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팽길산에게 현철을 받은 하현은 팽주은과 함께 북경의 거리로 나와 있었다.
하현이 향하는 곳은 철무문(鐵撫問)이 있는 북경의 끝자락.
일전에 지하에서 인연을 만든 소학산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하현아. 그거 무겁지도 않아? 아버지가 짐꾼을 붙여준다고 해도 거절하고.”
“불편할 것 같아서 그랬지. 모르는 사람이 한 명 더 껴야 하니까.”
“불편하기는! 어차피 짐꾼이라고 해도 우리 팽가의 무인일 텐데, 너 우리 세가 사람들 전부랑 친하게 지내는 거 모를 거 같아서?”
팽주은이 맞는 소리를 했건만, 하현은 씨익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래도, 너랑 둘이 가는 것만큼 편하지는 않잖아.”
“뭐? 아니, 뭐. 그렇긴 하지.”
“고마워. 길 안내를 해줘서. 너 아니면 나 찾아갈 수도 없었을 거야.”
“지도를 보여주면 한 번에 다 외워버리면서 너 점점 능글맞아져 가는 거 같다?”
하현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도 직접 찾는 거랑 따라가는 거는 다르지. 그러니까 빨리 앞장서 줘.”
“으이그. 말이라도 못하면.”
팽주은은 하현을 보며 혀를 차고는 앞장섰다.
그런데 그녀의 입가에 슬쩍 미소가 차오르는 것은 숨길 수 없었다.
그들은 그리 빠르지 않은 속도로 철무문을 향해 걸어갔다.
가는 도중에 경단도 사 먹고, 탕후루도 사서 걸어가며 하나씩 빼먹으며 가는 재미가 쏠쏠했다.
하현으로서는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여유였다.
‘주은이도 회복이 정말 빠르네, 역시 무가의 여식이라는 건가.’
하현이 생각하는 회복은 육체적인 회복이 아니었다.
팽주은이 하북팽가의 일원이라고는 하지만, 사람이 죽은 것을 보는 것도 처음일 테고 다른 문파와의 전쟁에 목숨의 위협을 받는 것도 처음일 것이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그때의 기억을 떨쳐내는 것에 한참 걸릴 것이건만, 팽주은은 가볍게 털어내고 일어났다.
내심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 정도였다.
‘하긴. 주은이 정도면 자질도 뛰어나고, 끈기도 있지.’
아마 수년 뒤에 팽주은이 강호출두를 한다면 중원은 또 한 명의 여류고수를 맞이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현! 빨리 안 와?”
“응. 가!”
하현은 멈춰서서 생각하느라 멀찍이 멀어진 팽주은을 급히 따라갔다.
잠시 후 그들은 철무문에 도착했다.
철무문은 각종 장인이 모여 있는 거리에 있었다.
고개를 돌려 주변을 돌아보니, 그 주변이 온통 공방이다.
그 종류가 무척이나 다양했는데, 철무문 같은 대장간뿐만 아니라 가죽 공방, 비단 공방 등 세상에서 손으로 만들어 결과를 내놓는 업종 대부분이 이곳에 몰려 있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아이참. 한눈팔지 말래도.”
“미안. 미안.”
하현은 팽주은의 손에 이끌려 철무문으로 들어갔다.
철무문은 특이하게도 입구에 문이 따로 없었기에 그들은 자유롭게 그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땅- 땅- 땅- 땅-
그곳에 들어선 순간, 훅 끼쳐오는 뜨거운 열기와 함께 쇠 두드리는 소리가 한가득 들려왔다.
남궁세가에 있을 때, 방산의 대장간에서 검을 만드는 것을 구경한 적도 있지만, 이곳은 그 규모가 달랐다.
입구에서 가장 가까이에 있던 수염이 덥수룩한 대장장이 하나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로 오셨소. 의뢰를 맡기러 온 것이오?”
민소매 옷을 입고 있던 그는 키가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팔 근육이 거의 머리통만 할 정도로 커 엄청난 용력을 가지고 있을 것을 추측게 했다.
“맞습니다. 그렇긴 한데, 문주님을 찾아뵈러 왔습니다.”
“문주? 문주는 왜 만나려 하는 것이오?”
공손하게 말하는 하현이 답답했는지, 팽주은이 앞으로 나섰다.
“저희 하북팽가에서 왔거든요. 가주님께서 소학산 어르신께 직접 전달할 일이 있다고 해서 왔어요.”
“아! 하북팽가에서 오신 것이오? 진작 말씀하시지. 저기 뒤편으로 돌아가시면 제일 구석에 작은 방이 있소이다. 작업을 하지 않을 때는 항상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신다오.”
“고마워요. 아저씨.”
팽주은은 생긋 웃으며 대답하고는 또 하현의 팔을 이끌었다.
“넌 머리도 좋고 무공도 강한 애가 왜 그렇게 평소에는 넋을 놓고 다니니? 평소에는 어떻게 다니는 거야?”
“평소에?”
