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화
당당한 표정의 남궁무룡에게 하현이 물었다.
“그러면 지금 바로 출발하실 예정이신가요?”
“그래. 간밤에 기현이 보내온 전서응(傳書鷹)에 이제 막 귀주성 여경(余慶)지역에 각 문파와 가문의 무인들이 속속들이 모이고 있다고 하더구나.”
“그렇군요.”
하현이 속상한 티를 모두 지우지 못하고, 살짝 고개를 떨구었다.
할아버지와 함께 세가로 돌아가는 것을 기대하고 있던 하현이었다.
툭-
하현의 머리 위로 따뜻한 손이 얹힌다.
남궁무룡이 하현의 머리를 쓸었다.
“너무 실망 말거라. 귀주성의 일이 해결되면 곧 세가로 돌아갈 테니.”
“네. 할아버지.”
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함께 귀주성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지금 그의 몸 상태로는 어불성설이다.
게다가 할아버지 혼자라면 사나흘 만에 귀주성에 당도할 수 있을 테지만, 하현과 함께라면 며칠이 더 걸릴지 모를 일이다.
“나는 가지만, 여기 하북팽가에서 며칠 더 정양하다 돌아가거라.”
“알겠어요. 할아버지. 조심하세요.”
“그래. 걱정해 주어 고맙구나.”
남궁무룡은 하현의 머리를 한 번 더 쓰다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곧바로 바깥으로 나가버렸다. 미련 따위는 없어 보이는 뒷모습이었다.
잠시 후에 펑- 하고 터지는 기파로 할아버지가 떠났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 * *
남궁무룡이 귀주성으로 떠나고서도 며칠이 흘렀다.
팽길산은 그의 막내아들 팽헌홍과 마주하고 있다.
어려서부터 차를 좋아하지 않았기에 막내 팽헌홍에게는 다도를 가르치지 않았다.
그렇기에 차를 끔찍이 싫어하는 그이지만, 지금 앞에 내놓은 백호은침은 입에 맞는지 연신 홀짝이고 있다.
팽길산은 남궁무룡에게 좋은 것을 배웠다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하현이가 며칠 내에 돌아갈 생각이라고 들었다.”
“네. 몸이 많이 회복된 것으로 보입니다.”
하현은 요 며칠 사이에 굉장히 빠른 속도로 회복했다.
아직도 다친 내장과 기혈들을 다스리지 못하여 내공을 자유자재로 끌어 올릴 수는 없지만, 육체는 거의 다 나아서 평소와 같은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그제부터는 연무장에 나와 내공 한 줌 끌어올리지 않고, 거무튀튀한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한시라도 빨리 검을 몸에 익히고자 하는 노력이었다.
“그러면 너는 어떻게 할 생각이냐?”
“어찌하다니요?”
팽헌홍은 팽길산의 말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듯 의문에 가득 찬 눈으로 아버지를 보았다.
“너도 남궁세가로 돌아갈 것이냔 말이다.”
“제가 남궁세가에 가지 않으면 어딜 갈 곳이 있겠습니까?”
팽길산이 찻잔을 내려놓고는 양손을 살짝 벌리며 말했다.
“여기가 있지. 너는 원래 하북팽가의 사람이 아니더냐?”
“그 말씀은…….”
“그래. 이제는 남궁세가에서 수학하기를 그만두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게 어떠냐고 묻는 게다. 무룡에게 들어보니 어차피 남궁세가에서도 따로 비전을 익히거나 하지는 않는다고 들었다. 기본 무공만을 배우고 익히며 대부분의 시간을 혼원벽력도에 할애한다고.”
아버지의 말은 한치도 틀린 것이 없었다.
하현에게 혼원벽력도를 복원할 실마리를 얻고 나서는 혼원벽력도의 복구에 온 힘을 쏟고 있는 그였다.
