜찮으세요?”
“하하하. 나를 걱정해 주는 것이냐?”
남궁무룡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양손을 벌려 휘적휘적하며 하현에게 다가왔다.
아무런 불편함이 없어 보이는 모습이다. 그토록 강맹한 기운을 흘렸음에도 내상 따위는 조금도 생기지 않은 듯 보였다.
“괜찮으시니, 다행입니다.”
“그래도 걱정해 주니 기분이 좋구나.”
남궁무룡이 빙긋 웃었다.
“마교는 어찌 되었습니까?”
“어디까지 봤느냐?”
“팔이 잘린 마통검이 업혀서 도망치는 것까지 보았습니다. 마교의 무사들이 할아버지께 달려들었고요.”
“그랬구나. 네가 봤던 도망친 두 명은 놓치고 말았단다. 나머지는 다 죽였지.”
하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할아버지께서 놓치셨다고요?”
“감쪽같이 사라졌다. 신법이 빨라서 멀리 도망간 것은 아닐 것이야. 그들의 기운이 땅으로 꺼지듯 흩어져 버렸거든.”
“진법이나 다른 술법인가 보군요.”
“그렇겠지. 길산과 함께 마륜대를 모두 처리하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사이에 사라졌다는 것은…… 어떤 특별한 방법을 썼을 테니 말이다.”
남궁무룡은 아쉬운 어투로 말하고서는 하현의 등에 가볍게 손을 가져다 대었다.
하현은 따스한 기운이 몸으로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조금 더 누워있지 그러느냐.”
“아니에요. 일단은 조금 움직이고 싶어요. 제가 얼마나 누워있었던 거에요? 배가 고파서 가만히 누워있을 수가 없네요.”
“하하. 내가 그 생각을 못 했구나. 사흘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으니 그럴 만도 하지. 나가 있을 테니 옷을 갈아입고 나오거라. 길산에게 맛있는 걸 내오라고 할 터이니.”
이제 돌아보니, 그가 누워있는 방의 문양이나 장식이 낯익다.
하현은 금방 이곳이 북경의 하북팽가 본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곳은 팽가로군요?”
“그래. 마음 같아서는 곧장 남궁세가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선화분가의 모두가 함께 이곳으로 오기로 하여 일단은 이곳으로 함께 왔지.”
“그랬군요. 그러면 마교의 전각이 있던 곳은 어찌 되었습니까?”
“무림맹에 전갈을 보내어 강한 무사들을 보내왔단다. 궁금한 건 차차 말해줄 테니 일단은 식당으로 가자꾸나.”
“아! 그렇게 할게요.”
남궁무룡은 쫑알쫑알 물어오는 하현이 귀여웠는지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는 문으로 향했다.
그가 문 바로 앞까지 가서 문을 열려 문고리를 잡았는데, 무엇이 생각났는지 뒤를 돌더니 하현을 향해 말했다.
“현아. 이따가 나오기 전에 저기 보이는 선반을 한번 보고 나오거라. 길산이 거기에 선물을 하나 넣어 두었다고 전해 달라고 하더구나.”
“도제 어르신이요?”
남궁무룡은 하현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그대로 방을 나가버렸다.
“무슨 선물이지?”
하현은 궁금증에 벌떡 몸을 일으켜 옷도 갈아입기 전에 선반으로 먼저 다가갔다.
“헙!”
그리고, 선반을 열어본 하현은 깜짝 놀라 헛숨을 들이키고 말았다.
투명해 보일 정도로 하얗고 완벽에 가까운 구체의 영단.
이것을 얻으려 먼 길을 떠나본 적도 있었기에 더더욱 잊을 수 없는 것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선반에는 소림의 이름 높은 영단인 소환단이 고고한 기품을 흘리며 놓여 있었다.
* * *
칠주야라는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그새 하현은 상당 부분 몸을 회복할 수 있었다.
할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소환단을 섭취한 것도 큰 도움이 되었지만, 무엇보다 빨리 회복할 수 있던 이유는 자연의 기운을 온몸에 끼얹고 난 뒤에 본신의 회복력이 크게 향상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하현이 독자적으로 발전시킨 창궁대연신공 역시 회복을 보조했다.
하현은 의복을 챙겨 입고서 바깥으로 나왔다.
팽길산이 가주의 방으로 찾아와 달라는 전언을 하인에게 남겼기 때문이다.
가주실로 이동하는 하현에게 말을 걸어오는 무인들이 많았다.
“하현아. 일어났구나. 오늘은 나와 대련 한번 해볼 테냐.”
“아직 다 회복되지도 않은 아이에게 대련이라니 그게 무슨 망발인가?”
“아니! 자네는 어제 했다고 이리 나오는 겐가?”