하현이 잠시 기억을 떠올려 보니, 평소에는 딱 팽주은이 있어야 할 자리에 소화 누나가 있었다. 무공을 제외하고는 별 관심이 없는 하현이기에 어디를 다니던 소화가 하현의 뒤치다꺼리를 해주곤 했었다.
‘누나도 보고 싶네.’
하현은 문득 든 생각에 남궁세가가 조금씩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누나가 나를 잘 챙겨주거든.”
“소화 언니?”
“응.”
“나도 언니 보고 싶다. 못 본 지 한참 되었는데. 이번 용봉지회에서 검봉이라는 칭호를 받았다던데, 얼마나 강해졌는지 몰라.”
하현이 그녀를 슬쩍 바라보고는 말했다.
“너랑 그렇게 큰 차이는 없을 거야.”
“나랑?”
“응. 네가 알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너는 생각보다 굉장히 큰 자질을 가지고 있거든. 수년 만에 이렇게까지 발전한 것도 그 증거고. 지금 당장에 맞붙으라고 하면 네가 소화누나에게 질 수는 있겠지만, 몇 년만 지나도 대등한 실력을 가질 수 있을걸?”
팽주은은 하현의 입으로는 처음 들은 칭찬이기에 기분이 좋으면서도, 온종일 주변을 구경하느라 넋을 놓고 다녔던 하현이 무공 이야기가 나오자 저렇게 또박또박 말하는 것이 웃겨 쿡쿡 웃어 버렸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사이, 조금 전 장인이 말해준 구석 방에 도착했다.
문이 열려 있던 덕에 안에 앉아 있던 소학산과 곧바로 눈을 마주쳤고, 그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걸어나 왔다.
“이게 누구신가. 하현 공자와 주은 아가씨 아니신가.”
그는 특유의 털털한 말투로 인사를 건넸다.
‘지하에 있던 철무문 장인분들께서도 다친 곳 없이 귀환하셨구나.’
하현은 새삼 지금까지 이들을 잊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학산은 그런 하현의 마음은 짐작도 못 하는지, 하현의 어깨를 팡팡 치며 말했다.
“팽가주님께 전갈을 받았네. 현철을 들려 보낸다고 하셨는데…… 자네가 어깨에 멘 그것인가?”
“네. 맞아요.”
하현은 등짐을 끌러 소학산에게 건네주었다.
꽤 무게가 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소학산은 거뜬하게 한 손으로 들고는 목함을 열어보았다.
“이렇게 많이 보내시다니. 우리한테 챙길 수 있도록 해주신 양이 많아서 그냥 만들어 주었어도 됐는데.”
“그리 말씀하시면 이렇게 전달해 달라 하셨습니다. 팽가에 현철이 아무리 많다고 한들 장인이 검으로 만들어 주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라고요.”
“하하! 역시 도제 어르신께서는 우리 듣기 좋은 말을 잘해주신다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 말이 싫지는 않은지 그는 연신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지 말고, 이리로 들어오게. 이 안은 북해빙궁에서 가져온 냉석(冷石)을 곳곳에 박아두어 열기가 미치지 않거든.”
그를 따라 방으로 들어가자 그의 말대로 온도가 그리 높지 않았다.
“아하. 그래서 방을 이토록 작게 만드신 거군요. 냉석이 감당할 수 있을 크기만큼.”
“하하하! 역시 총명하군. 자네 말이 정확히 들어맞는다네. 냉석이 여간 비싼 게 아니라서 말이야. 난들 큰 방을 가지고 싶지 않았겠는가?”
그는 껄껄 웃고서는 말을 이었다.
계속 웃음기가 담긴 눈이기는 하지만, 그 안에는 일견 진중함이 엿보였다.
일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자네는 어떤 형태의 검을 가지고 싶은가? 자네의 몸과 희망 사항에 맞추어 만들어 주도록 하지. 남을 위한 검이 아니라, 자네만을 위한 맞춤이 탄생하는 것일세.”
“저에게 맞춘 검이군요.”
하현은 기분이 좋다는 듯 빙긋 웃었다.
그리고는 허리의 적룡검을 꺼내 탁자 위에 탁- 하고 올려 두었다.
“우선 제가 원하는 형태는 적룡검이랑 흡사합니다. 꽤 오랜 기간 이 검과 함께했더니, 손에 익어 버려서요.”
“맞아. 자네에게는 적룡이 있었지. 자네가 가장 잘 느끼고 있겠지만, 적룡검도 중원에서 손꼽을만한 명검이라네.”
“네. 저도 느끼고 있습니다. 이 붉은 빛이 도는 철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도 잘 나가지 않고 가벼운 무게에 비해 강성도 뛰어난 것 같더군요.”
소학산은 말이 통하는 주제가 나오자 신나서 입을 열었다.
“그래! 그것이 적룡검의 핵심이지. 사실 적룡은 엄밀히 말하면 순수한 철검은 아니라네.”
“그러면 무엇입니까?”
“적룡검은 석류석(石榴石)과 강철을 아주 적절한 비율로 섞어 만든 검이라네.”