물론 남궁세가의 기본적인 보법이나 청풍검법 같은 기본 검법을 배웠다지만, 그 비중은 극히 미미할 정도였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제 집으로 돌아오라는 말씀은…….”
“애초에 너를 남궁세가에 보낸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라, 네가 형들의 등쌀에 치여 제대로 성장하지 못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미 무홍이와는 동수를 이뤘고, 사홍이도 너를 한 명의 무인으로 인정하고 있더구나. 이제는 여기 하북팽가에서도 네가 하고자 하는 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팽헌홍의 눈에 몇 가지 감정이 교차했다.
우선은 기쁨이다.
아버지가 이제는 돌아와도 된다고 했다는 것만으로도 이제 그는 더 이상 약자가 아니라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다.
그의 실력을 아버지에게, 그리고 큰형에게 인정받았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는 기개였다.
하북팽가로 돌아오는 순간부터 그는 차기 가주 경쟁을 시작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여태까지는 남궁세가에서 한 발자국 떨어져 있던 이 피 말리는 경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될 것이다.
“바로 대답이 나오지 않는구나. 고민이 되느냐?”
“네. 조금은 생각이 많아지는군요.”
마지막 세 번째는 미련이다.
벌써 사 년이라는 시간을 남궁세가에서 보내며 열아홉이라는 나이가 된 그다.
그가 내적으로도, 외적으로도 가장 큰 성장을 이룬 곳은 남궁세가라는 소리다.
그곳에서 무언가를 이루지도 못했는데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그는 내키지 않았다.
“왜. 돌아오지 못할 이유라도 있느냐?”
“이유라…….”
그리고 마지막.
그는 아버지의 입에서 나온 이유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얼굴의 주인은 남궁소화다.
남궁소화를 떠올리자 순식간에 그녀의 웃는 표정, 슬픈 표정, 화내는 표정 등등이 초상화를 그린 것마냥 머리에서 스쳐 간다.
“하…… 하하하!”
그 표정을 보던 팽길산이 갑자기 박장대소를 터뜨린다.
팽헌홍은 자신의 속마음을 들켜 버린 것 같아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팽길산은 한참을 더 웃더니, 다 알겠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래. 아직은 돌아올 준비가 되지 않았구나. 네 뜻대로 하라. 이렇게 쉽게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네가 팽가에 있을 때보단 남궁세가에 있을 때 더 크게 발전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니.”
겨우 표정을 수습한 팽헌홍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이해해 주셔서.”
“이해는 무슨.”
그런데 팽길산이 짓고 있는 표정이 조금 이상했다.
“왜 그런 눈으로 보십니까?”
“혹시 소화냐?”
“네?”
“맞구나. 둘이서 용봉지회에 같이 갔다 왔더라니.”
“아, 아버지!”
팽헌홍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큰 소리를 냈다.
그러고서 자신이 그런 소리를 낼 줄은 몰랐는지 입을 헙 하고 막았다.
“하하! 그랬군. 내 언젠가는 무룡과 사돈을 맺고 싶었는데, 그게 너일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사돈이라뇨. 너무 앞서가셨습니다.”
팽길산은 은근한 눈빛으로 그의 막내아들을 바라보았다.
“최선을 다해라. 그게 무엇이든. 시기가 지나면 하지 못하는 것도 있느니라.”
“명심하겠습니다.”
“그런데 소화는 너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있느냐? 혹시 자존심 상하게 짝사랑은 아니지?”
“아닙니다. 절대로.”
지금까지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던 팽헌홍이었지만, 이번에는 단호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리고, 그 얼굴을 보던 팽길산이 한 번 더 박장대소를 터뜨린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들은 한참 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팽헌홍은 문득 남궁세가에 가기 이전에는 아버지와 이렇게 편하게 대화를 나눌 수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을 떠나서야 아버지와 이렇게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다니.’
지금 팽길산과의 대화는 헌홍이 오래전부터 꿈꿔오던 아버지와의 관계와 가까웠다.