명실상부 선화분가를 넘어 하북팽가의 은인인 하현은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비단 은인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내공을 끌어 올리지 않는 간이 대련이라 해도, 하현과 대련한 무사들은 작은 것이라도 한 가지씩을 얻어갔기 때문에 이토록 줄을 서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정말 오랜만이네.’
하현은 자연스럽게 옛 생각이 떠올랐다.
그가 처음 정식 대원으로 승급되었을 때, 남궁세가의 무사들이 딱 이랬었다.
다들 하현과 한 번이라도 더 대련하고 싶어서 자기들끼리 순번을 정하기도 했었다.
문득 그들을 생각하니, 빨리 세가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몸은 많이 회복되었어요. 다음에 꼭 시간 내어 대련해봐요.”
하현은 하북팽가에 있는 모든 무인과 잘 지냈다.
분명 팽헌홍은 그의 형들의 기질이 사납고 패도적인 강함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라 말했건만, 그들 모두 하현에게 친절했다.
특히나 팽사홍이 가장 심했는데, 때때로 식사 시간을 맞추어 하현과 함께 식사하곤 했을 정도였다.
하현이 가주실에 다다르자, 그 앞을 지키고 있는 무인이 눈에 띄었다.
“용소 삼촌!”
“하현이 왔느냐. 네가 이곳에 올 것이라는 언질을 받아둔 참이었다. 어서 들어가 보거라.”
“삼촌은 항상 여기 아니면 입구에서 경비를 서고 계시는 거 같아요.”
팽용소가 크게 웃었다.
“하하. 내가 우리 팽가의 경비대장이니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느냐.”
“아. 그랬어요?”
“허나, 그것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 거예요?”
“아직 대외비라 말하면 안 되는 것이지만, 네가 어디 떠들고 다닐 아이는 아니니 말해주마. 우리 팽가에서 맹호대라는 전투조직을 하나 만들려 하는데, 거기에 지원하려 한다.”
“오…… 맹호대. 멋진 이름이네요.”
그가 의기양양하게 가슴을 폈다.
“그렇지? 얼른 들어가 보아라. 가주님께서 기다리신다.”
“네.”
하현이 가주실에 들어가자, 그 안에는 팽길산과 남궁무룡이 함께 앉아 있었다.
“현이 왔구나. 여기 앉아라.”
솥뚜껑같이 두꺼운 손으로 가리킨 의자에 앉자, 팽길산이 재차 물었다.
“차를 한 잔 줄까? 좋아하는 차라도 있느냐?”
“저는 백호은침으로 하겠습니다.”
“하하! 백호은침 말이냐?”
하현이 백호은침이라고 말하자 팽길산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껄껄 웃으며 남궁무룡을 보았다.
“내 뭐라 했는가. 사다 두길 잘했지 않은가?”
“그래. 자네 말이 맞아. 누가 손자 아니랄까 봐. 하하.”
하현이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자 팽길산이 설명했다.
“사실 네가 무슨 차를 좋아하는지 무룡이에게 물어보았었거든. 그런데 백호은침은 없다고 했더니, 당장 하인을 시켜 사 오라고 난리를 피우는 것 아니겠는가? 무룡이가 이렇게 손주 바보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는데 말이야. 쯧쯧.”
남궁무룡은 하현을 보며 눈을 찡긋했다.
이제야 어찌 된 일인지 알아챈 하현이 쿡쿡 웃고는 팽길산에게 물었다.
“어르신. 저는 왜 오라고 하신 겁니까?”
“자네와 상의를 할 게 있어서 오라고 했네.”
“그게 무슨……?”
팽길산은 하현을 보고서 빙긋 웃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소환단만으로는 우리 팽가의 성의가 모두 표현되지 않을 것 같아서 말이네. 자네에게 무슨 선물을 더 줄지에 대한 상의라네.”
“네? 저는 소환단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재물도 그다지 필요 없고요.”
“하하하. 그래? 무룡. 이번에도 자네 말 그대로구만.”
남궁무룡은 하현이 이렇게 반응할 것이라 미리 말해두었는지, 두 노인은 서로를 마주 보며 한바탕 박장대소를 했다.
눈물을 훔친 팽길산이 하현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한 선물은 이것이네. 사실 상의라고 했지만, 일방적인 내 결정이긴 하지.”
팽길산은 탁상 위에 적절한 크기의 목함을 하나 꺼냈다.
얼핏 보기에도 그 목함은 굉장히 무거워 보였다.
“이게 무엇입니까?”
“자. 이걸 보게.”
팽길산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목함을 열었다.
그 안에는 어린아이 팔뚝만 한 현철이 들어 있었다.
“현철이네. 이것으로 자네의 검을 만들어 주는 것이 어떨까 싶어서 말이야.”
“아! 검을!”
하현은 진심으로 기뻐하며 눈을 반짝였다.
그리고 이 반응 역시 남궁무룡이 예상한 반응이었는지, 두 노인은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남궁세가 천재 외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