“석류석…… 그래서 검신이 이리도 붉은 것이군요. 그런데, 광석과 철을 섞어서 이렇게 검을 만들 수 있는 것입니까?”
소학산이 고개를 저었다.
“원래라면 힘들지. 아니…… 조금 더 솔직히 말해서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네.”
“그러면 이 검은……?”
“수많은 시도의 결과물이지. 전대 문주께서 석류석과 철의 비율을 계속해서 바꿔가며 검을 만드시다 겨우 적룡검을 완성 시키신 것이지.”
하현의 얼굴에 약간의 의아함이 떠올랐다.
“그러면 그 비율대로 계속해서 만드시면 되는 것 아닙니까?”
“하하. 그러니까 불가능하다는 말일세. 분명히 전대 문주님께서 남겨두신 비율대로 다시 만들어 보려고 해도, 계속해서 실패한단 말일세. 검이 너무 약하거나, 색이 나지 않거나. 심하면 모양 자체가 잡히지 않는 경우도 있네.”
“아…… 그렇군요.”
“이놈의 영감쟁이가 무엇을 빼놓고 적은 것인지, 아니면 뭔가를 틀리게 적어놓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일세.”
그는 잠시 옛 생각을 떠올리고는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말이 다른 길로 새 버렸군. 그래서, 자네는 적룡검과 똑같은 형태를 원한다고?”
“아니요. 조금은 달랐으면 합니다.”
“어떤 차이를 원하지?”
하현이 슬쩍 일어서더니 적룡검을 들고 앞으로 가 벽을 베어내는 시늉을 했다.
그가 팔을 쭉 뻗었을 때, 검의 끝은 일 촌 정도(약 3c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딱 이만큼입니다. 이만큼만 더 길었으면 좋겠어요.”
“응?”
하현의 이야기를 들은 소학산도 자리에서 일어나 하현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하현의 팔과 다리 관절 부근을 주물럭거렸다.
“허허. 자네. 내 생각에는 두 촌은 늘려야 할 것 같은데?”
“네?”
“자네. 최근 키가 많이 자란 것 같은데. 그렇지 않은가?”
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일 년 새에 그는 머리통 하나만큼이나 더 성장했다.
그리고 지금도 계속해서 성장해 나가고 있는 것이 느껴지고 있었다.
“자네 팔과 다리가 길어지며, 본능적으로 자네가 소화할 수 있는 최대한의 거리를 가늠하는 것으로 보이네. 하하! 내가 말하고서도 웃기긴 하지만.”
“무엇이 웃기십니까?”
“자네는 지금 자네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검격을 인지하고 있는 것이야. 보통은 서른, 마흔이 넘은 중견 고수들에게서나 볼법한 경지지. 그런데 자네는 그걸 벌써부터 자유자재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란 말일세.”
소학산이 할 말이 많아 보이기에, 하현은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아니나 다를까? 소학산은 또다시 말을 이었다.
“비록 나는 검법을 익히지는 않았지만, 수많은 검을 만들고, 수많은 무인을 만나며 알게 된 것일세. 그러니 내 말이 신빙성이 아예 없는 말은 아니라네.”
“아. 문주님을 믿지 않은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두 촌이나 길게 만들라 하시는 겁니까?”
소학산이 하현을 가리켰다.
“내가 볼 때는 자네가 더 클 것 같기 때문이네.”
“제가 더 크다니요?”
하현은 이미 어지간한 성인들과 눈높이가 맞을 만큼 키가 컸다.
그렇기에 더 크지 않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자네의 뼈마디를 내가 살피지 않았는가? 내가 봤을 때는 더 클 수 있는 뼈마디더군. 내 말을 들으면 절대 후회하지는 않을 것일세. 적룡검과 같은 형태의 검이지만, 두 촌이 더 긴 검을 만들어 주겠네.”
하현은 아주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소학산이 가벼워 보이기는 해도, 철과 검에 있어서는 누구보다도 전문가다.
게다가 열정적이기까지 하기에, 하현은 그를 믿어보기로 했다.
“그래. 내가 칠일 안에 만들어 줄 수 있도록 하지. 그때 다시 오게나.”
그런데 하현은 아직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왜 그런가?”
“추가적으로 의뢰를 더 드릴 수 있을까 해서요.”
“의뢰? 무슨 의뢰? 검에 관련된 것이라면 얼마든지 해도 좋네. 이곳은 철무문 아닌가?”
그가 호기로운 표정을 지었다.
하현은 그 얼굴을 보며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탁자 위에 탁 꺼내 놓았다.
“이게 무언가?”
“사천당문의 비검입니다.”
“비검? 혹시 의뢰라는 게……?”
하현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 비검과 똑같은 무게, 똑같은 모양으로 스무 자루 정도를 더 제작하고 싶습니다. 문주님이라면 충분히 가능하시겠지요?”
그는 소학산을 똑바로 보았다.
절대로 거절하면 안 될 것 같은 신뢰의 눈이었다.
남궁세가 천재 외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