마치 남궁세가의 가족들과 같은 모습.
팽헌홍은 남궁세가에서 살며 자연스럽게 그들과 닮아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 * *
또 며칠이 흘러 하현이 팽헌홍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기로 한 날.
얼마 없는 짐을 꾸리는 하현의 방에는 팽주은이 와 있었다.
팽주은은 놓고 가는 것이 없는지 주변을 둘러보는 하현에게 말했다.
“조금 더 있다가 가라니까. 몸도 다 안 나았으면서.”
“아니야. 많이 좋아졌어. 네 덕분이야.”
“피- 그렇게 말해도 어차피 갈 거면서.”
팽주은이 입을 삐죽였다.
하현은 같은 나이임에도 그런 그녀가 귀여웠다. 여동생이 있다면 이런 느낌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심이야. 언젠가 이 은혜는 꼭 갚을게.”
“은혜라고 할 것도 없네요.”
말은 이렇게 해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은지 어느새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는 그녀였다.
팽주은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하현에게 말했다.
“이렇게 헤어지면 언제 보게 되지?”
그러자 하현은 뭐 그런 것을 물어보냐는 얼굴로 말을 툭 내뱉었다.
“올해도 몇 달만 있으면 끝나잖아? 늦어도 내년 용봉지회에서는 만나지 않을까 싶은데. 생각보다 일 년은 짧잖아.”
“용봉지회?”
팽주은이 그렇지 않아도 동그란 눈을 더욱 동그랗게 뜨며 하현을 바라보았다.
“너 정도의 실력이면 용봉지회에 참가하고도 남지. 물론 앞으로도 지금처럼 열심히 수련해서 실력을 더 쌓으면 더 좋겠지만.”
“어……?”
생각지도 못한 말에 팽주은이 잠시 대답하지 못했다.
하현에게 이런 인정(?)을 받을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한 것이다.
“왜 그래? 내가 이번에도 무슨 말실수라도 한 거야?”
“아, 아니야.”
팽주은이 살포시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하현도 피식 웃고는 짐을 챙겨 팽주은에게 다가갔다.
수년 전에 만났을 때는 키가 똑같았는데, 하현이 큰 덕에 제법 차이가 났다.
“잘 있어. 다음에 보자.”
“으, 응.”
하현은 팽주은의 머리에 손을 살짝 올리고서는 밖으로 나갔다.
팽주은은 그를 따라가려다가 그냥 옆에 있던 의자에 앉아버렸다.
“이거 왜 이래? 참내…….”
쿵- 쿵-
하현이 머리에 손을 올리는 순간부터 심장이 너무 크게 뛰어 하현에게 들켜 버릴까 싶었기 때문이다.
그의 발걸음 소리가 점점 더 멀어지고, 기어이 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까지도 팽주은은 그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 * *
다그닥- 다그닥-
하현이 모는 선풍이 우레같은 소리를 내며 관도를 내달렸다.
그의 바로 뒤에는 팽헌홍이 준마를 타고 그를 쫓아오고 있었다.
‘주은이 그 녀석은 삼촌이 가는데 나와 보지도 않고.’
도제에게 떠난다는 인사를 하고, 하북팽가를 나올 때까지도 팽헌홍은 투덜거렸다.
어젯밤에 분명히 내일 인사를 나누자고 했건만, 어디에 갔는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고 얘기하는 그였다.
물론 말을 이끌고 나오면서부터는 다시 예전처럼 말이 없어졌지만.
‘다음에 올 때는 아예 시간을 길게 잡고 와야겠어.’
하현이 떠나는 그 순간까지도 팽가의 무인들은 하현에게 호의적으로 대해 주었다.
특히나 팽사홍은 하현에게 따로 노자까지 챙겨줄 정도였다.
대신에 나중에 팽가에 오면 그와 제대로 비무해야 한다는 당부의 말을 잊지는 않았다.
“하현아. 돌아가는 길에는 아무 곳에도 들리지 않은 생각이냐?”
팽헌홍의 음성은 말을 달리는 도중에도 또렷이 들렸다.
그의 내공 공부도 경지에 올라가는지, 목소리에 적절히 내공을 섞어 말하는 것에도 능숙한 모습이었다.
“어디 들러야 할 곳이 있어요?”
“아니, 팽가에 갈 때는 황보세가도 들르고, 진주언가도 들렀기에 궁금해서 물어본 것이다.”
“그러셨군요. 따로 없습니다. 곧장 집으로 돌아가고 싶군요.”
“그래. 네 상태도 정상은 아니니 그리하도록 하자.”
그들은 애초에 동선을 짧게 잡았다.
선풍은 두말할 것도 없이 내로라하는 명마고, 헌홍의 말도 이름 없는 준마기는 하지만, 그에 못지않은 좋은 말이다.
“하남성 방향으로 하루를 꼬박 달려 내려가면 개봉이 나옵니다. 개방의 총타가 있는 곳이니 그곳에서 하루 쉬어가면 어떨까 싶은데요.”
“그러자. 그러면 개방에서 쉬어가자는 것이냐?”
“그건 아닙니다. 그곳은 사람이 묵어갈 곳은 못 돼요.”
하현이 개방의 총타를 떠올리며 쿡쿡 웃었다.
거지 움막이 끝없이 펼쳐져 있는 모습은 장관이라고 할 만하지만, 은근히 깔끔한 성격인 팽헌홍에게 그곳에서 자자고 했다간 질색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럼 가면서 적당한 객잔을 골라볼까?”
“그래요.”
팽길산은 막내아들에게 상당히 많은 은자를 챙겨주었기에 그의 주머니는 든든했다.
최고급 객잔에서 며칠을 묵어가도 티도 나지 않을 정도였다.
꼬박 하루를 달리는 동안, 그들 앞을 가로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잘 닦인 관도에서 마차 몇 대, 사람 몇 명을 본 것이 전부였다.
그들은 개봉에서 조금 못 미치는 원양(原陽)에 자리를 잡았다.
선풍은 아직도 쌩쌩했건만, 팽헌홍의 말이 지친 기색이 역력했기 때문이다.
어차피 어디에서 묵어도 상관이 없었기에 그들은 말을 맡기고 객잔으로 들어섰다.
객잔 안에는 꽤 많은 사람이 있었다.
하현은 자연스럽게 그들을 경계하였다.
‘아직은 내공을 자유자재로 다루기 힘들어. 최대한 싸움이나 마찰은 피해야 해.’
하현은 최대한 사람이 없는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음식을 시키고 조용히 기다리고 있는데, 그때 누군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혹시나 했는데, 도룡 팽소협이 맞군.”
단단한 목소리였다.
하현이 고개를 돌려 그쪽을 바라보자, 큰 키에 당당한 풍채를 가진 도사가 웃는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허리에는 아무 무늬는 없지만 정갈하게 만든 청강장검을 차고, 무복으로 개량한 도복을 입고 있다.
지금은 머리에 관을 쓰고 있지 않지만, 눌린 자국으로 보아 도관까지 쓰는 진짜 도사로 보였다. 하현은 이런 특이한 행색의 방파는 단 한 곳밖에 모른다.
“무당……?”
자연스럽게 도사를 바라본 팽헌홍의 눈에도 놀람이 깃든다.
그는 이 도사를 아는 눈치였다.
“검룡 소협? 이곳에 어떻게……?”
하현은 검룡이라는 별호에 눈이 번뜩 뜨였다.
눈앞에 있는 사내는 얼마 전 만났던 현무도장의 사형이자 수년째 검룡이라는 별호를 유지하고 있는 자.
그는 무당파의 후기지수 현암도장이었다.
남궁세가 천재 외손자